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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박병욱 목사
성령으로 잉태되심
대림절은 이 땅에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신비스런 사건입니다. 이 신비 속에 있는 진리를 찾아보겠습니다.
성탄의 첫째 진리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처녀 마리아와 약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좋은 사람인 요셉은 소문을 내지 않고 조용히 이 사건을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 어느날 밤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요셉아,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서 잉태되는냐에 따라서 누구의 아들인가가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빌립이 한번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세요.”
예수님께서 이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예수님은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드러내므로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단지 하나님을 나타내는 형상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인간이 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감추어진 비밀이 아닙니다. 드러난 사건입니다.
다른 종교는 웅장한 신전의 건물을 보고, 화려한 신상을 보고 경배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보고, 피조물을 보고 영광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종교처럼 거대한 신전과 사제들의 신비스런 종교 체험 속에서만 숨어계시는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서 온전히 드러내신 하나님이십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동정녀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사람들은 ‘처녀 탄생이 도대체 가능한가?’ 하고 과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관계된 일입니다. 이 사실에서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인 관점이나 물리학적 관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의지나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창조의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나 에 대한 관심보다 “누가” 인간이 되셨나 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어떻게’는 과학적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과학적 사고 안에 갖힌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신 하나님이므로 우리가 과학적 사고로 판단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누가 인간으로 낮아진 신인가를 묻습니다. 자신을 인간으로 낮추신 하나님, 이분이 기독교인이 고백하는 하나님입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성탄의 두번째 진리는 “예수”라는 이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가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여호와께서 구해주신다” 라는 뜻입니다. 태어난 아이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에 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의 사람들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한 가정의 일이나 그 아이 개인의 일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아이의 생애를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파악하고 있습니다. 한 개인이 공동체와 떨어진 개체가 아니라, 공동체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탄생을 공동체적인 사건,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과대망상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들을 예수라고 이름을 붙이는 요셉을 보면 유대인들의 역사관과 간절한 소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이란 보통 사람과 구별된 경건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을 말합니다. 죄란 우리 인간의 모든 비참과 고난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삶의 자리에 오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애통해 할 때, 우리는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구세주를 갈구합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물질을 가졌다고 해서, 지식을 가졌다고, 지위와 권력을 좀 가졌다고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게 대해서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면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언제나 자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죄와 죽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이 왕의 옷을 입고 오셨다면, 하나님이 부자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하나님이 지식인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리어 죄와 죽음의 세계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워낙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이 왠만해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첫자리가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자리는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자리는 말구유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우리는 과연 그의 생애를 말구유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끝낸 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까?
그러면 어린 아이로 오신 예수님은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에 저의 반에서 누가 씨름을 제일 잘하는지 시합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아이와 씨름을 오래 했습니다. 그 아이와 씨름을 한 이후로 냄새가 너무 지독하게 나서 옷을 갈아입고 목욕탕을 다녀왔습니다. 그래도 몇일간 코에서 이상한 냄새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아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 사건도, 그 아이의 얼굴도 이름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기도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잊어 버렸던 이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나에게 다가 오셨다면 어떤 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동물의 우리에 오신 그분의 옷에 소똥이 묻어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에게서 닭똥 냄새가 코를 찌를 것입니다. 아니면 그에게는 돼지 우리의 냄새가 코를 찌르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는 거지들 가운데 한 거지로서, 추방당한 사람들 가운데 한 추방당한 사람으로서, 절망한 사람들 가운데 한 절망한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죽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계십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 (사 53:2-3).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성탄의 세번째 진리는 “임마누엘”의 신비입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건이 어떤 사건입니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 보잘것없는 아이로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까?
