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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10월 24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오 28,16-20)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환시를 받고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 메시지는, 주님께서 수많은 민족들과 백성들의 중재자가 되시어, 다시는 이 땅에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선포한다. 우리가 삶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소리는 온 땅으로,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갈 것이다(제2독서).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당신의 가르침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사명을 부여하신다. 모든 신앙인은 이 사명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수행해야 할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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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와 똑같이 되시려고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또 주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또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지금처럼 거짓이 난무하고, 진리와 진실이 왜곡되며, 불신이 팽배하고, 물질에 사로잡혀 있는 때도 일찍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잘못된 삶의 태도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진실이 거짓을 이기고,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는 진리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가 혹여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용기를 잃을까 봐 당신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되새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세상에 선포할 것을 다짐합시다. 그리고 선교사로 세상 끝까지 나아가 선교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든 형제자매를 위하여 오늘 하루만이라도 기억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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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충격이 너무 컸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옴츠려 있던 그들 앞에 부활하신 스승님께서 나타나시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전교란 예수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주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삶은 불안합니다. 공평하지 않게 보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물질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재물이 불안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셔야 불안은 물러갑니다. 전교는 이러한 ‘예수님의 힘’을 전하는 일입니다.
‘힘 있는’ 선교를 위해서는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서 남에게 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내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자신은 관리자일 뿐임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하는 일이 잘될 때는 고백이 쉽습니다. 하지만 역경을 만나면 흐지부지됩니다. 세상은 실천하는 신앙인을 원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믿음으로 버티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 신앙인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말로만 전교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립시다! -신희준신부-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따라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따라야 할까요?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데, 마침 동창 신부가 선물해준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발견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 안에 닻을 내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린다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쁜 모든 일과 마음 아픈 모든 일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나라를 선포할 기회를 제공해줍니다”(헨리 나웬). 지난 몇십 년간 우리 교회는 양적인 측면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TV를 보다가 신자 연예인을 봤거나 신자 정치인을 봤다고 해서 놀라워하지 않을 정도로 되었습니다. 학교나 직장이나 군부대 등에서 나만 홀로 가톨릭 신자였던 과거에 식사하기 전에 성호를 긋는것이 너무나도 쑥스러웠던 기억이 이제는 먼 나라의 이야기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사회에 신자들의 수가 늘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 사회가 과거보다 더 ‘행복’하고 더 ‘공정’하고 더 ‘아름다워’지지 못하였을까요? 오히려 그보다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넘쳐나는 ‘예수님의 나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신자’들은 많아지는데도 어째서 이런 것일까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갑자기 내면에서부터 크게 들려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며’ 사는 ‘참’ 신자들의 수는 크게 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세례를 받아 겉으로는 ‘복음화’가 되었지만 ‘내적 복음화’를 이룬 신자들이 애석하게도 많지 않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 사회 안에서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선포해야 할 대상은 크게 볼 때 둘이 됩니다. 하나는 당연히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한 우리 전교의 열정이 식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내리신 지상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 ‘내면’입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 교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이교인은 우리에게 세속의 가치관대로 살자고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이 사회 안에서 비교적 모나지 않고 손해 보는 일 없이살 수 있고 또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고 우리를 세뇌시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택하는 대신에 이 이교인의 가르침대로 살아왔습니다. 이 ‘이교인’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 역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지상 명령입니다. 물론 이 ‘이교인’이 순순하게 항복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가 지닌 최고의 무기는 우리의 ‘두려움’입니다. 그렇게 할 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과연 손해 보지 않을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근거 없는 두려움을 우리 안에 뭉게뭉게 지펴 놓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우리 안의 ‘이교인’이 만들어낸 헛된 두려움들을 이겨내야겠습니다. 아멘.__
선교는 사랑이다 -전삼용신부- 선교 하면 바로 생각나는 것이 영화 ‘미션’처럼 오지에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펼치는 선교 사업이나, 작게는 띠를 두르고 가두 선교나 가정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이런 단순한 선교의 개념은 변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번은 마더 데레사에게 어떤 힌두교를 믿는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심각하게 자신도 천주교로 개종하고 싶지만 자신의 종교에서는 개종을 하는 것이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어야 마땅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돌아가서 지금 믿고 있던 종교를 더 열심히 믿으라고만 하였습니다. 선교는 우리 식대로 세례를 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 종교를 믿게 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입니다. 세상을 두루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같은 분도 계시지만 짧은 생을 사셨고 또 수도원에만 있으면서도 전교의 수호성녀가 되신 소화 데레사도 있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작은 희생으로 하느님만이 아실만큼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셨습니다. 따라서 선교는 활동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도와 희생으로도 충분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는 최근 십년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하였지만 결과는 현상 유지였습니다. 그러나 특별하게 보이는 전교 활동이 많지 않았던 한국 천주교는 80%에 가까운 증가를 보였습니다. 또 최근에 마더 데레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김수환 추기경님 등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대해 이미지가 많이 향상 되었고 지금은 믿지 않지만 만약 종교를 갖는다면 가톨릭을 갖겠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단지 찾아가서 믿으라고만 하는 것은 큰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집안에 앉아서 오는 손님만 맞을 수는 없습니다. 찾아가는 선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시며 길 잃은 양들을 찾아 쉬지 않고 돌아다니셨습니다. 따라서 관상과 활동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좋듯, 선교도 기도와 활동이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마리아뿐만 아니라 마르타도 성녀이듯이 소화 데레사만 있어서도 안 되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선교의 방법은 이렇게 다양합니다. 중요한 것은 왜 선교를 해야 하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따라서 선교사명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의무입니다. 복음 전파가 첫 번째 사명이 되는 이유는 바로 복음 전파가 사랑의 가장 큰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집니다. 신앙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신앙으로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려는 사람을 붙잡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 대한 어떠한 사랑도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뻔히 보이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기에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구원도 장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당당하게 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선교 왕은 그저 자신의 옷가게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찬미 예수님!’ 하며 웃으면서 인사했다고 합니다. 그 인사말은 1984년에 교황님이 우리나라에 오셨을 때 처음으로 한 인사입니다. 그리고 다른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그 손님들 중에서 일 년에 40명이 세례를 받기를 원해서 인도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하신 일은 가톨릭교회의 신자라는 자부심으로 그저 인사로 사랑을 전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분은 천주교회 안에 있는 구원의 은총들을 깊이 체험하며 사시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항상 인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이런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도 입교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제 동기 신부 아버님은 언제 어디서나 성호경을 잘 그으셔서 목사님 4분을 비롯하여 일 년에 10명 정도는 입교를 시키신다고 합니다. 성호경만 잘 그어도 이렇게 많은 선교가 되는데 사실 식당이나 성당 바깥에서 천주교 신자임을 알 수 있도록 자신 있게 성호를 긋는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여기 로마에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함께 입원해 있던 분께 고해성사를 주고 오랜 냉담을 풀게 하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병실에서 성호를 긋지 않고 성무일도를 바치지 않았다면 그 분이 제가 사제인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엔 용기가 없어서 주위에 천주교 신자가 나타나 주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면 마지막 심판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부끄럽게 여길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그만큼 책임도 따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참다운 제자일 때는 예수님께 영광을 드리지만 가리옷 유다와 같은 제자일 때는 예수님께 큰 손상을 입히게 됩니다. 어떤 아들이 바깥에 나가서 어른들에게 참 잘 할 때는 그 어른들이 그 아이의 부모님을 존경하며 교육을 잘 시켰다고 하겠지만, 그 아들이 사회에 해가 되는 일만 하고 다닌다면 부모님을 비롯하여 가족 전원의 명예에 손상을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열거 했던 성인들이나 마더 데레사, 요한 바이로 2세, 김수환 추기경님처럼 위대한 분들이 될 수 없을 지라도 우리 주위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작은 사랑을 실천해도 감동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보다도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한 모습”이 사람들에게 더 큰 충격을 줍니다. 사람들은 결혼하여 돈을 많이 벌고 인기 있고 높은 자리에 앉아야 행복한 줄 알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데, 결혼도 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된 일만 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평온한 행복을 발견할 때 세상적인 가치관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고 참다운 행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대학 친구들도 평균 이상의 돈을 벌고 가정을 꾸리며 잘 살아가고 있지만 결혼도 못하고 돈도 벌지 못하는 저를 다들 부러워합니다. 그러면서 계속 정말 저의 삶이 행복하냐고 질문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행복하냐고 질문을 던집니다. 참다운 선교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행복하다는 것을 내면에서 드러나는 행복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앞으로의 결정은 그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와 사랑을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선교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실천합니다. 주님의 말씀 자체가 사랑입니다. 아버지께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어 영혼을 구원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지닌 신앙을 나누는 것이 곧 사랑인 것입니다.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주님께로 이끄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렇게 나 때문에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은 하느님나라에서 영원히 나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며 그것 때문에 행복이 더 증가될 것입니다. 나만 믿는다고 참 신앙인이 아니라, 적어도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 단 한 명을 위해서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참 신앙인인 것입니다.
