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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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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네요. 모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독서 자료 보냅니다. - 이 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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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홍준 잡문집
◎ 제3장 답사여적(餘滴)
■ 백두산 답사
“그건 욕망이외다”
2018년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역사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 특별 수행원으로 다녀온 것은 큰 영광이자 행운이었다. 특별 수행원이란 특별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결혼식으로 치면 들러리이고 노래로 치면 백댄서 같아서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할 뿐이다. 가라는 대로 가고,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었으나 이처럼 수동태로 움직인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한 줄 몰랐다. 특히나 휴대폰을 서울 공항에 맡겨두고 왔기 때문에 완벽하게 모든 잡사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을 누린 2박 3일이었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의 하이라이트는 백두산 천지에서 남과 북의 정상이 맞잡은 손을 높이 치켜들었을 때였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그날따라 백두산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그때 문화체육계 인사로 함께 간 탁구 감독 현정화, 가수 알리, 시인 안도현, 축구 감독 차범근 넷이서 나란히 앉아 망연히 천지를 바라보는 모습은 가히 방북을 영원히 기념하는 사진으로 삼을 만하였다. 꿈결 같은 여정이었다.
1998년 권영빈 단장이 인솔한 제2차 중앙일보 방북 취재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답사할 때, 12박 13일의 일정 중 마지막 코스로 백두산을 답사하였다. 그때 우리는 황공하게도 평양에서 전세기 편으로 삼지연 비행장까지 날아갔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개마고원은 바늘잎나무들이 천연 원시림을 이루고 있어 뾰족한 나무 끝이 마치 모판에 심어진 벼포기처럼 빼곡히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아! 한반도에 이런 천연의 원시림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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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삼수와 갑산을 거쳐 혜산에서 올라가는 길이 정코스였다. 그 삼수와 갑산은 백두산 자락의 첩첩 산골이어서 삼수갑산으로 귀양살이 떠나는 유배객들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곳이다. 바둑에서는 절박한 상황에서 결단을 내릴 때면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끊고 본다’라고도 한다.
이윽고 우리의 배행기가 삼지연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삼지연은 해발 약 1,400미터의 평평한 고원지대에 있어 7월인데도 서늘했다. 안내원에게 물었다.
“백두산에도 4계절이 있습니까?”
“있지요. 봄에 풀이 나서 여름에 꽃을 피우고 가을에 시들고 겨울에 눈이 쌓이니 4계절이 분명한 것이지요.”
“언제가 봄인가요?”
“백두산엔 9월이면 눈이 내려 이듬해 5월까지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눈으로 덮여 있는 건 겨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6, 7. 8월 3개월 안에 봄, 여름, 가을이 다 있습니다. 지금은 7월이니까 여름입니다.”
그날 우리는 천우신조로 밝은 태양 아래 들꽃이 만발한 천지를 한없이 만끽했다. 안내원도 이렇게 좋은 날은 몇 년 만이라며 남쪽에서 손님이 온 것을 천지도 환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천지에서 내려온 우리는 삼지연 마을 깊숙이 자리 잡은 베개봉려관에 묵어갔다.
북한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삼수, 갑산, 혜산, 개마고원, 삼지연에 이르는 지역을 양강도라고 부른다. 양강도 감자는 크기가 갓난애 머리만 하고 벌방지대 감자와 달리 전분이 많아서 달다. 이곳에서 감자는 부식이 아니라 주식이다. 5월 단오 때부터 햇감자로 밥을 짓는데 보리쌀과 땅콩을 약간 섞은 감자밥은 대단히 향기롭고 싱그러운 맛을 내며 소화도 잘된단다.
양강도 감자 중 백두산 감자는 첫서리를 맞고 9월에 캐기 때문에 ‘언감자’라고 한다. 그날 우리 저녁상에 나온 것은 언감자농마국수였다.
접대원이 다가와 우리가 감자요리를 맛있게 먹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틀 묵어가는 동안 이 집 감자요리를 다 먹고 가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접대원은 가당치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욕망이외다.”
“욕망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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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식당엔 감자요리가 여든두 가지 있습니다. 감자찰떡, 감자묵, 언감자지짐, 농마지짐, 막가리지짐, 막가리국수, 오그랑 죽 ….”
