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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G. Deleuze et F. Guattari),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1000쪽.
[이것의 사용은 김재인과 그의 동료에게 감사하며]
목차
역자 서문 - 연애에 관하여
이탈리아어 판 서문
머리말
1. 서론 - 리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7. 0년 - 얼굴성
8. 1874년 - 세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5.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7. 0년 - 얼굴성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8. 1874년 - 세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 1914년 - 늑대는 한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03.0. 10 000 av.J.-C.: La Géologie de la morale (pour qui se prend, la terre?)
53-94 [3장 1만년전 - 도덕의 지질학 (토지는 누구를 위해서 처신하는가?)]
[[03. 도판 그림(53쪽): Photo Boyer, 가제(Homard), coll. Viollet.
/ 브와이에(Paul Boyer, 1861-1908/1952) 프랑스 사진작가, 실제적인 활동은 1908년이다.
/ 브와이에(L. Boyer)라는 사진 작가가 (이 책 제2장의)늑대의 발자국을 찍은 것이 있다.
그런데 이름의 전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 로제-비올레 가문(Le nom de la famille Roger-Viollet) 1938년에 설립된 파리의 옛사진 대행사이다.
로제 비올레(Hélène Roger-Viollet, 1901-1985)가 설립했다.]
[들뢰즈는 도덕의 ‘계보학’이 아니라 도덕의 ‘지질학’일까?
이는 니체와 다른 입장에 들어선 것이 아닐까?
이제 표면에서 상층에 대해 봉기와 저항할 것이 아니라, 심층에서 새로이 추상기계에 작동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일만년전’이라기보다, 생명존재가 생기는 과정의 긴 시간이란 표현일 것이다.
다시 쓴다면 지구 역사 45억년에 전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신화 같은)로 인류가 활동을 제대로 하는 구석기 시대 말의 일만년 전을 기준을 삼았을 것이다.
/ 코난 도일(Conan Doyle 1859- 1930)의 잃어버린 세계 The Lost World(1912)라는 작품을 먼저 보아야 할 것이다.
(44RKG) /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 스코틀랜드 지질학자. (44RKH)]
[일만년 전이라면 구석기의 아름다운 또는 피튀기는 구석기에 대한 이야기는 도덕론이 아니라 정념론 또는 열망론이
아닐까 한다.
신석기 시대에서 도덕론을 끌어낸다면, 인류가 이미 자연에 대해서는 아닐지라도 다른 동물에 대해서는 우월성을 차지
했다는 오만의 표시가 아닐까?
그나마 인간에서 도덕은 금지와 계약이 들어설 때가 아닌가 한다.
전설과 민담에서 잡히지 않는 대상의 개념화가 신화이름으로 추억의 단면을 우리에게 남겨두게 될 것이다.
기억은 총체적 지층인데 추억들은 지층화의 일부 일 것이다. (50MKB)]
[벩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마지막 문장에서 “우주는 신들을 만드는 기계(la machine)”이라 한다.
이것을 두 저자는 기계권(Mecanosphère) 또는 리좀권(rhizosphère)이라 할 것이다.]
- Les strates. 지층들 - La double articulation (segmentarité).
이중분절(절편성) - Ce qui fait l'unité d'une strate.
지층의 통일성을 만들어 주는 것 - Les millieux.
환경, 중간 - Diversité d'une strate: formes et substances, épistrates et parastrates.
한 지층의 여러 측면: 형식과 실체, 겉지층과 곁지층 - Le contenu et l'expression.
내용과 표현 - La diversité des strates.
지층의 여러 측면들 - Molaire et moléculaire.
그램분자와 분자 - Machine abstraite et agencement: leurs états comparés.
추상적 기계와 배치물: 그것들의 상관적 상태 - Métastrates. 웃지층
§03.1. 지층들 85 Les strates 53
53 첼린저(Challenger) 교수, 코난 도일의 작품으로 알려진, ... 그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지구(Terre)는, <탈영토화되고>,
<빙원(la Glaciaire)이고>, <거대 분자(la Molécule géante)>인 지구는 하나의 기관 없는 몸체(CsO)이다. (53, 85)
지층들(les strates)은 질료에 형식을 부여하고, 공명과 잉여의 시스템들 속에 강렬함들을 가둬두거나 독자성들을 붙들어
매고, 지구(la terre)라는 몸체 위에서 크고 작은 분자들을 구성하고, 이 분자들을 그램분자적인 집합체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85, 원54)
원주: Roland Omnès: 우주와 그 변신들(L'Univers et ses Métamorphoses, 1973).
