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고구려인들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간 세월이 너무나 흘러버렸고 또 남아 있는 자료마저 빈약하기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은 체질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문화 기반 위해서 생활을 했는가? 그리고 그들의 원류는 어디에서 온 누구이며 고구려가 멸망을 한 후 그 많던 고구려인들은 어찌되었는가? 또 그들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오늘날 어디에서 살고 있는 누구일까?
이 글은 위와 같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장구한 역사의 시간 속에서도 인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 가시적인 흔적들과 고대의 기록, 그리고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국내외의 현장들을 추적하며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기존의 학설과는 가급적 다른 시각, 곧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을 시도 한 것이다.
1. 체질인류학적으로 본 고구려인들
1-1. 고구려인의 주류는 남 서방 민족
결론부터 말하면, 고구려의 극히 일부계층은 북방민족이었을 개연성은 있다. 그러나 일반 기층민중은 동북아시아의 주변민족과는 너무 이질적인 존재였다. 고구려 민족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인종 집단은 소아시아에서 인도 등지의 남서쪽으로부터 남부 중국을 경유해서 간헐적으로 한반도와 일본의 구주 그리고 중국의 요령성 등지로 이동을 하여 온 인종 집단. 지금으로부터 70-60만년, 55-45만년, 35-32만년, 24-21만년, 18-12만년, 7-7.5만년, 5.8-3.8만년, 3.2-2.8만 년 사이에는 한반도와 남부 중국, 그리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연륙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의 조상이라고 추정되는 집단은 육지로 이동을 하여왔거나 그렇지 않으면 북상하는 쿠로시오(黑潮) 난류를 이용해서 한반도, 구주, 요령성 등지의 해안지방으로 상륙을 했을 것이다.
그 이후 청동기 시대 남하를 한 북방민족과 섞이고, 또 고구려 건국 이후 수차례에 걸쳐 난을 피해 피난을 왔거나, 수당 전쟁 때 포로가 되어 돌아가지 못했던 중국의 한족(漢族)들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인들에게 동화가 되어 고구려 민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반도에서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70-60만 년 전, 그들은 약 20만 년 전부터 불을 사용하기 시작 했고, 간단한 어휘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했다. 구석기 시대에 사용을 했다고 추측이 되는 ‘불’ ‘나’ ‘너’ ‘하나’ ‘둘‘ 셋’ ‘해’ ‘바다’와 같은 우리말의 원시어휘는 대부분 소아시아및 인도 지방과 연결이 되고, 어법(語法)도 팔리어, 드라비다어, 아샘어, 미얀마어 등과 가장 유사성을 보이는 것을 보면 한반도에서 살았던 최초의 인간집단은 한반도의 남서방과 관련이 있다고 상정을 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고고학지도를 바꾸게 했던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전곡리의 한탄강 주변에서 발굴이 된 주먹도끼, 이 주먹도끼는 구석기 시대 주로 서양인들이 사용을 했던 것인데 어찌해서 멀고 먼 동북아시아의 한반도에서 발견이 되는 것일까? 그러면 한반도에서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서양인종이였고 주변의 이질적인 민족들에 둘러싸여 한 점 섬처럼 살았단 말인가?
고대 우리민족의 구성원 중의 하나였던 일본의 아이누족도 지금으로부터 3-2만 년 전에 건너 온 서양인종, 그러나 더욱 확실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 구석기 말 무렵 고구려 지역인 평안도에서 발견이 된 고대인의 인골이다. 그들은 승리산과 만달인으로 명명이 되었는데, 놀랍게도 서양인과 유사한 장두형(長頭型)의 두개골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하여 가지 않았다면(북한 역사학계에서는 현재 우리민족의 시조였다고 함) 그들이 바로 고구려인들의 민족적 시초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이후 청동기 시대에 이르면, 고구려 지역에서 비로소 중두형의 두개골이 나타난다. 이것은 북방민족의 남하를 추측케 해주고, 오늘날 우리민족이 단두형이 된 것은 청동기 시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많은 수의 동남아인들과의 접촉, 그리고 고려 말 124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몽고의 직간접 지배시기에 발생을 했던 엄청난 규모의 강제적인 혼혈의 결과 일 수도 있다.