아! 삼지연 배개봉려관에 다시 가고 싶다. 가서 여든두 가지 감자요리를 다 맛보고 싶다. 그때는 삼수갑산의 허천도 보고 황초령과 마운령의 진흥왕순수비도 답사하고, 일본에서 찾아다 길주에 복원한 북관대첩비도 보고 싶다. 이것이 정녕 ‘욕망’이 아니길 바라는 기도하는 마음이다.
■ 중국답사 서설
“인인유책(人人有責), 사람마다 책임이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이라는 나라는 동아시아의 문명을 주도한 강대국이었다. 그 기간을 줄여 잡아도 2천 년은 된다. 그런 중국이 1966년부터 근 10년간 문화대혁명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문명 파괴를 자행하면서 거대한 후진국으로 전락하였다.
그 기간에 우리나라는 근대화, 산업화로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어갔다. 우리나라가 가발, 신발, 의류, 피혁 등 수출산업에서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죽의 장막을 둘러치고 바깥 세계와 접촉하지 않은 덕분이기도 하다.
잠자던 중국이 다시 잠을 깬 것은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등장하여 마침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는 실용주의 노선을 취하고부터다.
내가 중국을 답사하면서 감동받은 것은 만리장성이나 자금성 같은 장대한 문화유산보다도 대국다운 그네들의 대범한 마음 씀이었다.
10년간의 끔찍스러운 문화대혁명으로 나라를 망조로 만든 마오쩌둥이 죽고 사인방(四人幇)도 마침내 처단되었을 때 마오쩌둥에 대한 격하 움직임이 일어났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새 지도자로 등장한 덩샤오핑은 공칠과삼(功七過三)론을 폈다. 중국 현대사에 미친 ‘공로가 7이고 과가 3이며 마오의 과에는 나의 과도 들어 있다’며 끌어안고 갔다. 참으로 대륙적이고 대인다운 포용력이었다. 중국은 2천 년간 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해온 역사적 경험 속에서 이런 대국적인 너그러움을 키워 간직해왔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구동존이(求同存異)를 제시하였다. ‘같은 것은 함께 추구하고 다른 것은 다름으로 남겨두자’는 것이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 때 시진핑 주석이 제시한 기조도 구동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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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중국은 다시 강대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위상은 어떻게 되나. 그 옛날의 한중관계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당당히 말하건대 우리도 만만치 않은 존재감이 있다.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의 성취는 중국이 더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우리 기업이 중국에 현지 공장을 가지고 있고 한류도 깊숙이 흘러 들어가 있다. 중국은 우리와 함께 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해나가는 동반자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당당히 나아가야 한다.
내가 중국을 답사하면서 배우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공칠과삼, 구동존이 같은 마음 자세이다. 특히 그들이 입에 붙이고 사는 ‘인인유책(人人有責)’, 즉 ‘사람마다 책임이 있다’는 표어는 차라리 감동적이다.
‘거리 청결 인인유책’, ‘문화재 보호 인인유책’, ‘문명 창달 인인유책’
이에 하나 더 덧붙여 본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책임이 있다. ‘민족 장래 인인유책’, ‘문화 창달 인인유책’
■ 북경의 유리창, “그런 안경 어디 가면 사나요”
한 나라의 원수가 외국을 국빈 방문할 때 대개 국립묘지를 먼저 참배한다. 그리고 그 다음 찾아가는 곳은 자기 나라와 연관된 상징적 공간이다.
- 1984 고르바초프의 영국방문 :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한 영국 도서관
- 2014 시진핑 주석의 한국방문 :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싸운 명나라 장수 진린의 후손들이 한국에 살고 있음을 이야기함
- 문재인 : 북경의 유리창 전통문화 거리 방문, 서울의 인사동과 비슷한 고서 적 골동품 등 문화예술의 거리
- 조선 실학자 홍대용이 연경 방문 때 유리창에서 중국 학자들과 천애지기를 맺었던 곳, 조선의 실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문화교류를 한곳
* 문 대통령 내외가 그곳을 찾은 이유는 ‘사드’ 배치로 중국과 친선적 우호관계가 한창 어긋나고 있을 때여서 한중문화교류사의 ‘천애지기’를 환기시키기 위함 이었다고 한다.
■ 일본 답사 후기 : “머리부터 꼬리까지 앙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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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중고등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배우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근대로 들어설 때 35년간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식민통치 기간의 가혹한 폭정과 수탈, 징병, 징용, 위안부 등의 피해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역사적 상처로 남아 있다.
