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임시정부, 상해版 독립신문 창간
← 1919년 8월 21일 창간된 '상해판(版)독립신문' 창간호.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우리 근·현대사에서 ‘독립신문’의 제호를 사용한 신문은 많다. 서재필과 개화파가 창간한 독립신문(1896년), 장기영 등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한 독립신문(1919년), 광복 후 서울에서 발간된 독립신문(1945년), 1919년 8월 21일에 임시정부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기관지로 발간한 ‘상해판(版) 독립신문’ 등이다.
‘상해판 독립신문’은 상하이에 망명 중인 독립지사들이 자신들의 공동관심사와 독립운동 관련 소식을 모아 발행하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을 모태로 출발했다. 사장 겸 주필은 이광수가, 편집국장은 주요한이 맡아 타블로이드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주 3회 발행을 원칙으로 했다. 상하이에 한글 활자가 없어 성경에서 한글을 오려내 자모를 만들 만큼 제작환경이 열악했지만 일제를 통렬하게 비판할 때는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재정난과 일제의 간접적인 탄압으로 1925년 9월,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할 때까지 ‘獨立’ ‘獨立新聞’ ‘독립신문’으로 제호가 3번 바뀌었다./조선
[2003년] 2003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개막
← 개막식 장면 중
‘벽을 넘어 하나로, 꿈을 펼쳐 미래로’. 지구촌 대학생들의 스포츠제전인 제22회 2003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가 2003년 8월 21일 오후 화려한 막을 올렸다. 전세계 174개국 7000여명의 선수·임원이 참가해 사상 최대규모로 펼쳐졌다.
이날 오후 6시30분 부터 대구 유니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개회식은 첨단 IT기술을 응용한 대형 공연과 남북한 선수단의 동시입장으로 분위기가 뜨겁게 달구어졌다. 국제스포츠대회에서의 남북한 동시입장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003년 일본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였다.
열전의 11일 동안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1, 2위를 달성했고, 한국은 당초 목표(금메달 16~19개)를 훨씬 넘는 금메달 26개, 은메달 11개, 동메달 15개를 따내 역대 최고 성적인 3위를 달성했다. 8월 31일 그 막을 내렸다. 13개 종목에서 185개의 메달을 놓고 뜨겁게 대결하며 우정을 나눈 젊은이들은 아쉬움을 접고 차기 개최지인 터키 이즈미르에서 재회할 것을 기약했다. /조선
[1991년] 라트비아 독립선언
발트 해와 리가 만(灣) 연안을 끼고 있으며, 에스토니아(북쪽), 러시아(동쪽), 리투아니아(남쪽)와 경계를 이룬다. 수도는 리가이다. 면적 64,589㎢, 인구 2,287,000(2006 추계).
라트비아의 독립선언은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보다 늦은 것이지만, 소련 당국을 자극하여 독립선언 무효화 포고령을 내리게 하였다. 1990년 12월까지 라트비아 내 비 라트비아계의 항의와 파업이 계속되고, 1991년 1월에는 소비에트 통치를 재건하려는 파와 독립파 간의 무력충돌이 있었다. 1991년 3월 구소련 9개 공화국에 의하여 제안된 신연방조약 참여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 반대하여, 그 대신에 “민주적이고 독립된 라트비아를 원하는가?”라는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75%가 독립을 지지한 결과가 나왔다. 1991년 8월 소련 공산당계가 권력장악을 시도하는 쿠데타를 행하였으나, 긴급 소집된 최고회의에 의하여 실패하고, 완전독립의 선언, 공산당 불법화, 친공산당계 인사 체포 등의 조치가 시행되었다.
1991년 8월 21일 라트비아 독립이 선언되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라트비아의 독립을 신속하게 승인하였고 소련국가평의회도 1991년 9월 결국 승인을 하게 되었다. 또 라트비아는 9월 17일 UN에도 가입하였다.
[1983년] 필리핀 야당 지도자 아키노 피살
← 마닐라 공항 피의 현장. 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아키노다.
