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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뒤틀림의 배경(1)-이원론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어떻게 왜곡되고 뒤틀렸는지를 살펴봤습니다. 이제부터는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왜곡되고 뒤틀리게 된 근본 원인과 배경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합니다. 뒤틀림의 실상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뒤틀림의 근본 원인과 배경을 알아야 뒤틀림에서 해방될 수 있겠기에 이 작업을 하려합니다. 함께 살펴볼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이원론, 2) 구원 욕망과 자아, 3) 종교화의 유혹과 영적인 무지입니다.
먼저 플라톤의 이원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1) 일찍이 교회 안에 들어와 기독교화 했다는 점, 2) 기독교 신학과 신앙 속에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 3)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해악을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 4) 하나님의 구원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왜곡시키는 주범이라는 점, 5) 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하면 진정한 말씀의 세계, 진정한 구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제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앞에서도 잠간 언급했습니다만, 이원론(dualism)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세계가 근본적으로 분리된 두 개의 범주(category)로 나뉘어 있다고 보는 세계관입니다. 예를 들면,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영혼과 육체, 선과 악 등 존재하는 실재를 두개의 근본적인 범주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상체계입니다. 이원론을 철학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플라톤(BC428-348년)입니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이 세계(현상계)는 매우 불안정하고 일시적이며,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이 세계는 참된 세계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불변의 세계, 초감각의 세계가 참된 세계요 원형의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은 그 원형의 세계를 이데아(Idea)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은 세계가 두 개의 범주인 이데아와 현상계로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적 세계인 이데아는 참된 세계요 원형의 세계로서 상층부에 해당하고, 물질적 세계인 현상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세계로서 하층부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데아(형상) ⇒ 하늘, 영원불변, 초월, 초감각, 보편성, 정신 ⇒ 참된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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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계(질료) ⇒ 땅, 변화, 경험적 현실, 감각, 개별성, 물질 ⇒ 거짓된 실재
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플라톤은 이데아와 현상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대립각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범주 중에 이데아는 참되고 궁극적인 실재인 반면, 현상계는 이데아에서 파생된 실재이거나 환영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형상이 참이요 질료는 거짓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몸에 대해서도 영혼은 신성하고 불멸하고 불변하며 지성적인 반면, 몸은 변화무쌍하고 잡다하고 소멸하고 비지성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심지어 몸은 영혼을 더럽히고 영혼의 능력을 가로막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질서 또한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했습니다. 신 · 종교 · 정신 · 영혼 · 사후세계 · 천당 · 천사 · 지혜 · 영원한 가치 등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상층부에 속하는 것으로, 과학기술 · 물질 · 직업 · 정치경제적 활동 · 육체 · 지식 · 노동 등은 속되고 세속적인 하층부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했습니다.
플라톤은 이렇게 세계와 삶을 환원될 수 없는 두 범주로 구분하고는 하층부에서 상층부로의 상승을 끊임없이 추구했습니다. 상층부인 이데아만이 참된 실재라고 보았기 때문에 물질세계에 속한 것들과 육체의 정욕 같은 것들을 경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층부인 현상계를 떠나 상층부인 이데아로의 상승을 추구하는 것만이 참된 삶이요 영혼을 위한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 설명을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그리 낯설지 않지요? 낯설기보다는 오히려 친숙한 느낌이 들지요? 어떤 분들은 요한과 바울의 말씀이 생각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23).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요17:1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3:1-3).
정말 놀랍도록 유사하지 않습니까? 요한이나 바울이 플라톤보다 더 플라톤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예, 일단은 그렇게 보입니다. 요한이나 바울의 말이 플라톤보다도 더 이원론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깊이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이원론은 빛과 어둠 · 하늘과 땅 · 영혼과 육체 · 선과 악 등이 뒤섞여 있는 세계의 실상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는 면에서 현실적합성이 매우 탁월합니다. 또 빛과 어둠 · 하늘과 땅 · 영혼과 육체 · 선과 악 등이 뒤섞여 있는 세계의 현실을 극복하거나 통합하기 위해 고민하거나 애쓰지 않아도 되게 해준다는 면에서 매우 편리합니다. 하지만 이원론은 세상을 서로 다른 두 개의 범주로 구분하기 때문에 삶을 통전적으로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다는 면에서 한계가 있고, 전혀 다른 두 개의 관점을 갖고 살게 하는 모순을 낳는다는 면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원론의 모든 걸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원론의 탁월함이나 편리성은 제쳐놓고 한계와 약점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원론은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를 환원 불가능한 두 개의 범주로 나눌 뿐 아니라 두 범주가 서로 대립한다고 보기 때문에 성스러운 것에 속한 사람은 세속적인 것을 버려야 하고, 세속적인 것에 속한 사람은 성스러운 것에 속할 수 없게 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은 육체를 미워하게 하고, 육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영혼을 포기하게 합니다. 즉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통합된 삶을 살 수 없게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을 모순에 빠뜨립니다. 인간의 삶이란 본래 두 범주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밥은 외면한 채 정신세계만 쫓을 수 없고, 영혼의 소리는 듣지 않고 육체의 쾌락만 쫓을 수 없으며, 땅에 발을 딛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며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밥도 먹고 정신적인 활동도 해야 합니다. 육체의 필요도 채우고 영혼의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땅에 두 발을 딛고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과 소통하는 인간적인 삶,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원론은 이 엄정한 진실을 부정합니다. 너무도 쉽게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가 대립한다고 선을 그어버립니다. 영혼이 육체를 멸시해야 참된 삶을 살 수 있다고 단정해버립니다. 이것은 성경의 일원론적 세계관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본 것처럼 요한이나 바울의 말 중에는 이원론처럼 생각되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결코 이원론자가 아닙니다.
