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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멍쉬멍
2014. 12. 금계
12월 9일부터 11일까지 2박3일로 화백회 모임 8명이 제주도에 다녀왔다. 세계 7대 경관에 뽑혔다는 제주도는
언제 가 봐도 다정하고 푸근하다. 그러니까 몇 번째인가. 30년 전에 초등학교 동창생들 부부동반으로 갔던
여행이 첫 번째, 중학생들과 함께 갔던 수학여행이 세 번, 2년 전에 갔던 화백회 여행, 1년 전에 갔던 아들 가족
들과의 여행, 이번이 일곱 번째인가 보다.
목포항 대합실이 제주도 가는 승객들로 붐빈다. 여행은 남들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
다닌다던가. 아닌 게 아니라 여행을 다니면 남들뿐만 아니라 새삼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기가 어디쯤
서있는지 좀 더 확연히 깨닫게 된다.
수학여행 다니는 학생들뿐 아니라 70객도 떠나기 전 대합실에서는 은근히 가슴이 설렌다.
목포에서 제주도 다니는 시스타크루즈호는 국내에서 가장 큰 2만 4천 톤급 페리 호다.
학생들도 이렇게 크고 튼튼한 배를 탔더라면 세월호 같은 비극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 같아 은근히 가슴이
아려왔다.
배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4층 중앙 홀에서는 노래잔치가 벌어졌다.
요즘은 무안공항에서 제주도 가는 저가 항공이 생겨 비행기 삯이 배 삯하고 비슷하다지만 뜻에 맞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왁자지껄 씨부렁씨부렁 할랑거리며 여행하기에는 좁은 좌석에 꽉 끼어 옴쭉 달싹 못하는
비행기보다 느릿느릿 넓은 공간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여객선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2년 전 제주도 갈 적에는 화백회 회원이 일곱 명이었는데 세 명이 늘어 이제는 열 명이 되었다. 사정상 두
명이 못 오고 여덟 명이 늙어가는 시름을 바닷바람으로 달래었다. 팽목항을 스쳐가는 햇살은 휘황하였고
겨울바다와 섬들은 쌀쌀하면서도 아늑한 정겨움을 옹골지게 보듬고 있었다.
전 박사가 홍어와 막걸리를 준비해 왔다. 여행에는 여러 가지 즐거움이 뒤따르지만 그 중에서도 먹는 즐거움이
으뜸이다. 단언컨대 즐거움의 절반은 먹거리에서 오는 듯하다.
한참 배의 꽁무니 휴게실에서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나누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우리 잔칫상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나는 그 눈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은 장흥 회진에선가 부두를 어슬렁거리는데
이제 막 선상 낚시질에서 돌아온 낚시꾼들이 광장에 둘러앉아 갓 건져 올린 도미를 썰어놓고 술을 마셨다. 우리
들이 빙 둘러싸고 입맛을 다시는데 한 잔 마셔보라고 권하는 법도 없이 저희들끼리만 희희낙락하는 것이었다.
고약한 친구들 같으니라고. 가만히 들어보니 이쪽 사투리가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제. 전라도 사람 같으면 저렇게
인정머리 없지는 않을 텐데....... 그 뒤로 나는 배만 타면 지나가던 사람을 끌어당기던 것이었다. “앗따, 어쨌다요.
홍어 한 점만 잡숫고 가이시오.” 그러자 힐끔거리던 아저씨는 못 이긴 체 끌려오더니 막걸리도 마시고 홍어도 우물
거리고 반쯤 말린 무화과도 냉큼냉큼 입으로 가져가던 것이었다.
배 안의 가게에서는 화산석으로 만든 인형을 팔고 있었다. 저 인형만 보면 누구든 제주도를 연상하게 된다.
시스타크루즈 호 식당에서 점심. 이 식당은 상당히 합리적인 운영을 하여 내 마음에 꼭 들었다. 반찬 한 가지에
일이천 원씩 하는데 마음에 맞는 반찬을 고르도록 해서 여럿이 두어 가지씩 골라잡으면 갖가지 반찬을 맛볼 수
있다. 식탁에 반주가 빠질 수 없제. 유 박사가 소주 두어 병을 사 오는 바람에 제주도 들어가기 전부터 알코올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뱃속이 느른해진 임 박사는 마사지실에 들어가 전기 마사지를 받으며 노곤하게 오수를 즐겼다.
