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사기)에서는 굴원으로 쓰지만 드라마에서는 미원으로 부른다.나는 미원이라는 이름이 입에 붙어 굴원보다 미원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따라서 이하에서 미원으로 부르겠다.맨아래는 역대 초나라 군주의 계보인데[나무위키자료],미원은 초회왕과 초경양왕 재위 연간에 살았던 정치인이자 시인이었는데,그 직위는 좌도와 삼려대부였더이다.미원은 기원전 278년 초나라 수도 영도가 진나라 전쟁의 신 백기에 의해 함락되자 울분을 참지 못해 돌을 몸에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중국 CCTV에서 방영된 대진제국 시리즈3편 대진제국지굴기2017大秦帝国之崛起 제 17화에서는 미원이 그냥 돌을 안고 멱라수로 걸어 들어가서 자연스레 서서히 물속으로 빠져들어 죽는 것으로 17화 극이 끝나는데,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이미지,즉 시퍼런 멱라수를 아래로 내려다 보며 상당히 높은 낭떠러지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것으로 상상해왔던 것과는 너무도 달라 실감이 훨씬 반감되어 실망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이제 본론으로 들어와서 그럼 도대체 미원은 왜 수중자결할 수 밖에 없었나?누구 때문에,무엇 때문에?
1.암군 초회왕 너 때문이냐?
2.혼군 초경양왕 너 때문이냐?
3.백기에게 초나라 침략을 지시한 진소양왕 때문이냐?아니면 초나라 수도 영도를 함락시킨 백기 때문이냐?
4.초회왕을 이리저리 농락한 진소양왕의 애비 진혜문왕 때문이냐?
5.진혜문왕의 책사 장의의 상어6백리에 초회왕이 속아넘어간 것 때문이냐?사실은 6리인데,6백리로 말이 헛나갔다고 장의가 오리발 내밀자 초회왕 이 바보쩌리가 분기탱천하여 진나라로 쳐들어 갔다가 오히려 애꿎은 병사 8만만 잃고 보너스로 한중땅까지 빼앗겼는데,나중에 진혜문왕이 한중땅은 다시 돌려주겠다고 하자 한중땅은 필요없고 장의만 내놓으라고 하자,장의가 자진해서 초나라로 가서 옥중에 갖혔는데,장의는 옥중에서 근상을 구워삼고,근상은 다시 초회왕의 애첩 정수를 구워삼아 옥에서 풀려났는데,이에 대해 미원은 죽기살기로 장의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건만,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장의는 진나라로 출행랑쳤다더라!!이걸 그냥 그대로 넋놓고 바라보아야 했던 미원의 원통,절통,분통,복통이 그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더라!!
6.진소양왕이 제의한 무관회맹에 가면 안된다고 미원이 그렇게나 말렸는데도 회맹에 참가했다 포로로 잡힌 초회왕의 바보짓 때문이냐?
7.미원의 건의를 묵살시키고 초회왕으로 하여금 무관회맹에 참석하시라고 꼬드긴 초회왕의 아들 자란때문이냐?
8.초회왕 앞에서 온갖 중상모략으로 미원을 음해하여 끝내 미원을 좌도직에서 삼려대부직으로 좌천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간신 근상 때문이냐?
9.초회왕이 진나라를 탈출 조나라로 갔으나 조나라에서 문전박대 당하고 진나라로 다시돌아와 피를 토하고 죽은뒤,그 시신을 초나라로 돌려 보내자,미원이 초경양왕 앞에서 초회왕 죽음은 근상과 자란 네놈들 때문이라고 힐난,문책하자,오히려 근상과 자란의 역공을 받아 삼려대부직마저 빼앗기고 장사땅으로 유배 보냈기 때문이냐?
10.행여나,혹시나, 이제나 저제나 다시 정계복귀할 날만 학수고대했는데,백기의 초나라 수도 영도함락으로 다 글러버렸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자결하였는가?
