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06 주일낮설교 / 충만교회 민창근 목사
막 8:22-26 /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1)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예) 지난 주 감동받은 이야기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타이타닉호가 북대서양 한곳에서 가라앉고 있을 때였습니다.
공포에 떨고 있는 한 여인이 이제 곧 차가운 바다위로 내려질 구명보트위에 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 여인은 갑자기 배를 인도하게 될 사람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너무나 급한 일이 있으니, 잠깐의 말미를 달라는 것입니다.
어렵게 그 사람으로부터 3분의 시간을 얻었습니다. 3분이 지나고 나면 여인의 도착과 무관하게 배는 바다에 내려지고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생명은 단 3분 안에 결정이 되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여인은 달렸습니다. 자신이 사고 나기 바로 전에 놀았던 그 카지노를 지납니다. 수많은 칩들, 자신이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칩들이 수없이 발에 차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현찰들이 자신의 발에 밟힙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자신이 먹었던 숙소를 향해서 열심히 뛰어갑니다. 이미 숙소에는 물이 차기 시작해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다이아몬드 팔찌와 반지세트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이를 가질 시간이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침대 테이블 위에 있던 오렌지 세 개를 들고는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다시 여인은 돌아가게 됩니다.
실은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불과 30분전만 하더라도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던 그 오렌지 세 개가 이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30분전만 하더라도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그 귀한, 값비싼 보석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에, 정말 한 순간에 가치의 기준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순간에, 자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고,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변화되어지는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영원한 가치, 소망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붙잡고 달려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 소경 고치는 사건의 의미
복음서에 나타나는 소경(Blind) 치유 사건은 다섯 사건이 소개되고 있다.
1) 두 소경(마9:27-31) 2) 데가볼리의 소경(마15:30-31) 3) 소경 바디매오(마20:29-34, 막10:46-52, 눅18:35-43) 4) 벳새다의 소경(막8:22-26) 5) 날 때부터 소경(요9:1-7)
이 사건 중에서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의 흐름과 연관되어 중요한 의미를 주는 사건이다.
마가복음 1장 14절부터 시작되었던 예수님의 갈릴리 중심의 사역은 8장 26절로 마무리되고, 8:27-10:52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것(수난)이기에, 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은 그 수난을 준비하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참고 ; 예루살렘 중심의 사역은 11장 1절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8:27)에서 가버나움(9:33)을 거쳐 유대 지경(10:1)으로 해서 여리고(10:46)를 거쳐서 예루살렘에 이른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이 여행에서 예수는 한편으로는 갈릴리에서의 자기의 사역을 정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예루살렘에서의 자기의 수난을 준비한다. 이제껏 그렇게 많이 등장하던 이적 기사는 사라지고, 수난 기사와 제자들을 향한 교육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수난을 앞둔 이 기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교육시키고, 예수님이 걸어가려는 자기 희생과 섬김의 길에 대해 제자들이 따라올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걸어가려는 십자가의 길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제자들은 수난을 예고하는 예수를 책망하거나(8:32 베드로의 '간하매'는 책망하는, 비난하는 뜻이다.), 서로 누가 큰가 논쟁을 하고(9:34), 인사 청탁을 한다(10:35-37).
예수님은 이 기간에 제자들의 잘못된 기대를 교정하고, 올바른 고백과 올바른 행동으로 따라올 것을 요구하셨다.
다시 말하면 8:27-10:52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에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제자들의 몰이해, 예수님의 올바른 가르침이 세 번 반복되는데(① 8:31 - 8:32-33 - 8:34 / ② 9:31 - 9:33-34 - 9:35-37 / ③ 10:33-34 - 10:35-41 - 10:42-45), 이 세 번의 과정 앞뒤에 벳새다의 소경 고치는 사건과 바디매오의 소경 고치는 사건이 나오고 있다.
