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브아 사건: 이스라엘의 몰락(삿17-21장)
사사기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뉩니다. 곧 사사기 전반적인 성격에 대하여 삿 1-2장이 기록하며 사사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삿 3-16장까지 기록되어 있고, 삿 17-21장은 사사시대의 시대적 상황이 어떠하며 얼마나 부패하였었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삿 1-2장은 전반적인 상태를 서론적으로 제시한 것이며, 삿 3-16장에서는 역사적인 인물중심으로 이스라엘이 얼마만큼 패역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끝으로 삿 17-21장에 와서는 도저히 다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러서는 안 될 만큼 부패해진 이스라엘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패된 상황에서 사사기는 반복적으로 어떤 현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점이 아주 특이합니다. 곧 그것은 이스라엘에 왕이 있어야 한다는 암시입니다.
삿 17장은 미가라는 사람의 등장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그가 어머니의 돈을 훔쳤음을 어머니에게 고백하면서부터 이야기가 발단됩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그 돈을 가지고 놀랍게도 신상을 부어 만들고 그 돈을 신당을 짓고 맙니다. 그뿐만 아니라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성막에만 있어야 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마음대로 제사장까지 세웠습니다.
당시에는 그러한 일들은 사사로운 일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곧 집집마다 신상을 하나씩은 만들어 두었음에 틀림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이 깊은 우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삿 17:6에 와서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하면서 마치 그러한 이스라엘의 부패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감당해야 할 왕이 없어서 그런 현상이 발생한 것처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암시는 삿 18:1에서도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라고 나타나며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는 삿 19:1에서도 역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 ---}라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사기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21:25)라고 마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반복적인 기록은 사사시대가 끝이 나고 뭔가 새로운 시대 곧 왕이 통치하는 시대가 올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삿 17-18장에서는 앞에서 잠시 말씀드렸듯이 미가의 신상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는 어느 시대인지 확실치 않으나 삿 18:1에서 단지파가 얻었던 유다지파 기업의 서쪽의 땅에서 아모리 족속에 의해 쫓겨나 북쪽의 라이스 족속의 땅으로 옮기고 있음을 볼 때 삼손 이전의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이 사건을 뒤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처음에서 말했듯이 사건의 성격상 이스라엘이 이만큼 부패해져 있음을 결론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미가가 신상을 만들고 섬기고 있을 때 베들레헴으로부터 레위인 한 사람이 이르렀습니다. 그는 적당한 직업이 없어서 거처할 만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마치 미가가 그를 보고 {네가 나와 함께 거하며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삿17:10)고 제의하자 그 레위인은 미가의 집을 위한 사적인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미가는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을 주실 줄을 아노라}(삿17:13)고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래 제사장은 실로에 있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며 레위인이라면 의당히 태어날 때부터 성소에서 일을 해야만 합니다. 더군다나 개인이 사사로이 신전을 만들고 신상을 섬기고 그것을 위해 제사장까지 세우는 일이란 이스라엘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때 당시에 종교적으로 얼마나 부패하였었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패역 된 모습은 이에서 끝까지 않았습니다. 남쪽의 단 지파가 자기들에게 맡겨진 유업의 땅을 아모리 족속에게 빼앗기자 다섯 사람을 정탐꾼으로 삼아 새로이 거처할 땅을 찼던 중 미가의 집에 이르게 됩니다. 마침 그들은 레위인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아 레위인이 단 지파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단 지파 사람들은 {청컨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삿18:5)고 묻자 레위인은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삿18:6)고 대답합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는 죄악된 모습입니다. 단 지파에게 주어진 기업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받게 될 기업의 상징이며 보증인데도 불구하고 그 기업을 빼앗기는 것부터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용납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정식 제사장이 아닌 사이비 제사장에게 묻고 대답을 구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했든 그들은 라이스라는 북쪽에 올라가서 그곳이 좋게 여겨져 자기 동족들에게 고함으로 정복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라이스를 치러갈 때 미가의 집을 지나면서 레위인에게 한 사람의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는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하자 레위인은 미가의 집을 떠나 단 지파를 좋아 가버립니다(삿18:19-20).
