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을 온 식구가 늦장을 부린다.
춘천을 한 번 갈까 싶어서 여기저기 검색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주천을 가겠느냐고 물어온다.
아마 소고기를 사러갈 모양이다. 하기야 그게 아니라도 바람결 따라 한 번씩 가기도 하는 곳이긴 하지만...
원주에서 신림을 넘어가는 가리파고개(고속도로에는 치악재라고 되어 있다),
신림서 황둔으로 넘어가는 싸리재, 황둔에서 주천으로 넘어가는 솔치가 다 운치가 있고,
싸리재 넘어 감악산은 등반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기도 하기에 수도 없이 지나간 길이다.
그 고개에 지금은 모두 터널이 뚫려서 고갯길의 운치는 다 사라졌다.
마치 영동고속도로가 새로 확,포장 되고 나서 대관령 기분이 전혀 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얼른 영월 주천의 탑 두 기를 메모해서 따라나섰다.
가을 바람을 쐬는 것은 득이면 득이지 실이 될 것은 없지 않겠는가...
말도 살이 찐다는데 인간도 뭐 다를 것이 있으랴...
주천은 한자로 酒川으로 쓰는데 그 지명의 유래는 이렇다.
==============================================================================================================================
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약 0.8㎞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망산의 바위 틈에서
양반이 마시면 약주가 나오고 상민이 마시면 탁주가 나왔다고 하는데서
酒(주)자와 泉(천)자를 써서 주천이라 한다고 한다.
주천교를 지나 신일리 비석거리 우측 망산 밑에는 주천면(酒泉面) 땅이름의 유래가 되는 "주천샘"이 있다.
주천면 남쪽 길가에 술이 나오는 돌이 있으니
그 형상은 반 깨어진 술통과 같다 하여 돌술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는 이 돌술통은 예전에는 서천(西川)에 있었는데
그곳에 있을 때는 술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현의 아전이 술을 마시려고 그곳까지 가는 것이 싫어서 현(縣) 안으로 옮겨 놓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함께 옮기는데 갑자기 우뢰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 술샘이 세 개로 나누어졌다 한다.
한 개는 못에 잠기고, 한 개는 지금 남아있는 주천샘이고, 다른 하나는 어디 있는지 알수 없다.
==============================================================================================================================
주천에는 언뜻 보기에도 재미있는 지명이 많이 있다. 몇 개만 살펴보면...
*<도천리> ; 본래 영월군 우변면(右邊面)에 딸린 지역으로
태기산과 치악산에서 내려오는 '서마니강'이 마을을 돌아서 흐르므로
"도는내→되내→ 도천"으로 부르다가
후에 건너 마을인 도원리(桃源里)와 같은 의미로 "도천리(桃川里)"라 하였다.
도원리는 서마니강 안쪽에 있으므로 "안도내"라 칭하고, 도천리는 바깥쪽에 있으므로 "바깥도내"라 불렀다.
(서마니강은 강이 휘돌아 나가서 마치 섬처럼 보이므로 '섬안이>서마니'가 되었다.)
*<개살이> : 본부락 앞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개가(改嫁)해온 여자가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해서
"개살이 (개살이는 개가의 속된 말이다.)"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실제로는 웅덩이(물가) 끝에 붙어 있는 논이 있는 곳이므로 "개살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도천분교 동쪽은 개울건너에 있는 마을이므로 "개건너"라 불렀다.
('개'가 들어가는 이름은 항상 물과 관계 있다. 강이든 개울이든...)
*<비산> : 도천리의 남쪽에 있다.
원주시(原州市) 신림면(神林面) 송계리(松桂里)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해발 694.3m로 도천리의 진산(鎭山)이다.
산이 금시라도 날아갈 것 같은 형상이므로 "비산"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이 곳에 검은 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고 하여 일명 "비우산"이라고 부르고
그 모양도 마치 비가 올 때 쓰는 우산처럼 생겼다.
'비우산'에서 '비산'이 나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느지내> : 본부락 북서쪽으로 두 마장 거리에 있다.
마을 앞에는 서마니강이 활 모양으로 굽어져서 느리게 흐르므로
"느리내→느지내"라는 순수한 토박이 땅이름이 붙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느지내"는 한자식 표기인 만천(滿川), 만촌(滿村)마을로 불리어졌다.
그 앞에는 비스듬하게 누운 듯한 "느지벼루"라는 바위도 있다.
('벼루'는 '벼랑'의 방언)
주천은 몇 년 전부터 다하누(다한우==>다하누) 한우고기가 특화되어서 성공한 경우다.
주천이라면 원래 사자산과 법흥사, 적멸보궁이 있어 유명하였으나
이제 그보다는 한우가 더 유명해졌고 마을은 온통 소고기집과 식당으로 즐비하다.
다리를 건너 주천으로 들어가자말자 나는 강변으로 차를 몰고 천천히 나아갔다.
옛날에 탑이 강 기슭에 서 있다가 그 부근으로 옮겼다는 것을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내 예상대로 탑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변 방둑에 서 있었고
그 옆으로는 나무들이 서 있으며 그 아래는 상가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탑은 2층 기단에 3층을 올린 일반형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삶의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전형적인 우리 강원도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항상 최변방에 있었고 삶의 끝자락에서 주변인으로서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아간 것이 우리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집권여당이 떨어지고 야당이 당선되니 어이없어 기겁을 한 것이고
그 충격은 다른 어느 곳에서 떨어진 것보다 더 컸을 것이다.