선교 방법, 어린이들에게 배워야 " -이기양신부- 갈릴래아로 모여라!
우리가 기쁘게 살지 못하면서, 어찌? -안병철신부- 하 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아버지의 그 러한 보편적 구원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십자가 위에 서의 죽음’이라는 값비싼 희생을 치르셔야만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세상 안으로 파견 하시며 당신의 값비싼 희생을 통해 무상으로 나누어주게 된 구원의 기쁨을 모든 이에게 전하라 명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 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전해주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의 선교사명이야말로 주님께서 남겨주신‘유산이자 명령’ 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줍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 신자 로서의 정체성은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증언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에 관해 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없기는 하지만 무엇을 기쁜 소식으로 선포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짚 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복음이라는 용어는 본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나 전쟁 을 종식시키는 의미에서의 평화조약 체결 또는 승전 선포 나 새로운 임금의 등극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실질적인 기쁨’을 표명하기 위해 사용되어왔습니다. 교회는 그때까 지 사회적, 정치적인 용도로 사용되어 오던 바로 그 복음이 라는 용어를 그리스도 사건을 지칭하기 위해 갖다 쓰면서 주님이신 그리스도 사건을, 구원의 기쁨을 살게 하는 더할 나위 없는 결정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선포하기 시작한 것 입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우리 모두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롭게 해 주셨기에 우 리 모두가 온전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그리 스도교 신자들의 구원관은 바로 복음 자체인 그리스도로 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을 전교주일로 지내면서 구원의 문제에 있 어서조차 아직도 이기적인 장벽을 헐어 내지 못하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선교 사명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 깨워 줍니다.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 그리 스도 때문에 일상의 삶을 참으로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가 와 그분을 전 실존의 주님으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 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생각 해야 할 것은 복음을 살아야 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 는 삶이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구체적인 확신 없이 과연 복 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을뿐더 러 고통스럽기까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는“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언약해 주십니다. 그보다 더 큰 희망과 격려가 어디 또 있 겠습니까? 하지만 복음을 살며 전해야 할 신앙인들이 참으 로 기쁘게 살지 못하면서 어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하 는 질문이 혹시라도 이 순간 우리 모두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고, 스승을 배반한 아픔에 감히 부활하신 당신을 쳐다볼 수도 없었던 제자들을 모두 갈릴래아산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왜 부르셨을까요?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부르셨던 곳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으로 공동체로 어우러진 곳, 즉 첫사랑의 순수함과 열정이 어린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의에 빠진 제자들을 새 출발시키고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 갈릴래아로 부르십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세상에 파견하기에 앞서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계명으로 재무장시키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요. 제자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선교에 나섰듯이 우리도 복음 선포 사명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실천하자는 주일이 오늘입니다.
선교를 하자는 말이 나오면 신자들은 부담스러워 합니다. 거리선교하는 모습을 연상하면서 나는 그런 것은 못한다고 쉽게 생각해버립니다. 신심도 약하고 교리지식도 별로 없으며 또 나설 용기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선교는 방식이야 어쨌든 우리의 첫 번째 사명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며 성체를 모신 그 다음에 해야 할 것은 말씀 선포와 실천입니다. 저는 사목자로서 '누가 선교를 잘하고 어떻게 하면 선교를 잘 할 수 있을까?'를 자주 생각하게 되는데 선교를 잘 하고 못 하는 사람의 차이는 아주 간단합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많이 배우고 성당 직책을 여러 번 거친 분들이 선교를 잘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지만 의외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교를 제일 잘 하는 사람은 초등학생들입니다. 그것도 6학년만 되면 교만해져서 잘 못하고 유치부 어린이들이 제일 잘 합니다. 무엇보다도 순수해야 합니다. 이것은 저의 실제 경험입니다.
유치부 어린이들에게 "다음 주에는 성당에 안 다니는 친구들 한 명씩 데리고 성당에 나오세요"하고 이야기하면 이 어린 친구들은 당장 친구들 손을 잡고 말합니다.
"우리 신부님이 친구를 데려오라고 그랬는데 나랑 같이 가자."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친구는 그냥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조금 지나면 아이만 성당에 보내기가 좀 걱정스러운지 아이 엄마가 아이를 따라서 성당에 나오고 또 한참 있다가는 아빠도 못이기는 척하고 따라오게 됩니다.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가자!"고 제안하는 것이 선교의 시작입니다.
어른들은 가르치고 감화시켜 완전히 기권을 받아 데려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 힘이 들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십년지기 친구도 성당 이야기를 꺼내면 도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부담 없이 성당 구경이나 한번 가보자는 제안, 이것이 선교의 시작입니다.
