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逆) 남파랑길(열 번째 - 1)
(거제∼부산, 2023년 12월 16일∼17일)
瓦也 정유순
오늘의 첫 걸음은 신거제대교 입구인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거제대교휴게소 앞이다. 용남면(龍南面)은 통영시의 북동쪽에 위치한다. 지명은 용남군에서 유래하였다. 1895년 처음에는 진남군이 설치되었는데, 군명이 평안남도 진남포와 동일했기에 이를 피하여 1909년(융희 3) 용남군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진남군의 <진(鎭)>자 대신으로 옛 지명 두룡포에서 <용(龍)>자를 따서 용남군이라 하였다. 통영 IC가 있고 면의 남서쪽은 삼봉산(247m)에서 이어지는 산지가 있고, 중앙과 동쪽으로 평지가 분포한다.
<통영시와 거제도 지도>
진남군이 설치될 때에는 동면에 속하였고, 1914년에 동면과 서면 일부를 합쳐 통영면으로 개편되었고, 1931년 무전리·동달리·원평리 등 10개 마을을 용남면으로 분리되어 1995년 통영시 용남면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남쪽은 무전동·정량동과 접하고, 면 전체가 북동쪽으로 돌출하여 나머지 3면은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동쪽으로 견내량 건너 거제시 사등면을 마주 보고 있으며 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를 통해서 연결된다.
<통영타워>
이곳에는 통제영과 고성 그리고 거제를 연결하는 지역으로서 통제영의 관련 군사시설이 많이 설치되었다. 면 남서쪽 동달리에는 원문성(轅門城)이 있었다. 고성에서 통영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육로에 원문을 쌓고 수문장이 통영의 입구를 방비했다. 장평리에는 통영과 거제 해방(海防)의 요충인 견내량(見乃梁)해역을 방비하기 위해서 유방을 설치하였다. 유방(留防)은 조선 때 전략상 요충지(要衝地)에 군대를 상비(常備)하여 방비하던 제도이다.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장평리(長坪里)는 남해에 위치하고 있는 비교적 큰 어촌마을이다. 마을 북쪽과 서쪽으로 바로 남해와 접해 있다. 완만한 구릉성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서쪽으로 북섬과 가까이 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간섬, 굼통몰, 분덕마을 등이 있다. 간섬마을은 새마을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굼통몰마을은 유방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분덕마을은 연기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새마을은 유방 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신거제대교>
거제대교 북쪽에 있는 신거제대교는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와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를 잇는 연륙교다. 한산도대첩이 벌어진 견내량해협(見乃梁海峽)을 가로질러 놓였으며, 포항~마산~고성~통영~거제를 잇는 국도 14호선이 지나는 길이다. 길이 940m, 폭 20m의 왕복 4차선 교량이다. 1971년에 준공된 거제대교(길이 740m, 폭 10m)가 증가된 교통량을 소화하기 힘들어지자 6년 6개월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1999년 4월 22일 개통하였다.
<거제대교>
신거제대교를 걸어서 들어오면 거제도다. 거제도(巨濟島)는 거제시의 섬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며 진해만 입구에 있다. 73개의 부속 섬 중 유인도는 10개다. 섬의 면적은 382.2㎢이고, 해안선 길이는 443.8㎞에 달한다. 남쪽 일부는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여 지세포·장승포·옥포·율포·죽림포 등의 작은 만이 많고, 해안 곳곳에는 모래가 많은 사빈해안(沙濱海岸)으로 해수욕장이 분포해 있다.
<거제도 지도>
문무왕이 상군(裳郡)을 두었다가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1896년(고종 33)에 경상남도 거제부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남군(龍南郡)과 거제군을 통합하여 통영군(統營郡)이 설치됨에 따라 통영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1953년에 통영군에서 나뉘어 다시 거제군이 되었다. 1989년에 장승포읍이 거제군에서 분리되어 장승포시(長承浦市)로 승격하였다가 1995년에 거제군과 통합하면서 거제시가 되었다.
<견내랑항>
첫 방문지는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이다. 거제도에는 가슴 아픈 한국 현대사의 상처가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과 한국군이 사로잡은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가 수용되었던 거제포로수용소(巨濟捕虜收容所)는 부끄러운 듯 옛 터만을 간직해오다 이제는 유적공원으로 새롭게 단장되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거제도 주민의 수가 20여만 명, 당시 피난민과 포로의 숫자가 37만 명이었으니 상상만으로도 당시의 혼란스러움이 느껴진다.
