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평화 정상회의 결산…공동성명도 채택 못해
이집트, 라파 통로 일시 개방 불구 상시적 개방 난망
구호트럭 수백 대 중 20대 만 건너가, 인적왕래 차단
이스라엘, 공습‧진입‧하마스 제거등 3단계 계획 발표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7일)과 가자지구 북부 알아흘리 병원 폭발(17일)은 눈에 띄는 참극일 뿐이다. 카타르 알자지라 방송이 20일 집계한 인적 피해 규모는 '팔레스타인 지옥도'의 단면이다. 팔레스타인 측 4137명, 이스라엘 측 1403명이다. 팔레스타인 측 사망자 중 어린이가 1524명, 여성이 1000명이고 저널리스트가 11명이다. 반면에 이스라엘 사망자 중 363명은 군인·경찰이다. 7일 하마스의 선제공격 이후 20일 오전(현지시각)까지 사망한 숫자다.
21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평화 정상회의에 참석한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가운데) 2023.10.21. 유엔 누리집
'결의' 없었던 카이로 정상회의
직접적인 교전이 벌어지지 않고 있는 요르단강 서안에선 팔레스타인인 81명 대 이스라엘인 0명이다. 미국이 '중동 민주주의의 횃불(힐러리 클린턴)'이라며 상찬해 온 이스라엘 국가폭력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스라엘 대통령이 CNN 방송에 출연해 하마스 테러 현장의 참혹한 사진을 디밀며 아무리 하마스를 지탄해도, 부인할 수 없는 희생의 불평등이다. 미국과 유엔 등 이른바 국제사회 지도자들은 이번에도 현란한 '외교 놀음'을 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과 언어와 종교, 피를 나눈 인접 아랍 국가들은 어떨까.
21일 끝난 카이로 평화 정상회의는 공동성명조차 채택하지 못했다. 아랍 국가들을 중심으로 34개국 대표 및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등이 참석했다.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서구열강과 러시아, 중국, 남아공 등 브릭스(BRICS) 국가가 각각 대표를 참석시켰다. 정작 이스라엘과 하마스 대표는 빠졌다.
이들은 앞다투어 민간인 희생에 우려를 표명하고, 인도적 구호를 강조했다. 그러나 '우려'와 '촉구'는 귀중한 인명은 물론, 가자지구의 강아지 한 마리도 구하지 못한다. 카이로 평화 정상회의를 덤덤하게 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주최국인 이집트의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은 가자지구의 인도적 재앙을 끝내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평화의 길을 다시 열자고 촉구했다. 가자지구에 구호 물품 전달 및 휴전, 두 국가 해법 논의의 재개가 엘시시 대통령이 제시한 평화 노정의 3단계였다. '인도주의'는 절실하게 필요하되, 허기를 면하기는커녕 늘 '맛'만 보여주는 단골 메뉴가 됐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왼쪽)가 20일 이집트 카이로의 대통령궁에서 가자 위기 문제를 논의하고자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과 만나고 있다. 2023 10.20 [로이터=연합뉴스]
우려, 개탄, 촉구에 그쳐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당국(PA) 수반은 구호품을 전달할 '인도주의 통로'의 재개를 촉구했다.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은 "모든 민간인의 생명이 중요하다"면서 "이스라엘의 폭격은 전쟁범죄이자 인도주의 국제법의 위반"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회의는 지난주 이집트 정부의 제안으로 소집됐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팔레스타인을 두고 "가슴이 찢어지고 영혼이 타들어 가는 이미지에 근본부터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지역"이라면서 민간인과 병원, 학교 등을 공격하는 것은 제네바 의정서를 포함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반향을 기대하기 어려운 목소리다. "군사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이스라엘 장군들과 총리, 전시내각인데 이 자리에 이스라엘 대표가 없지 않나"라는 알자지라 방송의 논평이 정곡을 찔렀다.
이스라엘과 국교 수립국인 이집트와 요르단 지도자의 강한 항변이 전혀 의미 없는 건 아니다. 이스라엘 안보의 중요한 축인 이집트 및 요르단과의 평화조약을 흔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웅변은 웅변에 그친다.
