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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65) 나훔서
니네베의 멸망은 하느님의 징벌
히브리어 ‘나훔’은 ‘나훔야’의 줄임말입니다. 우리말로 ‘야훼께서 위로하시다’라는 뜻입니다. ‘느헤미야’(주님께서 위로하신다)도 나훔과 같은 히브리어 어근에서 변형된 이름입니다. 말뜻처럼 나훔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협하던 원수의 몰락과 주님의 승리를 예고하면서 하느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신앙적으로 위안과 희망을 북돋아 준 예언자입니다.(로마 15,4-5 참조)
구약 성경 제1경전인 「타낙」에는 열두 소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드야, 요나, 미카, 나훔, 하바쿡, 스바니야, 하까이, 즈카르야, 말라키입니다. 성경에서 열둘(12)은 ‘이스라엘 민족의 수’이며 ‘완성’을 의미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부족의 시조입니다. 성전 사제단 역시 열두 조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구약의 소 예언자도 열둘이었고, ‘사도’라 불리는 예수님의 제자도 열두 명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새 예루살렘을 ‘12’라는 수로 표현합니다. 새 예루살렘 도성 성벽 초석과 성문도 열두 개이고, 초석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습니다.(묵시 21,12-21 참조) 아울러 교회의 신앙 고백문인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사도 신경도 열두 신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타낙」은 나훔서를 후기 예언서 가운데 10번째, 소예언서 가운데 7번째에 배열해 놓았습니다. 이 예언서를 헬라어 구약 성경 「칠십인역」은 ‘Ναουμ’으로,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Nahum’,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나훔서’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나훔은 ‘엘코스 사람’(1,1ㄴ)으로 남 왕국 유다의 요시아 임금(재위 기원전 640~609년) 때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스바이야·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같은 시기 활동했었죠.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나훔은 요시야 임금 통치 초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당시 근동의 패자는 아시리아였습니다. 아시리아는 시리아, 북 왕국 이스라엘, 티로, 시돈 등을 함락할 만큼 군사력이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민족들은 아시리아의 수도를 ‘피의 성읍’(3,1)이라 부르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 임금이 신하들의 음모로 죽임을 당하자 백성들이 이 반란자들을 맞서 그를 왕좌에 앉혔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습니다. 기원전 7세기 중반 요시야가 유다를 통치할 때 아시리아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됩니다. 7세기 바빌론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아시리아 안에서도 왕권 계승을 둘러싼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급기야 기원전 612년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가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파괴합니다. 나훔은 니네베 함락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2,1) 이는 제2이사야의 예언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와 흡사합니다.
하지만 같은 기쁜 소식이어도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풀려나는 것’을, 나훔서는 ‘니네베의 멸망’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정치 변화 안에서 나훔 예언서는 니네베의 멸망을, 유다를 억압하고 괴롭혀 온 아시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규정합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징벌 뒤에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은 여럿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사야와 예레미야 예언자이죠.
나훔서는 총 3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먼저 서론(1,1-8)은 히브리어 자음 순서를 따라 고통받는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당할 징벌을 예고합니다. 둘째 부분(1,9─2,3)은 니네베의 최후에 대한 위협과 유다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비상한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것은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셋째 부분(2,4─3,19)은 니네베 멸망에 대한 애가로 읊어집니다. 니네베의 힘이 아무리 막강해도 마지막에는 재로 변해 흔적도 없이 몰락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니네베의 멸망은 하느님의 주권과 백성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구체적인 본보기로 만드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요나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니네베를 아끼시는데 왜 나훔서에서는 하느님을 “보복하시는 분”(1,2)이라며 니네베에 불행을 선언하는 것일까요? 성경학자인 안소근 수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훔서 1,2-8의 노래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느님을 ‘분노에 더디신 분’(1,3), ‘선하신 분’(1,7)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쉽게 분노하고 마구 보복하는 분이 아니시며, 분노에 더디신 분이면서도 아시리아의 지나친 불의를 벌하지 않은 채 끝까지 그대로 두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은 아시리아보다 강하십니다. 아시리아가 폭행을 저지를 때, 그 아시리아를 응징하시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불의를 꺾고 정의를 세우십니다.”(「구약 종주」, 186~187쪽, 성서와 함께)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13) 인내하며 하느님을 찬미한 레아