벳새다의 소경을 두 차례의 안수를 통하여 고치는 사건은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숙한 제자들의 닫혀진 눈이 서서히 떠지고 있는 과정과 연관이 되고, 10장의 바디메오의 분명히 보게되는 눈은 제자들에 대한 교육이 완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과 연관이 된다.
→ 어리숙한 시각, 내 중심 시각을 예수님 중심의 시각으로 바꾸자!
1.벳세다(뜻 ; '사냥집')의 특징(22절)
공관복음에서 이 벳새다는 베드로의 고향인데(요1:44), 고라신, 가버나움과 함께 예수님의 이적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의 장소로 언급되고 있다.
(마 11:20-24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 평행본문 : 눅 10:13)
- 예수님이 이 벳새다 지역에서 행하신 기적은 이방지역 두로와 시돈지역을 구할 만큼의 충분한 역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루살렘이라는 이스라엘의 중심에서 소외된 갈릴리에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부어졌지만, 그들은 믿지 못했다.
그래서 진정 인간이 심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푼 이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이적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면, 놀라운 역사를 많이 경험하여도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큰 은혜를 많이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거나,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예, 열명의 문둥이의 치유사건 - 감사를 모름).
→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감사하고, 믿음이 성장하고, 올바른 믿음의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2.사람들이 데리고 온 소경(22절)
소경에 관한 유머 : 싸움을 누가 잘하는가? 젊은이와 할머니 : 죽자사자(이판사판), 소방수 : 물불안가리니까, 소경 : 눈에 뵈는 게 없으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눈병은 모든 질병 중 가장 널리 퍼져있던 질병의 하나였다. 애굽에는 많은 사람이 한 눈을 잃었고, 두 눈이 다 먼 사람도 아주 많았다고 한다. 팔레스타이나 시리아 지방에서는 그렇게까지 심한 편은 아니었어도, 더위와 햇빛, 먼지 그리고 불결한 생활습관으로 인해 눈병이 쉽사리 번져나갔고, 하루만에 시력을 상실하는 수도 있었다고 한다.
소경의 영적 의미는 거짓에 사는 자, 진리를 모르는 깨달음이 없는 자를 의미한다.
(사 56:10)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애 4:14) 저희가 거리에서 소경같이 방황함이여 그 옷이 피에 더러웠으므로 사람이 만질 수 없도다
(요 9:39-41) 내가 심판하러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함이라
중요한 것은, 처음 예수님께 와서 손대시기를, 즉 눈을 뜨게 해달라고 원했던 것은 소경 자신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과연 믿음으로 예수님께 이 소경을 데리고 온 것일까?
벳새다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믿음의 분위기가 아닌 것을 생각하고, 26절의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면, 벳새다 사람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 소경을 데리고 온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치유에 대한 단순한 기대나 호기심 정도라고 볼 수도 있고, 예수님을 떠보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에게 온 이 소경의 수동적인 행동은 10:46의 소경 바디메오와 크게 비교된다.
소경 바디메오는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자기 쪽으로 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크게 소리 질렀다. 많은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여도 더욱 심히 소리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를 부르시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아왔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물음에,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믿음으로 말했다.
이때 예수님은 “가라,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라고 응답하셨다.
- 바디메오의 신앙은 크게 도전적, 확신에 찬 믿음, 간절한 소원, 주체적이었다.
그러나 벳새다의 소경은 이런 신앙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에 의하여 데려옴을 받고, 수동적인 자세, 수동적인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의 문제는 단순히 눈 문제만이 아니라, 이 사람의 내면에 있는 의존적인 성격이나 인격의 장애도 문제일 수 있다. 그것은 불신앙적인 벳새다 사람들이 심어준 잘못된 자아상일 수 있다.
예수님은 적극적인 믿음의 사람들에게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는 말을 해주셨는데, 이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믿음이 없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점진적으로 고치셨다.