성당에 나오는 계기는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당 건물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은 지나가다가 수녀님과 한 번 마주친 것이 계기가 되어서, 또는 영화 속 신부님이 생각이 나 등등 인간적인 것으로 출발해서 서서히 하느님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몰아붙이면 거부 반응이 일어납니다. 또 이렇게 성당에 나온 사람들은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성당에 처음 나오면 아주 불안하고 힘들어 합니다. 미신을 믿거나 다른 교파를 믿다가 성당에 나오면 벌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별별 생각이 다 들게 됩니다.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집에서 아이가 다쳤다면 성당에 나가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 꽤 있습니다. 특히 남자들은 용기가 부족합니다. 성당에 한 발짝 발을 들여놓는 데에 한 10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옆에서 신자들이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도 미사 중에 주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는 그 모든 거룩한 전례를 마친 후에 사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자들을 파견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그렇습니다. 신자들의 첫째가는 사명은 복음 선포 사명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노력하는 발걸음 속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며, 적어도 1년에 한 사람 정도에게는 복음을 선포해 신자의 기본 사명을 수행하는 멋진 신자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 명의 선교사가 파견되면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양승국신부- 가끔씩 해외선교를 꿈꾸는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럴 때 마다 “너무나 좋은 생각이다. 꼭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하자.”며 용기를 불어넣어줍니다. 얼마 전 이 세상의 가장 오지로 파견된 한 형제가 기억납니다. 이제야 막 사제로 서품된 형제입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풋풋한 젊은이입니다. 가족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선교지에서 겪게 될 갖은 고초가 손에 잡힐 듯이 떠오릅니다. 물설고 낯 설은 이국땅, 풍토병, 지독한 더위, 입에 댈 수조차 없는 음식, 외로움, 무엇보다도 끝까지 괴롭히는 언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선교사를 지망합니다. 저희 입장에서도 사실 아깝습니다. 오랜 기간의 수도자 양성 끝에 이제야 ‘써먹을 사람’ 한 사람 생겼는데, 한 번도 써먹지 못하고 고스란히 넘기자니 허탈합니다. 그러나 ‘한명의 해외 선교사가 파견되면 열 명의 성소자가 들어온다.’는 말을 굳게 믿으며 아깝지만 기꺼이 파견합니다. 오늘 모든 교회는 전교주일을 맞아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우리 한국교회 역시 해외선교사들로부터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노고는 오늘 우리 교회의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형제가 해외로, 그것도 가장 낙후된 오지로 파견된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한 형제의 마음 안에 선교사로서의 꿈이 생겨난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오직 복음 때문에 이역만리 머나먼 땅에서 ‘쌩고생’들을 하고 계십니다. 복음의 힘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정된 기반을 기꺼이 포기하게 하며, 불확실한 미지의 생활로 투신하게 하며, 결국 목숨까지 바치게 하는 복음의 매력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권고를 따라 보다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 안에 선교사로서의 열망이 활활 불타오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땅에 오셔서 청춘은 물론 평생을 헌신하신 선교사들을 바라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고국에 한 번씩 들르시지만 워낙 오래전에 떠나왔기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쪽에서도 이방인입니다.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영원한 이방인, 영원한 타향살이를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그들의 노고를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다 보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의 복음을 향한 열정을 다 파악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수백 배, 수천 배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록 쉽게 걸을 수 있는 판자 위라고 하지만, 높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 연결된 판자 위에서 혹시라도 떨어지게 된다면 큰 위험에 처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운 가운데 판자가 놓인 반대편 빌딩에 있다면? 또 당신이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판자 위를 걷는 것뿐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내 삶을 헌신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큰 위험도 무릅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면서 그 위험을 피하면 어떨까요? 그 사람의 삶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삶을 지속해야 할 뚜렷할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그 사명은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이 시대는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의 세대로 주님의 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믿고 따르겠다는 주님의 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모습을 게을리 합니다. 바로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겉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귀찮다면, 또 조금이라도 위험하다면, 또 조금이라도 내게 피해가 올 것 같다면, 마치 빌딩과 빌딩 사이에 놓여있는 판자 위를 걷는다고 생각하는지 주님의 뜻을 외면하는 우리들입니다.
자신이 헌신해야 할 대상을 현명하게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 그 대상을 지키는 인생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 대상이 바로 주님임이 명백한데, 우리는 과연 누구를 선택하고 있습니까?
전교주일이며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 나는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하고 있었는지를 지금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우리에게 권고하며 말씀하십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주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주님을 알리도록 합시다.
-김찬선신부-
솔직히 저는 행복하지 않은 수도자가 있다는 것에 대해
같은 수도자로 부끄럽습니다.
길을 가다가 얼굴이 어두운 수도자를 보면 부끄러움을 넘어서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이것은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오래 전 제가 4-50대 기소 중지자 불심검문을 당하고 나서부터
수도자의 얼굴이 얼마나 중요한 지 뼈저린 경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수도자가 행복하지 않다면
누가 세상에 행복을 전파하겠습니까?
온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의 전파자가 되어야 할 수도자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세상의 어둠에 어둠을 더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실상 오늘날 세상은 너무도 어둡고
사람들은 너무도 불행하고 불쌍합니다.
요즘 연예인들이 자살하는 사건을 보면서
저는 한 연예인의 죽음 너머의 사회적 병리현상을 봅니다.
연예인들도 그렇고
연예인들의 이러저러한 얘기들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사람도 그렇고
다 내면적 기쁨이 없어 그런 것입니다.
내면적 기쁨이 없으니 사람들은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놀아나
연예인들의 이러저러한 얘기들에 과도한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연예인들을 선망하여
연예인들을 통해 대리만족하고 연예인들과 일체화합니다.
연예인의 성공이 마치 자기의 성공인 양 열광하기도 하고
연예인의 실패나 죽음이 자기의 실패와 죽음인 양
같이 좌절하고 동조 자살을 하기도합니다.
그러나 연예인에 대해 선망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연예인에 대한 질시도 있습니다.
연예인을 애초부터 질시하는 사람도 있고
선망이 실망으로 인해 질시와 질타로 바뀌는 사람도 있습니다.
연예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면적 기쁨이 없으니 연예인들은 사람들의 이런 허황된 인기를 쫓고
이런 허황된 인기에 의해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행복을 줄 것이라 여겼던 인기, 명예, 권력, 재물
이런 것들이 사실은 허상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이런 것들에 절대적으로 행복을 의존한 만큼 이런 것 때문에
삶이 무너지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의 자기 내적 기초를 가지지 못하고
밖에서 행복의 허상들을 쫒는 것이 요즘의 병든 우리 사회인 것입니다.
행복의 허상을 쫒는 병든 우리 사회에
올바른 행복 추구가 어떤 것인지 우리가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세자 수를 늘리고 교세를 확장하는 것보다
우리가 진정 해야 할 세상의 복음화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가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복음으로 기쁘고 행복해야 합니다.
여간해서는 외부 환경이나 조건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복음적 가치가 내 안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거센 도전에 의해
우리가 세속화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복음화의 바탕 위에서 우리는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나의 행복이 깨지고 기쁨이 부서질까 두려워
자기 안에 갇히거나 머물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행복과 기쁨이 참되다면 밖으로 뻗쳐 나가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안에 머문다면 그 행복, 그 기쁨은
거짓 행복, 거짓 기쁨일 것이며
물이 고여 썩듯 내 안에서 썩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하고
동적인 사랑, 동적인 행복에 대해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께는 머물되
세상으로는 나가야 하는
기쁜 소식의 전달자들이어야 합니다.
등잔 밑의 선교지 -김귀웅 신부- 지난 봄 부활절을 지내고 수고한 본당의 수녀님과 직원들, 그리고 사목회
몇몇 임원들과 함께 짧게나마 작은 섬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저희는 그곳
공소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곳의 현실이 마음을 참 아프게 했습니다. 120여
명의 신자들 중 공소예절에 나오는 분이 20여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이가 별로 없었습니다. 배를 타고 멀리 바다에 나가 일하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어려운 처지였고 주변엔 유흥업소 또한
많았습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기 때문에 신부님도 자주 못 오신다고
합니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배가 뜨지 않고, 그러면 예정된 미사도 드릴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고 합니다. 같은 신자이지만, 사는 환경에 따라
매일 미사에 참례하며 아무 때나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이가 있는가
하면, 주일 미사 참례하는 것조차도 하늘이 허락해야 가능한 이가 있다니
참 안타까웠습니다. 선교라고 하면 저 멀리 아프리카나 남미의 가난한 오지를
떠올렸는데, 우리나라 안에서도 해외선교와 마찬가지의 선교가 도처에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사명을 떠올리는
날에 등잔 밑의 어두움처럼 남아 있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생각해봅니다.
