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Texto del Evangelio (Mt 5,20-26): En aquel tiempo, Jesús dijo a sus discípulos: «Os digo que, si vuestra justicia no es mayor que la de los escribas y fariseos, no entraréis en el Reino de los cielos. Habéis oído que se dijo a los antepasados: ‘No matarás; y aquel que mate será reo ante el tribunal’. Pues yo os digo: Todo aquel que se encolerice contra su hermano, será reo ante el tribunal; pero el que llame a su hermano "imbécil", será reo ante el Sanedrín; y el que le llame "renegado", será reo de la gehenna de fuego.
»Si, pues, al presentar tu ofrenda en el altar te acuerdas entonces de que un hermano tuyo tiene algo contra ti, deja tu ofrenda allí, delante del altar, y vete primero a reconciliarte con tu hermano; luego vuelves y presentas tu ofrenda. Ponte enseguida a buenas con tu adversario mientras vas con él por el camino; no sea que tu adversario te entregue al juez y el juez al guardia, y te metan en la cárcel. Yo te aseguro: no saldrás de allí hasta que no hayas pagado el último céntimo».
♣ 생명을 키우고 넓혀가는 길 ♣
에제키엘 예언자는 제1차 바빌론 유배를 전후하여 어려움 중에 있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스스로는 회개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과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잘못을 경고합니다. 다른 한편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라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5,2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율법의 세목을 지키고 정해진 교리를 꼬박꼬박 지키는 것만으로는 신앙인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생명 존중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육신을 죽이지 않는 외적 행위 뿐 아니라, 성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말함으로써 평화를 깨뜨리며 마음에 상처를 주는 내적 살인도 해서도 안 된다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개별 목숨에 국한시키지 않으시고 관계 안에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최대한을 요구하시고, ‘보다 더’를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요구에 충분히 응답하며 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더 잘 응답하려면 무엇보다도 잠에서 깨어나 영적 감각을 되살려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늘 하느님 앞에 자신을 두고 온갖 피조물을 지극한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니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민감한 영적 감각을 지닐 때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에서도 분노, 폭언, 멸시, 관계 단절과 같은 평온과 일치를 깨뜨리는 행동을 그만 둘 것입니다. 아울러 형제와 ‘먼저’ 화해하지 않고는 참지 못할 것입니다.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면 분노, 증오, 악의, 험담과 같은 반생명적인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립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고”(5,23-24), "고소를 당하면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마지막 한 닢까지 갚고 얼른 타협하라."
우리 사회는 거짓과 무책임, 당리당략의 추구, 공정한 기회의 박탈, 금수저와 흙수저로 표현되는 신분 차별, 돈과 경쟁으로 숨쉬기 힘든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인들부터 대충주의와 안일함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5,26)이라 하십니다.
갚는다는 것은 생명을 거스르는 온갖 부조화와 불일치, 부정적인 언어와 움직임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이제 서로 존중하면서 애정어린 대화, 따뜻한 배려와 관대한 이해, 차별과 불화의 극복을 통해 자유롭게 생명의 관계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나 영성생활은 늘 '보다 더', ‘아직도 더’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잠든 의식을 일깨워 어떤 상황이나 관계에서도 주님의 영을 품고 ‘더’, ‘먼저’, ‘서둘러’ 사랑하고 작은 것 하나도 소중히 여김으로써 생명을 키워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주님께서는 포장보다는 알맹이, 외형보다는 본질을 중요히 여기십니다!
살레시오회에 입회 후 자주 듣게 된 돈보스코의 말씀, “교육은 마음의 일입니다.”라는 말씀이 처음에는 ‘대체 무슨 의미인가?’ 통~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청소년 사목 현장에 뛰어든 후,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 의미를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교사에게 있어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기준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위한 참 스승이 되는가? 아니면 그저 급여를 받으니 의무감에 교단에 서는 월급쟁이가 되는가는, 바로 이 마음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교사는 정말이지 아이들을 향한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도 사랑도 없었습니다. 별 기쁨도 보람도 없이, 그저 마지못해 교단에 서니 하루하루가 지겹습니다.
