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BC 469년에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이미 아테네는 전성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을 다듬는 석공이었다. 어머니는 산파였다. 소크라테스는 아주 못생긴 사람이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키가 작고 얼굴을 털투성이에다가, 코는 들창코였다. 짱구머리에 대머리였고, 목덜미에도 털이 많이 나 있었으며, 어깨와 다리는 가늘고 약했다. 그는 항상 다 떨어져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다녔는데, 날씨가 덥든 춥든 상관없이 키톤이라는 옷을 1년 내내 입고 다녔다. 키톤은 오른쪽어깨부터 주름 져 흘러내리게 입는 망토 같은 옷이다. 여기에 속옷은 전혀 안 입었고, 1년 내내 맨발로 다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한번이라도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누구나 겉보기와 다른 그의 고운 마음씨와 성품에 놀랐다.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후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석공 일을 했다. 또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용감한 군인으로 알려져 있다. 18세와 20세 때, 군대에 갔다 왔는데 세 번의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나라의 부름을 받으면 용감하게 나가 싸웠다. 아테네가 독립을 막기 위해 아테네 식민도시 포테이다이아를 공격할 때 큰 부상을 입은 알키비아데스를 구해서 유명해진 일이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평생 동안 소크라테스를 따라다니며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배가 고프지 않은 병사가 없었습니다. 전투 중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배고픔을 잘 견디어 냈습니다. 먹는 것에 대해 특별한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혹 파티라도 있으면, 즐겁게 놀고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동료들이 권하면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북쪽은 매우 추운 지방이라 군인들은 옷을 여러 겹 걸쳐 입고도 추위에 떨었지만 소크라테스는 달랑 한 벌의 옷만 걸치고도 잘 견디어 냈습니다. 맨발로 얼음 위를 걸어 다닐 정도였습니다.
두 번째 전투는 BC 42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일 때, 보이오티아 지방에서 있었다. 이때도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와 함께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말을 탄 기병으로, 소크라테스는 무기를 든 보병으로였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스파르타와 그리스 동맹국의 승리로 끝나자 아테네 군에 속했던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섬겼다.
소크라테스가 참가한 세 번째 전투는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그리스 북쪽 트라키아 지방의 암피폴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일 때 아테네로부터 독립하려고 애를 썼다. 이것을 막기 위해 아테네는 암피폴리스에 군대를 파견했다. 세 번의 전투에서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용감하게 싸우고 동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4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크라테스는 나라에서 필요로 하자 곧바로 전투에 참가했는데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법을 지키려고 하는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세 번의 전투에 참가한 후 50세가 되어서야 크산티페와 결혼했다.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에서 젊은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일을 즐겼다. 혼자서 생활을 꾸려야 했던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에게 자주 불평을 했다. 한번은 부부싸움을 하다가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에게 물을 끼얹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물을 뒤집어쓴 채 아무런 표정도 없이 “천둥이 심하면 소낙비가 오는 법이다”고 말했다. 당시 아테네는 많은 군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러 여자와 결혼했다. 소크라테스도 당시 아테네의 풍습대로 아테네의 정의로운 사람이었던 아리스테이데스의 딸 미르토와 결혼했다. 두 번째 부인을 맞은 셈이다. 크산티페는 한 명의 아들을 낳았고, 미르토는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소크라테스는 가난했다. 맨발의 청춘이었다. 키톤만 1년 내내 입고 다녔다. 그래서 그의 몸에서는 냄새가 났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일, 즉 잘 먹고 잘 사는 일, 명예, 출세, 성공 등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단지 예의바른 행동을 하며, 올바른 생각을 하는 것을 최고로 여겼다. 특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유머 감각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모조건 존중하고 따른다는 생활 신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생활관은 영혼이 사라지지 않으며, 결코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이란 현재 세계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다음에도 살아 있기 때문에, 영혼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한 상태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대화를 통해 진리를 찾는 그의 가르침 방법을 산파법, 조각법이라고 한다. 산파가 아이 낳는 것을 돕는 것처럼 그는 제자들이 진리를 찾는 것을 도왔다. 조각이란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는 작업이다. 즉 군더더기를 쪼아내고 꼭 필요한 부분만 남기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제자들을 조각한다고 믿었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 곧 양심의 소리에 대해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귀에 항상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주장했다. 점술가 테오크리토스가 친구들과 함께 아고라로 가던 길이었다. 소크라테스가 갑자기 멈추더니 생각에 잠겼다. 잠시후 소크라테스는 먼 길로 돌아가자고 했다. 왜 그러냐고 하자 다이몬이 시킨다고 했다. 소크라테스와 몇 사람은 먼 길로 돌아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름길로 갔다. 지름길로 가던 사람들은 도중에 돼지 떼를 만났다. 그중 몇몇은 결국 그 길을 포기하고 소크라테스가 가자고 했던 길로 다시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고집을 부린 사람들은 돼지 떼를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아고라에 나타났을 때 그들의 옷은 돼지 오물로 더러워져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어릴 때부터 늘 자신의 귀에 어떤 음성이 들려온다고 말했다. 그 목소리는 소크라테스에게 무엇을 할지, 하지 말지를 가르쳐 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잘 풀리지 않는 어떤 문제 때문에 저녁부터 다음 날 정오까지 한 자리에 서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어느 새 소크라테스가 오래도록 한 곳에 서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저녁이 되어 호기심 많은 군인들이 식사를 마치고 이불과 베개까지 준비하여 소크라테스가 밤새도록 그곳에 서 있는지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는 정말 이튿날 아침까지 그대로 서 있었으며, 해가 뜨자 태양을 향해 기도하고 그 자리를 떴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이라는 양심과 진실을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누구든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꼭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