복음을 진정 기쁘게 사십시오
- 배광하 신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강지숙- 마태오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단 한 번 만나십니다. 이 만남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 예수님께 위임받은 제자들의 사명 등이 모아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후원 약속과 그 믿음이 세상 끝 날까지 유효할 것입니다.
신앙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
자신과 남을 구원하는 전교 -김영춘신부-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학업만큼이나 힘들었던 것은 캠퍼스 생활이었습니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저는 교내에 있는 경당의 매일미사에 참례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캠퍼스 안에서 저를 알아보는 미국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도서관, 강의실 근처, 교내 식당, 교내 셔틀 버스 정거장 등에서, 그들은 저를 보면 "Hi, Father!(안녕하세요, 신부님!)" 하며 친근하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그들 중에는 매일미사에 자주 참례하여 이름을 알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학생들이 더 많았습니다.
민족들의 복음화 +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고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양승국신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 한 몇 일 출장 같다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아이들과 축구시합을 할 때였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왜 한참동안 안보였냐? 도대체 어디 갔다왔냐? 놀러 같이 가기로 해놓고 혼자서만 그렇게 돌아다니기냐?"며 따졌습니다. 또 한번은 점심식사 시간 무렵 손님이 와서 아이들과 식사를 못했던 날의 일이었습니다. 간식시간에 만난 한 아이가 "점심식사 때 왜 안 나타났냐? 나이 들수록 식사를 제때 해야된다"는 등의 일장훈시를 제게 한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살맛 나는 순간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들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런 아이들인지요? 저희 아이들의 모습과 말투, 삶에서 아주 가끔씩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워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너무도 상습적으로 써먹는 단어, 눈만 뜨면 외치는 단어이면서도 정확한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단어가 "사랑"이란 단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유별나거나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란스럽게 갖은 미사여구를 동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바로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점심은 먹었냐고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요즘 어떠냐고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하는 일은 잘 되냐고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어디 아픈데 없냐고 신경 써주는 것입니다. 도와줄 일은 없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축구시합을 끝내고 씻으러 들어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응접실에 불이 켜져있길래 들어갔더니 기숙생 친구 한 명과 면회 온 형이 앉아있었습니다. 얼마나 다정해 보이던지요? 형은 동생을 위해 없는 용돈을 쪼개 프라이드 치킨이며 피자며 잔뜩 사 가지고 와서 풀어놓았고, 동생은 신이 나서 먹으면서 형과 저보고도 먹으라고 했습니다. 두 살 차이인데도 형은 참으로 듬직해 보였습니다. 듣자하니 형은 동생을 만나기 위해 오후 4시에 도착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동생은 뮤지컬 젠베르데 공연을 보러 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 8시나 되서야 돌아왔던 것입니다. "한참 기다려야 되는데...어쩌나"하는 사무실 직원의 걱정에도 형은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동생 얼굴 한번 본다면 그까짓 몇 시간 기쁘게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답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투자가 필요합니다. 그 투자는 다름 아닌 상대방을 향한 자기 희생, 상대방을 위한 인내, 상대방을 향한 배려, 상대방을 향한 친절입니다. 이런 사랑의 요소들-희생, 인내, 배려, 친절-바탕이 되지 않은 사랑은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신앙의 결실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야할 복음 -양승국 신부-
등불이 되는 신자, 등대가 되는 교회 -손희송 신부-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부모의 유언을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신자라면 주님이신 예수님의 ‘유언’을 소홀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그분의 ‘유언’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선교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선교의 사명을 지니고 있고,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제2독서). 선교는 말과 행동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믿음·사랑·희망의 삶,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풍성히 받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그 자비에 응답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어떤 처지에서도 오직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삶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말로 선포하고,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이런 믿음·사랑·희망의 삶을 살아간다면, 불신과 증오 그리고 절망으로 점점 더 어두워져 가는 세상에서 작은 등불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혼자서 등불의 역할을 하기에는 세상의 저항이 너무 거셉니다. 신자들이 합심해서 함께 등불이 되고자 한다면, 힘은 덜 들고 효과는 더 커질 것입니다. 신앙인 한 사람은 작은 등불의 역할을 하겠지만, 이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등대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는 이웃은 물론 신이나 종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해지는 세상입니다. 교회가 이런 세상과는 다른 모습, 즉 주님을 굳건히 믿고 그분께 모든 희망을 두고서 신자들이 서로 아끼면서 살아간다면, 믿지 않는 이들에게 큰 매력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초창기 신앙인들은 매력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는 황일광(1756-1802) 순교자의 증언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는 백정으로 태어나 이제껏 사람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천주교인이 됨으로써 어떤 학문이나 이치가 아닌 신앙의 삶을 통해 천주교가 참됨을 깨우치게 되었다. 나에게는 천국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아직 오르지 못한, 곧 가게 될 이승 너머의 곳이고 또 하나는 지금 이 생활이다. 양반인 천주교 형제들은 금수와 같이 취급되는 나를 형제라 부르며 나를 친형제처럼 사랑으로 대해 주었다. 우린 하느님 아버지와 성모 어머니께 한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드렸고 함께 고생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과 구원을 주시는 주님을 찾아 몰려올 수 있도록(제1독서) 신자 각자는 등불이 되고 교회는 등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는 어려운 사명이지만, 세상 마칠 때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우리 곁에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다운 삶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서공석 신부 -
-배명섭 신부-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여 식민지 통치를 할 때, 영국군 장성들의 모임에 초청을 받은 간디는 연단에 올라가 영국군 장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교와 신앙인의 삶 참된 복음 선포 -상지종신부- 복음 선포는 광고 전단 뿌리듯이 하느님에 대한 일단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선포는 시기와 질투로 얼룩진 세상에 사랑을 심는 것입니다. 불신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세상에 믿음을 심는 것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 절망에 놓여있는 세상에 희망을 심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어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고자 바둥거리다가 결과적으로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세상에 하느님께서 주신 참 삶, 참 생명을 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화려한 미사여구나 감언이설로 전해질 수 없습니다. 복음은 복음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질 뿐입니다. 복음을 보여주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가장 설득력있는 말입니다. 세상 어느 것도 줄 수 없는 기쁨, 희망, 사랑, 정의, 평화를 복음 안에서 찾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보여 주지 못하는 사람이 단지 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직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신앙 생활로 초대하는 것은 위선이며 기막힌 사기일 뿐입니다. 복음 선포를 신자 불리기쯤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기쁜 소식(복음)을 슬픈 소식으로 만듭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가뜩이나 나약한 사람에게 공포심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선전하면서 가뜩이나 이기심과 경쟁에 찌들려 사는 사람들을 더욱 더 이기심과 욕구 충족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는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단지 사회 제도 몇 가지를 바꾸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변화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끝이 보이지 않는 머나먼 길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 그러나 완성의 그날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이땅에서 일구어나가는 고된 여정입니다. 이 여정 한 가운데 믿는 이들이 서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이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셨기에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 복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신 것을 기억하기에 기쁘고도 감격적인 날입니다. 