또 하나는 일본 고대사회는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쌀 농사, 철기문화, 문자 불교 도자기 등이 모두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들이다. 그래서 일본의 고대문명은 ‘죄다 우리가 해준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그런 일본에게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억울하기만 한데 일본 극우들이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면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 일본이기 때문에 그들이 한때는 세계 2위를 차지했던 경제 대국이고, 노벨상 수상자가 25명에 달하는 문명국이며, 유럽의 유수한 박물관들이 중국 문화실 못지않은 일본 문화실을 갖출 정도로 일본이 세계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아도 한국인들은 전혀 인정할 마음이 없다.
이런 한일 정서는 열등의식으로 인해 서로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을 무시하고 있다.”
나는 이 콤플렉스로 인한 색안경을 벗어 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그래서 2,300년 전 한반도로부터 쌀농사가 전해진 규슈 답사기는 ‘빛은 한반도로부터’,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고대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인도한 아스카•나라 답사기는 ‘아스카 들판에 백제 꽃이 피었습니다’. 불교 사찰과 정원에서 일본 문화의 진수를 보여준 교토 답사기는 ‘일본 미의 해답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달고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일본의 문화가 한반도의 영향 하에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소화하여 이룩한 문화의 내용은 일본의 특질이다. ‘죄다 우리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 문화를 성숙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마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독일과 네덜란드로 퍼져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로 된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의 문화는 중국, 한국, 일본이 주요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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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되어 유럽의 문명과 맞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정원도 너무 다르다. 일본은 나무를 일일이 가위질하며 인공미를 극대화하고 한국식 정원은 자연미를 더 존중한다. 두 나라의 정원사는 돌 다루는 자세부터 확연히 다르다. 정원에 돌 10개를 깔아 놓는다면 일본 정원사는 9개를 반듯이 놓고 나서 1개를 비스듬히 틀어놓으려고 궁리하는데 한국의 정원사는 9개는 아무렇게나 놓고 나서 1개를 반듯하게 놓으려고 애쓰더라는 것이다. 일본은 인공미, 한국은 자연미를 그렇게 구현하는 것이다. 일본과 우리는 같은 문화권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다르다.
내가 본 일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장인정신과 직업윤리 의식이다. 이 전통의 뿌리는 아주 깊고 오랜 것이다. 1,200년 전, 헤이안 시대 천태종을 일으킨 승려 사이초가 세운 절 엔랴쿠지에는 그가 말한 경구가 큰 비석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조천일우(照千一隅) 차즉국보(此則國寶)” 천 가지 중 오직 하나를 잘하면 그것이 국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일본에는 대대로 가업을 이어가는 오래된 점포가 많다. 이를 일본에선 노포(老鋪), 일본 말로 ‘시니세’라고 하는데 한 자리에서 건물의 형태도 바꾸지 않고 변함없이 이어가는 상점들을 말한다.
이마미야 신전 앞에는 25대째 내려오는 떡집 이치몬지야 와스케가 있고, 우지 뵤도인 앞에는 450년 된 찻집이 지금도 성업 중이다. 도쿄의 다와라야 여관은 11대 당주 가 경영하는 300년 전통을 갖고 있다. 대기업 전무가 부친이 돌아가시자 사표를 내고 철공소 주인이 되었다는 등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한일 월드컵 당시 일본 쪽 조직위원장 오카노 슌이치로 일본 축구협회장의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우리나라 붕어빵 비슷한 ‘타이야키’라는 빵 가게 2층이었다. 이 점포는 100년 전부터 내려오는데 자신이 4대째 당주라는 것이었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응접실 한쪽에 가훈이 걸려있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앙꼬(팥소)”
내가 일본에서 가장 배우고 싶은 문화는 바로 이것이었다.
빈틈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은 일본 제품의 가장 큰 장점이자 성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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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결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이 IT 시대에 일본이 발전하는 것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 장인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아날로그에 익숙하여 신용카드보다 현금 사용을 선호하고 인터넷 소통이 우리처럼 원활하고 신속하지 못한데 있는 것이다.
◎ 부록 : 나의 글쓰기
■ 좋은 글쓰기를 위한 15가지 조언
주제를 장악하라
글쓰기의 핵심은 주제를 장악하는 것이다. 주제가 명확하지 않으면 글이 흔들린다. 간혹 소재와 주제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소재는 글의 재료이고 주제는 말하고자 하는 뜻이다. 비유하자면 깍두기는 주제이고 소재는 무이며 양념의 배합은 글의 구성이다.