<거제포로수용소 입구>
한국전쟁 당시의 거제도는 고립된 천연의 수용소로 1,190㏊의 넓이에 40만 명에 가까운 수용인원과 이를 감시, 감독하는 미군 중심의 UN군까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수용소였다. 반공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뉘어져 스스로의 지휘조직까지 갖추며 서로를 공격하였는데 공산포로의 인민재판으로 반공포로 100여 명이 살해당하고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미군 프랜시스 도드(Francis Dodd) 준장이 납치당하기도 하였다.
<거제포로수용소 작업장도 - 2019년 10월 23일>
이 때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현 위치에서의 휴전보다는 군사적 승리와 압록강까지의 진격을 부르짖었고, 서울에서는 군중대회가 개최되어 5만여 명의 군중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휴전을 서둘렀다. 이리하여 비밀회담을 열어 병상포로 교환 이후 그동안 타협에 이르지 못했던 포로문제에 대해 협의하였다.
<사진 좌로부터 모택동,김일성,스탈린(좌) 트루먼,이승만,맥아더(우) - 2019년 10월 23일>
본국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관리위원회의 관리 하에 두고 이들 포로를 설득하며, 여기서도 송환을 거부하면 정치회담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지난 후에는 유엔 총회의 결정에 따른다는 안을 제시하였으나, 한국정부와 국민을 경악케 하여 우선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는 회담 참석을 거부하월 23일고, 이승만은 6월 6일 휴전에 대한 대안을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동시에 철군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발표하 였다.
<당시 거제포로수용소 전경 - 2019년 10월 23일>
그 와중에 6월 8일 휴전성립을 예고하는 포로송환협정은 조인됨에 따라 전례 없는 반미징후가 한국전역에서 일기 시작하고, 휴전반대시위가 그 빈도나 규모면에서 증가되었다.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송환시킬 수 없다는 이념적인 측면과 외교적 주도권의 장악 및 한국국민의 반공통일에 대한 의지, 그리고 휴전협상에 전쟁 당사국인 한국의 주장이 전혀 참작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반영하여 반공포로의 석방을 결심하게 되었다.
<위령탑 - 2019년 10월 23일>
그리고 6월 18일부터 이틀간 이승만이 추진하여 온 반공포로의 석방이 단행되었다. 반공포로들은 한국군 경비병의 묵인과 협조 하에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였다. 반공포로들은 거제수용소, 가야수용소, 광주수용소 등 총 8개 수용소 총 인원 35,698명 가운데 27,388명이 탈출하면서 56명의 포로들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각 수용소장은 소수의 행정참모와 기술참모를 거느린 반면, 경비 병력의 대다수는 한국군이어서 탈출이 용이하였었다.
<1950년 당시 포로수용소 내의 취사장 - 2019년 10월 23일>
이때 탈출한 포로들은 대부분 지방주민들과 섞여 버렸고 더구나 한국정부가 그들을 비호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재수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공포로 석방에 관한 공산군 측의 반응은 다음날인 6월 19일 아침에야 나타났다. 그들은 통역관회의와 비무장지대의 세부작업을 책임진 다른 참모장교회의도 취소하였다. 6월 20일 본회담이 재개되었을 때, 적의 대표는 유엔군 측이 포로 석방을 이승만과 공모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2019년 10월 23일>
공산포로의 조기송환을 추진하는 UN군과 이를 반대는 한국정부의 대립까지 이어지던 포로수용소의 역사는 결국 1953년 판문점을 통한 희망 포로의 송환으로 아픈 시간을 마감하였으며, 잔존 건물의 일부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민족역사교육장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1983년 12월 20일)로 지정되었으며, 유적공원은 총 6만 4224㎡의 부지에 2002년 11월 완공하였다.
<포로수용소내 38선 그림 - 2019년 10월 23일>
현재 유적공원의 시설들은 거의 모두 공원 건립과 함께 재현된 시설들이다. 옛 수용소의 경비도로를 따라 자리하는 전시관들은 당시의 상황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희미한 사진 속 수많은 천막으로 채워진 수용소의 모습과 당시 사용된 빛바랜 물품들은 혼란스러운 당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시각적으로 구성된 유적공원을 둘러보면 어느새 가슴이 갑갑해지며 이념과 동족전쟁의 아픔을 생각하게 된다.
<포로수용소 디오라마관 - 2019년 10월 23일>
https://blog.naver.com/waya555/223304071586
첫댓글 등제감사합니다.
[거제포로수용소]
벌써몇십년이흘러그자취가 몽롱하던차에 수용소모습보니 그때그시절이생각납니다.
군용텐트속에서보낸수용소포로병들-고향에가고픈마음오죽했으랴
그래서 전쟁은맊아야한다.
...15박장춘...
그렇습니다. 선배님
어떤 전쟁이든 모두 비극이죠.
그래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