오후 두시에야 제주항에 닿았다. 배 운항 시간은 버스와 달라서 밀물 썰물이나 기상 상태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보통은 네 시간 반 걸리지만 이번에는 다섯 시간이 걸렸다. 목포 9시 출발, 제주 14시 도착.
대합실까지 마중 나온 기사가 깨끗한 꼬마버스로 일행을 안내했다. 우리들을 사흘 동안 태우고 다닐 버스였다.
시가지를 벗어나서 드라이브 겸하여 1100고지를 향하였다.
멀리서 흰 눈 쌓인 한라산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만물은 불에서 비롯되었다. 제주도도 화산이 터지고 한라산이
솟구치면서 오늘의 낙원을 이루게 된 터였다.
백화난만하던 봄여름 가을이 지나고 대설이 지난 길가에는 하얗게 쇤 억새꽃이 넋 나간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람이 없어서 억새꽃은 흔들리지 않았다. 여행 날짜를 누가 잡았는지 참 날씨가 좋아 고맙다고 치하해주었다.
제주도에서 이렇게 햇빛이 짱짱하고 바람이 잠잠한 날은 드물 터였다. 작년 겨울에 아들 손자랑 왔을 때에는
어마 추워라, 칼바람에 혼찌검이 났었다.
1100 고지에 다다라 잠시 한라산 중턱의 겨울 풍경을 감상하였다. 하얀 사슴의 조각상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저런 사슴이 있을까 싶었는데 이틀 후 에코랜드에 가보니 수풀 속에서 흰 사슴 여러 마리가 노닐고 있었다.
그래, 그래. 옛날에는 흰 사슴들이 무리지어 뛰놀았기 때문에 백록담이라고 이름 지었겠지.
제주지야 (濟州之夜). 판타지 쇼. 쇼킹이라 해서 shocking한 쇼인 줄 알고 기대했더니 그냥 show king이어서
충격을 받았다고 나 박사가 투덜거렸다. 입장료가 5만 원인데 우리 일행은 조금 싸게 보았다. 사실 5만 원 주고
보기에는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해외여행을 몇 번 다닌 덕분에 눈을 버려버렸다. 북경의 ‘금면왕조’에서는 무대로 폭포수가 웅장하게 쏟아
지고, 계림의 ‘인상유삼저’나 장가계의 ‘천문호선’에서는 야외극장에서 수백 명의 등장인물들이 배경을 이루는
산봉우리들과 호수에서 그야말로 환상적인 장면들을 연출하고,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는 풍만한 아가씨들이 번쩍
거리는 의상을 입고 요염한 몸짓으로 넋을 뽑고, 터키 카파도키아 동굴 극장에서는 소피아 로렌을 닮은 무희가
거대한 유방을 흔들고 배꼽을 씰룩거리며 요지경을 연출하던 것이었다.
테니스 라켓 20만 원짜리를 쓰던 사람은 10만 원짜리 라켓을 쓰기 힘들다. 소나타를 몰고 다니던 사람이 티코를
끌고 다니기는 힘든 법이다.
‘제주의 밤’ 공연도 나름대로 훌륭한 무대장치와 현란한 의상과 육감적인 동작과 다양한 등장인물로 관객들의
흥미를 자아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나로 하여금 별다른 충격과 감동을 주기에는 조금 모자랐다고나 해야
할까. 감지덕지해야제 지금 무슨 배부른 소리여. 이런 때 아니면 일 년 365일, 자네가 언제 이런 화려한 무대를
구경할 수 있겄어.
1인당 2만 원짜리 저녁 식사. 주요 식단은 생선회와 갈치조림. 하이라이트는 갈치회와 고등어회인데 신선하고
쫄깃하고 구수해서 맛이 참 좋았지만 술 몇 잔 마시기에도 부족할 만큼 양이 적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나마 제주에서는 가장 인상적인 회를 맛본 점을 고마워하기로 했다. 재작년 가을 화백회 모임이 해녀촌 식당에
들어갔을 적에는 갈치 고등어뿐 아니라 한치, 방어 등등 꽤 여러 가지를 먹었지만 시들시들해서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했다.
남자용 화장실 표지판이 눈길을 끌었다. 나처럼 주의가 산만한 사람한테는 이토록 얼른 식별하기 쉬운 표지판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다른 화장실에 가면 표지판에 눈을 박고 그림이 치마를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한참이나
들여다보아야 한다.