제목만으로 주제를 전달할 수 있을 때 좋은 글이 된다. 제목만으로 전달이 잘 안 될 때는 부제(副題)를 달아보면 명확해질 때가 있다. 이를테면 <남도 답사 1번지 : 강진•해남 답사기>, <봄의 전령 : 홍제천변의 개나리> 같은 식이다. 나는 제목이 먼저 정해져야 글을 쓴다. 글을 다 써놓고 제목을 달려면 늦다.
2. 잠정적 독자를 상정하라
글이란 내가 아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누군가가 읽어 줄 것을 기대하고 쓴다는 점에서 공급자 입장이 아니라 소비자 입장을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 항상 내 글을 읽을 잠정적 독자를 떠올리고 글을 쓴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하다.
내 전공인 미술사 논문을 쓸 때는 미술사를 전공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고 쓰지만, 산문, 칼럼, 답사기, 등 대중적 글쓰기를 할 때는 전공이 다른 독자들을 머릿속에 두고 쓴다. 심지어 미술 평론을 쓸 때도 미술가나 미술평론가를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미술에 관심 있는 일반인이 읽는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독자는 그 글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독자는 일단 성실하게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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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독자는 언제고 글이 시시하면 읽다 말 수 있다. 그 점에서 독자는 매우 단호하다.
글을 쓸 때는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말고, 독자에게 호소해야 한다. 신문에 실린 칼럼을 읽다 보면 많은 필자들이 정연한 논리로 정론을 펴지만 어떤 글은 필자가 유식하고 똑똑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독자 입장에서 ‘야단맞는 것’ 같아 끝까지 못 읽는 경우가 많다. 독자를 우습게 보다가는 크게 다치거나 망신당한다. 즉 독자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
이는 글 쓰는 이의 좌우명으로 삼을 만하다.
3. 기승전결을 갖추고, 유도동기를 활용하라
나열식 서술은 읽는 이를 피곤하게 만든다. ‘지루한 웅변’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절대 금물이다. 하나의 글은 어떤 식으로든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글의 짜임새이다. 기승전결에서
기(起)는 들어가는 말로 여러 방식이 있다. 어떤 서예전에 대해 쓴다고 할 때
“9월로 들어서면서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라고 편하게 말머리를 시작하는 방법, “지금 예술의 전당에서는 근대 서예전이 열리고 있다”라며 첫머리부터 치고 나오는 방법, “서예는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대중적 관심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지만” 하고 주제를 암시하고 풀어가는 방법 등이 있다.
승(承은 글의 내용에 해당하므로 있는 사실대로 풀어가면 되지만
전(轉)에서는 글에 활력을 넣어주어야 한다. 이때 반전을 드라마틱하게 구사할 수 있으면 좋은 글이 된다.
결(結)에 이르기 전에 주의할 점은 결론은 감추고 전개해 와야지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늘어놓으면 맥이 빠진다. 결론을 맺는 데도 여러 방법이 있다. 핵심을 요약하는 법,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방법, 잔잔하게 조용히 마무리하는 방법 등이 일반적인 마무리인데 때론 무대에서 마지막 징을 한 방 울리듯 간결하게 끝내는 방법도 있다.
4. 에피소드로 생동감을 불어 넣어라
글을 쓰면서 그 주제에 맞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그 글은 무조건 성공한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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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답사기 1권의 경주 답사기에서 <삼화령 애기부처>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애기처럼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다행히도 나는 이 애기부처에 얽힌 생생한 에피소드 하나를 알고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지낸 정양모 선생님이 애기 부처의 발가락이 까맣게 된 내력을 얘기해준 것이다. 박물관의 유물은 절대로 손으로 만지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단체로 견학 온 초등학생들이 유물들을 보며 지나가다가 이 애기부처를 보는 순간 그 귀여운 모습에 경비원 몰래 발가락을 살짝 만지고 돌아서는 바람에 애기부처의 발가락이 까맣게 되었다는 것이다.
5. 이미지를 차용하라
누구나 글을 쓰면서 가장 애태우는 것 중 하나는 어휘력의 부족이다 특히 슬프다, 그립다, 안타깝다, 아쉽다 등 감정을 나타내는 형용사의 경우는 너무도 슬프다, 한없이 그립다, 애가 타도록 안타깝기만 하다, 마냥 아쉬운 감정이 일어난다. 등 걸맞은 부사만으로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던 이미지로 대체하여 그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좋을 때가 많다.