1983년 8월21일 오후1시, 4∼5발의 총성이 필리핀 마닐라공항에 막 착륙한 중화항공 여객기 주변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잠시후 한 여인이 “군인들이 니노이를 쏘았다”고 부르짖었다.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가 피살된 것이다. 잠시후 항공기 정비사 모습을 하고 있는 20대 청년도 군인들이 쏜 수발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 쓰러졌다.
필리핀 정부는 죽은 청년이 청부살인업자 출신의 범인이라고 발표했지만 야당측이 발표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달랐다. 아키노를 태운 여객기가 공항에 도착한 뒤 아키노를 호위하려고 비행기에 올라탄 보안요원들이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필리핀 내 야당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망명지 미국을 떠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미국 뉴욕의 필리핀 총영사관이 암살설을 근거로 아키노에게 비자발급을 해주지 않자 아키노는 위조여권을 만들어 귀국을 강행하다가 이날 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아키노의 비극은 그가 1973년의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그를 경계한 정적 마르코스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1972년)로 그를 투옥시킨 뒤 사형을 선고했다가 미국으로 쫓아냈었다./조선
[1959년] 하와이, 미 합중국의 50번째 주(州)로 편입
하와이 합병은 1900년 4월 30일에 미국이 하와이를 합병한 사건이다. 하와이는 본래 독립국가로서 1782년에 카메하메하 1세 이후 왕조 체계가 유지되던 독립국가였다. 이 합병은 텍사스 합병과 거의 유사한 절차로 이루어졌다.
먼저 다른 국가로 이민을 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난다. 그 다음 단계로 미국인들이 중심이 된 공화국을 세우고, 이 공화국이 미국에 자신들을 합병해달라고 요청하면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주는 식이다. 이 방식은 나중에 1938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주데텐 할양,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점령과도 유사한 수법이다.
하와이는 19세기 중반부터 미국과 극동을 잇는 중간 기지 역할을 해왔고, 1887년에 미국과 호혜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진주만(Pearl Harbor)을 미국 해군기지로 제공하기도 했다. 하와이로 이민온 사람들은 주로 미국인들이 많았는데, 19세기 후반에 사탕수수 및 파인애플 재배에 성공하여 제당업이 번창하자 아시아인을 포함한 다른 외국 이민이 증가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그런데 1890년의 미국 관세법 개정으로 제당업이 타격을 받자 하와이에 와있던 미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1년에 즉위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국수적인 헌법개정을 시도하자 1893년에 하와이 혁명이 일어나서 1894년에 공화국이 되었다.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 미국과 합병운동은 "Newlands Resolution"라 하여 미국에 하와이를 합병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결국 1897년 6월 16일 매킨리 미국 대통령과 하와이 공화국이 합병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고 이 조약을 미국 의회가 1898년 7월 7일에 비준하였다. 조약이 효력을 발생한 날짜가 1900년 4월 30일이다.
미국 합병 직후에는 준주(準州)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주(州) 승격운동이 활발해져 1959년 8월 21일 알래스카에 이어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wikipedia
[1944년] 덤버튼 오크스 회의 개최
덤바턴 오크스 회의(Dumbarton Oaks Conference)는 국제연합의 창설을 위하여 1944년 개최된 국제예비회의이다.
미국의 워싱턴 교외에 있는 덤바턴오크스에서 미국 ·소련 ·영국의 3개국회의(8월 21일~9월 28일)와 미국 ·영국 ·중국의 3개국회의(9월 29일~10월 7일)가 각각 별도로 열렸다. 회의를 2회로 나눈 이유는 당시 일본과의 교전국이 아닌 소련이 중립적 태도를 지키기 위하여 중국 대표와 동석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덤바턴오크스제안(일반적 국제기구 설립에 관한 제안)에는 강대국의 협조 아래 안전보장이사회를 중심으로 집단안전보장기능을 발휘하려는 평화유지구상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은 후에 국제연합헌장의 원안(原案)이 된다. 그러나 안전보장이사회의 표결방식과 소련내 공화국들에 대한 회원자격조항과 같은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다음해 2월 개최된 얄타회담으로 넘겨졌다. 이 회의에서 새 기구의 명칭을 국제연합(The United Nations)이라 정하였다. /naver
[1920년] 법학자 김기두(金箕斗) 출생
1920. 8. 21 전남 구례~1993. 9. 7. 서울.