바울의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그(예수)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5-20).
요한의 말도 잘 들어보십시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3:16).
자, 요한과 바울의 이 말에서 이원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헬라 세계의 이원론적 체계를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저들뿐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이원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가 대립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고 말합니다. 아니,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원론은 정반대로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분리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원론과 성경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이원론을 따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신과 물질이 따로 놀고, 영혼과 육체가 따로 놀지 않겠습니까? 영혼은 하늘을 따르고, 몸은 땅을 따르는 이중 행보가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중인격자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 밖에서는 세상의 방식을 추종하며 사는 일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원론은 전인으로서의 통합된 삶을 살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자아를 분열시키고 분열된 삶을 살게 합니다. 세계와 삶을 반 쪼가리로 두 동강내고, 삶을 모순과 분열의 늪에 빠뜨립니다. 아무런 내적 갈등이나 고민 없이 마음으로는 하늘을 쫓고 몸으로는 땅을 좇으며 살 수 있게 합니다. 신앙적으로는 하늘의 법을 따르고, 생활적으로는 세상의 법을 따르며 살 수 있게 합니다.
이와 같은 이원론의 오류를 토끼를 통해 설명해보겠습니다. 이원론은 세상을 흑토끼와 백토끼로 확실하게 구분하고, 흑토끼는 열등하고 무상하며 백토끼는 우월하고 영원하니 백토끼를 좇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백토끼만 좇으며 사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숨 쉬고 두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은 어디까지나 흑토끼이기 때문에 흑토끼를 좇지 않고 백토끼만 좇으며 사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이원론은 끝까지 흑토끼를 좇으면 안 된다고 고집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제로는 흑토끼를 좇으면서도 흑토끼를 좇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를 속이게 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는 흑토끼를 열심히 좇으면서도 자기는 지금 백토끼를 좇고 있다고 강변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이원론은 언뜻 세계를 매우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현실의 모순 구조를 지나치게 안이한 방식, 즉 이분법적으로 손쉽게 설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현실의 모순 구조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추론해낸 허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반 쪼가리로 두 동강내고, 하나님이 선물한 삶을 모순과 분열에 빠뜨리는 반성경적인 이분법적 사상에 불과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과 눈에 보이는 땅으로 구성된 세계의 현실을 정직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심히 부족한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반성경적이고 부족한 사상이 교회 속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오게 된 내력은 이렇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과 유대교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그의 열두 제자들을 통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태동할 당시의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은 플라톤의 이원론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유대인 필로가 이미 유대주의와 플라톤주의를 융합하려 시도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는 처음부터 플라톤 철학을 직면해야 했고, 플라톤 철학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해야 했습니다. 특히 그리스 사상(플라톤의 이원론 체계의 철학) 교육을 받은 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기독교와 이원론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됐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순교자라 불리는 유스티누스(AD100-165년)입니다. 그는 이교도로 자라면서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 철학을 공부한 뒤 132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는 기독교로 회심한 후 기독교와 플라톤 철학이 공히 초월적이고 불변하는 하나님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리스 철학을 성경의 계시에 긍정적으로 접목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기독교 철학이야말로 진정한 철학, 즉 참된 진리라고 생각하고 기독교를 철학적 방식으로 변증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후 3세기 무렵에는 클레멘트(155-220년)와 오리겐(185-254년) 같은 알렉산드리아 출신 교부들이 신약 성경을 플라톤의 사상적 체계로 해석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이 기독교 신학을 위한 준비로서의 가치가 있다고까지 보았습니다.
물론 정반대의 입장도 있었습니다. 육신을 영혼의 감옥으로 여기는 그리스 철학은 기독교의 핵심인 성육신 사건이나 예수님의 부활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삼위일체 교리와도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부 터툴리안(160-220년) 같은 이는 “예루살렘과 아테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말하며 플라톤 철학을 배격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이원론이 기독교화 되고, 기독교가 이원론화 되는 혼합과 순응의 과정이 진행됐습니다.