고대사서인 중국의 25사서 가운데서 고구려인들의 체질에 관한 기록은 없다. 오직 고구려인들은 힘이 세고 용맹스러웠다고 기술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고구려, 백제, 부여 사람들은 고구려인들과 같은 종족이라고 했는데, 후한서 부여 조에는,
[그 사람들은 추하고 크고 씩씩하고 용맹스럽다.]
또 같은 후한서의 한(韓)전에 의하면,
[사람들의 모양은 모두 키가 크고 몸이 장대하며 머리털이 아름답다.]
고구려인들은 부여나 훗날 백제인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한족처럼 체격이 커서 주변의 중국인이나 북방민족과 차별화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의 체격이 그처럼 컸던 것은 혹시나 그때까지 서방적인 유전 요소가 남아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1-2. 아샘인들도 속은 필자의 모습
보다 확실한 것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인의 모습이다. 지배계층의 상당수는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중국이나 북방민족이어서 그렇다는 일방적인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고대 수메르인들도 동양인의 모습이었고, 동남아와 동부 인도인들 가운데는 우리와 유사한 모습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이 소위 남부 몽골로이드계통의 사람들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필자가 우리문화 탐험 차 인도의 아샘 지역에 몰래 잠입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곳은 내전중이어서 외국인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가 되고 있었다. 결국 숙박계를 쓰는 과정에서 밀입국 사실이 들통이 나서 경찰에 연행이 되었다. 그 때 인도 경찰이 하는 말인 즉,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잠입할 수가 있었지? 오호라! 당신 얼굴 모습이 우리 아샘 사람들과 똑같이 생겼구먼!’
고구려인들이 남부 몽골로이드계통의 사람들이였을 가능성을 부인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고분 벽화에는 서양인의 얼굴들도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예는 각저총, 우리의 일부 학계에서는 큰 코를 가진 서양인 얼굴의 고구려인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지 각저총의 씨름꾼들이 시범경기를 하고 있는 서양인들이라고 설명을 했지만, 그것은 상식을 초월한 비약적인 발상이다.
비행기도 여객선도 없던 그 시절에 서양인들이 아시아 끝머리 한반도에 와서 씨름경기를 하였다니! 씨름꾼의 정체는 주먹도끼를 사용했고 장두형 머리를 가지고 있던 조상들의 체질적인 흔적을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일부 토착 고구려인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우리의 역사에서 우리의 체질이 가장 많이 변했던 시기는 124년이란 장기간의 몽고지배 였다. 그 때, 우리는 그들의 언어와 민속을 차용했고, 15만 명이 넘는 처녀들이 강제로 끌려가 그들의 자식을 낳았는가 하면 국내에서도 엄청난 혼혈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학계의 일부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즐문토기, 고구려 시대의 적석묘, 그리고 알타이어족 설을 앞세워 우리민족의 시원이 북방이었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나, 북방의 것은 제작방법이 우리의 것하고 다를 뿐만 아니라 설혹 같다고 하여도 고고학적 연대가 우리의 것이 빨라 오히려 우리의 것이 북방으로 전파되었다고 생각을 하여야 한다. 또 알타이어족 설은 허구라는 주장도 만만찮은 실정이다. 거기다가 가장 오래된 청동기는 한반도 남단의 전남 영암의 것이고, 최근에는 제주도의 남단에서 인간의 화석까지 발견이 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국내의 일부 학자들이 고증이 빈약한데도 우리민족의 북방 유목민족 설을 주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북방민족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남서방 민족이 인더스와 간지스의 문명을 창출하고, 또 메소포타미야 문화를 일궜을 당시 북방민족은 똥은 방에서 누고 오줌으로 세수를 하는 등 지극히 야만적이었던 것이다. 고대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인들은 가장 깨끗했던 반면, 숙신 등의 북방민족은 가장 더럽게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조상이었다면 필자는 하필이면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결코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다음, 고구려인들은 과연 누구였는가 문화인류학적 측면에서 검증을 해보자.
<사진>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서 서양인 닮은 얼굴들
2. 비로소 제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는 고구려인들
2-1 탄생설화
고구려인들의 탄생설화는 중국인이나 중국인으로 동화가 된 북방민족들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먼저 고구려민족의 탄생 설화의 특징을 살펴보자.