낮아진 자만이 다른 사람을 높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만이 다른 사람을 부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 멸시를 받는 자만이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죽는 자만이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낮아진 자와 함께 낮아진 자만이 하나님의 높여주시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함께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풍요하게 하시는 은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멸시 받은 사람과 함께 사람에게 멸시를 받은 자만이 참된 위로를 할 수 있습니다. 죽는 자만이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인간을 돕고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도움과 구원을 초자연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초월적인 현상에서 찾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이 세계를 떠난 특별한 현실 속에서, 신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이 후 인간은 이제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이 세계를 버리거나 이 세계를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어떤 특정한 건물을 짓고, 그 건물 안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 후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더 이상 성전이라든가 신성한 장소를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날 특정한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중의 어떤 시간 즉 새벽 또는 한밤 중 또는 정오나 저녁 때 등 또는 1년 중 특별한 절기에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특정한 시간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복음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와 화해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화해한다는 것이고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들의 마음을 모두 하나님께로 돌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일어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육체적인 탄생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한 인간을 입었다는 사건은 단지 특정한 인간 예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오실 수 있고 오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며, 하나님을 향하여 담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향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짐승의 우리에서 강보에 싸여 사람들 가운데 계셨고, 목자들과 동방박사들 사이에 함께 계셨습니다. 헤롯이 어린이를 살해하는 잔인한 살육의 장에 함께 계셨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지배로 인한 고통의 장에 함께 계셨고, 예언이 끊어진 영적인 암흑기에 함께 하셨습니다. 죄인과 세리와 창기와 함께 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더 낮은 곳에 찾아가심으로써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서강대 교수로 있는 장영희씨의 책 중의 한 이야기 입니다. 장영희 교수는 소아마비 장애인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에 박연주(가명)라는 한 여자 아이가 신데렐라 같은 좋은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당시는 여자 아이들도 검정 고무신을 신던 시절이었는데 연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빨간 비닐 구두까지 신고 다녔습니다. 아이들은 부러워하며 미워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연주의 어머니가 술집을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그 돈이 ‘더러운 돈’이라고 욕했고, 어떤 아이들은 연주의 어머니가 돈 많은 노인네의 ‘첩’이라고 했습니다. 피부색이 고우니까 화장을 한다고 소문도 났습니다. 한마디로 연주는 왕따를 당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복도에서 “불이야, 불! 모두 건물 밖으로 피해! 빨리!”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였습니다. 대혼란 중에 비명을 지르며 아이들은 서로 밀치며 교실을 빠져 나갔습니다. 혼자 남은 장영희는 공포에 사로 잡혔습니다. 다리에 보조기를 신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타인의 도움이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이제 나는 타 죽었다” 생각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도와 줄까?” 연주였습니다. “내가 업어 볼게. 날 꼭 잡아.”
장영희는 연주의 목에 매달렸지만 무게에 못이겨 연주는 바닥으로 넘어졌습니다. 장영희는 살겠다는 일념에 연주의 목에 악착같이 매달리고, 연주 또한 장영희를 포기하지 않고 넘어지기를 되풀이 했습니다.
그런데 화재 경보기가 잘못 작동을 했다며 다시 학생들이 들어왔습니다. 다행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장영희의 마음은 정상이 아니라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연주에게 말도 걸고 다른 친구와 똑같이 대할 것인가? 암 그래야지! 날 도와 주려고 했던 유일한 친구인데… 하지만 나도 연주처럼 따돌림을 당하면 어쩌지?’ 그리고 학년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연주에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학년이 바뀌고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30년 후에 작가는 글을 마치며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미안해 연주야, 정말 미안해.”
비록 글로 쓰는 화해지만 장영희 씨는 30년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대림절, 성탄의 계절은 화해의 시간입니다.
사람에게는 함께할 존재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동행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는 혼자다. 아무도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 생각 되는 순간에 나와 함께 하시는 사람이 내게 가장 필요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여도,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나도, 나의 옆에 와서 함께 있어 주는 사람” “옆에 있으면서 정죄도 하지 않고 값싼 위로도 하지 않고 그저 옆에 계시며 동행해 주시는 분” 이 진정 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