“성층 작용의 표면은 두 층 사이에 있는 보다 밀집된 고른판이다.”
.. 한 층은 다른 층의 밑지층 ... 따라서 배치물들은 두 지층들 쪽을 향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이런 의미에서 사이층이다) 다른 쪽, 즉 기관없는 몸체나 고른 판 쪽을 향하는 얼굴도 가지고 있다(이것이 웃지층)(86, 원54)
§03.2. 이중분절(절편성) 86 La double articulation (segmentarité). 54
54-2신[즉 자연]은 가재(Homard) 또는 이중 집게(double pince), 이중 구속(double-bind)이다. (54 86)
[신 즉 자연은 두 가지 방식[속성]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표현은 인간이 의식하는 한에서 영과 육 사이에서 이중적 표상을 만든다. 거울에 비추는 것처럼, 이를 내부와 외부로 의미 확장하여 보면 자아와 대상, 주체와 객체가 된다.
이 둘은 평행이 아니라 비대칭인데, 거울의 비유에 빠지면 대칭으로 여기는데 이는 착각일 것이다. (50MKB)]
각각의 지층은 실제로 이중분절(double articulation) 현상들을 보여준다.
B-A, BA 두 번 분절하라. (54 87)
[남 대 여(남녀)는 영과 육(영육)보다 더 확연하게 겉지층으로 보이지만, 생물학적으로 4억년 전에는 그렇지 않다.
오관(cinq sens)이 없는 단세포에서 지각과 감관(감관이 없지만 표면지각)은 겉지층이 아니라 곁지층은 아닐까?
/ 성희에서 혀끝, 손끝, 좆끝은 곁지층 관계일 것인가?
욕망이 작동하면 사유는 뒤로 밀리는 것인가? 열망이 먼저이고 사유가 다음인가? (50LMB)]
첫째 분절은 불안정한 입자-흐름들로부터 준-안정적인 분자 단위들 또는 유사 분자 단위들(실체)을 골라내거나 뽑아내며, 여기에 연결들과 이어짐들이라는 통계학적 질서(형식)를 부여한다.
다른 한편 둘째 분절은 밀집되고 안정된 기능정 구조들(형식)을 세우며, 그와 동시에 이 구조들이 현실화되는 그램분자적
합성물들(실체)을 구성한다. (55 87)
55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 두 개의 분절이 하나는 실체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점은 분명하다. (55 88) [실체와 형식에 관한한 주지주의적 관점일 것이다. (50MKB)]
55-2여기서 이야기는 에너지론, 물리-화학, 지질학적 지층들을 한걸음에 뛰어 넘는다.
이야기는 유기체 지층들로, 아니 유기체에도 커다란 성층 작용이 있다는 사실로 이행한다.
유기체의 문제, 즉 어떻게 물체로 유기체를 “만드는가”? 이것은 다시 한번 분절의 문제요 분절적 관계의 문제이다.
(55-56, 89)
그리올(Marcel Griaule 1898-1956) 프랑스 민족학자. 소르본대 교수 물의 신(Dieu d'eau, 1948)
우선 형태발생의 수준에서(au niveau de la morphogenèse) 보자. 한편으로 분자 유형(type moléculaire)의 실재들은 서로
우연적 관계를 맺고, 군집이나 통계학적 집합을 이루며, 여기서는 하나의 질서가 결정된다.
– 단백질 섬유(la fibre protéique), 섬유의 시퀀스{=정보배열}, 또는 절편성(segmentarité). 다른 한편으로 이 집합들 자체는
안정된 구조를 이룬다.
구조는 입체적[중첩적] 합성물들(les composés stéréoscopiques)을 “선출하고(élire)”.. 그리고 그램분자적 메카니즘들을
조직화하고, .. 또 도구통(l’outillage)울 사용하고 수선하고, 또 집합물을 “덧코드화하”(surcoder)도록 중심들을 분배한다
– 밀집구조 안에 섬유를 포개기(le repliement de la fibre) 그리고 둘째 절편성.
[발생수준에서 이중 분절:] 침전 작용과 습곡작용, 섬유와 포갬. (56, 89).