고구려인들은 자기네들의 시조인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를, 그리고 자기네들이 갈라져 나왔다는 부여의 탄생설화는 천손설화의 주인공들이다. 이와 같은 난생설화와 천손설화는 모두 남서방의 것과 같은 맥락의 것으로 북방민족의 동물설화(사슴, 이리 등)이나 변변한 탄생설화조차 없는 중국인들과는 전혀 이질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반면, 고구려의 와 부여의 설화는 천손 설화의 주인공인 고조선의 환웅천왕, 그리고 신라와 가락국의 난생설화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래도 고구려인의 뿌리가 중국인이고 중국인과 연결이 있는 북방민족이었는가?
2-2. 고구려어는 남방어
다음은, 고구려인들이 사용을 했던 언어가 어떤 것이었는지 추적을 해보자. 우리민족은 특별나게도 고대자료가 빈약하다. 아니, 고대 자료가 많았는데도 1,000여 회에 이르는 외세의 침략과 고려 때 김부식 등에 의해서 소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언어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부득이 삼국사기 지리지 등을 토대로 추정을 할뿐이다.
고구려어 가운데서 중세 언어와 연결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약 30%, 인간의 언어는 의외로 빠르게 변한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또 고구려가 멸망한 후 중세기에 이르기 까지 수 백 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감안하면 고구려어는 현대 한국어의 모체가 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필자는 기존의 학설과 시각을 달리해서 지명과 수사를 이용해서 고구려어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고구려의 지명은 대개 ‘부리’, ‘골’, ‘라’로 대표된다. 펴라성(平壤城)은 일명 ‘불이’성이라고도 불렀으며, 또 고구려를 이은 발해에도 ‘부리’라는 지명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지명은 백제의 ‘소부리(부여)’, 신라의 서라벌(경주)‘과 동원어로서 삼국이 같은 민족이었음을 나타내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골’과 ‘라’도 동북아시아에서는 오직 우리민족만이 사용을 했던 고유한 지명이었는데, 특히 ‘라’는 당시 우리민족의 태양숭배 신앙과도 연결이 있는 명칭으로 펴라, 새라(신라), 구다라(백제), 탐라, 하슬라(강릉), 나라(일본)과 같은 맥락의 것이다.
‘부리’의 어원을 찾아보면, 유럽의 ‘폴’ ‘풀’ - 인도의 ‘푸르’ - 태국의 ‘부리’ - 한국의 ‘부리’로 이어지는데 특이한 것은 고인돌의 분포와도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또 ‘골’은 인도의 ‘갈’과 ‘골’에서, 그리고 ‘라’는 태양을 상징했던 중동지방의 어휘 ‘라’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학계에서 ‘라’를 땅으로 해석을 하기도 한다.)
‘골’은 힌디어로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치안이 확보되어 있는 읍락, 나머지는 평지보다 다소 높은 산골 장소로 우리말 ‘골’의 뜻과 정확히 일치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더러 원수처럼 죽기 살기로 싸우기도 했지만, 알고 보면 종족적으로 같은 핏줄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일본열도에도 분국을 세워 언어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가운데서도 삼국사기 지리지를 통해서 재구할 수 있는 수사는 3개인데 기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일본어와 일치한다.
고구려어 일본어
3 미 미
7 나난 나나
10 덕 또는 더(한국어 수사와도 일치) 도
그 가운데서 10은 언젠가 우리가 ‘다’라고 불렀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구려인들의 신앙을 알아보자.
3. 밤이 두려웠던 고구려인들
중국인들이 용, 그리고 북방민족들이 사슴과 같은 동물을 섬기고 있을 때, 고구려인들은 차원 높은 천신(天神)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매년 10월이면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거국적으로 거행했다. 이 외에 소아시아와 인도 등지와 연관이 있는 태양숭배도 고구려인들의 보편적인 신앙이었다. 또, 고구려의 주신은 여신이었으니 일본 및 남서방의 것과 일치한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독특했던 고구려인들의 태양숭배에 관해서 자세하게 조사를 해서 고구려인들이 중국인들과 얼마나 차별화가 되는지 밝혀보자.
