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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대계 제22권 <신라를 빛낸 인물>
1. 석우로
우로의 인명과 출자
우로于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니사금 즉위조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흘해니사금訖解尼師今이 즉위하니, 나해왕奈解王의 손자다. 아버지는 우로于老 각간角干이요, 어머니는 명원부인命元夫人이니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우로는 일찍이 임금을 섬기어 공이 있고 여러 번 승진하여 서불한舒弗邯이 되었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흘해니사금 즉위조)
위의 기록에 의하면 우로는 신라 삼성왕실의 하나인 석씨로서 제16대 나해왕의 아들로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권45의 석우로 열전에는 ‘우로가 각간角干 수로水老의 아들’이라는 다른 전승도 있으나, 『삼국유사』 왕력王曆의 제16대 걸해니질금第十六代乞解尼叱今조에는 ‘아버지는 우로음 각간于老音 角干이며 나해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전한다. 따라서 우로의 아버지는 나해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왕자 우로는 조분왕의 딸 명원부인命元夫人과 혼인하여 왕실 내부에서 유력한 세력가로서 명실상부한 석씨 왕실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우로의 인명표기를 검토해 보면 『삼국사기』에는 ‘于老’라고 표기하고 『삼국유사』에는 ‘于老音’이라고 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우로를 우로 ‘음’이라 한 표기와 같은 어미를 가진 이름의 인물로서 나해왕의 아들, 즉 우로의 형제로 보이는 왕자 혹은 태자인 이음利音이 전하고 있는 점이 참고된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신공기神功紀에도 ‘신라왕 우류 조부리지간新羅王 宇流 助富利知干’이라 하여 ‘宇流’라는 표기로 우로와 유사한 이름을 전하고 있다.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이라 해서 신라왕인 우류가 조부리지간, 즉 서불한이라는 칭호를 띠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신라왕이 서불한이라는 칭호를 가지는 예는 없다. 신공기에 의하면 신공神功의 신라정벌전승 일설에 항복한 신라왕이 우류 조부리지간이라고 하였는데, 그 전승의 본문에는 신라왕을 파사매금波沙寐錦이라고 해서 혼선이 있다. 파사매금은 신라 제5대 파사니사금婆娑尼師今(80~112)을 가리키는 것이고 우로(?~249)와 연대 차이가 많이 나므로, 같은 시간 속에 공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다만, 『삼국사기』의 석우로 열전에 우로의 아내가 살해당한 남편의 복수를 위해 왜국의 사신을 술로 꾀어 죽였다는 전승이 신공기에도 유사하게 전하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허구는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공기의 신라 관련 전승은 시간 관념이 없이 잡다하게 뒤섞여 있다. 그와 같은 전승은 전혀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왜가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막연한 전승이나 와전을 기년에 대한 지식이 없이 아무렇게나 모아놓은 것이다. 또 신라 초기에 교류한 왜는 야마토왜(大和倭)가 아니라, 규슈왜(九州倭)였다. 야마토왜가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신라번국관新羅蕃國觀을 창출하기 위해 신라와 왜의 관계에 대한 전승 가운데 사실성을 지닌 우로 관련 전승에 신공의 신라정벌신화를 창조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덧붙여 말하면 신라왕 우류 조부리지간이라는 전승도 규슈왜로부터 전해진 일개 신라 장수의 살해 전승을 야마토왜가 신라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마치 신라왕을 살해한 것처럼 왜곡시켜 놓았던 것이다.
우로가 왕의 아들이었음에도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고, 아들 흘해가 왕위에 올랐는 데도 갈문왕에 추봉되지도 못하였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먼저 우로는 나해왕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나해왕대에 일어난 포상팔국 전쟁에서 왕자인 이벌찬 이음利音과 함께 가라加羅를 구원하러 갔는데, 이때 태자였다. 한편 우로의 형제로 보이는 이음도 태자라고 하였는데 우로보다 일찍 사망한 점에서 보아 우로의 형일 가능성이 크다. 이음은 나해니사금 25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어 우로보다 29년 일찍 사망하였고 또 아버지 나해왕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왕위계승의 여부와 관련이 없다.
<표 1>의 우로가계도에서 보듯이, 석씨왕통은 시조 탈해왕脫解王 이후 우로의 아들 흘해왕까지 지속되었으며 벌휴왕 이후 전반기의 석씨 왕실은 내부적으로 근친혼이 행해졌다. 나해왕은 큰아버지 골정의 딸과 혼인하였고 조분왕은 나해왕의 딸 아이혜부인阿伊兮夫人과 혼인하였으며, 우로 또한 조분왕의 딸 명원부인과 혼인하였던 것이다. 우로의 아버지 나해왕은 할아버지 벌휴왕을 이어 이사금이 되었는데, 벌휴왕 재위 중에 태자 골정骨正 및 차남 이매伊買가 먼저 사망하고 대손大孫 조분助賁이 아직 어렸기 때문이다.