1943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49년 광주의대 조교수, 1951년 법무부 법무관, 1954년 서울대 법대 부교수, 1960~85년 대학 교수, 1965년 동 대학 학장 겸 사법대학원장을 역임하고, 1987년 동 대학 명예교수로 임명되었다. 한국법률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형사소송법론〉·〈형사각론〉·〈미국형사소송법〉·〈한국에 태어난 행복〉·〈한국청소년범죄연구〉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19년] 전 두산그룹 회장 정수창(鄭壽昌) 출생
1919. 8. 21 영덕~1999. 10. 24 서울.
전문 경영인으로서는 최초로 그룹 회장이 되었다. 1941년 경성고등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광복 전 3년간 만주 흥업은행에서 근무하다가 1945년 (주)동양맥주에 입사해 1952년 상무이사, 1963년 전무이사, 1969~77년 회장을 역임했다. 그밖에 1965년 세한제지(주) 전무, 1967년 한국비료(주) 전무, 1968년 삼성물산(주) 사장, 1975년 두산농산(주) 사장, 1977~81년 두산그룹 회장, 1981~89년 (주)동양맥주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1991~93년 두산그룹 회장으로 재임했다. 1973년 국제상공회의소 부회장 겸 아시아 극동위원회 의장, 한국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고, 1978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1981~87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및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사장, 1984~86년 아시아 태평양 상공회의소 연합회 회장, 1985년 한·아랍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80년부터 환경보존협회 회장을 맡았고 1994~96년 환경보존협회 명예회장을 지냈으며, 전국경제인연합회 원로 자문단으로 있었다. 금탑산업훈장, 은탑산업훈장, 우수경영자상, 한국의 경영자상, 골드머큐리 개인상, 독일십자훈장 등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11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서 모나리자 도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 [Monarisa]는 신비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모델은 누구인지, 정확한 제작 시기는 언제인지, 미소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 각종 미스터리에 휩싸여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빈치의 자화상, 매춘부 또는 임신부를 그린 작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모두 추정일 뿐이다.
또한 도난 사건으로도 유명한데 1911년 8월 21일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휴관일 아침 한 청년이 전시실 벽에 걸린 ‘모나리자’를 떼어낸 뒤 태연히 걸어 나갔다.
경비원들은 박물관 직원이 사진을 찍기 위해 작품을 떼 가는 것으로만 생각했으며 범인은 계단으로 숨어들어 액자를 뜯어내고 그림을 둘둘 말아 옷에 감춘 뒤 박물관을 빠져 나갔다. 범인은 2년 뒤인 1913년 12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경찰에 붙잡혔는데 20대의 이탈리아 화가 페루지아였다. 페루지아는 모나리자가 탄생지 이탈리아에 있지않고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에 격분해 그림을 훔쳤다고 강변했지만, 사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왕 프랑수아1세에게 돈을 받고 팔아 넘긴 그림이다.
우여곡절 끝에 ‘모나리자’는 피렌체 로마 밀라노에서 전시되었고 1914년 1월 루브르박물관으로 돌아갔다. 그 후 ‘모나리자’가 해외로 나들이한 것은 단 두 번으로 1963년 미국 워싱턴과 뉴욕에서, 1974년 일본 도쿄에서 전시됐다.
도쿄 전시 때엔 도난에 대비해 장갑차가 수송차량을 경호했으며 워낙 많은 인파가 몰리다보니 1인당 관람 시간을 16초로 제한하기도 했다. bbs.dreamwiz.com /Google
[1909년] 동방유량 설립자 신덕균(申德均) 출생
1909. 8. 21 경남 창원~1999. 1. 22 부산.
