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 양근 군수 부군 행장〔從父楊根郡守府君行狀〕 불초한 나는 태어나 미처 선고(先考)를 섬기지 못하였고 어머니만 모셨다. 불초한 우리 여러 형제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혹 강론하다가 서로 양보하지 않고 쟁변하기에 이르면 어머니께서 항상 경계하기를,“내가 예전에 너희 계부(季父)인 군수공을 보니, 너희 선고와 함께 살면서 엄부처럼 섬겼다. 말하다가 혹 서로 논란하기도 하였는데, 형의 안색이 굳어 있는 것을 보면 바로 다시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자신이 불민한 탓이라고 말하였고 형 또한 그 때문에 안색을 풀어 한 번도 어조가 높아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지금 너희 대에 와서 가풍이 실추되었다.”하였다. 불초한 나는 어린 시절에 또한 곁에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천천히 말씀하시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시어 대단히 옛날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었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책을 들고 오면 매양 암송하여 가르쳤는데 한 글자도 어긋난 법이 없었으니, 이는 공의 성품이 노둔하면서도 확실하여 두루 관통하고 충분히 이해한 뒤에 그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배우러 왔다.공은 신사년(1641, 인조19) 12월 16일에 서울 집에서 태어났다. 을묘년(1675, 숙종1) 봄에 이르러 성균관에 들어갔다. 정사년(1677)에 처음 정릉 참봉(貞陵參奉)이 되었다. 경신년(1680) 봄에 사옹원 봉사에 승진되었다. 곧이어 사섬시, 내섬시에 옮겨졌다. 신유년(1681) 여름에 내자시 직장에 승진되었다. 임술년(1682) 겨울에 장악원 주부에 승진되었다. 계해년(1683) 봄에 사헌부 감찰에 옮겨졌다.갑자년(1684, 숙종10) 5월에 외직으로 나가 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87) 여름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기사년(1689) 가을에 양지 현감(陽智縣監)에 제수되었다. 경오년(1690) 여름에 체직되고 마침내 조정에 들어와 익위사 익찬이 되었다.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신계 현령(新溪縣令)에 제수되었다. 갑술년(1694) 봄에 양근 군수(楊根郡守)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병자년(1696) 5월 24일에 덕산(德山) 전장(田莊)에서 임종하였으니, 향년 56세였다. 가을에 전장 위의 모좌(某坐) 언덕에 안장되었다.공의 휘는 명진(明鎭)이고, 자는 명경(明卿)이다. 여흥 이씨(驪興李氏)는 고려조부터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성명한 우리 왕조에 들어와 판서를 지낸 휘 계손(繼孫)이 있었으니 바로 7대조이다. 응교를 지낸 휘 사필(士弼)은 고조이고, 첨정을 지낸 휘 우인(友仁)은 증조이다. 이상(貳相)을 지낸 휘 상의(尙毅)는 조부이고, 지평을 지낸 휘 지안(志安)은 고(考)이다. 종반(宗班)인 영제군(寧堤君) 휘 석령(錫齡)은 외조이다.전 부인은 광산 정씨(光山鄭氏)로 한성부 참군 휘 수선(壽先)의 딸이다. 계미년(1643, 인조21)에 태어나 갑술년(1694) 12월 그믐에 임종하였다. 광주(廣州) 대화산(大華山) 모좌 언덕에 안장되었다. 후 부인은 용인 이씨(龍仁李氏)로 효자인 휘 갑준(甲俊)의 딸이고 정존재(靜存齋) 휘 담(湛)의 현손이다. 무인년(1638) 9월 15일에 태어났으니, 지금 춘추가 76세이다. 공은 자식이 없어서 형의 아들 침(沉)을 후사로 삼았다. 손자, 손녀 약간 인이 있다.
첫댓글 이명진공의 장인 정수선공을 '참군'으로 쓰시고 졸 시에 참군 직책이셨다고 하니, 족보에 있는 '현감' 기록은 잘못된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승정원일기에도 나오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