나해왕 사후의 왕위는 그의 아들인 이음이나 우로가 적자로서 계승해야 하지만, 그의 사촌인 조분이 왕위를 계승하고 있다. 벌휴왕 사후에 장손인 조분이 ‘유소’한 때문에 나해왕이 왕위를 계승한 것과 달리, 나해왕의 아들인 우로는 나해왕 때에 이미 정치적, 군사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해왕을 이어 조카 조분왕이 왕위에 즉위한 것은 전왕 나해왕의 유언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조분왕이 나해왕처럼 할아버지 벌휴왕의 장손으로서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정당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요건 외에도 사실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여서女壻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조분왕 사후에 우로가 왕의 사위였음에도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왕의 동모제同母弟인 첨해가 왕위를 이었다. 우로는 첨해왕 3년에 왜와의 외교상 구설수에 올라 왜인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우로의 아들 흘해는 기림왕基臨王을 이어 이사금이 되었다. 조분왕의 동모제 첨해왕이 아들이 없어 조분왕의 직계 유례왕과 기림왕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후 조분왕의 후손 가운데 아들이 없어 흘해왕이 즉위하였던 것이다. 흘해왕은 나해왕 직계로서 왕위에 올랐던 점에서 우로가 왕위계승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태자제도가 성립되지 않은 시기임에도 기록상에서 우로를 태자로 표현한 것은, 흘해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그리 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로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이유는 왕으로서의 통치 능력이 아닌 다른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뒤에서 보듯이 우로는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혁혁한 무공을 쌓았다. 당시 신라는 소국 정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로서 군사적 능력을 가진 인물이 절실하게 요망되었다. 또 석씨 왕실의 왕위 계승은 직계인 조분왕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방계인 우로는 왕위계승권에서 멀어져 군사 활동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흘해가 왕위에 올랐는데도 왜 아버지 우로를 갈문왕에 추봉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점이 문제이다. 갈문왕에는 왕비의 아버지, 왕의 외할아버지, 왕의 아버지, 왕의 동생, 여왕의 남편 등 왕과 일정한 혈연관계를 가진 인물들이 추봉 또는 책봉되었다. 석씨 왕실의 경우 왕의 아버지와 왕의 외할아버지가 갈문왕에 추봉되었는데 해당 인물은 골정과 이음뿐이다. 그 외에 구추仇鄒·이매·걸숙 등 석씨 왕실의 구성원이나 구도 등 왕과 혈연관계를 가진 인물들이 있으나 모두 갈문왕에 추봉되지 않았다. 골정은 조분왕과 첨해왕의 아버지로서 조분왕이 갈문왕으로 추봉하였고 첨해왕이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다시 추봉하였다. 이는 벌휴왕 직계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석씨 왕실의 정통성을 더욱 강조하려 했던 때문이다. 이음은 나해왕의 아들이고 유례왕 어머니의 아버지, 왕의 외할아버지로서 갈문왕에 추봉되었다. 이음과 우로는 모두 벌휴왕의 방계인 나해왕의 아들이었으나, 우로만 갈문왕에 추봉되지 못한 것이다. 우로가 흘해왕의 아버지로서 골정과 마찬가지로 갈문왕에 추봉될 자격은 있었는데 추봉되지 못한 이유는 첨해왕 때에 왜와의 관계에서 구설수에 올라 왜로부터 위기를 맞이하는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왕실의 위상에 손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우로의 활동시기 문제
우로가 249년 사망한 지 61년 만인 310년에 그의 아들 흘해왕이 이사금으로 즉위한다는 점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흘해왕이 즉위할 때 ‘흘해는 어려도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라고 한 점에서 흘해왕은 젊은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자간의 연령 차이를 그대로 인정해 흘해왕이 250년에 유복자로 태어나 61세로 즉위하였다면, 흘해왕의 즉위시 연령은 노년에 해당되므로 ‘노성한 덕이 있다.’라는 식의 기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흘해왕을 유복자로 볼 수 없는 점은 ‘우로가 왜인에게 살해당하자 흘해가 어리고 약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여 사람들이 안아서 데리고 왔다.’거나 우로가 흘해를 가리켜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라고 한 사실에서 우로가 살아있을 때 아들 흘해가 이미 태어나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둘 점은 우로가 사망한 해의 간지년차는 기사년이고, 바로 그 다음해인 경오년에 흘해가 이사금에 즉위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석씨 왕계의 기년이 적어도 1주갑 이상 인하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기는 61년이라는 연대 차이는 우로가 사망한 점해왕 3년으로부터 13년이 경과하였고, 미추왕의 재위기간 22년, 유례왕의 재위기간 14년, 기림왕의 재위기간 12년을 더한 합계 61년 이후에 흘해왕이 즉위한 셈이다.