어떤 청소년 시설 책임자는 마음은 있는데, 그 마음이 전혀 엉뚱한 마음, 사심(私心)이었습니다. 그에게 아이들은 자기 홍보의 대상이요, 공금 횡령과 착복의 대상이었습니다.
돈보스코께서 강조하신 그 마음은, 다름이 아니라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의 미래를 활짝 열어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이 홀로 설수 있도록 도와 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픈 마음입니다. 결국 청소년들의 영혼을 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참 스승은 청소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을 극진히 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자식 같고, 친구 같고, 연인 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산상설교 중에 예수님 역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에 따라, 외적, 실제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계명을 준수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로, 시나이 산에서 주어진 율법 그 위에 새로운 해석을 추가하십니다. 외적, 실제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다해도 마음으로, 내적으로 하는 살인 조차 안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마음으로 이웃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해치고 죽였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선언에 따르면, 우리는 수십번도 더 재판에 넘겨지고, 지금쯤 전과 십범쯤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계명을 더 적극적이고 폭넓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실행할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이웃을 향한 분노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가득 한채, 제단으로 나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호통을 치십니다. 그런 예배는 마음, 영혼, 진정성이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럴듯한 포장보다는 알맹이, 외형보다는 본질, 외적인 것보다는 마음을 더 중요시 여기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뭘 하든 마음이 담겨있어야겠습니다. 매일의 인간 관계 안에서도, 매일의 전례적 삶 안에서도 마음과 영혼이 담길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진짜 의로운 사람은 이웃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가만히 보면 화를 내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더 큰 잘못을 한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 가장 화를 많이 내는 캐릭터가 이서진입니다. 몰래 외도를 한 친구와 동성애자가 된 친구에게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렇게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더니 속은 썩은 인간들이구만! 그러면서도 나 맨날 무시하고.”라는 식으로 화를 냅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에 가면 진짜 못된 사람은 이서진이었습니다. 갓 결혼해서 아내가 임신했는데 또 다른 여인을 임신시키고 심지어는 자신의 친구 아내와도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방귀뀐 놈이 성낸다.’는 것일 것입니다. 2005년 실제로 지하철에서 방귀를 크게 낀 사람이 그 냄새가 싫어서 자리를 바꾸려는 사람을 폭행했다는 뉴스가 실린 적도 있었습니다. 방귀를 뀌어서 든 죄책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 제물로 삼아야했던 것입니다.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은 그 만큼 자신 안에 죄가 많다고 보아야합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그 화를 내는 것에 대해 자신은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의로운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의를 화를 통해 정당화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의로움과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비교하십니다. 의로움은 빚이 없다는 뜻입니다. 빚이 없으니 당당하게 누구 앞에나 설 수 있는 마음이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말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어야” 의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은 이들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 이들이기에 그들이 바치는 예물도 더 의롭게 되기 위한 것입니다. 즉, 무언가를 희망하며 바치는 예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물은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어야지 그 예물을 통해 무언가 얻어내려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로움은 어떻게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넘어서야할까요? 먼저 우리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고 예수님만 하느님 앞에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분은 우리의 불의를 입으시고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할 때, 그분은 우리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입으신 우리 불의를 당신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달아 죽이셨습니다. 우리가 의로워짐은 이렇듯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 덕분입니다. 그러니 누구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의로움과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의로워졌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그렇지 못하다고 판단하며 화를 냅니다.
그러나 실상 화는 자신의 불의를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시며,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상태로 예물을 바쳐봐야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의로워진 사람은 자신의 공로가 하나도 없기에 누구에게든 화가 나지 않습니다.
화는 자신이 의롭다는 착각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다 불의한 사람이고 혹시 의롭게 되었더라도 이는 모두 주님 덕이니 같은 처지끼리 무슨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웃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로 예물을 바치는 것은 의롭지 않은 제물이니 바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 이웃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의로워진 사람은 남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두 발로 걷고 있다고 해서 네 발로 걷는 아이에게 화가 날 수는 없습니다. 본성이 자기 힘으로 바뀐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나쁜 본성과 마찬가지로 분노는 참아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생기지 말아야합니다. 남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바리사이-율법학자들처럼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게 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임을 명심하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과 사이좋게 지냅시다.
전삼용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