11.불의나 부정,부패,혼탁을 참지 못하는 미원의 고집스런 청렴결백의 성격때문인가?
12.하고 싶은 말은 초사와 시부로 다 표현해서 더이상 할말,쓸글도 없고,내 나이 62살이면 살만큼 살았고, 영욕 역시 맛볼만큼 다 맛봐서 더이상 생의 미련이 없어져서 자결했다고 봐야할까?
1부터 12까지가 다 해당되지 않거나,다 해당된다면 미원의 수중자결은 딱히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이말 뜻은 어떤 사건(미원의 수중자결)에 그 원인이나 이유가 너무 많다면 그건 그 어떤 것도 그 사건에 이르게한 이유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그래도 굳이 하나만 찍으라면 11번을 찍을까,12번을 찍을까 조금 고민하다가,그냥 눈감고 맨 마지막 12번을 찍겠다! ^0^ [파공자님 크게 웃음]
그러나 나 파공자는 초도왕시의 오기의 변법이 초도왕의 죽음과 함께 변법이 무산되어 버린데서 미원의 비극은 잉태되고 예견되었다고 본다.초도왕의 아들 초숙왕과 그 손자 초선왕때는 진나라 중흥의 군주 진효공 (생몰 기원전 381~338)[대진제국지열변2009大秦帝国之裂变의 주인공]때와 겹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초나라는 진나라보다 변법을 먼저 시작했으나 바로 초도왕 아들, 손자,때에 그 변법을 다 말아 먹어 버렸는데,반대로 진나라는 진효공이 시작한 상앙의 변법을 진효공의 아들 진혜문왕이 그대로 이어 받아 더욱더 굳건히 함으로서 진나라는 계속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물론 변법의 창시자 상앙은 진효공이 죽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잽싸게 자신의 모국 위나라로 토깨다가 붙잡혀와 잔인하게 거열형으로 죽었지만,어찌됐든,그리하여 바야흐로 진효공의 손자때인 진소양왕때에 이르러 드디어 굴기하여 초나라를 가지고 놀았던 것이었던 것이다!!그리고 미원은 이 놀이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었던 것이라고 나 파공자는 본다.미원은 문학적으로는 애국시인으로,시경에 버금가는 초사라는 문학장르를 개척한 시조로 받들어 모실만한 걸출한 인물인 건 당연한 평가로 보나, 정치적으로는 진소양왕이 장기판에서 가지고 논 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이게 나 파공자가 미원을 바라보는 정치적 평가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미원 같은 놈은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한마디로 미원은 자신이 놀아야할 놀이판을 잘못 골랐다는 것이다.자신의 적성,소질에도 맞지않는 정치판은 아얘 처음부터 기웃거리지 않고,그냥 시나 사나 부나 지으며 한평생 예술인으로 그 인생 살다갔으면 딱 좋았을 걸....잔넨다!!자신의 적성,소질에도 맞지않는 정치판은 아얘 처음부터 기웃거리지 않고,그냥 시나 사나 부나 지으며 한평생 예술인으로 그 인생 살다갔으면 딱 좋았을 걸....혼또니 잔넨다!!^0^잘못 쓴게 아니라 일부러 두번 쓴 것이다!!
[부기]아래 초나라 군주자료목록에서 조금 파공자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는데,초소왕의 약력 설명중에 <이때 초나라가 오나라에게 멸망했으나 신포서가 진(秦)에 원병을 청해준 덕분에 초나라를 다시 되일으켰다.>에서 초나라가 멸망한 것이 아니라,<초나라는 오자서와 손자와의 백거대전 패배로 수도 영도가 함락되어 수도를 약으로 옮겨야 할 정도로까지 일시적으로 쇠퇴하였다.>로 약력 설명해야 맞다고 보겠다.아마 파공자의 과문으로는 초나라는 이때 처음으로 수도 영도가 함락된 걸로 알고 있으며,초경양왕때의 영도 함락은 두번째로 알고 있다!끝으로 초소왕의 애비가 바로 오자서에게 굴묘편시를 당한 바로 그 초평왕이고,초소왕은 초평왕이 태자 건의 신부,즉 며느리 될 여자를 가로채서 얻은 아들이라는 점만은 꼭 언급해 두고 싶구나!! ^0^
大秦帝国 대진제국 시리즈
2009
대진제국지열변2009 大秦帝国之裂变
2012
대진제국지종횡2012 大秦帝国之纵横
2017
대진제국지굴기2017 大秦帝国之崛起
2020
대진부2020 大秦赋
초나라 군주계보
육웅(鬻熊): 초나라의 시조.