식용유를 한국에 처음 도입했다. 1933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수료했다. 1940년 부산합동정미(주)를 설립하면서 사업을 시작한 이후, 1947년 동방흥업(주), 1957년 고려산업(주), 1966년 식용유 생산 및 판매업체인 동방유량(주) 등을 설립했다. 1951년에는 농림부 중앙농림위원회 위원과 양정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3년 대한수산중앙회 회장을 역임한 이후, 1957년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및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60년 곡물협회 회장, 1966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회장, 1966~89년 동방유량(주) 사장 및 회장 등을 지냈다. 1977년부터 전경련 고문으로 있었고, 1989년부터는 동방유량(주) 명예회장, 1996년부터 고려산업 명예회장, 신동방(구 동방유량) 명예회장으로 있었다. 수상 및 서훈으로는 국무총리상·석탑산업훈장 등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858년] 링컨-더글러스 논쟁 시작
← 미국 일리노이 주 딕슨에 있는 링컨 기념 주립기념비
1858년 8월 21일 에이브러햄 링컨과 스티븐 A. 더글러스가 노예제 확대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854년 더글러스는 북위 36°30′ 이북 준주의 노예제 금지조치를 해제하고, 대신 ‘주민주권’의 원칙을 적용하는 내용의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제안했다. 이 법안의 요점은 노예제의 채택 여부를 해당 준주의 주민들이 결정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되자 노예제를 확대하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화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1857년 대법원에서 미국 의회나 준주의 입법기관은 준주에서 노예제를 배제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드레드 스콧 판결)함으로써 양쪽의 주장은 모두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가 1858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인 더글러스와 공화당 후보 링컨이 맞붙으면서 노예제 확대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다시 부각되었다. 링컨은 이 문제를 놓고 더글러스에게 토론을 제의했다. 토론은 8월 21일~10월 15일 일리노이 주의 7개 선거구에서 각각 3시간씩 모두 7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토론 결과 더글러스는 남부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잃었다. 그러나 선거에서는 더글러스가 링컨을 간신히 물리치고 상원의원에 재선되었다. 한편 2년 뒤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링컨이 더글러스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브리태니커
[1831년] 미국, 터너(Nat Turner)의 노예반란사건 발생
1831년 8월 21일 미국 버지니아 주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서 냇 터너(1800. 10. 2 ~ 1831. 11. 11)가 7명의 노예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터너는 어려서부터 노예제에 대해 강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1820년대 초에 그는 가난한 이웃 농장에 팔려갔으며, 이후 10년 동안 거의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종교에 매달렸다. 자신의 종족을 노예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기까지 했다. 마침내 그는 군청소재지인 예루살렘의 무기창고를 점령하고 신병을 모은 뒤, 디즈멀 대습지로 이동해 백인들을 몰살시킬 계획을 세웠다. 1931년 8월 21일 밤 터너는 추종자들과 예루살렘으로 행진하면서 백인 55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주 민병대가 진압에 나섰으며, 반란군은 예루살렘에 도착도 하기 전에 모두 죽거나 사로잡혔다. 터너는 6주 동안 도망다닌 끝에 붙잡혀 11월 11일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후 흑인들의 소요가 잇달아 일어나자 백인들은 흑인의 교육, 활동과 집회의 자유를 금지하는 더욱 억압적인 법률을 통과시켰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부의 노예제 지지론자들은 더욱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남북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브리태니커
[1821년]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 순교자 김대건(金大建, 1821~1846.9.16) 출생
← '103위 성인상' - 문학진 작 (혜화동성당 소재)
1821년 8월 21일 충청남도 솔뫼에서 김제준과 고 우르술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이후 집안 대대로 천주교를 믿었기 때문에, 증조부가 감옥에서 옥사당할 정도로 가혹한 수난의 길을 겪었다. 박해를 피해 가족들은 흩어져야 했고, 김대건은 7살 때까지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가족들과 함께 경기도 용인의 산골인 미리내 마을로 피신하였다. 당시 용인의 미리내 마을은 박해를 피해서 온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현재도 한국천주교회에서는 미리내마을을 성지로 보고 있다. 아버지 김재준(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김대건은 1836년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인 모방(Maubant)신부의 배려로 서울에서 라틴어 등의 기초적인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수업을 마친 후 김대건은 후에 충청도의 공소(사제가 없는 교회)에서 사목하다가 과로로 순직한 최양업,마카오에서 병으로 별세한 최방제 등과 함께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의 신학 지도를 받았다. 신학생시절 김대건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상당히 성숙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네로황제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았습니다. 집에서 사자를 키우던 어느 그리스도인도 잡혀갔고, 경기장에서 사자와 마주쳤습니다. 사람을 보고 달려들던 사자는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사자는 그리스도인이 키우던 사자였습니다. 자신을 키우던 주인을 보고 조용해진 것입니다. 사자도 제 주인을 알건만, 왜 사람들은 천주님을 못 알아보는 것일까요?
