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19)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는 문장에 투표했다
삶이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내가 삶에게 화가 난 것이라는 문장에,
아픔의 시작은 다른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아픔 끝내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문장에,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이라는 문장에 투표했다
- <나는 투표했다> 중에서…
(21)
한 사람의 진실
한 사람이 진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이 진실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진실한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진실한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
모두가 거짓을 말해도
세상에 필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의 진실
모든 새가 날아와 창가에서 노래해야만
아침이 오는 것은 아니므로
한 마리 새의 지저귐만으로도
눈꺼풀에 얹힌 어둠 밀어낼 수 있으므로
꽃 하나가 봄 전체는 아닐지라도
꽃 하나만큼의 봄일지라도
(34-35)
흉터의 문장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을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 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52-53)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뭇잎의 집합이 나뭇잎들이 아니라
나무라고 말하는 사람
꽃의 집합이 꽃들이 아니라
봄이라는 걸 아는 사람
물방울의 집합이 파도이고
파도의 집합이 바다라고 믿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길의 집합이 길들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걸 발견한 사람
절망의 집합이 절망들이 아니라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슬픔의 집합이 슬픔들이 아니라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벽의 집합이 벽들이 아니라
감옥임을 깨달은 사람
하지만 문은 벽에 산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
날개의 집합이 날개들이 아니라
비상임을 믿는 사람
그리움의 집합이 사랑임을 아는 사람
(57)
꽃은 무릎 꿇지 않는다
꽃에게서 배운 것
한 가지는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무릎 꿇지 않는다는 것
타의에 의해
무릎 꿇어야만 할 때에도
고개를 꼿꼿이 쳐든다는 것
그래서 꽃이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
(82-83)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북극의 빙하는 무너지고
시리아 난민들은 영국 해협에서 떠오르고
카불의 여성들은 검은 히잡 속에 숨는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티베트 승려들은 몸에 불을 붙이고
후쿠시마에서는 원전수가 바다로 흘러가고
멕시코인 밀입국자들은 트럭 안에서 숨이 막힌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우한에서는 바이러스가 폐를 잠식하고
갠지스강은 성스러운 중금속으로 오염되고
인도의 노동자들은 수천 리 걸어 집으로 간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바그바드에서는 자살 폭탄 테러가 이어지고
미얀마에서는 시위 군중이 영화처럼 쓰러지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어린이 병원에 미사일을 쏜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알래스카에서는 신생아가 울음을 터뜨리고
이스탄불에서는 수도승들이 회전춤을 추고
제주 바다에서는 해녀가 숨비소리 내며 자맥질한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지구는 초속 30킬로미터로 태양 둘레를 내달리고
야생 기러기는 희망의 날갯짓으로 대륙을 건너고
혹등고래는 새끼 업고 북극해로 이동한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신이 하루를 더 허락하고
맹인 소녀는 점자로 시를 읽고
아이는 나무 아래서 주운 새를 품에 안는다
(114-115)
접촉 결핍
만약 자신이 죽었는데 그 사실을 모른다면
당신이 허기를 느낄 것이다
뱃속 허기가 아니라 피부의 허기를
당신의 피부는 접촉을 원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가벼운 포옹, 어루만짐, 우연한 스침도
봄바람마저 당신의 얼굴을
간지럽힐 수 없다 다가가 손을 내밀지만
뼛속까지 투명한 혼이 되어
누구도 그 손 잡을 수 없고
그 손 또한 다른 손 잡을 수 없다
살아 있을 때 당신은 접촉을 두려워했다
상처 줄까 상처 입을까
그림자 인형으로 살았다
서로 맞닿은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아무 접촉도 하지 않는 그림자놀이 속
인형으로
하지만 육체가 없는 지금
당신이 갈망하는 것
당신이 질투하는 유일한 것은
서로 만지고 입 맞추고 껴안는 행위
그것들 모두 가능했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격렬한 통증 같은 접촉 결핍으로
혼이 점점 희미해져 가면서
(122-123)
늦게 출가해 경전 외는 승려가 발견한 구절
어떤 꽃도
거짓으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어떤 새도
절반의 마음으로 날갯짓하지 않는다
어떤 번개도
건성으로 파열하지 않는다
어떤 바다도
절실함 없이 파도치지 않는다
이 길에 온 존재 쏟아붓지 않는 것은 없다
자신이 속한 세상과
일체가 되기 위해
다 걸어야 한다
아무리 작은 기회라도
온몸을 던지는 씨앗처럼
(135)
달에 관한 명상
완전해야만 빛나는 것은
아니다
너는 너의 안에 언제나 빛날 수 있는
너를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너보다
더 큰 너를
달을 보라
완전하지 않을 때에도
매 순간 빛나는 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