오래전 일이다. 어느 겨울 몹시 추운 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초등학생 형제가 있었다. 뒤에 귀마개와 장갑을 낀 동생이 털모자도 없이 낑낑대며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돌리는 형의 양쪽 귀를 잡고 있었다. 나는 차 안에서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면서도 목이 메었다. 나도 형과 동생에게 저렇게 따듯던 적이 있나 자연히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느 저녁 형과 영화를 보러 갔다. 막상 극장에 도착했는데 두 사람의 푯값에서 딱 10원이 모자라 영화를 보지 못했다. 풀이 죽은 내가 측은했는지 형은 나를 청계천의 중고 서점으로 데려가 책을 골라주었다. 그때 처음 본 소설이 삼국지였는데 며칠 동안 열심히 보았던 기억이 난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형제자매 사이는 무척 친하면서도 경쟁심을 갖고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고 한다. 그래서 형제자매 사이의 어린 시절의 관계는 평생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편애하면 그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며 어른이 되어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예쁘고 아름다운 동생 라헬에 비해 레아는 눈에 생기가 없었다고 표현한다. 시력이 약하다는 것은 무엇을 볼 때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거나 이마에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당시 근동 지방의 미적 기준의 큰 결점이 되었다. 야곱이 라헬을 선택하는 순간 레아에게 열등감과 질투심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레아는 야곱의 편애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한 여성이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 한 레아는 평생을 동생 라헬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편 야곱을 지켜보아야 했다. 레아는 인내심이 강하고 인성이 좋은 여성이었다. 레아의 아들들의 이름에도 남편에 대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첫아들을 르우벤이라 부르며 이제는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 희망했다. 레아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살펴주셔서 아들을 낳아준 자신을 야곱이 사랑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둘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겼고 호소를 들어주었다며 시메온이라 불렀다. 셋째는 레위였다. 아들을 셋이나 낳았는데도 남편의 마음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레아는 넷째 아들을 출산하여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송하리라는 뜻의 유다라고 이름을 붙였다.
레아는 소극적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끊임없이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레아는 삶이 힘들었어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 라반의 이기적인 행동과 남편의 냉대, 라헬에 대한 열등감에도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았던 레아를 하느님은 잊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다.”(창세 29,3) 하느님은 레아의 마음을 알아주셨고 은총을 내려주셨다. 마태오복음서 1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며, 그 다윗은 레아의 아들인 유다의 후손이다. 결국 레아는 세상을 구할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선조가 되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예루살렘의 성 안,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곳에는 ‘리토스트로토스’라는 옛 로마 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요한 19,13에 언급된 빌라도의 재판석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본시오 빌라도는 예루살렘을 좋아하지 않아, 평소에는 항구 도시 카이사리아에서 살다가 1년에 세 번 정도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유다인들이 의무적으로 성전을 순례해야 한 3대 명절, 곧 파스카, 주간절(오순절), 초막절을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예루살렘으로 순례 온 유다 남자들이 혹시라도 반란을 모의하고 도모할 봐 미리 견제하려고 올라왔던 것입니다. 여기서 빌라도가 예루살렘을 좋아하지 않은 이유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때는 유다인들의 3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파스카 축제 직전이었습니다. 이때 빌라도는 리토스트로토스의 재판석에 앉아, 유다인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을 선고하게 됩니다. 리토스트로토스 위에는 옛 로마인들이 제비 뽑기를 했음 직한 판이 새겨져 있는데요,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마태 27,35) 가졌다는 대목을 떠올려줍니다. 물론 리토스트로토스 유적은 기원후 2세기의 것이라 예수님 시대와 간격이 있지만, 당시의 장면을 그려보기에는 충분합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두고 임금 놀이를 한 듯합니다. 예수님 머리에 가시나무 관을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힌 뒤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뺨을 쳐 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주색’ 옷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당시 자색은 귀한 염료여서 임금과 귀족들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에스 8,15; 1마카 10,20; 루카 16,19 등). 그것은 이스라엘의 북쪽, 곧 지금의 이스라엘 하이파 시와 레바논 앞 바다에 사는 뿔고둥의 체액에서 얻을 수 있는 염료였고(『바빌로니아 탈무드』 므나홋 44ㄱ 참조), 뿔고둥 만이천 마리에서 추출할 수 있는 양이 불과 1.4g 정도였다고 합니다.