동시에, 아직도 삶의 많은 부분에서 복음과는 거리가 먼 자신을 부끄럽게 반성하는 무거운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보다 좀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며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떠올립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교회의 지상 최대 사명 -박상대신부- 10월의 마지막 직전 주일인 오늘은 세상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와 노력을 다짐하는 전교주일이다. 1922년 비오 11세 교황(1922-1939)의 교서에 의해 제정된 전교주일은 1926년부터 전세계 교회에 확산되어, 우리나라는 오늘, 유럽교회는 다음 주일에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한다. 이는 교회와 신자 본연의 사명인 "선교"(Mission)의 권리와 의무를 일깨우기 위함이다. 전교주일의 특별헌금은 교황청 전교회로 송금되어 전교지역과 선교사를 돕는데 쓰인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그리스도의 지상사명에 따라 우리 모두는 세상 끝까지,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따라서 선교(宣敎)는 선교사들만의 일이 아니기에, 우리는 물질적으로 그들을 도와야할 의무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 자신과 이웃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활동하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교주일에 봉독되는 마태오복음(28,16-20)은 가해의 예수승천대축일에 봉독되는 복음과 같다. 오늘 복음은 앞서간 빈무덤 사화(28,1-10)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제자들로 하여금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도록 분부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갈릴래아의 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마태오복음에서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봉은 여기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물론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루살렘의 무덤 앞에서 발현하신 부활 예수님을 뵈었다. 한편 마르코, 루가, 요한복음은 모두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마르 16,14; 루가 24,36; 요한 20,19) 요한복음의 추가편집 부분에서 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도 부활 예수님을 뵙는다.(요한 21,1-14) 마태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간의 단 한번의 상봉을 굳이 갈릴래아로 국한한 의도를 생각해 보자. 갈릴래아는 어떤 곳인가? 예수께서 하늘나라의 복음선포를 위해 첫 발걸음을 내딛었던 곳이다. 그곳은 베드로와 안드레아, 요한과 야고보 등 대부분의 제자들이 생업(生業)에 종사하던 곳이며, 동시에 거기서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의 증인으로 선택받은 곳이다. 이제 갈릴래아는 (이미 운명을 달리한 가리옷 사람 유다를 뺀) 열한 제자가 예수부활의 증인과 선포자로 간택되는 곳이며, 복음선포의 지상 최대 사명을 부여받는 곳이다. 예수께서 내리시는 사명의 세부사항은 ① 복음선포, ② 세례수여, ③ 가르침 교시(敎示)이다. 이를 풀어보면, 이는 교회의 지상사명인 ① 복음선포(Kerygma, 케리그마)의 사명, ② 말씀과 성사교역(Leiturgia, 레이뚜르지아)의 사명, ③ 사랑과 봉사(Diaconia, 디아꼬니아; 또는 Caritas et Servitium)의 사명이다. 이는 곧 교회가 사명(使命)이자 동시에 권리(權利)로 여기는 교도권, 성화권, 사목권의 삼중직무를 의미한다. 교회란 곧 하느님의 백성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세례 받은 모든 신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교도권, 성화권, 사목권에 각기 자신의 신분에 따라 참여한다. 물론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20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참여하는 것이다. 교회의 삼중직무는 원래 예수님 스스로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예언직, 사제직, 왕직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 전교주일을 맞아 우리 각자의 삼중직무를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기고, "갈릴래아"의 의미를 되새겨 우리의 일상(日常)과 생업(生業)에서 복음선포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16절) 제자·갈릴래아·산은 예수님의 이 세상 활동을 구성하는 본질입니다. 바로 이 공간에서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의 활동에 동참했습니다. ‘산’이 재회의 장소가 된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부활하신 분은 다시 이곳에서 미래를 지시하십니다. 이제 제자 공동체는 열둘이 아닙니다. 유다의 배반과 낙오의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예수님께 끝까지 충성을 다하지 못한 충격으로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단절을 치유하십니다. 새로운 제자를 뽑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좌절한 제자들을 새로이 부르십니다. 이미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래아에 가 있겠다고 예고하신 대로(26,32; 28,7.10) 이곳에 와 계십니다. 좌절을 맛보았기에 예수님의 새 부르심이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했던 그들의 전체 역사에 다시 귀환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 형제들’이라 부르셨습니다(10절).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17절) 약속하신 대로(7.10절)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함으로써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주님이심을 경험합니다.(2,11; 14,33 참조) 더러는 의심하여 흔들렸습니다(17절).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믿음과 의심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은 발현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제자들을 안심시키시지만, 의심을 풀어주지는 않으십니다. 믿음은 본인의 몫입니다. 제자들은 선교를 통해서 자신들의 의심을 극복할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절) 하느님께서 지배하실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동안에도 전권을 지닌 분으로서 행하셨습니다(7,9; 8,8 이하; 21,23 참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께서(11,25) 그분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주셨습니다. 역대기에 등장하는 키루스 임금의 선언을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2역대 36,23) 다니엘서의 하늘로부터 권능을 받는 사람의 아들의 모습이 더 신비스럽습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예수님은 우주적 왕권을 하느님께 받았음을 확언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19-20ㄱ절) 하늘과 땅을 호령하시는 부활하신 분이 아버지께 받은 모든 권한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십니다. 사명을 주시고 강력한 후원을 보증하십니다. 모든 세계가 그분께 속해 있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자 하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차별 없이 모든 인간 집단을 향하여 열려 있습니다. 자유로운 결정으로 제자들을 부르셨듯이 그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들을 만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길은 세례를 통해서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는, 아버지이시며 아들이시고 성령이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선포를 믿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알고 당신께 향하여 당신과 관계를 맺도록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울타리 안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께 우리를 맡겨드립니다. 그분의 보호와 지배 아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자녀가 됩니다. 성령께서 세례로 우리를 개방하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로 묶어주실 것입니다.
세례 받은 이들의 공동체는 이에 어울리는 생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에서부터(5,3-12) 최후 심판의 말씀에(25,31-46) 이르기까지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바입니다. 제자들은 또 다른 제자들에게 계속 이 가르침을 전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분께서는 제자들을 통해 모든 이들을 공동체에 받아들이고자 하셨고, 공동체와 가르침이 계속 전해지길 바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을 파견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변화된 이들은 다른 이들과 이 체험을 나누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계속 가르칠 것입니다. 이념을 확장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 공동체는 세례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공통된 소속감에 뿌리 내린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0ㄴ절) 지금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예수님의 살아 계신 현존을 통하여 이어져 왔습니다. 이 현존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형태가 달라질 뿐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아주 오래된 강하고 효력 있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힘만으로 무엇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사명에는 그분의 현존과 강력한 도움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지금 모든 권한을 위임하시면서도 이 말씀으로 약속하십니다. 부활하셨지만 인간세계를 떠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주님으로 활동하십니다. 부활하신 분은 ‘임마누엘’로 남으십니다. 복음의 시작과 끝은 이렇게 맞닿아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 신앙의 증인으로 살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 소명을 수행하면서 그들의 부활 신앙은 더욱 확고해질 것입니다. 신앙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유영봉몬시뇰-
묵상길잡이 :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온 세계 교회가 '선교가 교회의 근본 존재사명 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복음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마련된 주일이다.“신앙은 자유인데, 남에게 나의 신앙을 권하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인가?”아무도“나에게 신앙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1. 종교는 인생에 도움이 되는가?.