각각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으로 이스라엘과 인접한 이집트와 요르단 지도자가 정작 목소리를 높인 것은 '인도적인 재앙'만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유입에 대한 우려가 더 컸다. 알시시 대통령은 개막연설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강제 이전과 이집트 시나이로의 이주를 엄중하게 반대한다"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압둘라 2세 역시 어떠한 팔레스타인 주민 이주에 대한 "단호한 반대"를 분명히 했다. 우려를 부채질한 것은 이스라엘이 결국 팔레스타인 주민을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몰아낼 것이라는 의혹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최종 해법'에 대해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집트 적신월사 직원들이 21일 라파 통로에서 가자주민을 위한 구호 물품을 실은 트럭이 통과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다. 2023ㅣ.10.21. AFP 연합뉴스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20일 3단계 작전을 발표하면서도 팔레스타인 주민의 긍극적인 거주지에 대한 언급은 피했다. 공습 및 지상군 진입의 1단계 '군사행동'으로 하마스의 무장전사와 군사인프라를 제거한 뒤 저항의 근거지를 제거하는 2단계 '저강도 작전'과 3단계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책임 철회'이다. 3단계는 영구 주둔을 하지 않고 이스라엘에 안전한 새로운 안보 체제 구축을 말한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이집트와 요르단 지도자들에게 팔레스타인 주민 이주 가능성을 공식 배제하기 전까지 계속될 우려다.
이집트·요르단엔 난민유입이 '재앙'
요르단과 레바논 등에는 그동안의 중동전쟁과 분쟁의 결과로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항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 사정이 녹록지 않은 이집트는 특히 이번 사태로 가자지구 난민의 대량 유입을 걱정하고 있다. 가자와 인접한 시나이반도 북부에는 이집트 이슬람 과격주의 분파가 활동하고 있기에 안보상의 우려도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에 이어 두 번째 '나크바(재앙)'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 주민 230만 명을 집단 처벌하려는 지금, 이집트와 가자지구를 잇는 '라파 통로'를 폐쇄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집트는 지난 7일 사태 발생 뒤 라파 통로를 닫고 있다가 18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텔아비브 방문과 21일 카이로 회의를 계기로 잠시 개방했다. 그 덕분에 이집트 쪽에서 대기하던 구호물품 트럭 200여 대 중 20대가 이날 건너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이중국적 소지자들은 이집트 입국을 하지못했다고 알 아라비아가 전했다. 현장의 유엔 구호기구 직원은 이날 전달된 구호물품이 기껏 "대양에 물한방울 떨어뜨리는 격"이라고 한탄했다. (텔레그래프) 이집트 당국이 그동안 폐쇄 이유로 내세운 것은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파손된 도로 보수 때문이었다.
21일 이집트와 가자지구를 잇는 라파 국경 검문소에서 이중국적을 갖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 가족이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2023.10.21. EPA 연합뉴스
라파 통로는 2005년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철군과 함께 이집트로 관할이 넘어왔지만, 이후 대부분의 세월 동안 폐쇄됐다. 2011년에는 막힌 라파 통로 탓에 가자지구로 향하던 튀르키예 선적의 구호선이 이스라엘군의 포격을 받기도 했다. 이집트는 테러리즘과 무기 밀수 및 불법 월경 활동 차단이라는 내용의 이스라엘과의 합의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실제론 팔레스타인 주민의 이동을 달갑지 않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아랍국 이기주의의 상징, '라파 생명줄'
가자지구 주민들이 생수는 물론, 전기와 식품, 의약품, 연료 등을 제공받지 못한 채 고립될 때마다 생명줄로서 라파 통로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전기가 끊긴 병원에 연료는 절실하다. 그러나 이집트는 간헐적으로만 개방해 왔다. 유엔 인도주의조정국(OCHA)에 따르면 해 8월 현재 가자지구의 생필품 37.1%와 식품 17%가 라파 통로로 전달됐다. 평시에도 하루 수백 대의 트럭이 날라야 할 물품이다.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습에 무력한 유엔과 미국도 라파 통로에 관해서는 목소리를 높여왔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21일 "각 측은 통로를 계속 열어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이로 회의 전 라파 통로를 먼저 방문했던 구테흐스는 현장에서 "인도적인 재앙이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패러독스를 목도했다"면서 지속적인 개방을 촉구했다. 그러나 지난 18년 동안 이집트 정부의 행동 양태로 미루어 통로의 상시적인 개방은 희망 사항에 가깝다. OCHA는 하루 최소 트럭 100대의 이동을 허용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스라엘 군이 가자지구 남부 칸 유니스에 있는 건물을 폭격한 이후 한 팔레스타인 주민이 어린이의 시신을 안고 나오고 있다. 2023.10.17 [AFP=연합뉴스]
지난 세기 아랍권에 번졌던 '아랍 민족주의'를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다. 정치적으론 소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인도주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 동포들의 생명줄마저 차단하는 것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아랍 이기주의'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소가 라파 통로이다. '인도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모욕해 온 상징이기도 하다.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과 이스라엘군의 국가 테러만 인도주의의 적이 아니다. 유일한 통로를 또 닫는다면, 이집트 정부 역시 인도적 재앙의 확실한 공범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