그런데 흘해왕의 사후 아들이 없어 김씨 나물왕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차돈異次頓이 흘해왕의 증손으로 전해지고 있으므로 의문이다. 『삼국유사』염촉멸신조의 본문에 의하면, 박염촉, 즉 이차돈은 ‘그의 아버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할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으로서 곧 습보習寶 갈문왕葛文王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주석에 인용한 김용행金用行 찬술의 「아도비」를 살펴보면, ‘사인舍人(이차돈)은 순교할 때 나이가 26살이며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할아버지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고 하였다. 법흥왕 때 불교의 공인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의 예에서도 박씨와 석씨로 성씨가 혼동되어 있다. 성씨가 잘못 전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드물게 혼동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즉 이차돈은 김씨는 아니며 흘해왕의 증손으로서 석씨로 볼 수 있다. 세계상으로 볼 때 이차돈의 증조의 세대에 해당되는 인물은 흘해왕과 습보갈문왕이다. 습보갈문왕은 나물왕의 아들이자 지증왕의 아버지이므로, 우로와 나물왕이 같은 세대이고 나해왕·조분왕과 같은 세대인 셈이다. 그런데 미추왕은 조분왕의 딸 광명부인光明婦人과 혼인하였으므로 김씨 왕실 인물의 세대는 석씨 왕실의 인물보다 한 세대를 늦추어 볼 수 있다. 따라서 미추왕-우로와 나물왕-흘해왕이 같은 시기의 인물로 볼 수 있으므로, 우로의 활동 시기는 4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된다.
우로의 활동과 업적
우로가 나해왕 14년 포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라加羅를 구원한 것이 처음 보이는 기록이다. 포상팔국이 공격한 가라에 대해서는 금관가야金官伽倻 혹은 안라국安羅國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신라의 변경까지 쳐들어와 신라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라면 신라와 인접한 구야국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시기에 대해서는 그 기록대로 208년으로 보거나 기년을 수정하여 4세기 초로 보기도 하며, 6세기 중엽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앞서 언급한 우로의 활동시기를 고려해 수정 기년에 입각하면 4세기 초반에 가야제국간의 갈등, 즉 구야국狗邪國이 가지고 있던 해상교역체계상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자 이에 구야국이 인접한 신라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전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우로와 이음 형제로서 이들은 석씨 왕실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당시 우로는 태자로서 나해왕을 이을 후계자로 지목되어 있었으며, 이음은 같은 왕 12년 이벌찬으로 승진하여 국내외 병마에 관한 업무, 즉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이 전쟁을 주도한 점에서 보아 이들은 나해왕의 왕권을 공고히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이 전쟁을 지휘하여 포상팔국을 제압하였는데, 이는 한반도 동남지역의 정세는 신라가 주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우로는 한동안 활동이 없다가 조분왕 2년에 대장군으로 등장해 감문국甘文國(경상북도 선산)을 복속하였다. 우로를 대장군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장군이었을 것이다. 두 형제 가운데 이음은 나해왕 25년에 사망하고 그 직책은 우로가 아닌 충훤忠萱이 담당하였는데, 나해왕 27년 백제왕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파면된 대신에 연진連珍이 직위를 이었다. 우로·이음과 달리 충원과 연진의 경우 계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석씨 왕실의 구성원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로가 포상팔국 전쟁 이후 한동안 활동이 없다가 조분왕 초기에 다시 등장한 것은 나해왕 말년에 후계 구도가 우로에서 조분으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로가 다시 등장한 기반은 군사적 능력이 탁월하였음과 동시에 조분왕과 처남 매부 사이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왕권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는 친연관계에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이때부터 우로를 중심으로 하는 나해왕계는 국왕의 측근으로서 기반을 다져 나갔으며, 감문국을 정복하는 등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우로는 조분왕 4년에 침략해온 왜선을 사도沙道(경상북도 영덕 혹은 경상남도 거제)에서 화공술을 써서 궤멸시켰다. 당시 왜는 신라를 자주 침략하여 조분왕 3년에도 수도의 금성까지 침공하였을 정도로 자못 나라의 우환이었다. 우로는 왜병이 수도로 다시 침공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화공술이라는 새로운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불태우고 퇴로를 차단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후 한동안 왜는 신라를 침공하지 못하고 사절을 보내어 외교적 교섭을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이 되자 이제 우로는 외교를 담당하였는데, 문제가 야기된 점으로 보아 그는 군사전문가이나 외교적 역량에서는 미흡한 단점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또 15년에 서불한이 되어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중요한 권력자가 되었으며, 16년에는 북쪽 변경을 침범한 고구려군과 싸웠다. 