→ 단순한 호기심이나 기대를 갖는 신앙, 떠보기 위한 신앙이 되지 말고, 확실히 믿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또한 수동적인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 적극적인 믿음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믿음은 남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고백하고, 섬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예) 야곱의 믿음 - 루스(벧엘)에서 시작 : 아버지가 가르쳐준 믿음이 광야에서 나의 체험적인 믿음으로!
신학교 처음 갔을 때 - 부모들로부터 받은 피동적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탑을 쌓으라!
남이 하라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도적으로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배하고, 감사하고, 헌신하고, 참여하는 믿음이 되라!
3.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23절)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실 때처럼, 그 소경의 손을 붙들고 마을 밖으로 나간 것은 일차적으로 귀먹고 어눌한 자에 대한 친밀한 언어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만을 위한 시간, 공간, 그만을 위한 사랑의 표현을 하심으로, 그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행동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하심으로서 벳새다에 큰 권능을 행하시었지만 헛된 일이 되고만 것에 대하여 책망하시려는 뜻일 수 있다.(마 11:21). 소경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불신앙적인 모습을 꿰뚫어보셨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행동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사42:16)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사 43:8)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내라
소경의 손을 붙잡았는데, 주의 붙드심에 대한 표현이 성경에 많다(시 3:5, 18:35, 20:2, 37:17,24, 41:3,12, 51:12...) : 의인을 붙드심, 쇠약한 병상에서 붙드심, 오른손으로 붙드심, 인자하심이 붙드심, 고아와 과부를 붙드심...
(시 145:14)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
(히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 소경의 손을 붙드시는 예수님처럼, 오늘 우리도 소경된 자를 잘 인도하며, 깨닫게 하고, 연약한 자를 붙들어주어야 한다.
(살전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군대대열에서 이탈 - 일하지 않고 문제일으키는 사람)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 나는 누구의 손을 붙잡아 끌어주고 있으며, 누구에게 기대와 소망을 주고 있는가? 누구를 잘 인도하고 있는가? (예) 군대의 사고방지 - 군종활동의 손잡아줌
4.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다(23절)
예수님은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손을 대셨다.
막 7:33의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실 때도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요 9:6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실 때도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유대적인 치유의 이야기속에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치유를 위한 행동이요, 그 소경을 사랑하는 표현이다.
그냥 말씀으로 고쳐주시는 것과 달리 치유를 위한 여러 가지 행동을 보임으로 그 소경에게 치유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노력을 보임으로 그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예) 짐승들을 보면 침 묻은 혀로 새끼들을 핥아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표요 또한 치료행위이다.
좀 더럽게 여겨지지만 우리들은 모기에 물렸다든지 여러 가지 질병들에 침을 바르는 본능적 기초한 의료 행위를 볼 수 있다. 물론 정말 사랑하는 관계나 친밀한 관계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땀, 눈물, 피 뿐 아니라(겟세마네 동산) 침까지도 사랑과 희생으로 주셨음을 알 수 있다.
(예) 파푸아 뉴기니의 ‘하우나’족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병 고치는 사람을 ‘침 뱉는 자’라고 부릅니다. 마릴린 라스로(Marilyn Laszlo) 선교사는 마가복음 8장 23-24절을 번역했던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느 날 저녁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때, 번역 조력자였던 바울이 그날 번역했던 부분인 마가복음 8장 23-24절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안수하시고 ‘보이느냐?’하고 물으시니 그가 주위를 둘러보고 “예,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그 마을의 “침 뱉는 자”들이 말을 가로막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 바울은 “예수께서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라는 구절을 다시 읽었습니다. 세 명의 마을 지도자들은 예수의 치유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하우나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침 뱉는 자”로 인식했고, “예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침 뱉는 자’이시다!”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공표했습니다.
→ 오늘 우리도 어떻게 하면 땀과 눈물, 피뿐 아니라, 침을 주를 위해 사용할 수 있고 드릴 수 있는가?
그것은 침이 마르도록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일 것이다.
'나의 침을 주께 드리리라, 이웃을 위하여 쓰리라' 다짐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