[생명 발생과정을 지층에 비교하여 한편으로 쌓이면서 위 아래층이, 다른 한편으로 양쪽에 밀려서 주름지기, 전자를 분자적 후자는 그램분자적(molaire) / 전자는 국가적 폴리스적, 후자는 노마드적 노모스적이다. (50MKB)]
하지만 다른 층위[수준]에서 보면, 단백질의 구성을 관장하는 세포 화학 역시 이중 분절을 통해 나아간다.
이 이중분절은 분자 내부에서 일어나며, 큰 분자와 작은 분자 사이에서, 잇단 개정(par remaniement)을 통한 절편성과
중합을 통한(par polymérisation) 절편성 사이에서 일어난다. (56 90)
“첫째 시기에 요소들은 .. 조합되며(combinés) ... 둘째 시기에 작은 분자들은 .. 조립된다(assemblées). .. 첫
째 [단계]는 화학적 모형들을 찍어내고, 두 번째 [단계]는 그것들을 조립한다.
첫째에서 형성되는 화합물들은 일시적이다. 이 화합물들은 유기물 합성과정에서 매개물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에서는 안정된 산물들을 구축한다”. (56-57, 90)
이 셋째 층위[수준]에 유전 코드가 있다.
유전코드 역시 두 유형의 상호 독립적인 분자들 사이를 통과하는 이중 절편성 또는 이중 분절과 분리될 수 없다. (57, 90)
[45억년에서 35억년 사이에 첫째수준(조합), 35억년에서 25억년 사이에서 둘째 수준(조립, 분자덩이수준 원핵세포),
그리고 25억년 이후 자기 복제에서 RNA-DNA도 이중 절편성으로 상상하면 될까?(50MKB)]
청중들은 상당히 기분이 상해서 챌린저 교수의 발표에 많은 오해, 모순, 그리고 남용마저 들어있다고 규탄한다. (57, 91)
사실상 챌린저 교수는 이중적이고 두 번 분절된 사람인데[단백질과 분자수준 뿐이겠나] ... 그(?)는 하나의 분과를 발명해
냈다고 주장하면서 리좀학, 지층-분석, 분열분석, 유목론, 미시정치, 화행론, 다양체학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지만 아무도
그 분과의 목표, 방법, 근거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었다. (57, 91)
[형상 형이상학이 각 과학을 갖게 되면 수학, 논리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 등 이듯이, 질료 형이상학이
각 분과학문(원 33족 참조)을 갖게되면 이럴 수 있겠다. (50MKB)]
알래스카의 젊은 교수(57, 91)
[에스키모족 연구자들에 의하면 에스키모인들은 여름에는 노마드, 겨울에는 정주적이라 한다.
/ 인류학자인 알랭 테스타르(Alain Testart, 1945-2013)의 「여자와 사냥」(pp. 128-139) 참조(50MKB)]
[언어학에서] 예름슬레우(Hjelmslev, 1899-1965)는 질료, 내용과 표현, 형식과 실체 개념으로 온전한 격자판을 구성할 수
있었다. (58, 92)
58 질료(matière)라고 불리는 것은 고른판(le plan de consistance) 또는 기관 없는 몸체(CsO)이다.
즉 형식을 부여받지 않았고 [유기적으로] 조직화되지 않았으며, 지층화 되지 않은, 또는 탈지층화된 몸체이다. (58 92)
[들뢰즈가 말하는 최 아래의 심층은 고른판 즉 질료 차원이고 아직도 형식이 부여되지 않은 것으로 플라톤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와 닮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유동이다. 이 유동으로서 내용은 심리학적으로 기억일 수밖에 없다. (44RKG)]
내용(contenu)이라고 불리는 것은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이며, ... 표현(expression)이라고 불리는 것은 기능(=함수)적
구조일 텐데. ... 예컨대 핵산의 시퀀스[내용, 나선구조]는 유기체의 화합물, 기관, 기능을 결정하는, 상대적으로 불변하는
표현과 불리할 수 없다. (58 92)
모든 지층은 신의 심판이기 때문에 동물과 식물, 서양란과 말벌뿐 아니라 바위나 심지어 강 그리고 지구에서 지층화된
모든 것이 노래를 부르고 자신을 표현한다.
따라서 첫째 분절은 내용과 관련되어 있고 둘째 분절은 표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분절의 구분은 형식과 실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표현 사이에서 일어난다. (58-59, 93)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대응관계도 일치 관계도 없으며, 다만 서로 동형성(isomorphisme)을 전제할 뿐이다.