그러다가 초대교회 신학을 집대성하고 중세교회 신학의 초석을 놓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에 와서는 이원론이 신학적 정당성을 얻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의 이원론을 전적으로 수납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플라톤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아무런 외적인 도움 없이 자신의 마음의 이성적인 상승에 의해서 이데아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본다고 말이지요(피터 브라운.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145쪽). 하지만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의 이원론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예가 바로 신국과 지상 나라를 대립시킨 [신국론]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신플라톤주의의 공간적 이원론을 시간적 이원론으로 대체했습니다. 그는 신의 나라와 지상 나라가 이 땅에서는 뒤섞여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나라라고 구분하였고, 신의 나라는 영원하고 지상의 나라는 반드시 멸망한다고 보았습니다. 신의 나라는 신의 질서를 근본으로 하는 세계로서 교회가 이에 속하고, 지상의 나라는 신의 뜻을 거역하는 세계로서 이교도들이 이에 속한다고 보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사상은 중세를 관통하면서 교회와 세속국가 사이에 갈등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1077년 1월 28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관용을 구한 사건)사건에서 확인하듯 교회는 언제나 세속 국가에 대한 우위성을 주장했습니다. 이원론 속에 있는 위계질서(hierarchy)를 그대로 고집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性)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성행위가 결혼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욕정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것이고, 성행위를 어두움 속에서 은밀하게 행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일과 직업에 대해서도 농사, 군대, 법률, 항해, 무역 같은 것은 “바벨론의 강들”이라고 야유하면서, 그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며, 그런 직업들 속에서는 기독교적인 부르심을 참되게 수행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리차드 미들톤. 브라이안 왈쉬. 세상의 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비전 6장). 이 모두가 플라톤의 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한데서 나온 잔재들입니다
하여튼 이런저런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이원론은 점차 기독교화 되었고, 기독교 또한 점차 이원론화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이 기독교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에 불과했지만 교회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기독교 복음의 개념을 규정하게 되면서 점차 교회의 신학을 지배하게 되었고, 기독교의 신학과 사상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아예 기독교적 전통으로 굳게 자리 잡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21세기 극동의 한국교회에까지 이원론의 그늘이 길게 드리워져 있을 만큼.
물론 외형적으로 보면 교회가 서구의 중세 천 년을 지배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교회의 신학을 지배한 것은 오히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예수가 아니라.
잠시 한국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이원론의 흔적들을 열거해볼까요? 다 아시는 것처럼 대다수의 성도들은 아직도 성직과 세속의 직업을 구분하고, 교회 일과 세상 일을 구분하는 성속 이원론에 빠져 있습니다. 기도, 성경공부, 예배, 전도, 선교, 교회 봉사는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는 주님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기왕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어둠의 영역이니까 세상을 위해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건한 성도들은 세상의 문화를 정죄하거나 거부합니다. 아니면 최소한 방치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세상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로 나아갑니다. 구원에 대해서도 ‘육체는 멸망하고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이원론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육체는 멸망하고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이원론적 구원관을 믿고 따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이원론의 안경을 쓰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튼 한국교회 안에는 이원론의 그늘이 생각보다 깊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 의사는 많으나 기독교적인 의사는 드뭅니다. 그리스도인 사업가는 많으나 기독교적인 사업가는 드뭅니다. 그리스도인 교사는 많으나 기독교적인 교사는 드뭅니다. 그리스도인 정치가는 많으나 기독교적인 정치가는 드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목사는 많으나 기독교적인 목사는 드뭅니다. 교회 또한 겉모습은 예수로 치장되어 있으나 속에는 예수 아닌 것들로 가득하고요.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이겁니다. 성경의 세계관과 전혀 다른 플라톤의 이원론이 하나님의 구원을 찌그러뜨리고 왜곡하고 짓밟는 첫 번째 주범이라는 것. 기독교의 모든 왜곡과 뒤틀림의 배후에 이원론이 있다는 것. 진실로 그렇습니다. 이원론은 세계와 삶을 반 쪼가리로 두 동강내고, 삶을 모순과 분열에 빠뜨리는 매우 해로운 사상입니다. 두 주인을 섬기게 하는 반성경적 사상입니다(마6:24). 기독교의 근본 토대와 기둥을 무너뜨리는 반복음적 사상입니다.
정병선목사(말씀샘교회)
첫댓글 한국교회는 로마의 팔라틴언덕에 서기를 원하면서 갈보리언덕을 외치는 이중적 삶에 사로잡혔 있습니다.
한신대 김경재 교수님께서 이 글을 읽으셨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