동물은 자기에게 주어진 본능에 따라 행동하기에 어떤 갈등이나 고뇌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지닌 존재이기에 매 순간 갈등과 번민을 할 수밖에 없다. 멀리 계신 부모님께 자주 연락을 하고 찾아보아야 하는데, 자녀들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씀씀이를 줄이고 좀더 검소하게 살아야 하는데, 이런 저런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잘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아는 것만큼 살 수 있으면’ 다 성인이 될 것이다. 아는 것을 사는 힘은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고해소에서 고해를 듣다보면, “신부님, 저는 주일도 계속 빠지고, 아침저녁 기도도 하지 않고 너무나 하느님과 멀어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하고 고백한다. 이 다음에 반드시 따라오는 말은“집사람과 자주 싸우고, 아이들에게 야단만 치고, 대인관계에서 자꾸 실수를 하고, 생활이 무질서해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하는 고백이다. 모르긴 뭘 모르는가?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주일 미사도, 아침저녁 기도도 하지 않고 살다보면, 자신을 하느님 앞에 비춰보며 반성하고, 잘못을 제때에 뉘우치고, 새로운 결심을 하며 살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마치 낙엽이 물에 떠내려가듯이 시간 속에 그냥 떠밀려 가는 삶이기에 생활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를 하느님 앞에 새롭게 바로 세울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음미되지 않은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자유를 지닌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을 다스리는 힘을 가진 사람만이 인간다울 수 있다. 자신을 다스리는 힘이 한번의 결심으로 어느 순간에 생기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안의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신앙 안에서 길러지고 강화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요즘 자살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가난을 비관한 자살도 있고, 재벌 2세의 자살도 있다.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때로는 정말 “모든 것이 끝장이다.”싶은 절망의 순간, 희망이라고는 바늘구멍만큼도 없어 보이는 경우를 누구나 당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게 될 때, 신앙이 없는 사람은 대개는 자살을 하거나 머리가 뺑 돌아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리고 기적처럼 회생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참으로 신앙은 강한 것이다.
암환자는 대개 죽는 순간까지 정신이 초롱초롱하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옴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환자들을 가까이에서 돌보며 죽음을 지켜보는 호스피스들은 신앙이 있는 이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비 신앙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너무나 다르다고 말한다. 비 신앙인에겐 이 세상이 전부이기에 죽음은 절망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새로운 세상에로 옮아가는 과정이며 진통인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고통 그 자체도 자신의 일생의 죄와 허물을 속죄하고 정화하는 마지막 세례로 받아들인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제사와 합쳐 바칠 수 있는 향기로운 제물인 것이다.
2. 신앙보다 더 큰 유산은 없다.
우리는 이상에서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신앙이 얼마나 큰 힘을 주는 것인지를 잘 보았다. 사실 자녀들에게 돈을 몇 억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보다 어디 내 놓아도 혼자서 반듯하게 살 수 있는 신앙을 길러주는 것이 훨씬 더 큰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웃에게 “신앙생활을 한번 해보시지요" , “함께 성당에 가봅시다”고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왜인가? 괜히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아니면 “남 걱정말고 당신이나 열심히 다니시오.”“성당 다니는 당신이나 안 다니는 나나 뭐가 다른데!”하며 무안을 줄까봐?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신앙 같은 것, 하느님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항상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달리 말하면 인생을 살면서 신앙만큼 누구에게나 필요한 상품(?)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설령 내가 "당신도 신앙을 가져보시지요" 하고 권했을 때, 당장은“필요 없다.”고 거절하더라도, 언젠가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는 내가 뿌린 신앙의 씨앗이 싹을 틔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언제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2디모4,2) 것이다.“새 순이 돋아나지 않는 가지는 죽은 가지이다.” 선교를 통해 새로운 신앙의 싹을 틔우지 못하는 신자는 죽은 신자라 할 수 있다. 지금부터 미리 미리 많은 공(功)을 들여야 한다. 갑자기 예비자를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
매일미사에 참례하는 미국 가톨릭 학생들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유학 온 대학원 학생들은 가톨릭 사제인 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교정의 곳곳에서 제가 잘 모르는 한국 유학생들이 길거리를 마주 지나치면서 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합니다. 또 식당이나 도서관 매점에서 만나게 되면 저를 매우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부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합니다. 교정의 도처에서 저를 알아보는 학생들이 있기에, 교정의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임에도, 교정에서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은 대부분 ??신부님??입니다. 제가 잘 모르는 미국 학생들과 한국 유학생들이 ??신부님??하고 저를 부르면, 저의 무조건적인 행동 지침이 있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상냥하게 대하고 친절을 베풉니다. 가톨릭 사제임을 표현하는 ??신부님??이라는 호칭이 저를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교정에서 학생이면서도 사제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했던 캠퍼스 생활은 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상의 삶에서 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행위였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가톨릭을 알리는 자연스런 전교였습니다.
전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서 전교할 수는 없습니다. 나 스스로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전교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이 믿는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긍심이 있을 때만이 전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사랑이 자신에게서 흘러넘치기에, 이 기쁜 소식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을 권하는 전교는 무엇보다 자기 신앙의 확신이며 표현입니다. 전교는 믿지 않는 사람이 신앙에 입문하거나 안하거나를 떠나서, 전교 자체가 자신의 신앙을 완전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전교를 통해 믿지 않는 이를 입교하도록 하면,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끌게 됩니다. 전교는 믿지 않는 이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는 행위이기에, 하늘나라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입니다.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신앙 안에서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자랑거리입니다. 전교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다른 이들 앞에서 떳떳이 증거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여 믿지 않는 이들을 구원한 까닭입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이고, 10월은 전교의 달입니다. 전교는 신앙인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완성하고, 또한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전교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강영구 신부-
그대에게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그분을 스승이요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분이 저에게 돈이나 재물, 권세나 명예 따위를 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을 통해서 제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불러주셨습니다.
그분은 제 눈을 열어 저를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아름답고 향기롭게 사는 길을 제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이 무엇인지 참 행복이 무엇인지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제가 만일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상상해봅니다.
정치인이 되었을까? 시인이 되었을까? 장사꾼이 되었을까?
혹시 사기꾼이 되어 남을 등쳐먹고 살거나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다행하게도 예수님을 만난 저는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그분과 함께 행복합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福音化)를 위하여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분의 자비로움과 아름다움에 매료됩니다.
그분 안에서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김영수 신부 -
가을 들판은 씨 뿌리고 땀 흘려 가꾼 것들이 맺은 열매와 결실이 가득합니다. 추수를 기다리는 곡식과 과일들, 벌써 속이 차오르는 채소들이 풍요롭기만 합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면 열매를 맺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면 신앙생활에서도 뿌려야할 씨가 있고 거두어야할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제때에 열매를 맺고 결실을 내는 가을 들판을 바라보며 나는 내 인생에서 어떤 결실을 내고 있는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맺어야할 열매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갈릴레아에 있는 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열매 맺어야할 신앙의 결실입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일이 신앙생활의 열매입니다.