1842년 조선 잠입을 시도한 그는 의주검문소의 검문이 심해서 실패했으며, 마카오의 민중 반란을 피해 청나라로 옮겨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1844년 부제 서품을 받았고, 1845년 8월 17일 천주교 조선교구장(한국 천주교는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로 설정되었다..)인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날씨가 좋지 않아 성공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영국인 선장의 도움을 받아 되돌아가야 했던 실패를 딛고, 그 해 10월 조선에 도착하여 12월까지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사목했으며, 남편과 사별한 후 거지꼴을 면하지 못하던 어머니를 위로했다.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을 돕기 위해 활동하던 김대건 신부는 1846년 6월 15일 경기도 연평도에서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옥중에서 몇몇 대신들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다. 또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라틴어실력을 발휘하여 번역하기도 했다. 그해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당해 순교의 길을 걸었다. 당시 그의 유언은 "천주님,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였다.
순교자 김대건은 그의 목이 군문에 걸리는 수모를 겪었으나, 비밀리에 교우들에 의해 미리내성지로 모셔졌다. 1960년 7월 5일 김대건의 시신은 혜화동의 가톨릭대학교안의 교회에 이장되었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되었으며, 1960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가 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위키
[1798년] 프랑스의 민족주의 역사가 미슐레(Jules Michelet) 출생
← 미슐레, Thomas Couture가 그린 유화(부분), 파리에 있는 Musee Carnavalet 소장
1798년 8월 21일 태어남 / 1874년 죽음
"가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안다. " - 쥘 미슐레
미슐레는 <프랑스사 Histoire de France>(1833~67)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민족주의 역사가이다. 미슐레는 역사 형성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 잠바티스타 비코의 사상에 공감해, 역사를 숙명에 대한 인간 자유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생각은 1830년혁명을 겪으면서 더욱 확고해졌고 이후 <보편사 서문 Introduction al'histoire universelle>(1831)을 비롯한 그의 저술의 밑바탕이 되었다. 미슐레는 역사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과거를 재창조하는 데 있다고 확신하면서, 정치뿐만 아니라 예술·종교·경제 등 과거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을 취합해 생생하게 재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31년 <로마사 Histoire romaine>(2권)를 쓴 후에는 중세사와 근대사에 몰두해 1833~43년에 중세말까지를 기록한 <프랑스사> 제1부 6권을 썼다. 1847~53년에는 집필 순서를 바꾸어 제3부인 <프랑스 혁명사 Histoire de la revolution francaise>(7권)부터 완성했고, 이어서 1855~67년에 르네상스부터 대혁명 직전까지의 제2부 11권을 집필했다. 미슐레가 주장한 역사 재창조는 때로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낭만적인 해석을 낳기도 했는데, 특히 그리스도교와 국왕에 대한 적대감이 심했던 까닭에 이들과 관련된 사건에 있어서는 왜곡된 서술이 발견되기도 한다./브리태니커
[1796년] 미국의 화가, 판화가 듀런드(Durand, Asher B.) 출생
← Asher B. Durand's "Kindred Spirits"
Durand, Asher B(rown), 1796. 8. 21 ~ 1886. 9. 17
1812년 한 판화가의 도제로 들어가, 11년 뒤인 1823년 존 트럼불의 〈독립 선언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이라는 유화를 판화로 제작하여 명성을 얻었다. 1830년대에도 미국 화가들의 그림들(예를 들어 밴 반덜린의 〈아리아드네〉)을 판화로 복제하는 일을 계속했다. 증정본이나 연감 등에 삽화를 넣기도 했으며 당시 유명했던 미국인 72명의 초상화를 판화로 제작하여 인기를 얻었다. 형인 사이러스 듀런드(1787~ 1868)와 함께 은행 지폐를 만드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형은 선 그리는 기계를 발명하여 조폐 기술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동생인 그가 '연방 인쇄국'을 위해 제작한 인쇄용 작품은 미국 지폐 디자인의 전통과 지폐를 장식하는 그림 도안을 확립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835년부터 듀런드는 주로 초상화에 전념하여 미국 대통령 몇 명과 정계와 사회의 저명인사들을 그렸다. 1840~41년에는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기 위해 유럽을 방문했고, 미국으로 돌아와서 정밀한 기법으로 허드슨 강 지역, 아디론댁 산맥, 뉴잉글랜드 지방 등의 낭만적인 풍경을 그렸다. 그는 야외에서 직접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 최초의 미국인들 중 하나로 꼽힌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마음이 맞는 사람들 Kindred Spirits〉(1849, 뉴욕 공공도서관 소장)은 정밀하고 사실적인 캣스킬 숲을 배경으로 그의 친구인 풍경화가 토머스 콜과 시인인 윌리엄 쿨런 브라이언트가 서 있는 그림이다.