웅려(熊麗): 육웅의 아들.
웅광: 웅려의 아들. 주나라 성왕에게 봉지를 하사받아 초나라의 초대 군주가 되었다.
웅역: 웅광의 아들. 주나라로부터 자작의 지위를 하사받아 제후국으로 인정받았다.
웅애: 웅역의 애들.
웅달: 웅애의 아들.
웅승: 웅달의 아들.
웅양: 웅달의 아들. 웅승의 동생
웅거: 웅양의 아들.
웅지홍: 웅거의 아들.
웅연: ? ~ 기원전 848년, 웅거의 아들.
웅용: 기원전 847년 ~ 기원전 838년, 웅연의 아들. 이때부터 재위 기간이 제대로 나오기 시작한다.
웅엄: 기원전 837년 ~ 기원전 828년, 웅용의 아들.
웅상: 기원전 827년 ~ 기원전 822년, 웅엄의 아들.
웅순: 기원전 821년 ~ 기원전 800년, 웅엄의 아들. 웅상의 동생.
웅악: 기원전 799년 ~ 기원전 791년, 웅순의 아들.
약오: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4년, 웅악의 아들. 이 사람 때부터 춘추 시대 초나라의 주요 귀족 가문인 투씨 가문이 갈라져 나왔다. 투백비의 아버지.
소오: 기원전 763년 ~ 기원전 758년, 약오의 아들.
분모: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41년, 소오의 아들. 이 사람이 화씨지벽 고사에 등장한 초 여왕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초나라는 칭왕하지 않았다.
초무왕: 기원전 740년 ~ 기원전 690년, 소오의 아들. 이때부터 초나라가 칭왕하기 시작했으며, 시호인 무답게, 무력으로 주위를 제압하며 중원 진출의 야욕을 노골화 한다.
초문왕: 기원전 689년 ~ 기원전 675년, 초 무왕의 아들. 식나라를 멸망시키고, 식후의 아내인 식규를 차지해 초 성왕을 낳았다.
장오: 기원전 674년 ~ 기원전 672년, 초 문왕의 아들. 놀고 먹기만 하다가 동생인 초 성왕에게 죽었다.
초성왕: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6년, 초 문왕의 아들. 형인 장오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 송나라를 물리치는 등의 활약을 하지만 진문공에게 패한 오점을 남겼다. 그 자신도 아들인 초 목왕에게 죽는다.
초목왕: 기원전 625년 ~ 기원전 614년, 초 성왕의 아들. 강나라, 육나라, 요나라[26]를 멸망시키는 활약을 했다.
초장왕: 기원전 613년 ~ 기원전 591년, 초 목왕의 아들. 춘추 오패로서 진나라의 대부 하징서를 죽이고 진나라를 멸한 뒤 진나라를 되일으켜 주었다. 절영지연의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초공왕: 기원전 590년 ~ 기원전 560년, 초 장왕의 아들. 아버지에 비해 능력이 떨어져 아버지 때의 위용을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애꾸가 되어버렸다.
초강왕: 기원전 559년 ~ 기원전 545년, 초 공왕의 아들.
겹오: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41년, 초 강왕의 아들. 숙부인 초 영왕에게 죽임을 당했다.[27]
초영왕: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29년, 초 공왕의 아들. 조카인 겹오를 죽이고, 왕이 되어 진(陳)나라와 채나라를 멸하는 정복 사업을 펼쳤으나 그 외에 사치를 벌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서 초 평왕에게 쫓겨 났다.
