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비탕 한 그릇
장마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생전에 평생을 이곳 양주 땅에서 살았어도 큰물이 지는 것을 보지 못했고, 큰 가뭄이 들어도 물이 모자라 농사를 그르친 적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나라가 온통 큰비로 난리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걱정이 없습니다. 좋은 마을에서 태어나 물이 들고 질 걱정 없이 삽니다.
집에 들어서면 어머니 팔순 때 찍은 부모님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습니다. 두 분이 나란히 앉아서 환하게 웃으시는 사진입니다. 늘 그 사진을 보면 평생 대화 없이 지내시는 줄 알고 더러 걱정도 했었는데 ‘우리는 금실(琴瑟)이 좋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듯해 마음이 놓입니다. 조석으로 드나들면서 올려다보게 되는데 이참에 부모님 앞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도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 그렇게 셋이 살다가 9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홀 아버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장례식 내내 작정하고 또 작정한 것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끝내 내가 모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혹시라도 형제들이 아버님 걱정할 것이 염려되어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아우들에게 아버님은 내가 모실 것이니 아무런 걱정하지 말라고 선언했습니다. 나의 작정은 어긋나지 않아 돌아갈 때까지 그럭저럭 집에서 편안하게 지내셨습니다. 제일 큰 걱정은 조석으로 끼니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걱정은 나만 한 것은 아니었을 테고 형제들도 끼니때가 되면 아버지는 제때, 제대로 식사는 하시는 걸까? 했을 것입니다.
아우들에게 아버지는 내가 잘 모시겠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는다고 해도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다 외출할 일이 생기면 이웃에 사는 셋째 제수가 수발을 들었습니다. 어지간하면 외출에서 급히 돌아오고는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간 후 3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무엇이든 잘 드시는 편이라 특별히 어려운 것은 없었지만 아침 먹고 나면 점심이 점심 후에는 저녁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세상의 어머니는 대단한 분이라고 새삼 감탄했고, 이럴 때 내 어머니라면 어떻게 할까, 하고 짐작해 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기 한 해 전 당신을 모시고 동두천에 있는 음식점에 가 점심을 대접한 적이 있습니다. 효심이 지극해서가 아니라 집에서는 대접할 음식이 마땅치 않아 꾀를 낸 것입니다. 그때도 아마 지금처럼 복 지경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벌이가 시원치 않아 밖에 나가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어쩌다 입맛이 없어 보이거나 매일 상에 오르는 음식이 같아 민망할 때는 아버지를 모시고 밖으로 나가기도 했고, 가끔 아우들이 찾아와 돌아가며 대접하기도 해 그나마 나의 체면을 세워주었습니다.
이미 아버지는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부축해야 할 지경에 이르러 식사도 식사지만 밖에 나가는 것을 크나큰 나들이로 알 때였습니다. 심지어는 병원에 약을 타러 갈 때도 동행을 요구해 발걸음을 더디게 하곤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외출할 일이 없어서 무료함을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귀찮은 일이지만 그런 일이야 당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머지않아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 것을 압니다. 음식점에라도 갈 양이면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열고, 부축해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을 양이면 이마에 땀이 솟고는 했습니다. 급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우리보다 늦게 왔더라도 식사를 마치고 나갈 시간이라고 과장할 만합니다.
연세가 구십을 넘겨 눈은 치료가 되지 않아 앞을 보기가 어려웠고 귀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삶의 끝자락을 보았으며, 죽음은 어떻게 오는가를 느끼기도 했고, 죽음을 앞둔 노인의 언행을 살피기도 했습니다. 잔소리가 사라지고,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골똘히 생각에 잠기셨고, 전화만 와도 궁금해하셨고, 주말이 되면 누군가를 특히 손자들의 방문을 기다리셨으며, 자식에게 폐가 되는 일을 삼가셨습니다. 그즈음 각자 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공연히 속이 상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럴 때면 슬며시 일어나 안방으로 가 잠든 아버지의 얼굴을 어둠 속에서 들여다보고는 했습니다. 다가올 이별이 안타깝고 동시에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런 소회는 다 지나간 일입니다. 평생을 살면서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도 많았겠지만, 뇌리에 기억나는 말은 별로 없습니다. 나무라지도 않으셨고 교훈이 될 만한 말씀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과묵한 분이셔서 어느 자리에서나 말을 아끼셨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갈비탕 한 그릇을 다 비우셨습니다. 누군가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생전 갈비탕 한 번 못 드신 노인이라고 여겼다 해도 그럴만합니다. 정작 나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다 드셨어요?” 하며 입가에 묻은 음식물을 닦아드리자 “평생 이렇게 맛있는 갈비탕은 처음이구나”하시는 것입니다. 가슴이 뭉클하며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구십 년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갈비탕을 자셔보았을 텐데 이렇게 맛있는 갈비탕이 처음이라니! 지척에 음식점을 두고도 그렇게 맛있는 갈비탕을 대접하지 못한 죄스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두고두고 이 말은 나에게 아버지의 명언으로 남습니다. 그때 내 나이도 칠십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인데 효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조차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엄청난 말의 크기에 비해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지금도 집에 들어서면 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어떤 칭찬이나 꾸지람보다 먼저 폐부를 파고듭니다. 백 번도 더 대접할 수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