그는 '국립 디자인 학회'(1826) 창립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1845~61년에는 회장을 역임했다. /브리태니커
[1741년] 헨델 오라토리오 '메시아' 작곡
← 헨델
메사이아 또는 구세주라고도 한다. 헨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고금(古今)의 종교음악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대본은 성서를 바탕으로 영어로 씌어졌으며, <예언과 탄생> <수난과 속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3부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서사적 묘사라기보다도 전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존재를 강력히 호소한 작품이다. 알기 쉬운 웅장한 표현 속에 생생한 종교적 감동이 잘 나타나 있다.
1741년 불과 3주일 만에 완성되어, 이듬해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자선행사로 초연되어 절찬을 받았다. 헨델이 죽기 전부터 자주 자선단체를 위하여 상연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세계 각처에서 자선연주회를 개최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다.
제2부의 마지막 곡 <알렐루야 코러스>가 특히 유명하며 런던 초연 때는 조지 2세가 너무나도 감동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선 고사(古事)에 따라 오늘날도 그 대목에서 청중이 일어서는 습관이 있다.
[1567년] 로마 카톨릭교회 제네바 주교, 교회박사 프란키스쿠스(Franciscus : St. Francois de Sales) 출생
← Saint Francis of Sales
1567 ~ 1622. 12. 28
칼뱅주의에 반대해 투쟁했고, 방문수녀회(Visitation Nuns)를 공동 설립했다. 고전적인 신앙서적 〈경건생활 입문서 Introduction to a Devout Life〉(제3 결정판, 1609)의 저자로서, 이 책에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오직 사회를 등진 사람들만 영적 완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일에 바쁜 사람들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23년 교황 피우스 11세는 그를 저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포했다.
1580~88년 파리에 있는 예수회 클레르몽대학을 마치고 1591년 이탈리아 파도바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잠시 법률가로 일하다가 종교에 귀의해 1593년 고향 사부아의 제일 큰 도시인 안시에서 사제 임명을 받았다. 이곳에는 종교개혁이 진행되던 1535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제네바 주교구와 수도원들이 옮겨와 있었다. 프란키스쿠스는 샤블레에서 열정적인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이곳은 과거에 사부아에서 떨어져 나가 칼뱅주의자들의 지역이 되었다가 열정적인 가톨릭교도인 사부아 공작 샤를 에마누엘이 되찾은 지역이었다. 프란키스쿠스는 공작의 보호 아래 대부분의 샤블레 주민들을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1602년 12월 8일 제네바 주교로 축성되었다.