5. 한국인은 태양족(太陽族)의 후예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해 세계인들은 황홀해 하고, 우리들은 자랑스런 조상들의 생동하는 모습을 보며 곧잘 감동에 젖는다.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무사들, 고취대를 선두로 보무당당하게 행진하는 병사들, 고래등 같이 크고 화려한 가옥에서 생활하는 고구려인들을 보면 마치 2천 년의 시간이 단절되지 않고 아직도 살아서 우리의 곁에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 많은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 한장 있다. 그 벽화는 바로 오괴 4호분의 천정에 그려진 것으로서 신선(神仙)이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는 작업 광경. 지금까지 민족학계에서는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는 신선’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천한 수레바퀴나 만들고 있는 신선이 어디 있을까. 하늘에서 살고 있는 지고지순한 신선들은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을 알고보면 바로 이 한 장의 벽화 속에 고구려인의 뿌리를 밝힐 수 있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수레바퀴의 상징은 바로 태양(太陽). 신선은 천한 수레바퀴가 아니라 위대한 태양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하루의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 그날의 태양이 사멸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태양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면 그들에게는 무척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고분벽화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네들의 신선이 밤새도록 새로운 태양을 만들어서 다음날 보네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또 고분벽화는 날마다 새벽이 되면 태양의 출현을 예고하는 수탉을, 그리고 태양 그림 속에다 수탉의 신(神)인 삼족조(三足鳥); 일부 학계에서는 색깔을 검게 칠해 놓았다 해서 까마귀로 해석하기도 하지만)를 그려놓기까지 했던 것이다.
인도의 태양사원 문양 고구려의 태양 상징 문양
< 사진 38 > 고구려 고분벽화 수레바퀴와 인도 태양사원의 수레바퀴 문양
신선이 해와 달을 만들면(사진 38참조), 다른 신선들이 머리에 이고 날라다가 다음날 떠오르게 한다는 내용)
< 사진 39 > 해와 달을 나르는 신선들(오회분 4호묘)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태양의 출현을 예고하는 세발달린 수탉의 신이 태양안에 그려져 있기도 하고, 직접 수탉이 그려져 있다.
< 사진 40 > 태양의 출현을 예고하는 수탉들(무용총)과 삼족조
고구려의 무사 무령왕관의 장식
< 사진 41 > 고구려 무사들이 머리에 꽂은 수탉의 깃, 그리고 백제 무녕왕 부부의 금관을 장식한 수탉의 꽁지털
과연 고구려 시대의 수레바퀴는 태양을 상징했던가. 훗대인 고려(高麗)시대까지도 태양의 날인 단오(端午)절에 백성들이 수레바퀴 닮은 수치떡을 해 먹은 것을 보면 일단 그렇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확실한 것은 고대 인도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도 태양을 고구려 사람들처럼 수레바퀴로 상징 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들의 태양 사원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닮은 커다란 수레바퀴가 장식되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태양을 ‘라’라고 불렀는데 옛적 삼국시대에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도 태양을 ‘라’라고 불렀다는 언어의 일치이다.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處容歌)에 아직도 그때의 말이 흔적처럼 남아 있다.
신라성대 소성대(新羅聖代 紹盛代)
태평성대 라후덕(太平聖代 羅侯德)
처용아비야.
라후(羅侯)에서 라(羅)는 태양, 후(侯)는 태양을 높혀서 부르는 호칭이다. 즉, 신라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것은 모두 태양신의 덕택이라는 뜻, 그러면 당시 고구려 사람들도 정녕 태양 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가. 지금까지 역사의 베일속에 감춰져 있던 불가사의의 한꺼플을 벗겨보자. 확실히 고구려 사람들은 태양족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하는 과정에서 추격자가 급하게 따라붙는 판국인데 하필이면 큰 강을 만난다. 이때 주몽은 활로 강물을 치며 이렇게 외쳤다.
[나는 태양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 (魏書, 隋書 高句麗傳)
* 하백은 물의 신
과연 태양족 답게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랬더니 물고기와 자라가 수면위로 무수히 떠 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고, 덕분에 강을 건넌 주몽은 목숨을 보전해서 훗날 대 고구려를 건설할 수 있었다. 당시 태양을 숭배한 우리 민족은 고구려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신라 사람들도 고구려인들 못지않은 열렬한 태양 숭배자들이었다.