답사기 1권의 강진 답사기에서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만덕산의 야트막한 산길은 봄이면 길가에 춘란이 피어나고 솔밭 속에서 벌 나비가 날아들고 산새 소리가 답사객을 맞이해 주는, 우리네 야산의 정겨운 고갯길이다. 그런데 어느 해 찾아갔더니 솔잎혹파리 피해로 소나무들이 죽어 마른 가지가 허공을 향해 뻗어있고 살충제를 살포하는 바람에 벌 나비가 사라져 산새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적막강산에 대한 아쉬움을 나는 형용사만으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솔밭과 산새가 사라진 만덕산의 봄, 그것은 마치 외할머니 돌아가신 외갓집을 찾는 듯한 허전함으로 다가왔다.
6. 유머를 적절히 구사하라
유머는 글의 재미와 멋을 살려준다. 유머는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글이 전개되는 상황과 긴밀히 맞물릴 때 효과가 있다. 요즘 시골은 젊은이를 보기 힘들고 노인들만 모여서 사는데, 안타깝지만 이것이 시골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을 나는 답사기 6권의 부여 답사기에서 내가 반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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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휴휴당을 마련하고 이장님에게 마을 회비를 냈을 때 이장님이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고 한 말로 대신 전했다.
“아직 환갑은 안 됐지유?”
“안 되고 말고요.”
“그럼 청년회로 들어가슈,”
유머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나온다.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수렵도>는 호랑이를 쫓아 치달리는 장면과 뒤를 돌아보며 사슴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힘찬모습으로 유명한데, 화면 한쪽 구석에는 말을 타고 졸면서 서서히 나타나는 고구려 청년이 묘사되어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7. 은유를 음미하게 하라
문장 속에 은유의 상징이 함축될 때 독자들의 사색을 일으킨다. 답사기 1권의 문경 봉암사 답사기에서는 가양주 9단이 과실주 담는 광경을 설명했다. 가양주 9단이 과실을 맑은 물에 헹구어 병에 넣고 증류수를 넣은 다음 3개월 후에 과실을 빼어내고 엑기스만 담아 밀봉한 다음 어두운 곳에 놓아두어야 한다고 했을 때 한 사람이 선반에 놓고 보면 안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가양주 9단은 느린 어조로, 그러나 단호하게 반드시 어두운 곳이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술은 자기가 변해가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아요.”
이런 은유 속에는 인생이 들어 있는 것이다
8. 비판하려면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라
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아둔한 현실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특히 초기의 1권, 2권이 심하다. 그로 인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도 당하였고 개인적으로 사과를 드리기도 하였다. 그것은 내가 글쓰기에 서툴러 직설적으로 비난했기 때문이다. 문화적 수사를 동원하여 불특정 다수를 비판한 경우는 좋은 유머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9. 인용으로 내용을 보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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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생명은 거기에 담긴 내용에 있다. 형식이 서툴더라도 내용이 충실하면 독자들이 용서하지만 내용이 빈약한데 형식만 번지르르하면 독자가 흉보거나 욕한다.
내용이 정확하고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 인용이다. 부석사 답사기를 쓰면서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인용한 것은 그 아름다움을 나의 표현력으로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글 내용을 보강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답사기 2권에서는 석굴암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남천우 교수가 “신라인들은 사인(sin) 9도에 대한 정확한 값을 구할 수 있는 기하학을 최소한도의 것으로 갖고 있었다”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은 고미술의 과학을 증언하는 구체적인 예시였다.
10. 각 문체의 특징을 파악하라
문체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지만 간결체, 화려체, 서사체, 세 가지가 기본이다.
간결체로는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절구(絶句)라는 고요한 시를 들 수 있다.
만리 푸른 하늘엔 구름이 일고, 비가 오는데 萬里長天 雲起雨來
빈산엔 사람은 없고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空山無人 水流花開
화려체로는 당나라 이백(李白)의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신다’는 월하독작(月下獨酌)의 다음 구절을 들 수 있다. 그 이미지의 구사가 현란하다.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잠반월장영 暫伴月將影
모름지기 이 봄을 즐기리 행락수급춘 行樂須及春
내가 노래하면 달은 서성이고 아기월배회 我歌月徘徊
내가 춤추면 그림자는 어지러이 움직인다. 아무영영란 我舞影零亂
서사체는 길게 늘어지는 만연체도 있지만 잔잔히 서술해 나가다 반전을 줄 때 극적 효과를 일으킨다. 한 예로 송나라 소동파의 ‘아이를 목욕시키며 재미 삼아 쓴다’는 세아희작(洗兒戱作)을 들 수 있다.