첨해왕 때에는 신라에 속해 있던 사량벌국沙梁伐國(경상북도 상주)이 배반해 백제에 붙으려 하자 우로가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군사적 업적이 많은 우로의 인간적 면모는 조분왕 16년에 벌어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드러난다.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열세에 몰려 퇴각하였는데, 밤에 신라 군사들이 추위에 괴로워하므로 우로가 직접 돌아다니며 위로하고 손수 땔감을 때어 따뜻하게 해 주니 군인들이 마음 속으로 감격해 마치 솜옷을 입은 것 같이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처럼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움으로써 열세에 몰린 전제를 바꾸어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우로는 전략 전술뿐 아니라 용병술이 뛰어난 장수였고 인간미가 풍부한 인물이었으므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전쟁을 잘 수행해 위기를 극복하여 국가의 안녕과 평안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우로의 죽음과 추모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첨해왕 3년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석우로 열전에는 첨해왕 7년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열전의 연대보다 연대를 중시하는 체제인 신라본기의 연대를 취한다. 열전에 그 과정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사신의 숙소인 객관에 있을 때 우로가 그를 접대하며 농담으로 말했다. “조만간 당신네 국왕을 염전의 노비로 만들고, 왕비는 부엌데기로 만들 것이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 주군于道朱君을 보내어 우리를 공격하자, (첨해)대왕이 궁궐을 나가 우유촌于柚村(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에 기거하게 되니 우로가 아뢰었다. “지금의 환란은 제가 말을 삼가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마침내 왜군에게 가서 말했다. “전에 한 말은 농담이었을 뿐인데 내 어찌 군대를 일으켜 이 지경까지 이를 것을 생각하였겠느냐?” 왜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장작더미 위에 얹어 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 버렸다. 그 후 미추왕 때에 왜국 대신이 와서 빙문聘問하였는데, 우로의 처(명원부인)가 국왕에게 청해 그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하게 되었다. 그가 흠뻑 술에 취하였을 때, 그녀가 힘센 장사를 시켜 뜰에 끌어내려 불태워서 지난날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이 분개하여 몰려와 금성을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권45열전 석우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우로가 사도전투에서 화공술로 왜병을 크게 격퇴한 이래 왜는 한동안 신라를 침공하지 못하고 외교관계에 주력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었다. 7세기 이후 대왜외교활동을 수행한 신라사절의 관등이 대부분 나마급인 점도 참조해보면, 일반적으로 외교에서는 고위직이 아닌 하위직을 가진 인물이 사절로 활동하였다. 신라측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우로를 내세워 접대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왜국에서도 중대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위가 상당히 높은 인물을 보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왜가 고위급 인물을 신라에 보낸 것은 신라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석씨 왕실의 원로였던 우로가 왜의 사절을 접견하는 과정에서 실언을 하였다. 외국 사절을 접견할 경우 으레 주연이 베풀어졌을 것이고, 우로는 취중에 자신이 전에 왜의 침공을 격퇴한 자부심을 은연중에 드러내어 왜왕을 희롱한 것으로 보인다. 왕권 중심의 고대사회에서 그와 같은 모독은 전쟁을 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삼국사기』의 사관史官이 석우로 열전 말미에 다음과 같이 논평한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우로가 당시의 대신으로서 군사와 정무를 맡아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비록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모책이 틀림없이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 한 마디를 잘못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 사이에 전쟁까지 일으켰다. 그의 아내가 원한을 갚을 수 있었으나 이것도 역시 변칙이요 올바른 길은 아니었다. 만일 이렇지만 않았다면 그 공적도 기록에 남길 만하다.”
(『삼국사기』권45 열전 석우로)
우로의 아내인 명원부인이 남편의 복수를 하였다는 것은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관념이 투영된 때문일 뿐이며 사실이라고 이해하기는 힘들다. 이 설화는 왜에 대해 신라가 가지고 있었던 적대감을 표현한 데에 불과하다.
우로는 이음과 함께 석씨 왕실의 무훈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우로의 전승은 영웅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웅도 한순간에 저지른 실언으로 찬란한 업적에 옥의 티를 남긴 것이다.
선석열 (부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