내용과 표현 사이에 구분(la distinction)은 여러 측면에서 이루어져서 항상 실재적이지만, 내용과 분절이라는 두 항이
이중분절에 앞서 미리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59, 93)
[당근, 내용과 표현은 속성과 같고, 자연은 그 밑층(동근원)으로 엉켜있기에 평면태이며 다양체이다.
대응 또는 일치(정합)이란 것은 속좁은 이성이 제 입맛에 맞게 구성하는 양태로서 주지주의의 특성이다. 기표와 기의처럼
비대칭적이며, 동형성이라도 상동구조라기보다 상사구조일 경우가 많다. - 이원론이 아니라 이중성이다 (50MKB)]
59 내용과 표현의 구분이 실재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구분될 때조차 그것들은 상대적이다
(첫째 분절과 둘째 분절 또한 완전히 상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59 94)
사실과 모든 분절은 이중적(double)이기 때문에 내용의 분절과 표현의 분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59 94)
하나의 지층에는 도처에 이중 집게(doubles-pinces), 이중 구속(des double binds), 가재(des homards)가 있으며 도처에
모든 방향에 때로는 표현을 가로지르고 때로는 내용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이중 분절이 있다. ..
옐름슬레우(Louis Hjelmslev, 1899-1965)의 경우... “...내용과 표현은 서로 연계되어서만 정의될 수 있을 뿐이며, ..
내용과 표현은 대립적으로 또는 상관적인 방식으로만 정의될 수 있으며...” (60 95)
§03.3. 지층의 통일성을 만들어 주는 것 95 Ce qui fait l'unité d'une strate. 60
60 우리는 한 지층에서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무엇이 한 지층에 통일성(l'unité)과 다양성(la diversité)을 부여하는가?
질료, 고른판(또는 안고른판) 이라는 순수 질료는 지층들 바깥에(hors) 있는데 말이다. (60 95)
[지층 바깥이라기 보다 지층의 심층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연에 의해 생성되고 자연의 표현이 아닌가? (50MKB)]
우리는 조프루아 생틸레르(Etienne Geoffroy Saint-Hilaire 1772-1844)에게 찬사를 바쳐야 하지 않을까?
그는 이미 19세기에 성층작용(la stratification)이라는 웅장한 개념을 세울 줄 알았으니.
물질은 계속해서 나누어질 수 있어서 크기가 작아지는 입자, 공간으로 방사되면서 “자기를 전개하는” 유연한 흐름(flux)
또는 유체(fluides)로 되어 있다고 그는 말한다. (60, 96)
[벩송이 이런 용어를 직접 인용하지 않았지만, 조프르와 보다 퀴비에를 높이 평가한 이유가 있기는 있는 것 같다.
(50MKB)] / [조프루아 생틸레르(Etienne Geoffroy Saint-Hilaire 1772-1844) 프랑스의 동물학자.
/ 퀴비에(Georges Léopold Chrétien Fréderic Dagobert Cuvier 1769-1832) 프랑스의 동물학자.]
조프르아: 유기체 지층에서 한 형태가 다른 형태로 옮겨갈 때에는 항상 “접어놓기(pliage)를 통해 갈 수 있다는 점이
동형성의 존재를 증명해 줍니다.
뀌비에(화가 나서): 틀렸어, 그건 사실이 아냐, 당신은 코끼리에서 말미잘로 이행 못해.
비알통(뀌비에와 바에르의 제자): 그리고 접어 넣기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누가 그걸 견뎌낼 수 있겠어요?
조프르와: 난 동형성이 있다고 말했지 일치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소. (61 97)
(이상의 내용들)
62우리는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재기 어린 임기응변식 문답 속에는 그토록 많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 (62-63 99)
뀌비에는 완고한 전문가였고, 반면 조프르아는 항상 전문분야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
뀌비에는 권력과 땅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것을 조프르와에게 느끼게 하려고 했다.
반면 조프루아는 이미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유목민적 인간을 예고하고 있었다.
퀴비에는 유클리드 공간에서 숙고했지만 주프루아는 위상학적으로 사유했다.
.. 조프르와는 이미 비정상적인 소통을 하는 어떤 동물 리좀의 전조를, 즉 ‘괴물들’(les Monstres)을 갖고 있었다.
반면 퀴비에는 불연속적인 사진들과 화석 사본의 견지에서 반응했다.(63 99-100)
§03.4. 환경들 100 Les millieux. 63
[동일한 환경도 없었고, 또한 동일 반복도 없었다.
