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내려와 아버지 제사를 지내며 술을 꽤 마셨다.
피로한 몸을 술로 달래려는 난 참 의지가 약하다.
자식들한테 아버지 제사 모신다고 말했지만 한강이는 실습 때문에 못 온다고 연락을 했지만
큰놈은 아무 답도 없다.(하루가 지나서야 전화가 오긴 했다.)
서울에서 임시로 지내고 있는 둘째도 연락이 없다.
그거야 아버지의 딸인 일산의 막내도 마찬가지다.(다음날 송서방이 전화하긴 했다.)
愼終追遠民德歸厚矣
이런 말을 내 자식들에게 말하기 전에 내 자신이 신종추원하지 못할 것이다.
이날까지 아이들이 서울 공부하러 가 이수일 선생을 만나러 간다고 연락을 했다.
난 이수일 선생을 잘 모른다.
2015년 무렵 풍양초에 있을 때 후배 강복현이 이선생님 퇴임 수채화 전시회 한다고
평생교육관으로 불러 같이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고흥온마을학교와 온마을대학을 만들어 학교밖의 교육과 지역에 대해
많은 고민과 실천을 하고 계신 분으로 알고 있다.
전교조의 위원장을 지냈고 어떤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꽤 오래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분이 찍어주신 주소로 운전하여 내산마을 구비길로 올라가니 차는 인가가 없는 곳에 멈춘다.
다시 내려오며 전화를 하니 도로의 끝까지 올라오면 소나무 동산이 보일거라 하신다.
차를 돌려 다시 올라가니 선생님의 파란 1톤 트럭이 보이고 작은 소나무 동산이 보인다.
두채가 있는 집 둘레를 한바퀴 둘러보아도 선생님은 뵈이지 않는다.
꽃을 심고 계신다기에 소나무 동산의 뒷쪽으로 걸어올라보니
자연 연못 비슷한 곳에 수국을 심고 계신다.
주변엔 보라색 쑥부쟁이들이 가득 피어 있고 검은 부직포가 폭우를 막기 위해 덮여있기도 하다.
곧 끝난다고 수국에 물을 주고 작은 수레를 끌고 소나무 동산으로 가잔다.
뒷쪽 마복산은 나무 사이 바위를 많이 보여주고
저 건너로 천등산과 안장바위가 보인다.
그분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대충 듣는다.
10여년 수감생활 하시며 동양철학이나 종교관련 독서도 하셨다기에 주제넘게 신영복 선생을 들먹인다.
장준환이와 생태모임에 만나 서로 친밀감을 보였으나 마을학교엔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하신다.
군청 교육청 등 관변 단체 주변의 예산지원을 받아 무슨 사업을 하는 것이 진보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아마 했을 것이다.
준환이 이야기도 하고 대원이 이야기도 하다가 점심을 같이 먹을까 하고 대원에게 전화하니 멀리 외출중이란다.
내산마을의 주민들과 마을사업 같은 걸 벌여보기도 했지만
이주민이 많은 현실에 그들조차 모두 하는 일이 다르고 제 일에 바빠 모일 틈도 없다 하신다.
서울에서 조직생활하며 다치고 피곤했던 것이 싫어 다시는 사람 만나지 않으려
고등학생 때부터 소망해 온 산가꾸기를 드디어 시작했다 하신다.
전국을 돌며 준비하다 전남으로 도간 전출을 신청해 전남으로 오셨다 한다.
광양으로 발령이 나 구례 등을 돌다 어찌 고흥으로 와 도화고에서 정년을 했다 하신다.
전교조 교사 등과 가끔 산행을 하시는데 조응현 등 내가 아는 이름드도 있다.
그 분의 농원과 세간 살림살이를 안내해 주신다.
과일나무도 많다. 기계를 쓰지 않고 가능하면 혼자 손으로 일구셨다 하신다.
과수 종류가 많다.
풀과의 싸움이 힘겹지 않으시냐 하니 공생할 방법을 모색중이라 하신다.
집 두채 중 한채는 20평으로 혼자 살림을 하시고 다른 한 채는 손님용이란다.
다양한 책이 많고 녹색평론이 뜨인다.
아산 조방원의 석존출산도에 씌인 반야심경이 멋져보여 사진 찍는다.
모과차를 마시고 도화 봉동내려가는 고갯길에 퇴비를 실러 가신다 한다.
주인 없이 퇴비를 그 분의 트럭에 싣고 고센에 가 늦은 점심을 먹는다.
난 팥죽을 말하려는데 그 분은 들깨수제비가 좋다 해 나도 그걸 주문한다.
첫맛이 구수하더니 나중엔 조금 질린다.
2시 고흥문화회관의 류홍준 선생 강연회에 가자고 일어난다.
과역에서 마을대학 모임이 있다고 하셔 내 차를 이용해 읍으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