「매달 초하룻날에는 서로 하례를 하는 예를 갖추고 ... 왕이 연회를 베
풀어 모든 관리를 불러모아 가지고 해와 달의 신주에 절을 한다.」
- 北史 新羅傳 -
그러면, 우리민족의 태양신앙은 과연 어디로부터 유래한 것인가 먼저 언어학적으로 관찰을 해보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에서 태양을 가리키는 ‘하’에서 온 말이고(우리나라 중세 기록인 계림유사, 조선관역어 모두 ‘하’), 태양의 파생어 새(빛; 청산별곡, 북새;저녁놀 등)은 아랍어 솸, 힌디어 솔 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마지막으로 태양(太陽)이라는 낱말은 근세에 중국에서 차용한 어휘이기 때문에 민족의 기원 문제와는 관련이 없으므로 논외로 한다. 결론적으로 옛 우리 조상들이 태양을 가리켰던 말 수리, 라, 해 등은 모두 태양숭배 신앙과 함께 소아시아, 중동 및 인도 방향에서 한국인의 남서통로를 거쳐 온 말이다.
< 지도 17 > 세계의 대표적인 태양숭배 지역
또 태양숭배 신앙은 오늘날까지도 흔적으로 남아 있어서 할머니들은 물을 떠놓고 햇님을 향해 절을 하며 소원을 성취 해달라고 빌었고, 일반인들도 가끔은 태양의 신통력에 호소하기도 했다.
수리 수리 마하 수리(햇님 햇님 위대한 햇님 ... 소원 좀 들어주세요)
삼국시대 사람들이 해를 ‘라’라고 불렀던 반면, 고려시대 사람들은 해를 ‘수리’라고 불렀다. 고려의 대표적인 가요 ‘동동’을 보자.
[ 5월 5일
수리날(端午日)에 먹을 약은
천년을 장수하실 약으로
바치나이다
.... ]
곧, 5월 단오(端午)는 해의 축제 날이고 ‘수리 날’이다. 이것 말고도 신라향가에서 수로부인, 가락국의 수로왕 등의 뜻은 모두 해 부인 해 왕이란 뜻이다. 특히 수로왕의 경우는 김해에 남아 있는 김수로왕 능의 태양문양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럼, 고려 시대에 ‘해’를 가리켰던 말 ‘수리’는 이 지구상 어느 곳과 유사한 말일까?
고대 한국어 수 리(해)
다리어(이란, 아프가니스탄) *수리
힌디어 *수리야
터키어 귀네쉬
투르크멘어 군
몽고어 나르
만주어
고려 시대의 ‘수리’는 소아시아에서 이란, 아프가니스탄, 인도를 거쳐 온 말인 반면, 터키어와 몽고어 등 알타이어는 해(日)와 같이 중요한 낱말도 우리의 것과 같은 것이 없다.
이제 태양족 고구려인들에 대한 제3의 불가사의에 도전 해보자.
만약 고구려인들이 태양족이었다면 그들도 과연 피라미드가 있었을까. 고대 태양족의 나라 이짚트인들이나 북 아메리카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서 살았던 태양족 아즈덱 사람들은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특히 아즈덱 사람들은 고구려인들처럼 태양이 유한(有限)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태양의 생명을 연장 시키려는 목적으로 심지어는 매년 수 천명의 사람들을 피라미드 위에 눕혀놓고 날카로운 흑요석으로 심장을 도려내 태양을 향해 뿌리기도 했던 것이다.
과연 이짚트, 멕시코에 이은 제3의 피라미드가 바로 우리나라에 있었다. 제3의 태양족 고구려인들이 만들었던 피라미드는 만주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무덤들, 대표적인 것으로는 장군총(將軍塚)이다. 밑변의 길이 31.5m, 높이 12.4m, 면적 960m의 이 무덤은 광개토대왕이나 그 다음대인 장수왕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분명 피라미드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오늘날 북한에서 복원한 단군릉(檀君陵)도 거대한 피라미드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보면 언젠가 우리민족은 중동지역 사람들과 밀접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동부 아시아에서는 유독 우리민족만이 문화적으로 서방의 것과 유사해서 한 점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들이 석기시대 한반도에서 살면서 주먹도끼와 장두형의 머리 그리고 청동기 시대 서방으로부터 온 천손설화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주변 민족들과는 전혀 다른 문화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주변 민족과 가장 차별화 되는 것이 우리민족의 기마풍속이었다. 우리의 기마풍속은 과연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일까? 또 하나의 불가사의를 풀면 우리의 역사 가운데서 어떤 면이 새롭게 보일까?
