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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9일 월요일
◑ 오늘의 말씀 묵상 ◑
※ Hallelujah!
- 오늘도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 추운 아침이 계속 시작되고 있습니다.
- 어제 구주강림 둘째 주일 예배에 은혜 많이 받으셨지요? 이제부터 한 주간을 삶이 적용되는 예배에 형통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고난 중에서도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하여 맡은 직책과 직분 앞에 지혜롭게 선한 일에 겸손히 순종하여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본 문 ◑
{ 욥기 3장 1- 10절 }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5.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6.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7.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8.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 제 목 ◑◑◑◑
◗◗ 욥의 고난에 대한 탄식
◑◑◑본문 이해와 요약 ◑◑◑
◗ 3장에서는 욥이 가졌던 양 칠천 마리와 약대 삼천 마리, 소 오백 마리, 그리고 암나귀 오백 마리를 잃었고, 종들과 사랑하는 자녀와, 건강과 명예도 다 잃었습니다.
- 한마디로 욥은 그의 존재를 지탱하고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었던 것입니다.
-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보충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느끼는 고난과 고통은 죽음보다도 더 괴로운 것입니다.
- 그래서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물론 그런 한탄조차 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기뻐할 수 있다면, 그는 참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만일 욥이 자기가 지은 죄악으로 인해 고난을 받았다면, 본장의 내용과 같은 한탄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다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했을 것입니다만, 욥은 자신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를 행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신의 생을 저주한 것입니다.
- 본서 후반부에서 밝혀지지만, 욥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으며, 욥이 제아무리 의롭게 산다 할지라도 그는 본질적으로 죄인인 것이기에 그는 시험에서 면제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 이 처럼 인간 중에 의인은 아무도 없으므로 이 세상에서 받는 그 어떠한 고난이나 시험도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 그리고 염세주의는 하나님의 창조 자체를 부정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도 거부하기 때문에 믿는 성도로서 취할 사상이 아닙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하나님의 창조를 불의하고 의롭지 못한 것으로 보며, 현재의 모든 삶도 부조리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 따라서 그들의 염세주의는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죄악 된 세상을 선별적으로 거부하는 건설적 염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모든 염세주의가 아니라 철학적 염세주의이며 인본주의적인 파괴적 염세주의입니다.
- 그러므로 성도에게 고난이 다가오는 것은, 비 진리 가운데 있는 세상에서는 정신적, 육체적인 고난이 당연히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 초대 교회에서는 위정자들의 박해가, 그리고 현대 교회에서는 죄악 된 세속 문명을 거부하는 성도들의 정신적 고뇌와 사회적 소외가 고난이 필연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 그렇지만 기독교는 금욕주의나 염세주의는 분명히 아니기 때문에 성도들은 고난이 닥칠 때,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말고 하나님의 연단 후에 축복이 있음을 믿고, 기쁜 마음으로 참고 인내하며 고난을 맞이하고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욥은 갑작스럽게 당한 끔찍한 재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 그러나 그 재난이 너무나도 극심한 것이어서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게 되므로 그 결과 욥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범죄 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좌절을 느끼고 그것을 한탄하게 됨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 친구들과 침묵 속에 있었던 욥이 첫마디를 열면서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자신의 출생 준비 기간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 욥은 그가 출생하기 이전의 날들과 빛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이 세상에 아예 태어나지도 않을 수 있었으며, 그렇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 현재와 같은 고통은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욥의 받는 고난과 절망은 이처럼 너무나 깊었던 것입니다.
-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대해 이중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인 동시에 현세에서의 삶의 복락을 제공하는 선한 수단으로 보며, 또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올무로 보는 것입니다.
- 이 두 사상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올바른 관점에서 적용해야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아 갈 수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 적용한다면 ◖◖◖
♥ 오늘의 핵심 (P.S)
☞ 믿음은 생사화복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이다.(욥기3장3,4절)
◈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 인간의 행복과 불행에 관한 사람의 잣대는 매우 가변적이며, 모든 인간의 생로병사는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 3,4절을 살펴보면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라고 하였습니다.
- 여기서 욥이 침묵 속에서 먼저 친구들이 듣는 중에 입을 열었는데, 가장 먼저 가정법을 인용하면서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이라고 고통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 욥은 아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을 말하라고 한다면, 대개의 사람들이 생일날을 들 것입니다.
- 그 만큼 사람들은 생일날을 축복 받은 날로 생각하며, 또 그 날을 기억하여 서로가 축하 해 줍니다.