에스테르의 사촌 모로도카이가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 한 하만을 처단한 뒤 영광스럽게 되었을 때에도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모르도카이는 자주색 모직과 하얀 천으로 된 왕실 의복에 커다란 금관을 쓰고 아마와 자홍색 양모로 된 겉옷을 입고 어전에서 물러 나왔다”(에스 8,15).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에서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 호화롭게”(16,19) 살았던 것으로 나옵니다. 자주와 자홍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랑하던 시절, 하느님께 봉헌한 성막에도 사용되었던 염료입니다(탈출 26,1). 자주는 푸른빛이 도는 자색, 자홍은 붉은빛에 가까운 자색을 뜻하는데요, 그만큼 귀한 염료를 써서 주님의 성막을 장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께서 자색 옷을 입고 수난하신 이후, 자색은 회개와 속죄의 상징이 됩니다. 이렇게 오늘날엔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와,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사순 시기의 색깔이 되었습니다.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행복합니다”
너는 행복하냐, 묻는다면 당장 무엇이 행복인지, 왜 행복해야 하는지 다시 묻게 된다. 어정쩡한 행복론들에 둘러싸여 행복을 키워가야 하는 당위가 거세질수록 나의 행복은 점점 더 무거운 족쇄가 된다. 꼭 행복해야 하므로, 그리하여 행복하지 않은 것은 자책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엔 갈증을 느낀다. 오늘은 그래서 불행한 쪽에 좀 더 가까운 시간을 겨우 살아낸다. 행복의 끈은 잡힐 듯 또 멀어진다.
묵시 1,3은 이렇게 말한다.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행복을 바라는 내용은 요한 묵시록에 일곱번 나온다.(1,3;14,13;16,15;19,9;20,6;22,7.14) 묵시 1,3은 요한 묵시록의 저술 의도이기도 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전해진 후 반드시 남게 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전해진 계시가 사람들의 행복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요한 묵시록을 읽는 이유가 된다.
행복을 두고 많은 사람이 많은 말을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선을 행하는 것’이 행복이라 했다. 그럼에도 의로운 이의 불행을 말하는 욥기는 옳고 바른 일을 실천하더라도 행복을 담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요한 묵시록은 행복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할까. 묵시 1,3을 찬찬히 다시 살펴보자.
행복의 대상은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한정된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다. 학자들은 전례 공동체 안에서 낭독된 일곱 교회의 편지들(묵시 2-3장)이 요한 묵시록의 시작으로 추정한다. 누군가는 편지들을 읽었고 공동체는 그 낭독의 소리를 듣고 삶의 지침으로 삼았으리라. 신비한 계시의 내용을 많이 알거나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적혀진 글들을 소리 내어서 읽고 읽은 것을 듣고 적혀진 것을 지켜내는 일이 요한 묵시록을 쓴 이유다.(묵시 22,18-19) 적혀진 글 요한 묵시록은 2000년 전 요한 공동체를 향했으나 읽고 듣는 행위를 통해 그 글은 수많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또 전해진다.
읽는다는 것은 적혀진 것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언어학자들은 독서 행위를 통해 글이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말은 고정된 기록이 아니라 살아 움직여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하는 매개체가 된다. 교회의 주석학은 역사 속 사실 관계에 천착하여 글의 진위 여부와 글이 가리키는 역사적 실제에 관심을 두는 반면, 글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언어학자들은 글이 시대를 초월하여 읽고 듣는 이들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살핀다. 요컨대 글에 대한 주석(주석학)이 해석(언어학)으로 옮겨지면 글은 늘 배고프고 목마르다. 읽기는 글이 있는 한 끝이 없으므로, 그래서 글은 읽기를 통해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하므로.
그래서일까. 요한 묵시록은 적혀진 기록에 대해 굳건히 지켜 나가길 권고한다.(묵시 22,18) 주석학은 기록된 것을 ‘지키는’ 일을 윤리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적혀진 글이 삶의 규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올바른 행위의 준거로 이해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글을 지키는 것은 행복한 일이어야 하고, 그 글은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는 공동체 안에서 지켜져야 한다면, ‘지키는 행위’ 는 단순히 개인의 윤리적 노력에 내맡겨 둘 수 없다. 저 홀로 올바로 산다고 행복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개인의 무결점이 누군가에게는 숨막히는 흠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지키는 행위’는 자신을 향하고 자신의 올바름을 다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고 타인을 찬찬히 살피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을 읽는 이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적혀진 글을 읽으면서 자신을 토닥이고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신앙 선조들이 걸어간 삶의 여정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살펴보는, 다분히 타자 지향적인 행동이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다.