자오: 기원전 529년, 초 영왕이 쫓겨난 공백에 즉위한 왕. 초 영왕의 동생. 초 평왕의 계략으로 초 영왕이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말에 속아 자결했다.
초평왕: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16년, 초 공왕의 아들이며, 초 영왕의 동생. 처음에는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간신 비무기의 말에 넘어가 오자서 부자를 해치는 일을 하다가 초나라의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다.
초소왕: 기원전 515년 ~ 기원전 489년, 초 평왕의 아들. 이때 초나라가 오나라에게 멸망했으나 신포서가 진(秦)에 원병을 청해준 덕분에 초나라를 다시 되일으켰다.
초혜왕: 기원전 488년 ~ 기원전 432년, 초소왕의 아들. 이때 진(陳), 채, 기나라를 멸망시킨다.
초간왕: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8년, 초 혜왕의 아들. 거나라를 멸망시킨다.
초성왕[28]: 기원전 407년 ~ 기원전 402년, 초 간왕의 아들. 얼마나 무능했는지 도적이 일어났을 때 도적에게 순삭당했다.
초도왕: 기원전 401년 ~ 기원전 381년, 초 성왕의 아들. 오기를 등용해 부국 강병을 이룬다.
초숙왕: 기원전 380년 ~ 기원전 370년, 초 도왕의 아들.
초선왕: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40년, 초 도왕의 아들. 형인 초 숙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했다.
초위왕: 기원전 339년 ~ 기원전 329년, 초 선왕의 아들. 월나라를 멸망시킨다.
초회왕: 기원전 328년 ~ 기원전 299년, 초 위왕의 아들. 장의에게 질질 끌려다닌 바로 그 암군이다.
초경양왕: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3년, 초 회왕의 아들. 진나라의 침략으로 재위 20년째에 400년고도 영도(강릉)를 잃고 진현으로 천도
초고열왕: 기원전 262년 ~ 기원전 238년, 초 경양왕의 아들. 그가 후계자 선정을 바로 하지 못하여, 갈등의 불씨를 낳아 춘신군 황헐이 이원에게 죽었다.
초유왕: 기원전 237년 ~ 기원전 228년, 춘신군의 사생아지만[29] 공식적으로는 초 고열왕의 아들. 이원이 이 당시 때 권력을 휘둘렀다.
초애왕: 기원전 228년, 초 고열왕의 아들. 초 유왕과는 달리 아버지가 초 고열왕이 맞다. 웅부추에게 죽었다.
초왕 부추: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3년, 초 고열왕의 아들. 초 애왕과 그를 끼고 행패를 부리던 이원을 죽여 초나라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진나라에게 밀려 수춘이 함락당하고 진 시황에게 붙잡혀 서민으로 강등된다. 그 명분은 초 애왕을 죽인 죄.
창평군: 기원전 223년, 사실상 전국시대 초나라의 마지막 왕이다. 초 고열왕의 아들. 다만 초나라 측에는 왕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기록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창평군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원래는 진나라의 상국까지 했던 사람이었으나 초의 장수 항연의 추대를 받아 초나라의 왕이 되어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진나라에 저항하다가 결국 전쟁에서 패해 죽었다. 진나라에서 왕 다음의 권위를 가졌던 상국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진나라의 통일 전쟁 막바지에 대세가 기운 상황에서 초나라를 택했다는 점이 특기할 부분. 다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인지 그에 대한 기록이 기록말살형 수준으로 적다. 사실 창평군은 본명이 아니고, 본명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창평군의 본명은 어느 정도 간접적인 기록과 유물로 추측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초나라 측에 기록이 없는 것은 초나라가 멸망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지만, 진나라 측에도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역사상 얼마 없었던 상국의 위치에 올랐던 사람임을 고려하면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