사람들 모두 자식 기르며 총명하길 바라지만,
인개양자 망총명 人皆養子望聰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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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총명함 때문에 한평생을 그르쳤네 아피총명오일생 我被聰明誤一生
원하노니 우리 아이는 어리석고 미련해서 유원해아우저로 惟願孩兒愚且魯
아무 탈도 어려움도 없이 정승판서(공경) 되거라
무재무난도공경 無災無難到公卿
11. 구어체로 글맛을 살려라
글은 문법에 맞아야 한다. 그러나 언어는 생활 속의 관습이기 때문에 바뀐다. 그래서 문법에 얽매이면 글맛이 사라질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글맛을 내기 위해 구어체를 사용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대가인 양 단정적으로 말하였다.”의 경우 “자기가 무슨 대가라고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면 글에 힘이 생긴다. 그렇다고 말하는 투로 쓰라는 것은 아니다.
12. 접속사를 절제하고 ‘의’를 활용하라
가능한 한 ‘그리고, 그러나, 그리하여, 그런데, 아무튼, 하지만’ 등 접속사 없이 글을 써라. 접속사를 자주 쓰면 글에 맥이 빠지기 십상이다.
13. 글의 길이에 문체와 구성을 맞춰라
글의 길이에 따라 문체도 달라야 하고 구성도 달라야 한다. 짧은 글 (200자 원고지 기준 10매 이하)은 문장이 단문으로 이어가야 좋다. 짧은 글에서 긴 문장은 글의 호흡을 늘어지게 한다. 중간 길이의 글(25매 내외)은 문단을 4~5개의 토막으로 나누어야 한다.
이 경우는 중간 제목을 설정하는 것이 좋다. 긴 글 (30매 이상)의 문장은 긴 호흡으로 써야 한다. 문장이 짧거나 단문으로 이어가면 글의 흐름이 튄다. 중간중간 에피소드나 사례, 또는 인용문을 적당히 배치해야 글에 활력이 생긴다.
14. 문장의 리듬을 생각하며 윤문하라
완성된 원고는 반드시 윤문을 거쳐야 한다. 이발소와 미장원으로 치면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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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질이 남아 있는 것이다. 윤문을 할 때는 독자의 입장에서 읽어야 한다. 문장이 읽기 편하려면 그 글 전체에 리듬이 있어야 한다. 독자는 한 문장도 두세 번은 끊어 읽는 것이 보통이니 거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15.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점검하라
나는 답사를 다닐 때 둥근 부채를 들고 다니는데 거기에다 쓸 글을 설계하듯 기본 틀을 적어두고 시간 있을 때마다 추가하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한다. 메모지보다 부채가 유리한 것은 글 전체의 구성을 놔두고 계속 덧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부채에 설계도를 그려본 다음 시공을 하고 나중에 인테리어를 하듯 마무리한다. 글을 다 쓰고 나면 바로 완성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묵혀둔 다음에 다시 읽고 객관적으로 검토한 뒤에 완성시켜라. 한밤에 쓴 연애편지는 아침에 읽어보고 부치라는 교훈이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이란 자기 논리가 있기 때문에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서술되는 성질이 있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으로 돌아와서 읽어보면 독자의 생리에 따라 걸리는 부분이 드러난다. 이런 구절은 빼는 것이 좋다든지 어떤 사항은 좀 더 설명을 보완하겠다든지 하는 생각이 반드시 나온다.
* 결론
대중적 글쓰기라고 해서 전문성이 약하면 안 된다. 전문성이 떨어지면 내용이 가벼워 글의 격이 낮아진다. 전문적인 내용을 대중도 알아듣게 하는 것이 진정한 대중성이다.
쉽고 재미있는 글을 쓰는 것이 대중적 글쓰기이다. 그래서 글쓰기의 진정한 프로는 쉽고, 짧고, 간단하게 쓸 줄 안다. 그러나 내용은 내용대로 충실히 갖추어야 한다. 당송 8 대가의 한 분인 당나라 한유(韓愈)는 <양양 우적 상공께 올리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부하되 한마디 군더더기가 없고 풍이물여일언 豊而不餘一言
축약했으되 한마디 놓친게 없다 약이부실일사 約而不失一辭
2024.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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