다른 이의 모습과 삶을 읽고 한 사회를 살펴보는 데 예언자들의 말씀은 그 전형이다. 요한 묵시록은 스스로 ‘예언의 말씀’이라고 제 정체성을 규정한다.(묵시 1,3) ‘예언’으로 번역되는 ‘프로페테이아’라는 그리스말은 ‘~앞에서 말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계시를 백성에게 전하는 일이 ‘예언’이다. 대개의 예언자들은 공정과 정의를 말했고, 그 이면에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서민들의 애환을 보듬는 위로가 있었다. 예언은 행동거지에 대한 심판이나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암시가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들을 이어주고, 끊어진 사람 간의 자비와 사랑을 회복하는 것을 제 역할로 삼는다. 이를테면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랑의 언어가 ‘예언의 말씀’이다. 지난 시간 요한 묵시록이 묵시문학이냐, 예언문학이냐를 놓고 학자들은 씨름했다. 대개 표현과 형식의 면에서 묵시문학적 뉘앙스가 뚜렷해 묵시문학으로 분류되지만, 내용과 의미에 있어 요한 묵시록은 분명 우리에게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느님 앞에서, 백성들 안에서 예언자들이 외쳤던 말들은 요한 묵시록의 글로 옮겨져 우리에게 전해진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그 글을 읽고 듣고 서로 나눔으로써 저 옛날 예언자들의 외침이 세상의 이곳저곳에서 행복의 포탄되어 터져 나오게 한다.
행복의 때는 지금이다. 내일의 행복을 좇는 마음으로 요한 묵시록을 읽을 이유는 없다. 묵시 1,3에 ‘가까이’로 번역되는 ‘엥구스’는 현재를 포함한 시간의 충만으로 해석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아직 다다르지 않은 시간은 없다. 전통적으로 가까이 온 ‘그때’를 예수님의 재림의 시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접속사 ‘가르’는 앞 문장, 그러니까 ‘행복합니다’로 시작하는 문장의 원인을 정확히 짚는다. 행복해야 할 이유는 아직 오지 않는 그 재림의 시간이 아니라 이미 다다른 시간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 초기 교회의 신앙인들은 물론 오늘 우리 역시 예수님의 재림을 여전히 기다린다.(요한 14,2-3; 사도 1,11; 1코린 15,51-52; 1테살 1,10) 예수님은 아직 오지 않으셨고 언제 오실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가까이 온 그 시간’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리스말의 시간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구별한다. 크로노스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지나가는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의미를 담은 시간이다. 철이 들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늙어가는 순간들에 우리가 느끼고 깨닫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이다. 묵시 1,3이 말하는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아직 오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 묵시록을 읽고 듣는 모든 이들 안에서 ‘이미’ 오신 메시아로 여겨진다. 예언의 말씀이 공동체 안에 울려 퍼질 때, 그 시간은 아직 오시지 않은 예수님이 이미 오셨다는 믿음으로 행복해야 할 시간이 된다.
오늘의 이 시간을 홀로 고민하고 홀로 노력하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의 지식을 적당히 얼버무려 타인의 행복을 논하는 책과 글들이 서점가를 메우고 있는 요즘,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행복으로 살아갈 것인가. 믿음을 가진 우리가 행복한 정도는 이웃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에 비례할 것이다. 요한 묵시록의 행복을 한마디로 추려보면, ‘만남’이라는 말마디가 떠오른다. 요한 묵시록은 읽는 이와 듣는 이들이 만나는 행복의 자리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모든 글이 그러하듯, 읽고 듣는 일이 개인으로 끝날 때, 글은 죽는다. 글은 읽고 듣고 나누어진다. 그래서 살아 있는 말이 되고,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생각한다.
서로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리고 결국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에 대해. 행복은 다름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한다. 요한 묵시록의 글이 다 읽히고 나면 글은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갈증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제 글이 다하는 마지막에 요한 묵시록이 남긴 이 말은 모든 민족이 모여 와 하나로 만나는 천상 예루살렘 이후에 적혀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모든 만남의 끝이 결국엔 예수님이라는 사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역사 속 한 인물을 만나는 게 아니라 모든 세대에 걸쳐 모든 이를 만나는 일이 된다는 사실, 이 사실들은 요한 묵시록을 읽고 듣고 나누는 일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린다. 그러니까… 나의 행복을 좇다가 우리의 행복이 무엇인지 또 다른 질문을 받고야 만다. 어쩌면 행복은 나로부터 우리를 읽어내는 작업, 그 자체가 아닐까.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64) 미카서
임마누엘,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 예언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듣거나 읽었을 성경 말씀입니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할 때 꼭 인용되는 성구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 이 예언을 한 이가 바로 ‘미카’ 예언자입니다.