- 현대에도 아직도 남아 선호 사상이 남아 있지만, 고대 사회에서 남아의 탄생은 그 집의 경사 중의 경사였습니다.
- 그러한 이유로 고대 사회에서는 여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죄인 취급을 받았으며 아들을 낳으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 그런데 욥은 그러한 자신의 생일날을 아들로 태어나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을 그 생일날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 물론 그가 처음부터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는 자기에게 찾아온 고난이 너무나 심한 나머지 차라리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자기의 생일날을 저주한 것입니다.
- 그에게 있어 그 동안 가장 행복한 날이었던 생일날은 이제 고난으로 인해 가장 불행한 날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행복과 불행에 관한 사람의 잣대가 매우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해서 어제는 행복한 것 같았는데, 오늘을 불행한 것이 인간이요, 오늘은 불행한 것 같았는데, 내일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처럼 인간의 모든 범사에 일어나는 마음과 생각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것입니다.
- 연약한 인간은 이렇게 흔들리는 존재이며, 동일한 일로 최고의 기쁨을 누리는가 하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불행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 따라서 사람이 가진 잣대나 기준은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일 수 없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잣대를 행, 불행, 가치관, 삶의 중심으로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성경이 하나님만을 우리의 기쁨의 근원으로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하나님 혹은 하나님께서 행복의 기준으로 제시하시는 것을 나의 행복의 절대적 기준과 잣대로 가질 때 혹여 당장은 불행한 것 같아도 근원적으로 보면,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 또한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반드시 평강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따라서 이러한 이들은 삶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이제 성경이 가르치는 바, 행복과 불행의 기준과 잣대를 나에게서 이제는 하나님께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 그런즉 나의 기준과 잣대에서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기준과 잣대로 옮겨 놓읍시다.
-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회귀 본능 같은 것이 있어서 모든 중심을 자기도 모르게 자신에게로 옮겨오는 경향이 있기에 늘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 그러므로 절대 흔들림이 없는 이 행복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쉼 없이 자기중심적이 되려는 생각을 밀어내고 다만 내 생각이 하나님 중심적이 될 때까지 끝없이 밀어내야 비로소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 있기에 흔들림이 없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잠언3장 5절에서 “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 이사야26장 3절에서“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그리고 모든 인생의 생로병사는 하나님의 손에 전적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 4절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이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사실을 원망한 표현이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잡고 계심을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는데, 이것을 나타내주는 말씀은 이 4절만이 아니라, 본문 3장 전체가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사를 강하게 붙잡고 계심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 분문을 잘 살펴보면, 자기가 태어난 사실을 불평하는 욥의 탄식 가운데서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간 생명을 강하게 붙잡고 계신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사야2장 22절에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 시편71편 20절에서 “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사실 연약한 인간의 생명이란 그렇게 강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친구 요나단에게 자신과 사망 사이가 한 걸음뿐이라고 말한 것처럼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 사무엘상20장3절에서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 고관대작이나 부자는 죽음에서 멀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는 죽음에서 가까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 누구나 죽음을 벗 삼아 살아가는 것은 모든 인간이 동일한 것이기에 이사야는 인간의 생명을 수에 칠 가치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 신약에 야고보서 기자는 4장14절에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 그런데도 우리가 살고 죽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험한 세상을 살면서 우리의 생명이 건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 지금 내가 욥의 고난에서 그의 출생을 두고 탄식의 이유가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인간의 생사의 절대 주권자가 누구인지? 그 주권자 앞에서 내가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 어떻게 삶을 적용해 나갈 것인지? 묻고 있으니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믿음은 행복과 생사의 결정이 하나님의 주권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 바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단단히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기에,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우리를 내보내시고 굳세게 붙잡아 주시는 분입니다.
- 신명기32장 29절에서 “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 그래서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가녀린 생명조차 굳센 손으로 붙잡아 주시고 특히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의 생명에 관한 한 더욱 그렇습니다.
- 마태복음10장 31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남으로부터 그 때까지 길러주시고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다고 했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탄생한 때로부터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놓지 않고 우리의 생명을 붙잡고 계신 것에 늘 감사드리는 신앙이 됩시다.
-창세기48장 15-16절에서 “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 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 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욥과 같은 극한 상황에 몰린다 하더라도 이렇게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섭리와 뜻을 깨달아서 함부로 죽음을 말하고 생각하고 결단해서는 안 됩니다.
- 언제나 연약한 우리의 생명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동일한 애착을 우리 자신의 생명에 관해 가져야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붙잡아 주시는 것은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고, 참 된 가치가 있기 때문이기에 감사하며 사명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