고구려의 장군총
< 사진 42 > 세계 3대 피라밋( 즙안 장군총, 이짚트와 아즈덱의 피라밋)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에서 전재 할 것.>
4. 순 농경민족이었던 고구려인들
고구려인들의 생업은 농사였지만, 풍족하지는 못했다. 그와 같은 사실을 후한서(後漢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밭이 적어서 아무리 노력을 해서 농사를 지어도 먹을 양식이 부족하다. 때문에 그 지방 풍속은 먹는 것을 절약하고 집만을 호화롭게 짓는다.]
우리민족은 신석기 이후 계속 농사를 주업으로 했다. 고구려인들은 신라, 백제 인들과 함께 인도의 아샘, 남부 중국을 거쳐 온 순 농경민족의 후예들이었던 것이다. 고구려민족이 북방민족처럼 유목을 하였다는 기록이나 증거는 아무데서도 찾을 수가 없다. 고구려인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양이나 말을 기르는 것을 주업으로 하지는 안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전통은 신석기시대부터였다.
고조선 시대의 8조 금법 중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변상을 하여야 한다.’ 즉 유목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이나 말이 아닌 곡식으로 변상을 했던 것이다.
4-1. 몽골반점과 기마민족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를 오도케 한 2가지의 허상이 존재해 왔다. 그 중 한 가지는 몽골반점이고, 다른 한 가지는 기마민족설이다. 몽골반점은 동부 아시아 2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에 지나지 않는다. 또 기마민족은 일부도서와 아프리카 대륙을 제외한 전 세계인들이 일찍부터 말을 탔으니 모두가 기마민족인 셈이다. 중국의 삼국시대 여포가 탔던 적토마를 보라. 중국인들은 기원전부터 기마전을 할 정도였지만, 자신들을 기마민족이라고 차별화 하지는 안했다.
설혹 고구려인들이 기마민족이라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중국이나 이웃 민족들처럼 북방과 연결된 기마민족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말의 주종은 산악지대를 오르내릴 수가 있는 과하마였다. 높이가 겨우 3자밖에 안되는 과하마는 북방에는 없고, 대신 인도 서쪽으로부터 파키스탄, 이란, 중동 등지에서 지금도 보편적으로 사육되고 있다. 또 ‘말(馬)’이란 어휘는 중세 몽고와 중국에서 차용된 것이고, 그 이전의 삼국시대에는 ‘가라’라고 불렀다. 이 어휘는 지금도 방글라데쉬, 인도, 이란 등지에서 사용이 되고 있다. 소아시아의 기마실력은 결코 동양에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탈라스 전투에서 모하마드 이븐 살리가 이끈 아랍 연합군의 기마병단은 고선지 장군의 기마군을 무참히 패배시켰던 일도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일부 학자들이 고증도 빈약한 북방의 기마민족, 알타이어족 설 등을 계속 주장을 하니까 중국이 우리의 역량을 가볍게 여기고 동북공정과 같은 무리한 도발을 해 오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진> 중동지방의 과하마
마지막으로 고구려인들의 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민속적 특징 가운데서 놀이문화를 살펴보자.
5. 누가 고구려의 씨름을 지금도 하고 있는가?
고구려인들이 즐겨했던 놀이는 가무(歌舞) 이외에 씨름, 줄타기, 장대타기 등이었다. 고구려의 것과 유사한 씨름은 스페인, 스위스 그리고 중부 아프리카에서 하고 있지만, 아주 똑같은 규칙의 씨름은 인도의 아샘 지방에서 지금도 거국적인 행사로 거행되고 있다. 삿바도 있고, 상대방을 거꾸러뜨리려고 용을 쓰는 모습도 우리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고구려 시대의 줄타기, 장대타기 등은 근대에 이르기 까지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놀이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오늘날 현대문화에 밀려 자취를 감추어버렸지만 지금도 동남아시아에서는 자치기, 비석치기, 팔방놀이, 공기돌 등과 함께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일반적인 민속이다. 원래 농경민족은 땅 위에서 하는 놀이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고구려 민족은 중국 민족과는 천양지판으로 다른데 왜 자기네의 역사로 편입을 시키려고 광분하는 것일까?