신제주호텔이라던가. 거기에서 두 밤을 잤다. 비교적 깨끗하고 좋았다. 아침 식사도 정갈하고 먹을 만했다. 가만
보니 주인이 아침저녁으로 달라붙어 정리정돈에 힘쓰고 투숙객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부족한 점이 없도록
잽싸게 응대했다. 이렇게 주인의 정성이 눈에 띌 정도면 그 업소가 잘 돌아갈 것은 빤한 이치다.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아침 8시 30분에 출발하여 한 시간가량 걸려서 성산에 도착했다. 안내인의 말에 의하자면
성산(城山)이란 성처럼 생긴 산이라고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이름이고 원래는 해오름이라 불리었단다. 1950미터의
한라산에는 기생화산 오름이 350개. 해오름은 본래 외돌토리 섬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육지와 이어졌단다.
우리는 우도를 구경하면서 제주도의 냄새를 흠씬 맡았다. 우도 관광은 단연코 이번 여행의 압권이었다. 유 박사,
나 박사, 또 나 박사, 김 박사 이 네 명은 자전거 마니아인데 우도에 들어온 자전거 일행이 멋진 단체복을 입고
산호사 해수욕장 부근을 지나자 반가운 나머지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우도에서 성산으로 건너와 해물탕 점심. 전복과 낙지와 조개와 팽이버섯. 몇 십 년 전에는 제주도 음식이 짜지도
맵지도 않아 슴슴하고 덤덤해서 당최 구미가 당기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가까운 전라도 영향을 받았는지 전국구로
바뀌었는지 간도 맞고 살짝 얼큰하기도 해서 해물탕이 얼마나 감칠맛 나는지 소주가 소주를 불렀다.
배도 부르고 술도 취해서 식당 문을 열고나오니 맞은편 가게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그랬다. 제주도 놀러온 우리
신세가 바로 하루 놀고 하루 쉬는 신세였다. 요즘 아주머니들한테는 하루 세 끼 집에서 다 먹지 않고 전국 노래
자랑 다니면서 늙어서까지 돈 벌어다주고 덤으로 지역 특산물까지 심심찮게 들어오는 송해 아저씨가 인기 1순위
라고 하지만 사실은 일할 나이에 일하고 놀 나이에 노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인생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애면글면 늙어 꼬부라지도록 일만 해야 한단 말인가. 사람마다 제각각 처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니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이제는 싸묵싸묵 놀면서 쉬면서 손자 엉덩이나 토닥거리면서 지나온 세월을
되짚어보고 사람으로 태어난 축복을 만끽해야겠다. 또 건강이나 경제 사정이 허락하는 한 꺼떡꺼떡 여행도 많이
다니면서 초록별 지구의 체취를 흠씬 맡아야겠다. 놀멍쉬멍 돌아다니기에는 제주도만한 곳도 많지 않다. 몇 번을
와도 싫증나지 않고 새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에코랜드 꼬마 열차를 타고 나서 점심.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식사. 토종닭이라 징허게 맛있었다. 닭똥집은 날로
먹고, 가슴살은 샤브샤브로 먹고, 닭다리는 삶아서 먹고, 녹두죽에다 국수까지 배가 터지게 포식했다.
식당 정원에서 안내원과 함께 기념사진.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꼬마버스의 기사이자 우리의 안내인.
학교에서는 청부를 잘 사귀어야 하고, 여행할 때에는 안내인을 잘 보필해야 한다.
안내인 복이 많아서 이번에도 매우 상냥하고 친절하고 설명이 자상해서 승객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입체감이 돋보이는 마술미술관에 갔다. 구경하고 나오는 곳에 편안한 그네 의자가 쉴 만했다.
마지막에 선물가게를 들렀다가 항구로. 겨울이라서 그런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대합실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참 잘 구경하고 잘 먹고 마시고 다녔다.
안내인도 고맙고 함께 따스한 우정을 쌓았던 회원님들에게도 무한한 신뢰와 감사를 드린다. (끝)
첫댓글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글과 사진을 고대로 실었으면 참 좋겠는데 사진은 쪼꼬만해도 용량이 커서 번번히 싣지를 못했습니다. 또 어째서인지 요새 학교 컴퓨터가 집 것만 못하여 영상이 잘 실리지를 않아 애도 먹었구요. 부디 선생님의 용서만 바랄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