얼마 전 가톨릭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실시한 ‘가톨릭 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이라는 조사결과에서 ‘지난 1년간 이웃이나 비신자에게 신앙을 권유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10명 중의 3명만이 ‘신앙을 권유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고 나머지 7명 이상은 ‘전혀 없다 혹은 별로 없는 편이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10년 전에 비해서 선교를 위한 실천이 훨씬 낮아진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천주교 신자들의 전교 열의가 전반적으로 낮을 뿐 아니라, 과거에 비해 전교를 위한 실제적인 노력의 정도가 많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본당에서 생활하다보면 선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신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일도 ‘선교’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 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신앙을 전하는 일을 어렵게 느끼는 사람은 아직 주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신앙을 통해 삶에 기쁨을 얻고, 희망을 얻고, 힘을 얻는 다면 인생의 그늘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어둠 속을 헤매는 세상에, 삶의 언덕에서 주저앉은 이들에게 그 믿음을 전하는 일은 기쁨이고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유행한 노래 가사 중에 ‘사랑은 아무나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인연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통속적인 이치를 노래한 것이지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일은 마음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눈이라도 마주쳐야하고 또 그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사랑의 결실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신앙을 주신 분을 알아보는 것이고, 그 분께서 바라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된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믿는 일과 고백하는 일이 하나로 될 때에 비로소 신앙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이 그저 마음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일로 그치고 말 때에 그 신앙은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고백’을 통하여 결실을 맺어야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그 신앙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이 고백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신앙의 열매도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맺는 열매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지마다 주렁주렁 풍성한 열매를 맺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나 덜 떨어진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신앙을 ‘고백’하며 사는 사람은 풍성한 열매를 맺지만 ‘고백’없는 신앙은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은 생활도 활기가 차고 생기가 넘치지만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른 나무처럼 생기를 잃고 마는 것을 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믿는 것을 삶으로써 증거하는 일을 통해서만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 뿌리고 가꾸신 사랑의 열매가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를 기원합니다.
얼마 전, 한 선교사의 어머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차!'하는 생각과 함께 그간 전화 연락 한번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앞섰습니다. 어머님 말씀 요지는 아들이 보고 싶어 죽겠는데,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요즘은 기력도 많이 떨어지고 세상 뜰 날도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죽기 전에 아들 얼굴 한번이라도 봐야 될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밥은 제대로 먹고 사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궁금해 죽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 아드님은 통신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오지 가운데 오지로 파견돼 사목 중이기에 한번 연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수도자이기에 앞서 자식인 아들을 향한 어머님의 안타까움이 한동안 제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해외 선교사들이 어찌 그리 존경스럽고 부러워보였는지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자아를 버리고 보다 큰 가치관이신 예수님을 가장 철저히 추종하는 열렬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저 역시 지원자 시절부터 해외 선교를 간절히 원했지요. '선교사'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마음 속에 불길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왠지 낭만적이고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선교 성소는 희망한다고 다 되는 것이 절대 아니더군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인 듯합니다.
안정된 생활 기반도, 사랑하는 가족들도 뒤로 하고,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지구 정반대 편으로 떠나가는 선교사들 삶을 묵상해봅니다. 모든 것이 생소한 선교지에 처음 도착해보면 우선 다가오는 것이 막막함이겠지요. 갖은 한계들과 투쟁이겠지요. 물론 선교사로서 보람이나 기쁨, 낭만이나 긍지도 크겠습니다. 그러나 매일 다가오는 고통과 끊임없는 십자가를 견뎌내느라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해외선교는 성소 중에 가장 의미 있는 성소, 가장 복음적 성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성소,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르는 성소인 것입니다. 해외선교는 성소 중 성소이자 성소의 꽃, 성소 여정의 정점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 단 한번도 예수님 복음을 접해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 가더라도 맛보지 못할 값진 감미로운 생명수, 그 어떤 교훈과도 비길 수 없는 소중한 말씀, 가장 값진 은총의 선물인 예수님 복음을 우리 안에만 간직하고 있다면 안 될 말입니다. 그래서 전교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 의무이자 가장 우선적 사명입니다.
오늘, 전교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 지향은 '민족들의 복음화'입니다. '전교' '복음화', 이런 말들 앞에 우리는 갑자기 부끄러워지고 몸 둘 바를 모르게 됩니다. 전교는 우리 교회가 지니고 있는 가장 본질적 사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전교' 하면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나 아닌, 열심한 그 누군가의 몫이려니' 하고 외면합니다.
오늘 전교주일을 맞아 전교에 대한 지나친 소극성, 해외선교에 대한 무관심을 진지하게 반성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 많은 청소년들 마음에 성소 중의 성소, 불같은 선교 성소가 활활 타오르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또 우리 모든 신앙인들도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열정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젠 우리도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탈바꿈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가끔씩 선교지에서 편지가 도착합니다. 심신은 비록 고달프지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손수 집도 짓고, 아이들을 위해 팝콘도 튀기는 신부님, 이 세상 어딜 가도 마땅히 머리 눕힐 곳조차 없어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찾아다니는 신부님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편지에 잘 담겨 있습니다.