1610년 샹탈의 성 프란키스쿠스와 함께 성모 마리아 방문수녀회를 세웠는데, 이 수녀회는 중요한 교육 수녀회가 되었다. 1661년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최초로 엄숙하게 복자로 추증받았다. 1877년 프랑스어를 사용한 저자로서는 처음으로 교회박사로 공포되었다. 저서에는 신앙서적 외에도 칼뱅주의를 반박하는 논쟁서, 편지, 설교, 교구 행정에 관한 문서들이 있다. 1925~29년 A. J. M.해먼의 〈살레의 성 프란키스쿠스의 생애 Life of St. Francis de Sales〉(2권)가 출판되었고, 그뒤를 이어 1964년 M.헨리 코버니어의 〈살레의 프란키스쿠스와 그의 친구들 Francis de Sales and His Friends〉이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838년] 프랑스 태생의 독일 시인, 식물학자 샤미소(Chamisso, Adelbert von, 1781.1.30~1838) 사망
← 샤미소, D. Weiss가 그린 드로잉을 보고 X. Steifensand가 제작한 동판화(부분)
프랑스혁명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일가가 독일로 망명하였다. 1801년 프로이센 군인이 되었다가 곧 제대하고, 처음에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다가 1803년부터 독일어로 쓰기 시작하였으며, 1812∼1815년에는 베를린대학에서 의학 ·식물학을 연구하였다. 1813년에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불행한 사나이의 이야기 《페터 슐레밀의 이상한 이야기 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를 써서 문명을 날렸다.
1815년에는 러시아 세계탐험대에 식물학자로서 참가하여 캄차카반도까지 탐험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1818년에 베를린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한편, 베를린 식물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본령은 서정시와 담시(譚詩)로, 시집 《여자의 사랑과 생애 Frauenliebe und Leben》(1830)는 후기 낭만파 색채에 초기 사실주의의 경향이 가미되어 묘사는 회화적이고 언어는 음악적인 것이 특징이었다. 이것은 뒤에 R.A.슈만이 작곡하여 유명해졌다. /naver
[1789년] 프랑스의 수학자 코시(Cauchy, Augustin-Louis, 1789~1857.5.23) 출생
파리 출생. 높은 교양을 지닌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고 16세 때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에 토목기사가 되어 셰르부르의 축항 공사에 종사하면서 수학을 연구하였다. 1815년 수학상의 업적이 인정되어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가 되었고, 이듬해에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며, 정치적으로는 발자크와 같은 정통 왕당파(王黨派)였으며, 왕당원으로서의 지조를 지켜 나갔다. 왕당파로서의 지조 때문에 1830년의 7월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 내에서는 일체의 공직 취임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피신하였으며, 여기서 그를 위해 창설된 새로운 강좌를 맡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 후 5년간을 프라하에서 지내다가 1838년 파리로 돌아왔다.
1848년 나폴레옹 3세가 즉위한 뒤에야 공직에의 취임이 허용되어 소르본대학 교수가 되어 평생 이 교수직에 있었다. 주요업적으로 복소변수함수론(複素變數函數論)과 해석학에서의 엄밀성을 주장한 것을 들 수 있다. 18세기에 발견된 미적분학(微積分學)은 달랑베르 시대로부터 코시와 같은 시대 사람인 가우스, 아벨, 볼차노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운 엄밀성의 시대로 바뀌고 있었다. 이것의 대표적 예를, 적분의 존재를 증명한 ‘존재증명’에서 볼 수 있다.
복소변수함수론은 코시에 의해 유체역학과 공기역학에서의 유용한 도구로부터 수학연구의 독립된 분야가 되었다. 1814년 이후로는 끊임없이 함수론에 관하여 논문을 썼으며, 1825년 유수(留數)를 지니고 있는 코시의 적분정리를 발표하였다. 파리의 과학아카데미가 학회지 《Comptes Rendus》에 보내오는 그의 논문의 길이를 제한해야 할 정도로 그의 연구는 다방면에 걸쳐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그의 연구에서, 빛의 이론과 역학에 대한 공헌도 있으며, 탄성(彈性)의 수학적 이론을 L.M.H.나비에와 함께 기초작업을 이루어 놓은 점 또한 중요한 것이다.
《해석학 교정》에서는 현재 교과서에서 쓰이고 있는 미적분의 기초를 남겼으며, 1838년에는 미분방정식의 풀이에 관하여 최초의 존재증명을 하였다. 이 밖에 그의 모든 연구는 《œuvres compl tes d’Augustin Cauchy》(27권, 1882∼1901)에 수록되어 있다. /naver
[1545년] 을사사화 발생(乙巳士禍, 대소윤의 싸움)
조선 전기 중앙관직에 진출했던 정치세력을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는데, 이들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은 주로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사화는 사림파들이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들을 가리키며 '사림의 화'의 준말이다. 4대사화에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가 있다.