원래 이 탑은 제방 안쪽 강 기슭에 있었는데
제방을 쌓으면서 그 위쪽,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라고 하며
옮길 때 탑 안에서 금동불상이 나왔다고 한다.
안내판에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제천 장락동 7층모전석탑, 무릉리 삼층석탑과 함께
사자산 흥녕선원을 찾는 사람들을 안내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적혀 있다.
사자산으로 가기 위한 길 안내역할을 했다는 것인데
나로서는 그런 내용의 탑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하기야 강변에 있었다고 하면 절이 거기에 있었으리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
무릉리 삼층석탑도 들판 한 가운데 있고 지금의 법흥사로 가는 길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층기단은 한 쪽 모서리가 크게 깨어져 나갔는데 통돌로 면석과 갑석을 표출하였으며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 떠 새겨 놓았다.
지대석에는 알구멍<성혈(聖穴)>같은 구멍이 3군데 있고, 윗면에는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기단부 모습>
하층 기단에는 상층기단 면석을 받치기 위해서 2단의 받침을 두었고
상층기단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겼다.
상층기단 갑석은 따로 부연을 두지 않고 오목형 곡선으로 처리하였고
위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을 두었다.
갑석은 기울기가 없이 평면으로 처리하였는데
2단의 몸돌받침과 부연에 해당하는 부분과를 비교하면 얇은 편이다.
문화재청과 안내판에는 탑신의 1층에만 우주가 있고 2,3층에는 기둥이 없다고 하였으나
사진상으로는 1층 탑신에는 우주와 탱주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탱주가 생략되고 우주가 보인다.
지붕돌 받침은 1층에서는 불규칙적인 2단, 2층과 3층에서는 각각 1단을 두어 형식적으로만 표현했다.
지붕돌의 처마는 직선이고 반전을 주었으며 낙수면은 곡선으로 처리하였다.
몸돌에 비해서 지붕돌의 두께가 두꺼워 보이고
특히 2층 지붕돌은 파손이 심해서 3층 지붕돌보다도 작아 보인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있고 나머지는 유실되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도 지적한 바는 없지만
이 탑에서도 1층 몸돌만 따로 만들고는 1층 지붕돌과 2층 몸돌을 하나로,
2층지붕돌과 3층몸돌을 하나로, 3층지붕돌과 상륜부를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올라가서 보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는 못 했고
가급적 그것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촬영을 해 보았다.
내가 볼 때는 아무래도 몸돌과 지붕돌이 일체형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노반과 복발까지...
아래층 지붕돌과 위층 몸돌이 하나의 돌로 형성되는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 강원도 지역 석탑의 특색으로서 <홍천 괘석리 사사자삼층석탑>,
<홍천 희망리 삼층석탑>, <여주 창리 삼층석탑>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몸돌의 비례는 2층에서 3층으로 가면서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이 어긋나 있고
그 영향으로 상층기단은 지나치게 높아보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반적으로 봐서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변형하며 형식에 치우친 것을 볼 때
고려 중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8호이다.
대체로 우리는 일반 개인이 제공한 정보보다는
지자체 문화관광과에서 적은 간판의 안내문이나
문화재청의 안내를 크게 신뢰하는 것이지만
꼭히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느꼈다.
수타사에서부터 뱀이 자꾸 나를 따라다니더니 여기서도 뱀이 나를 반겨준다.
차에서 내리면서 아내가 장난삼아 "뱀이 없는가 잘 보세요" 하였는데
문을 열고 나가니 정말 나무 더미 위에 꽃뱀이 한 마리 햇빛을 쪼이고 있었다.
"응, 여기 한 마리 또 있네."하였더니
기겁을 한 그 사람은 다시는 탑 근처에 오려고도 하지 않고
저 멀리서 딴 청만 피우고 있다.
내가 군대 가기 전에 뱀을 좀 잡아먹은 것이 있고,
군에서도 두어 마리 먹은 적이 있지만
그건 대한남아로서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하기 위한 단백질 보충 차원에서의 일이었건만
어찌 이 놈들은 30년이 더 지난 아직도 나를 따라 다닌단 말인가?
혹시 그 때 죽은 뱀들의 아내들인가? 그렇다면 복수???
이런 걸 보면 역시 군대는 가지 말았어야 했다.
군대를 안 간 사람들, 대통령, 국무총리, 여당대표, 국정원장.....등등은
나처럼 뱀이 따라 다닐 일도 없을 것이고 여차해서 복수를 당할 일도 없을 것이 아닌가...
역시 멋도 모르고 군대를 넙죽 따라 나서서, 무슨 충성을 한다고,
북한이 내려다 보이는 최전방 산꼭대기에서 살다 온, 나같은 사람들은
바보, 축구, 머저리, 등신임에 틀림없다.
일단 좀 자세히 들여다 보았으니 이 쯤 해서 재빨리 차를 몰고 무릉리 삼층탑으로 향해야 한다.
어물거리다가는 잔소리만 듣고 한 군데는 포기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므로...
네비게이션도 가게 이름이나 나오지, 동네이름, 이름없는 탑은 나오지도 않는다.
나는 길가에서 한 사람에게 길을 물은 다음,
'또 어디 가??'하는 투의 아내의 눈길을 못 본 척 무시하며
무릉리쪽 방향으로 얼른 차를 몰았다.
2010.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