또 다른 한 선교사는 매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선교지의 참혹한 상황을 낱낱이 소개하며 마음 아파합니다. 그러나 결코 희망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은 처참하리만치 열악한 상황이지만 그 선교사는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진정한 복음은 우리 마음에 고이 간직된 복음, 우리끼리만 열심히 읽고 공부하는 복음, 우리 민족만의 복음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복음은 점점 더욱 큰 동심원을 그리며 세상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는 세상 만민의 복음이라고 확신합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김윤근 신부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전교, 선교를 한다는 것은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주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자녀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을 전해주는 것, 교회 구성원의 양 불리기가 곧 선교는 아닐 것입니다. 선교는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스스로가 주님의 복음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주님의 복음을 우리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전해 줄 수 있어도, 그리스도 자체를 전해 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한다 하면서도, 그 안에 기쁨이 없다면, 주님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해 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한 율법은 전해 줄 수 있어도,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통한 참된 기쁨을 전해줄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물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면, 이웃에게 또 하나의 우상을 전해주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단순한 부적이나 보험처럼 여기게 만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가 복음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웃들을 주님의 제자로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과 평화를 주님으로부터 얻어 누리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 기쁨의 원천을 찾기 위해, 그리스도를 향해 뛰어들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물건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소개해주고, 그 역시도 그 좋음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합니다. 또 경치 좋은 곳을 발견하면 아끼는 사람과 함께 그곳에 가고 싶어합니다. 맛좋은 음식점을 발견하면 아끼는 사람을 데려가 함께 먹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도, 좋은 경치처럼, 맛좋은 음식처럼만 느낄 수 있어도, 우리의 신앙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그 평화 속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스스로가 신앙의 참 맛을 알아야 합니다. 맛을 알기 위해서는 음식을 입안에 넣는 행동이 필요한 것처럼, 신앙의 참 맛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복음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며,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민족을 가르쳐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고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 항상 살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을 배워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 노력은 성령이 그들 안에 일으키는 일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후에 이 세 분에 대해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협조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14,26).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를 성령이 생각나게 또 실천하게 하여 아버지의 자녀 되어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셨듯이, 그들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옛날 사회는 권한으로 조직되었습니다. 황제가 모든 권한을 가졌고, 신하들이 그 권한을 부분적으로 위임받아 행사합니다.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그 권한을 행사하기에 그 사회는 혼란 없이 유지되고 실효성 있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옛날 사회를 유지하고 움직이는 것은 권한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은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최종적 원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늘과 땅, 곧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기본 원리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배워서 하느님을 알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두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라는 명령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4세기 그리스도 신앙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을 때, 교회는 이 말씀을 그런 뜻으로 이해하였습니다. 5세기부터 야만인들이 대거 유럽대륙으로 이동하여 정착하는 혼란한 시기에,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야만 상태를 벗어나 로마제국의 문화권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의 국교인 그리스도 신앙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요하여 사람들을 그 문화권 안으로 편입시켜야 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생각은 오늘과 같이 인간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는 현대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고귀한 자유를 외면하고 말살하는 일입니다. 거리에서 행인들을 붙들고 믿으라고 강요하는 현상이나, ‘신자 배가 운동’을 하라고 지시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행태는 모두 과거 인류가 아직 몽매할 때, 통용되던 관행을 답습하는 일입니다. 신앙은 강요로 발생하지 않고, 신자는 우리의 노력으로 배가 생산할 수 있는 제품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유로운 사람이 심사숙고한 후에 스스로 하는 결단의 산물이라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살 것을 원하십니다. 신앙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참다운 자유를 찾아나서는 길입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 인간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 또한 이 세상의 헛된 영광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유로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에서 하느님의 자유를 읽어내고, 그것을 배워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롭게 사는 길을 배우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먼저 하늘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예수님을 원리로 하느님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저 멀리 하늘 높은 곳에 앉아서 사람에게 상이나 벌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권력자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고,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발전하고 행복할 것을 원합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신앙인이 믿는 하느님은 자애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삶에 발생하는 어떤 역경도 하느님이 하시는 복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은 이 세상을 사는 생명체에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생명을 베푸신 하느님을 은혜롭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땅을 달리 이해합니다. 땅은 자기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사는 곳이 아닙니다. 땅은 소중한 이웃들이 사는 곳입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면서 은혜롭게 살아야 하는 땅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자녀들이 함께 사는 곳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명의 아버지로 또한 우리 삶의 원리로 살아 계셔야 하는 땅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내가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9.17). 이 땅에 사는 신앙인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원리로 사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분이라, 자기도 이웃을 사랑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말 같이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도 전혀 뉘우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등의식에 젖어 사사건건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 전혀 사랑스럽지 못한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런 사람도 불쌍히 여기면서 미워할 기회를 피합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이런 하늘과 이런 땅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에 있습니다. 복음은 어떤 특권도 주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신앙을 빙자하여 우월감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삶의 원리로 배우는 신앙인이 하늘에 대해 땅에 대해 가진 이해와 실천이 사람들에게 구원으로 보일 때,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흥미를 가질 것입니다. 자연 재해와 인간이 만든 재해의 해악에 짓눌리고 찢겨서 사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선한 마음은 이웃의 악의로 짓밟히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자폐적 자세로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무자비를 실천의 원리로 삼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을 원리로 하늘과 땅을 바라봅니다. 하늘에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 자비의 숨결이 들리고, 땅에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과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보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그분이 우리 안에 함께 살아 계셔서 체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위한 첫째 방법은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표양이다.
“당신들이 가는 곳마다 십자가가 달린 교회를 짓는데, 당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건물이나 선전 벽보가 아니라 당신들의 삶으로 예수를 보여주시오. 당신들이 믿는 예수가 부당하게 폭력을 휘두르며 살인하라고 가르쳤습니까? 당신들의 예수가 나약한 여인들을 겁탈하라고 가르쳤습니까?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약탈하라고 가르쳤습니까? 내 조국 인도를 그냥 놓아 두시오! 당신들의 예수가 아니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싫어합니다.”
영국군은 교회를 짓고 벽보를 붙이며, 온갖 말로 그리스도를 전했지만 간디의 말대로 그리스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그릇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똑같은 인도에 마더 데레사가 갔다. 데레사수녀는 아무 말 없이 가장 가난한 도시 캘커타의 빈민가에 들어가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병자들을 돌보았다. 데레사수녀는 교회도 짓지 않고 십자가도 세우지 않고 벽보도 붙이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위한 첫째 방법은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표양이다. 끊을 수 없는 하느님의 친교로 봉헌하고 동시에 무한한 열성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생활의 표양은 복음선교의 첫째 수단이라고 인정한다”(현대의 복음 선교, 41항).
내가 사는 곳에서, 내가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의 삶을 사는 것이 전교이다. 하느님의 삶은 바로 ‘자비’와 ‘사랑’이다. 그것을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려고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교가 가능할까? 우리 삶의 모습이 전교의 힘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듣기보다는 우리의 행동을 본다.
전교는 신앙인에게 있어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다. 전교는 자기 신앙의 표현이며 결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바오로 사도의 노래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이 닿는 곳에 사랑이 닿는다’라고 하셨던 교황 바오로 6세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입이 하느님을 선포하고, 나의 눈이 사랑을 말하게 하며, 나의 손이 이웃의 손을 잡아 끌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재희 신부-
지난해 이곳에 부임한 후 어느 공소를 처음 방문했을 때 였습니다. 거기 계시던 교우들이 명색이 본당 신부라고 저에게 보여주신 환대를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대접이 좋았다기보다는 오랫동안 배여온 그분들 신앙의 삶 때문일 것입니다.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은 과거 본당 신부님들의 삶과 일화를 종종 말씀하십니다. 본당 초기, 수사 신부님의 신자들에 대한 헌신적 사랑과 자기 것을 아낌없이 내어 놓는 모습 그리고 그러한 본당 사제에 대한 교우들의 지극정성을 들을 때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지금은 미사시간에 서있기조차도 불편하신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어서 활력이 없을 수도 있지만 이곳은 그렇게 살아오신 본당 어르신들의 삶의 장소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사를 보면 그 뿌리요 중심은 바로 평신도입니다. 평신도가 먼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평신도가 스스로 교리를 공부하고 평신도가 먼저 중심이 되어 천주교를 알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곳곳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초기에 사제들의 수가 적었음에도 교회가 발전한 것은 옛 교우분들의 뜨거운 신앙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 당시 선교 사제들의 헌신적 삶의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분들이 살았던 그 삶의 터에는 기념성당이 세워지고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 터는 그렇다하더라도 그분들의 후손인 오늘날 천주교 신자들의 삶의 자리는 대도시에로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과 열성까지도 그대로 전해져 옮겨졌는가를 생각하면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전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사에서 전교는 신앙선조들의 삶과도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전교는 우리 믿음의 삶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선교와 선교사를 성체성사 내지는 성체에 비유하십니다(2005년 전교주일 담화문). 천주교를 전하고 우리 삶이 복음화 되려면 주님처럼 자신을 헌신하는 희생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냥 참새처럼 재잘거린다고 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전교주일을 지내면서 복음 선포의 열정이 다시 한번 끓어오르기를 희망합니다. 사제인 저 역시도 그렇게 살기를 다짐합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일할 수 있고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