6. 고구려가 중국역사가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
6-1. 중국의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옛 고구려 영토의 절반 이상이 오늘날 중국에 편입이 되어 있고, 또 고구려의 통치기구가 중국 영토 내에서 존재했던 기간이 한반도 내에서의 기간보다 길었다는 등의 중국측 이유는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서 취급을 했으므로 여기서는 부연 설명을 생략한다. 또 고구려가 고려로 정통성을 이었으며, 고대로부터 중국 스스로가 고구려사를 한국의 역사로 인식했다는 등의 한국 측 주장도 같은 이유로 취급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고구려사가 결코 중국의 역사가 될 수가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 한 가지는 빼놓을 수가 없다. 그것은 고구려가 망한 후 주민들의 유향이다. 즉, 고구려인의 후손들이 오늘날 어디서 사는 누구인가 하는 내용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바로 그들에게 귀속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점만 명백하게 밝혀지면 중국이나 세계인들도 이의 없이 수긍을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망한 후, 그러니까 669년, 69만 여 호 중 약 5%에 해당하는 3만 8천 여 호가 지금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감숙성, 청해성, 사천성 등지의 불모지로 끌려갔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상당수는 남아 있었고 677년 반란을 일으킨 고구려인들이 다시 산동성과 감숙성, 청해성 등지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대를 이어가며 살아야만 했다. 다음은 고문간, 고공의 등이 이끈 일부의 고구려 유민들이 몽고를 통해 중국 북부의 오로도스 지역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상당수는 신라와 일본으로 이주해 갔는데, 이들 모두가 대략 고구려 인구의 15%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이 된다. 그러니까 나머지 85% 가량은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아서 삶을 꾸려갔던 것이다.
6-2. 고구려인의 후손들은 누구?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았던 사람들의 대를 이은 사람들은 오늘날 어디에서 살고 있는 누구였을까? 60-70%는 압록강 남쪽의 한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 이였다. 그들이 바로 고구려의 주인공이었고, 그들의 후손이 바로 우리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간접적으로 추정 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고대로부터 기후가 온난한 미작지대(米作地帶)는 높은 생산력으로 인해 인구의 밀접지역이었던 반면, 기장, 수수 같은 잡곡지대는 인구가 희소했다. 당시 고구려의 미작지대는 압록강 이남의 평안도로부터 함경남도, 황해도까지였다. 고구려 사람 등의 다수가 이 지역에서 모여 살았기 때문에 427년 장수왕은 만주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고, 고구려가 망한 이듬해 당장 이세적은 당나라와 가까운 요동지역을 제쳐두고, 압록강 이남의 인구 밀집지역에서 붙든 그 많은 포로들을 이끌고 펴라성을 출발했던 것이다.
더욱 확실한 정황 증거는 백제는 영토가 고구려의 반도 안 되었지만 기후가 온난한 미작지대였기 때문에 멸망 당시의 인구는 고구려보다 더 많은 76만 여 호였고, 반 미작지대였던 신라도 60만 호를 상회했다. 이점은 고구려의 역사는 과 반 수가 넘는 그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한국역사로 편입되는 것이 당연한 논리로 부각되어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으로 올라간다. 장기간에 걸친 중국의 끈질긴 설득이 주효해서 오늘날 많은 수의 세계학자들은 중국 편을 들어주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북한의 사학자 김석형이 국제회의장에서 노구를 이끌고 항의를 한 적도 있었으나 국력의 차이였던지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감정적으로 대립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인 중국과 세계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차분하고 고증이 확실한 논리로 우리의 주장을 관철시켜야 할 것이다.
대쥬신
20억명이라는 통계수치는 야후-워키사전을 찾아보니- 몽골반 斑 Mongolian spot 유유아(乳幼兒)의 체간(體斡), 특히 미선골부(尾仙骨部)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청색반점으로 몽골로이드(황색인종)에게서 100% 가까이 나타나기 때문에 몽골반이라고 불리어졌지만, 백인종에선 10∼20%, 대쥬신 다물史 흑인종에선 80∼90%까지 나타나기 때문에 유아 또는 소아반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여기에서의 몽골로이드(중국,한국,몽골,일본,북중남미 인디오,알래스카 인디오) 모두를포함한 수치라고 추정 되어집니다..북방민족의 증거로는 불충분하다는 맥락에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참고가되셨길.
이희석
님이 소개해주신 논문을 보니 한양대학병원 소아과에 찾아온 환자를 대상으로 할때 51.9%가 몽고반점이 나타났다고 나오는군요. 그리고 제가 중국친구에게 몽고반점에 대해서 물어보니 잘 알지 못하고있는것으로 보아 황인종에서 100%라는 수치는 너무 큰것입니다.
