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이두에 대한 단상
삼국사기 사전 정의
고려시대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인종 23)에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역사책. 삼국유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꼽힌다. 총 50권으로 본기(本紀)가 28권(신라·통일신라 12권, 고구려 10권, 백제 6권), 연표 3권, 지(志) 9권, 열전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사료로 이용될 뿐 아니라, 고려 중기의 역사의식과 문화수준을 아는 데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편찬 당시 책의 정식 명칭이 〈해동삼국사기〉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최초의 정사이다.그동안 지은이 김부식의 사관에 대하여 여러 부정적인 견해가 있어왔다. 그러나 이두를 통하여 고찰해 볼때 과연 사대주의자 인가 하는 부정적인 견해로 보는데는 무리가 있겠다.
결론으로 김부식은 민족사관이 없어 환인, 환웅, 단군, 소리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김부식은 그 '고기의 기록이 문장이 졸렬하여 참고 할 것이 못 된다' 하였으나 김부식보다 134년이 늦은 일연이 인용한 고기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인들 시대에도 있었는지 모르지만 혹 있었다 해도 삼국인들 입에서는 단 한마디도 환인 환웅 단군 조선 소리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삼국인들은 우리 역사의 지도자를 중국식으로 말하지 않아서다.
따라서 김부식은 우리 민족의 주체인 환인 환웅 단군 조선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 환인 환웅 단군 조선소리가 나오는 중국의 고기(古記)가 졸렬하다고 배척한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 보다 136 년 후의 중 일연은 그 고기를 인용함으로써 비로소 우리 역사에 그 환인 환웅 단군 조선소리가 등장하게 된다. 그렇다면 김부식은 졸렬하다고 인용하지 않은 그 고기를 일연은 왜 인용 했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고기에 인용된 환인 환웅 단군 조선 소리는 중국인들이 우리말을 한자로 적자니 할 수 없이 그들의 한자를 빌어 만들어낸 이두 문이라 우리말의 본래의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졸렬한 한자 말을 중국이 고기에 사용하였는 바 이를 졸렬하다고 본 것이다.
당시 김부식이 활동한 시대는 이두가 졸렬한 절름발이식 문장이었으나, 136 년이 흐른뒤 일연 때는 그 졸렬하였던 이두도 일반에게 어느 정도 정착되어 많은 사람이 쓰게 되었다.
삼국인들이 쓰던 말에는 사실상 환숫이나 곰네의 표현을 공목(功木)이나 칠촌(七寸)등 은어 같은 말을 써 왔으므로 그것은 그들이 환인, 환웅, 단군,뿐 아니라 그 하느님이 주신 신지녹도문이나 천부경 하나 둘 셋 ...열의 의미까지 알았다는 말이 되고, 환인은 하느님, 환웅은 환숫, 단군은 밝달임금, 그리고 밝달임금의 처음 도읍지인 아사달>앗선에 세운 나라는 당연히 아사선 > 앗선 으로 알았을 것이므로, 그 삼국들은 중국의 고기 기록이 있다 하여도 당연히 그 졸렬한 환인, 환웅, 단군, 조선 소리는 쓰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 환인, 환웅, 단군, 조선 소리는 고려 말 일연의 고기 인용 때문에 생긴 말이니 하느님, 환숫, 밝달임금은 환인, 환웅, 단군,이란 말과 본래 부터 있었왔던 삼국시대인들의 말과는 도무지 연결될 수 없어, 일연은 자연히 옛글을 몰랐거나 알고 있었어도 중국의 기록만을 가탁하여 기록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김부식, 삼국사기를 사대주의 악서로 폄하한 신채호나 그 뒤 이 말을 믿는 후학들도 다 잘못이라는 것이며,일연의 삼국유사도 그나마 이러한 용어를 남겨두어 우리에게 일말의 역사관을 주고는 있으나, 용어에서 정확치는 않음이다. 또한 그 시대의 정황에서 고려 때만 하여도 많은 역사서가 있었으므로 해서 왕명을 받아 고려의 자존이 걸린 정사를 썻다고 본다면,다른 역사서와 차별성을 부각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고려이후로 내려 오면서 많은 기록물이 소실되었고,결정적으로 일제 36 년동안 우리의 기록물이 깡그리 사라진 역사가 이러한 논란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므로,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렇게 불편한 마음을 안고 이두를 통하여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사기와 유사를 소고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