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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협 창립대회 1986년 전두환 군사독재의 사슬이 시퍼렇던 시절 전태일기념관에서 열린 유가협 창립대회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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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가 없는 곳에는 공화국도 없다"고 했다. 명색이 공화국, 그것도 민주공화국에서 정의는 불의의 세력에 설 자리를 빼앗겼다. 하여 천주교 사제들이 나서 '정의'의 불쏘시개를 살리고자 힘든 길을 걸었다. 해가 바뀌어 1986년이 되었다.
86년은 전두환 정권의, 그 억압의 절정과 함께 한계가 드러나는 해다. 그 스스로 대통령 임기를 7년으로 정했으니 개정한 헌법에 의해 이제 권력의 수명이 1년만 남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각 대학과 개신교계를 중심으로 재야단체 등이 1월부터 개헌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독재정권의 억압 속에서 국민들이 그 나름대로 법의 테두리에서 펼칠 수 있는 지극히 초보적 운동이었다. 그러함에도 불의한 독재정권은 국민들의 소박한 염원까지 짓밟고 개헌서명 자체를 금하고 관계 인사들을 구속하는 어이없는 일을 계속 자행하였다.
그러나 권력의 억압은 한계가 있다. 줄기차게 이어지는 개헌서명운동을 물리적으로 막기는 했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었다. 정부당국의 무리와 경찰의 권인숙 양 성고문 은폐조작사건으로 불거진 국민적 연대는 결국 87년의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사건의 폭로와 함께 사제단의 단식투쟁을 통해 1987년 6.10 국민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주석 1)
1986년과 1987년은 한국현대사에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학생들의 분신이 잇따르고 불의한 권력은 단말마적인 행태를 보였다. 1986년의 주요 사건이다.
2월 12일 - 야당, 1000만 명 개헌 서명운동 돌입
4월 28일 - 서울대생 김세진ㆍ이재호, 신림동 4거리에서 분신(김세진 5월 3일, 이재호 5월 26일 사망)
5월 2일 - 대한변협, 〈1985년 인권보고서〉발간해 고문과 수감자 폭행 등 인권침해 사례 발표
5월 3일 - 5.3 인천사태
5월 6일 - 보안사, 서노련 활동가 6명 불법연행
7월 3일 - 부천서 성고문 사건 권인숙, 강제추행 혐의로 문귀동 고소
7월 16일 - 검찰 부천서 성고문 사건 근거 없다고 수사결과 발표
9월 6일 - 월간 <말> 특집호 '보도지침' 발간
10월 17일 - 검찰,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우리의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라고 발언한 신민당 의원 유성환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10월 20일 - 경찰, 구국학련의 상부조직 '노동해방전선' 적발
10월 28일 -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
11월 26일 - 정부, 북한의 금강산댐 위협에 대응한다면 평화의 댐 건설 발표
정의구현사제단은 1월 27일 장충동 분도회관에서 〈권력과 카리스마적 교회〉란 주제로 윤종관 신부의 강론을 듣고 격동기 종교인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였다. 3월 10일에는 같은 곳에서 이돈명 변호사의 〈현 시국과 정의평화운동〉이란 주제의 강연이 있었다. 또 4월 15일에는 분도회관에서 〈민주화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길〉이라는 주제의 토론을 벌였다.
사제단은 5월 6일, 그동안의 토론을 논거로 개헌문제ㆍ언론자유ㆍ통일 등 현안에 대해 '민주화, 인간화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내용을 담은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 민주화, 인간화의 복음 △ 인간성에의 갈망 △ 민주화에의 요구 △ 개헌문제 △ 민주화에 대한 견해와 군(軍) △ 언론의 자유와 KBS △ 국민 경제와 인간의 존엄 △ 올림픽과 민족화해와 통일 △ 민족적 현실에 대한 각성 △ 똑똑히 보고 기록합시다 △ 화해를 위하여 △ 우리들의 호소 등으로 나뉘어 정리된, 현실 진단이고 방향을 제시한 알찬 내용이다. 마지막 대목을 소개한다.
이제 우리는 서로 갈라진 세계를 사랑과 정의를 통해 화합으로 이어야 할 우리 교회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우리들의 국가공동체, 우리들의 민족공동체를 아무 사심 없이 비워진 마음으로 건설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진정 새롭게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편견과 독선, 기득권과 욕심을 모두 버리고 우리 하나가 되어 새 하늘, 새 땅의 질서를 창조합시다. 거기에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있습니다.
민주화되고 인간화된 사회는 평화의 상태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 사회의 창설자인 하느님께서 인간사회에 부여하신 질서, 또 항상 보다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실현해야 할 그 질서의 현실화가 민주화요 인간화이며 동시에 평화인 것입니다.(사목헌장 78 참조)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 24) (주석 2)
주석
1> 함세웅, <민초들, 민주의 텃밭을 지키다>, <암흑속의 횃불(7)>, 22쪽.
2> <암흑속의 횃불(7)>, 1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