사림파는 기묘사화 이후 중앙정치세력이 거의 없었는데, 1538년에 김안로 일파가 실각한 뒤 서서히 등용되어 요직에 배치되고 1543년에는 김인후가 향약시행을 주장하기까지 이르렀다. 1544년에는 조광조의 신원문제가 거론되어 이를 계기로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재연되기 시작했으며, 인종이 즉위한 지 1년도 못 되어 병사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정치적 갈등이 빚어졌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을,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이미 중종대에 외척 김안로를 축출하면서 다른 쪽 외척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외척이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것은 예고한 바나 마찬가지였다. 문정왕후는 그의 족질을 시켜 김안로가 왕후를 폐하려 한다는 밀고를 하여 김안로를 제거했다.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공신계가 정권을 장악했지만 외척들이 여기에 가세하여 단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뿐만 아니라 보다 복잡한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중종의 제1계비 윤씨가 낳은 원자(元子)가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던 터에 제2계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뒤의 명종)을 낳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 형제는 세자를 교체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이에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은 세자를 보호하려 했고 두 외척간에 왕위승계를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져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로·윤원형 형제를 소윤(小尹)이라 했다. 대윤과 소윤의 알력 가운데 중종이 죽자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 중종 계비 문정왕후의 태릉(1565), 사적 제201호, 서울 노원구 공릉동
인종은 즉위하여 중종 말년부터 진출해 있던 사림파를 중용했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12세의 경원대군이 즉위했다. 모후인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은 윤원형이 이기(李芑), 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 등과 모의하여 명종의 보위를 굳힌다는 미명 아래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윤원형은 핵심 동조 세력과 결탁하여 형조판서 윤임,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영의정 유관(柳灌) 등을 양사(兩司)를 통해 제거하려 했다. 당시 양사는 사림파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이를 반대하자 이기 등은 중신회의를 통하여 위 3명의 죄상을 아뢰는 형식을 취했다. 여기에서 일단 윤임은 유배, 유인숙은 파직, 유관은 체차(遞差)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홍문관을 비롯하여 양사의 사림파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항의하자 이기 등은 3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양사의 관원을 파직시켰다. 또 위의 3명을 역모로 몰아 귀양보냈다가 죽이고, 이어 종친인 계림군도 관련되었다 하여 죽였으며 윤임을 동조하던 사림 10여 명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당시 사림파는 왕위계승 문제에서 대체로 인종을 옹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을사사화에서 큰 화를 당했다. 을사사화는 척신인 윤원형이 권신인 이기와 결탁하여 윤임 및 사림파에게 타격을 가한 정치보복이었다. 을사사화를 통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이기 등은 명종의 보위를 굳혔다는 명분으로 공신책록을 서둘러 28명을 일단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했다. 따라서 명종 초년에는 이들 공신집단이 강력한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을사사화의 경우 싸움은 외척간에 벌어졌으나 사림파도 다수 제거되었다. 사화는 대개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어지는 지배계급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부분적으로 정치론에서 차이가 나거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엇갈려 일어난 사건이었다. 비록 사림파가 화를 당한 것이나 을사사화는 외척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던 정치적 갈등이었다.
그 밖에
1986년 구 중앙청 청사를 개조한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1985년 한국, 국제이동위성기구 가입
1982년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레바논 철수 개시
1981년 경제기획원,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980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전두환 장군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정
1976년 청계천 하수처리장 준공
1970년 추풍령서 고속버스 추락. 25명 사망
1964년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 사망
1949년 서독 점령군, 군정 종식
1943년 덴마크의 사실주의 작가 폰토피단 사망 - 1917년 노벨문학상 수상
1937년 중국-소련 불가침조약 조인
1912년 총포화약류 취췌(取締)령 공포
1909년 도수(屠獸)규제 반포
1903년 일본 정부, 한만(韓滿)보호 기본타협안을 러시아 정부에 제시
1875년 일본 군함 강화도 등에 침입, 약탈, 살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