참고로 님이 저에게 소개해주신 논문은 김재홍, 김중환, 허환, 몽고반의 통계적 고찰, 대한피부과학회지, 24(3), 373 (1986)이군요. 그리고 제 중국친구중에는 산둥반도에서 온 친구도 있는데 역시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원나라에 의해서 우리나라가 많이 혼혈되었기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 몽고반점이 나온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원나라에 의해 완전히 점령된 중국의 경우는 우리나라보다 몽고반점이 적게 나타나는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나라에 의한 혼혈로 인해 우리나라사람이 몽고반점을 많이 갖게 되었다는것은 모순입니다.
대쥬신
여기서 김병호박사님이 20억이라고 말한 이유는 몽고반점이 100%로에 근접하든 100%보다 훨씬 못 미치든 많은 수의 황인종(아메리카몽골로이드 포함)에게 나타나는 표피적 현상 일뿐이지 그것이 절대 북방민족. 기마민족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수는 없다는 말을 하고있지 않습니까?
필자가, 설사 20억이라는 몽골로이드 전부가 몽고 반점을 지녔더라도 ( 몽골로이드 모두 합치면 20억 될겁니다.) 그건 황인종이란 필요조건이 될뿐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단말을 하고있다는 겁니다. 몽고반점= 알타이=북방계민족 가 성립 될수 없다라 라는 주장을 펼치는데 20억의 수치가 너무 크다라는 말입니까?
지금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히려 님이 말한 대로 중국인들이 몽고반점을 잘모르고 제가 소개드린 논문에서처럼 한국인에게 나타나는 몽고반점 비율처럼 일부 몽골로이드에 국한된 것이라면 고구려인의 계통이 몽고반점 때문에 북방기원민족이 될 수는 없다라는 김 박사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갖지 않나요?
희석님. 윗 글에서 원나라에 의해서 우리나라가 많이 혼혈이 되었기 때문에, (어디에)그것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에게 몽고반점이 나온다고 했단말입니까?
여지껏 윗글에서 이야기 했던 서양인의 형질적 특성을 지닌 고대 고구려인들에 대한 이야긴는 모두 어디로 흘려들으셨나요, 고구려인들이 소아시아 대륙을 건너온 샘족계통의 서남지방의 민족이 원류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그 증거로 고구려인들이 살던 지방의 선사유적, 즉, 고구려 지역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돌도끼가 북방 및 동아시아에서는 볼 수없는 인도와 서양의 그것과 같은 것이고, 장두형 유골 또한 그렇다는 논증이 있었습니다.
그 밖의 서남의 인도. 소아시아 인들과의 공통점으로 탄생설화, 언어, 풍속등이 우리가 우리의 조상이라고 정설로 믿고 있던 알타이어 계와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례를 제시하고 있었습니다.서남아시아 인들과 흡사했던 고구려계의 형질이 원나라의 침략이후 변했다는 것인데 몽고와 혼혈이 되서 몽고반점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란 웬말인가요? 참고로 제가 알려드렸던 논문 역시 김재홍, 김중환, 허환, 몽고반의 통계적 고찰, 대한피부과학회지, 24(3), 373 (1986) 한양대학병원 소아과에 찾아온 환자를 대상으로 할때 51.9%에게만이 몽고반점이 나타났다고 나온 다고 님도 말씀하셨지않습니까?
게다가 고구려인들은 신석기 이후 계속 농사를 주업으로 했고 신라, 백제 인들과 함께 인도의 아샘, 남부 중국을 거쳐 온 순 농경민족의 후예로 보여지며 고구려민족이 북방민족처럼 유목을 하였다는 기록이나 증거는 아무데서도 찾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또한 유목민이 아니라는 증거이고요.
그 예로 고조선 시대의 8조 금법 중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변상을 하여야 한다.’ 즉 유목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이나 말이 아닌 곡식으로 변상을 했던 것과. 북방 기마민들과 달리 썼던 말은 인도 파키스탄 등지에서 타는 과하마를 썼는데 이것은 서남아시아에서 기원한 민족이단서였습니다.
소아시아계통 Elia 많은 일리있는 말을 들으며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부분...고구려의 유민들이 한반도에 편입되어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지금 고구려의 성씨들이 한반도보다는 차이나 땅에 더 많지않나요?...백제의 경우는 아예...한반도에는 찾기기 힘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