히브리어 미카는 ‘미카예후’를 줄인 말입니다. 우리말로 ‘누가 야훼와 같으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기원전 9세기께 유다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합니다. 이 미카 예언서를 헬라어 구약 성경 「칠십인역」은 ‘Μιχαιαs’(미카이아스)로,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Michaeas’(미캐아스)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미카서’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미카서 머리글은 미카 예언자를 “유다 임금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1,1)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미카가 기원전 8세기에 이사야 예언자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음을 알려줍니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 강대국은 아시리아였습니다. 아시리아의 군사력은 엄청났습니다. 아시리아는 무력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짓밟았습니다. 그래서 기원전 8세기 고대 근동 지역은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아시리아의 군사력은 북 왕국 이스라엘뿐 아니라 남 왕국 유다에도 미쳤습니다. 이 시기가 기원전 740~687년에 해당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중요한 두 사건이 일어납니다. 기원전 722년 북 왕국 이스라엘 수도인 사마리아의 함락과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남 왕국 유다 침공입니다. 당시 활동했던 이사야 예언자는 “히즈키야 임금 제십사년에,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유다의 모든 요새 성읍으로 올라와서 그곳들을 점령하였다”고 밝힙니다.(이사 36,1) 이 침략으로 미카의 고향 모레셋도 아시리아군에 점령당합니다. 모레셋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 약 35㎞ 떨어진 필리스티아의 작은 마을입니다. 오늘날 ‘텔 엘 주데데’로 추정합니다.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은 폭력과 음모가 난무하는 정변들로 말미암아 극심한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불균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북 왕국에 비해 남 왕국 유다는 정치ㆍ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유다 역시 사회 내부는 부패로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 바알 우상에 젖어있었고,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습니다. 미카서는 이러한 정치ㆍ사회 배경에서 나온 예언서입니다.
7장으로 구성된 미카서의 주제는 ‘심판과 구원’입니다. 아시리아 침공을 심판의 징조로 본 그는 이 불행이 예루살렘에도 들이닥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1,8-16; 3,12) 그러면서 그는 백성을 억압하는 지도자들과 자신의 사치를 위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부자들, 그리고 돈에 매수되고 거짓 예언과 허례허식에 찌든 종교 지도자들을 비난합니다. 아울러 하느님보다 국제적 정세와 권력과 힘에 의존하는 정치ㆍ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습니다.(2,1-5; 3,1-4; 5,9-14)
이어 미카는 온통 짓밟힌 유다 땅에서 장차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실 평화로운 날들을 예고합니다. 특히 ‘메시아 탄생’과 ‘메시아 왕국의 설립’을 예언합니다.(4-5장) 미카는 하느님께서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태어나게 하실 것이고, 그는 목자처럼 백성을 이끌 평화의 임금이 되며, 백성은 안전하게 살 것이라고 선포합니다.(5,1-4)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미카는 새로운 다윗이 부정과 부패의 본거지로 전락한 예루살렘이 아닌 보잘것없는 시골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예언이 ‘메시아 도래’의 약속이라고 봅니다.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앞으로 다스리게 될 자기 양 떼의 목자로서 새로운 다윗의 역할을 떠맡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약속이 ‘예수님 탄생’으로 성취되었다고 고백합니다.(마태 2,6)
다윗의 후손인 한 임금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주시리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희망은 다윗 왕조가 무너진 후 장차 올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으로, 종말에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합니다. ‘메시아’는 본래 ‘기름 부음을 받은 이’를 뜻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는 이는 누구보다 ‘임금’을 가리킵니다.
미카 예언자와 같은 시대 또는 15~20년 앞서 활동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이사 9,5) 그러면서 그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라며 장차 오실 메시아를 구체적으로 밝힙니다.(이사 7,14) 미카 예언자는 이 임마누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 예언이 성취됐다고 고백합니다. 아울러 그리스도교는 미카가 예언한 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께서는 종말론적 구원을 약속하고 실현하신 분이시라고 선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