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천도는 백제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데 개로왕이 죽는 475년부터 동성왕이 즉위하는 479년 사이의 4년이 개로-문주-삼근 의 3왕이 죽는 대 혼란기였습니다. 이에 관한 질문을 10개만 모아보았습니다.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1) 475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자 백제 상좌평 문주가 신라로 구원을 청하러 갔을 때 신라 자비마립간은 1만명의 기병을 주는데 이를 나제동맹이라고도 합니다. 강대국 고구려와 사이가 나빠지면 신라도 위험에 빠질 수 있는데 신라가 백제를 도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전쟁터에 가는 신라군 지휘권을 왜 백제 관리에게 줍니까? 돕더라도 신라군은 신라 장군이 지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때 온 신라군은 언제 돌아갔습니까?
2) 문주가 남은 피난민을 데리고 남쪽으로 천도할 때 그를 도왔다는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는 어디서 무엇하던 사람들입니까? 어떻게 이들이 천도를 돕습니까? 설마 둘이 와서 이사짐을 날랐다는 것은 아닐 것이고... 그리고, 아주 고전적인 문제인데, 당시 목협만치는 몇 살이었습니까?
3) 왜 장수왕은 한성을 함락시킨 후 더 이상 남하하지 않습니까? 적국의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죽었으니 죽 밀고 내려가면 될 것 아닙니까? 왜 더이상 남하하지 않습니까?
4) 왕은 명-휘-시호의 3개의 이름을 가집니다. 태어날 때 받는 이름이 명이고, 죽은 다음에 받는 이름이 시호고, 그 사이에 사용하는 이름이 휘입니다. 예를 들면 동성왕은 명이 여대, 휘가 모대(말다), 시호가 동성입니다. 근구수왕은 휘가 수고 시호가 근구수고 명은 모릅니다. 문주왕의 명(이름)이 모도인데 왜 모씨입니까? 모씨는 백제사에 여기만 나옵니다. 문주는 휘이자 시호인데 사후에 휘에 그냥 왕자를 붙인 경우입니다.
5) " 문주 3년(477) 봄 2월; 궁궐을 수리하였다."
- 문주왕은 남하한 후 궁궐을 수리합니다. 왜 신축이 아니고 수리하지요? 웅진에 무슨 궁궐이 있었습니까? 문주왕이 수리한 웅진의 궁궐은 언제 축조되어 누가 쓰던 궁궐입니까?
6) " 문주 3년(477) 가을 7월;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 곤지는 458년 유송에 의한 11장군 책봉에서 서열 2위인 "정로장군 좌현왕 여곤"입니다. 그가 458년에 좌현왕으로 책봉받았다는 유송의 기록 연도가 정확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또 477년 7월에 죽었다는 것이 달까지 정확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7) "문주 3년(477) 가을 8월; 병관좌평 해구가 권력을 마음대로 하고 왕을 업신여기니 왕이 제어하지 못하였다."
- 왜 웅진천도 후에 해구가 마치 왕인 것처럼 행세를 하지요? 심지어 문주왕을 죽인 것도 해구입니다. 도대체 해구의 지지세력은 무엇입니까?
8) 동성왕은 왜국에서 건너오자마자 대 혼란기를 마감하고 왕이 되었는데 무슨 힘으로 왕이 되었습니까? 아주 고전적인 문제인데, <전라도 천년사>는 '알 수 없다'로 끝맺고 있습니다.
9) 479년에 동성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몇 살이었습니까? (쉬운 문제지만 오차는 2년 이내여야 합니다.)
[답변] 이것만 답을 적습니다. 무령왕보다 18~20살 많았습니다. 그래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제2자인 것입니다. 왕통이 바뀔 때 쓰는 방식인데 고구려는 형제로 연결합니다. 태조-차대-신대왕의 경우가 그 예입니다. 신라는 사위로 연결합니다. 탈해이사금, 미추이사금, 내물이사금 등이 그 예입니다. 백제는 2가지로 같은 계열 내에서 왕통이 바뀔 때는 제2자. 다른 계열로 왕통이 바꿀 때는 서자,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애매할 때는 그냥 子를 쓰는 습니다. 왕통이 가장 많이 바뀐 것은 백제입니다. .
10) 475년에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할 때 사마왕자(훗날의 무령왕)는 14살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10개를 뽑아보았는데 사실은 중복되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 10 문제가 간단히 답변된다면 백제사에 관하여 상당한 수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