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은 으레 지각하는 아이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장애자들에게는 제대로 교육 혜택이 주어지지 않고 있던 농·어촌 지역에 신설된 관계로, 우리 학교에서는 집이 먼 아이들이 많아서 비오는 날이면 한두 시간 늦게 오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날도 나는 텅 빈 몇몇 자리를 바라보며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동장을 내다보니 허술했던 운동장 둑이 무너져 주민들이 몰려들어 선생님과 함께 한창 복구작업중이 아닌가?
야산이라서 비가 많이 와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니까 둑이 지탱을 못하고 허물어져 밭을 덮친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자습을 하라 이르고 수업 중이던 선생님들과 복구작업에 합세했다.
임시방편이라도 하려고 허물어진 둑에 열심히 몇 개의 가마니와 돌을 쌓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우리 반 아이 이호가 온몸에 진흙을 묻힌 채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쫓아가 무슨 일인가 물어보고 싶었으나 둑을 쌓는데 급해 그만 그 아이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점심시가쯤 겨우 복구작업이 끝이 나 대충 씻고 수건을 꺼내려고 서랍을 여는데 무엇이 부시럭 손에 잡혔다. 꺼내보니 지저분한 라면봉지 안에 진흙이 여기저기 묻어있는 딸기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집에서 갖고 왔다면 깨끗할텐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아이들을 하교시키고 책상 정리를 하고 있는데, 교무실 앞을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옆눈길로 바라보니 아까 보았던 이호였다.
이호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고 수화를 배우고 있던 아이로 늘 명랑한 소년이었다. 그러던 그가 안절부절못한 채 고개를 푹 떨군 죄지은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아이의 표정에서 흙 묻은 딸기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이호야! 무슨 일이니. 내게 할 말이 있니?"
큰소리로, 또 수화(手話)로 물었으나 묵묵 부답. 그러는 이호의 눈에 촉촉한 물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복받치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꺽꺽 소리를 내며 양어깨를 들먹이는게 아닌가. 이호는 잘못했다는 듯 연신 두 손을 비비며 떠듬떠듬 말로, 또 손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제가 바로 '스승의 날'이어서 아이들로부터 카네이션과 선물을 받았는데 이호는 내게 선물을 하지 못했단다. 무심코 지나쳤는데 그 아이는 내게 선물을 못한 것이 가슴 아팠던 모양이었다.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동그라미를 그려보이며 말을 했으나 의미를 알 수 없는 어머니는 오히려 야단만 쳐 학교로 보냈던 것이었다. 그는 비가 오는 산길을 걸어 등교하다가 마침 딸기밭을 보고선 내게 줄 생각으로 그만 나쁜 짓인지도 모르고 따서 봉지에 주워 담았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난 이호가 야산에서 진흙이 묻어 내려온 이유를 알 수 있었고, 뭉클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리고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다.
선생님을 생각하는 그 애의 갸륵한 마음씨를 무엇이라 야단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잘못을 이미 알고 있는 그 애는 내가 아무 말도 없자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호야! 선생님은 딸기를 무척 좋아해. 하지만 남의 것을 말하지도 않고 갖고 오다니…앞으로 남의 것을 훔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선생님은 네 갸륵한 정성이 담긴 그 딸기를 맛있게 먹을게."
와락 가슴을 파고드는 이호에게서 나는 짜릿한 사제지간의 정을 느꼈다. 가슴속에서 이호는 힘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