그러자 미가가 동네 사람들을 동반하여 좇아 이르자 단 지파 사람들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미가는 포기하고 돌아서 버렸고, 단 지파는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들을 모두 칼로 쳐 죽이고 미가에게서 빼앗아온 신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도무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삿 19장에서부터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은 앞에 있는 종교적 타락과는 다른 도덕적 타락의 모습을 단적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곧 레위 사람이 첩을 얻었는데 그 첩이 부정한지라 친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얼마 후 레위인이 그 첩을 데려오기로 마음먹고 장인 집에 가게 되면서 이 사건이 발생됩니다. 첩의 아버지는 레위인에게 3일간을 붙잡으며 먹고 마시며 즐기다가 여섯째 날에서야 비로소 길을 떠나게 됩니다.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여부스 곧 예루살렘에 이르러 저녁이 되자 그곳에서 유숙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자 베냐민 지파가 살고 있는 기브아로 가서 유숙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맞이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고 난 후에야 한 노인이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겨우 잠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마시고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기브아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며 레위인을 끌어내어 상관을 하겠다고 난리를 피게 됩니다. 남자들이 남자로 더불어 남색을 행하는 것을 요구할 정도로 이미 이스라엘은 도덕적으로 완전히 부패해졌던 것입니다. 그러자 집주인이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악을 행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삿19:23-24)고 간청하자 그들로 첩을 끌고가 밤새도록 욕을 보이다가 새벽녘에야 놓아줍니다. 그러자 첩은 그만 집 문에 이르러 죽어버립니다. 레위인이 아침에 그 집을 나서려다가 첩이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집에 데리고 와서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 두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며}(삿19:29) 그것을 보는 자가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삿19:30)고 분개를 하며 미스바로 모이게 됩니다.
미스바로 모인 이스라엘은 사십만 군대를 조직하고 기브아로 내려가 기브아를 징계하고자 했습니다(삿20:10-11).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무엇이 진정 공의이고 의리인지 구분되지 않은 비참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베냐민이 유다를 이겨 이만 이 천명을 죽였습니다. 그 이튿날에 또 다시 베냐민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일만 팔천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징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온 이스라엘이 회개할 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서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고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삿20:26), 여호와께서 베냐민과 다시 싸워야할 것을 묻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십니다. 처음에는 베냐민이 이스라엘을 삼십 명 정도 죽이자 지난날처럼 승리하는 줄 알고 쫓아 나오다가 복병작전에 말려 그 날에 베냐민사람 이마 오천 일백 명을 몰살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겨우 육백 명만 남아서 광야의 림몬 바위에 숨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의 모든 만나는 자와 가축을 다 쳐죽이고 성읍마다 다 불살라 버림으로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삿20:48).
그러나 이내 베냐민 지파가 멸절되어 이스라엘에서 한 지파가 끊어지게 됨을 이스라엘은 안타까워하게 되자 야베스 길르앗이라는 이방인의 성을 쳐서 모두 죽이고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잡아 베냐민의 남은 자들에게 주고 그래도 모자라자 실로에서 매년 여호와의 절기로 모이는 날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춤추러 나오는 여자들을 붙들어 아내로 삼도록 묵계를 내림으로써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멸절되지 않도록 비상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후에 베냐민은 그 묵계대로 여자들을 잡아다가 아내로 삼고 불타버린 성읍들을 다시 재건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의 두 사건 즉 미가의 신상사건과 기브아의 살인 사건은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경건을 잃어버렸고, 도덕적으로 몰락해버린 모습을 단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사기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9삿21:25)고 끝마쳐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곧 왕의 출현이 시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왕은 메시야를 가리키고 있음에 또한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임직을 할 때 기름을 붓는 직분이 셋 있었습니다. 곧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왕이었습니다. 이처럼 기름을 부은 사람을 “메시야”라고 합니다. 그리고 메시야란 히브리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이 말을 신약의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나 그리스도나 똑같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 것이며, 왕, 선지자, 제사장들은 모두 메시야이며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의지하고 믿는 예수는 그들과는 다릅니다. 물론 예수님도 역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메시야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만 구약의 모든 왕, 선지자, 제사장 즉 메시야들은 모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해 세워졌던 인물들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그리스도들의 완성이시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사기가 왕이 필요하다고 할 때는 왕 중의 왕이신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통치가 절박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메시야이신 왕은 어떻게 이 땅에 출현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모든 관심을 기울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해답은 룻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