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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들과 함께한 어린 시절 김종수(왼쪽에서 세 번째) 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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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암으로 선종한 어머니 김양순씨 품에 있는 아기 때 김종수 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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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중학교 재학 때 소풍 가서 친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김종수(왼쪽) 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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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부터 4년간 대전 공군교육사령부에서 정훈장교로 복무하던 시절의 김종수 주교가 부동자세로 전투기 앞에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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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2월 13일 대전 대흥동주교좌성당에서 사제서품예식을 마치고 김종수 새 신부가 분향하고 있다. |
'겸손하고 합리적 성품을 지닌 교수신부'. 신임 대전교구 보좌주교 김종수 주교에 대한 세간의 평은 한결같다. 전형적 '학자 주교'다. 20년 사제생활 가운데 16년 6개월을 유학생으로, 교수신부로 살았다.
특히 성서학자로서 그의 면모는 특유의 예리한 통찰력이 빛난다는 평이다. 그의 강의는 신학생들 사이에 '명강의'로 통한다. 말씀을 말씀으로만 끝내지 않고, 삶에 적용시켜 하느님 체험과 함께 엮어 풀어냄으로써 신학생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늘 겸손하면서도 합리적 성품으로 신자들이나 신학생들을 다독였고, 신행이 일치하는 삶을 보였다.
또 신학교 내 성무일도 등 통상적 기도에는 함께하면서도(가끔 빠진 적도 있지만) 평소 경당이나 집무실에서 사진첩을 꺼내놓고 동료 교수신부나 신학생들 얼굴을 보며 짧은 기도 바치기를 좋아했다. 사진첩을 꺼내놓고 바치는 기도에 대해 김 주교는 "재미도 있을 뿐 아니라 마음속에서도 기도를 바치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들어 이런 식의 기도를 즐겨 바친다"고 전한다.
김 주교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영적 조언자' 내지는 '동반자' 같은 스타일의 사제다. 동료 교수신부나 제자들에게는 편안하고 온화하면서도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낙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1997년부터 대전가톨릭대에서 구약입문이나 모세오경, 예언서 등 구약학 전반을 강의해온 김 주교는 12년간 교수신부로 지내면서 사제 양성에 오롯이 헌신해 왔다. 저술은 2004년에 낸 「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바오로딸), 2007년에 펴낸 「거룩하신 하느님, 질투하시는 하느님」(바오로딸) 등 두 권이 있다. 둘 다 구약성경을 구세사적 관점에서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말씀에 자신의 체험을 녹여냄으로써 말씀에 따라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묵상서다.
김 주교는 1956년 2월 8일 대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동억(요셉, 1989년 선종)씨의 고향이 경북 영일군 기계면 봉계동 701이어서 본적은 그에 따랐지만 대전에서 나고 자란 대전 토박이다. 3남 4녀 가운데 여섯 째로, 남자 형제들 중에는 막내다. "제대로 된 종교는 가톨릭밖에 없다"며 집안을 가톨릭교회로 이끈 어머니 김양순(마리아, 1962년 선종)씨는 김 주교가 대신초등학교에 입학하던 7살 때 위암으로 선종해 큰 누나 김갑수(엘리사벳, 65)씨가 김 주교를 키우다시피했다.
대전중ㆍ고 시절부터 농구와 탁구, 야구 같은 스포츠에 수준급 기량을 보였고, 학업성적도 뛰어났다. 1974년에는 서울대 국사학과에 진학, 한국사 전반을 공부하며 발굴 현장을 다니기도 했고, 한때는 사회주의이론에 심취한 적도 있다. '나말여초(신라말 고려초) 사회 변화의 경제적 기초'라는 제목의 논문을 쓰고 1978년에 대학을 졸업한 김 주교는 학사장교로 공군에서 4년간 복무했다.
군 복무시절은 김 주교의 삶에서 '분기점'이다. 1971년 9월 25일 뒤늦게 세례를 받았지만 어렸을 적부터 대전 대흥동주교좌성당을 다닌 김 주교는 복무를 하는 틈틈이 성경공부를 하다가 말씀에 푹 빠졌다가 나오는 것 같은 체험을 했다. 그런 체험이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끌었다. 대학원 재학 중에는 조선 후기사 연구와 함께 혼자서 천주교 연대표를 만들기도 했다. 김 주교 말에 따르면, "성경공부를 하다가 미쳐서 신학교에 간 사례"다.
김 주교는 가톨릭대 신학부에 입학해서도 성경공부에 매진했다. '성경을 읽을 수만 있다면 밥을 안 먹어도 된다'고 했을 정도였다. 당시 구약학 교수 심용섭(현 서울 녹번동본당 주임) 신부는 "넌 그렇게 공부가 좋으냐"고 말을 했을 정도다. 김 주교는 이 말에 "사학을 전공하며 몸에 밴 확고한 역사 인식과 사회주의적 시각을 뛰어넘기 위해 신학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5년 만인 1989년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한 김 주교는 그해 2월 13일 사제품을 받고 1년간 논산 부창동본당에서 보좌로 사목했다. 1989년 사제수품 때 정한 사목표어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다. 첫사랑 격인 부창동본당에선 '사목을 잘 하는지, 못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만 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그 때 주임이던 박상래(교구 원로사목자) 신부와는 아직도 '각별한' 관계로 지낸다.
이어 1991년 4월부터 4년간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공부하고 '예레미야서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 사목한 해미본당에서의 본당 사목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신자들과 무척 정이 들어 헤어지기가 힘들었던' 체험이었다.
이승룡(바오로) 해미본당 총회장은 "면 단위 시골본당이어서 본당 재정이 열악해 신부님께서 외지에 나가 특강을 하시고 받은 사례비를 본당 살림에 보태실 정도였다"며 "불과 2년 6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자하셨을 뿐 아니라 사목에도 열심이셔서 신자들의 각별한 존경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김종수 주교 약력
▲1956년 대전 출생
▲1978년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1978~82년 군 복무
▲1984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수료
▲1989년 2월 가톨릭대 신학부 졸업
▲1989년 2월 13일 사제수품
▲1989~90년 논산 부창동본당 보좌
▲1990~94년 교황청 성서대학 성서학 석사
▲1994~97년 해미본당 주임
▲1997~2007년 대전가톨릭대 교수ㆍ학생처장ㆍ교리신학원장
▲2007년 6월~현재 대전가톨릭대 총장
▲2009년 2월 10일 대전교구 보좌주교 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