그러면 자연 선택인가? 환경에 따른 욕망(열망)의 분출인가?
그리고 최상 적응자인가 앙리앙스의 성립인가?
/ 전자들은 목적론과 기계론이 후자에는 생성론과 역동론이 대립되는 것이 아닐까? (50MKB)]
63 우리는 아직 다윈, 진화론, 신 진화론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결정적인 현상이 생겨났다.
우리의 인형극 극장은 점점 더 뭉게뭉게 피어났다. 다시 말해 집단적, 미분적이 되었다. (63 100)
이중적인 깊어짐[천착].
이것은 다윈주의의 근본적 성과물이며, 지층 위에서 환경과 개체의 새로운 짝짓기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함축한다.
한편, 주어진 환경 가운데 원소적인 개체군 심지어는 분자적인 개체군(une population moléculaire)을 상정해보자.
이때 형태들은 이 개체군이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개체군은 오히려 통계학적 결과물이다. (63-64, 100-101)
이런 의미에서 배 발생과 계통 발생의 관계는 역전된다. 태아는 더 이상 닫힌 환경 속에 절대적 형태가 미리 갖추어져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반대로 열린 환경에서는 어떤 형태도 미리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개체군의 계통 발생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형태를 이용한다. (64, 101)
“우주적 진화의 규모에서는 이렇게 눈금 찍어가기란 불가능하다. ... 땅위에서 생명은 그 경계가 종종 유동적이고 구멍도
뚫려 있으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동물상과 식물상의 합으로 나타난다.
지리학의 영역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카오스, 또는 더 좋게 말하자면 생태학적 질서의 외부적 조화, 개체군들
사이에 일시적 평형들(des équilibres)뿐이다.”
64 다른 한편, 같은 시간 같은 조건하에서 정도는 미리 존재하는 발전이나 완성의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적이고 전반적인 평형을 가리킨다.
정도라는 개념이 유효한 것은 그것이 환경 속에서 특정한 요소들과 특정한 다양체에 이득을 줄 때, 환경 안에서 그러한
변주(variation)가 일어날 때이다. (64, 101-102)
다윈주의의 두 가지 근본적인 성과를 가지고 우리는 다양체의 과학을 향해 나아간다.
즉 유형을 개체군(des population)으로 대체하고, 정도를 미분율 또는 미분적 관계(taux ou rapports différentiels)로 대체하는 것, 이것들은 유목민의 성과이다. (64, 102)
§03.5. 한 지층의 여러 측면: 형식과 실체, 겉지층과 곁지층 102 Diversité d'une strate: formes et substances, épistrates
et parastrates. 65
65 첼린저는 단언했다. .. 유기체 지층의 통일성(l’unité)과 다양성(diversité)에 관해 몇가지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 (65 102)
65-2 우선 하나의 지층은 분자적 재료들, 실체적 요소들, 형식적 관계들이나 형식적 특질들 등 조성의 통일성(l'unité de c
omposition)을 갖고 있다.
이로서 그 지층은 하나의 지층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65 102)
[지층의 화석에는 통시적인 실체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구성의 통일성(l'unité de composition) 그 시대를 산 생명체의 한정적 특이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4RKG)]
재료들은 고른판으로부터 아직 형태가 이루어지지 않은 물질이 아니라, 이미 지층화되어 있으며, “밑지층”(substrates)
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공급된 재료들은 해당 지층의 요소와 합성물의 외부환경(un milieu extérieur)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재료들은 지층에 대해 외부적이지 않다. (65 103)
이렇게 결정체적인 지층에서 보자.
결정체가 만들어지기 직전까지도 부정형의 환경(le milieu amorphe= 매질)은 씨앗(le germe= 결정핵)의 외부에 있다.
하지만 결정체(le cristal)는 부정형의 재료 덩어리를 내부로 끌어들여 일체화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역으로 결정체 씨앗의 내부는 시스템의 외부성으로 옮겨가야 한다. (65 103)
지층 안에 감싸여 있으며 지층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동일한 추상적인 기계(machine abstraite)처럼 있다.
그것은 고른판의 평면태(le Planomène)와 반대되는 통합태(L'Oecumène)이다. (66 104)
66 하지만 지층의 통일적 중심층을 따로 떼어낼 수 있다거나 지층 자체가 퇴행함으로써 이 중심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우선, 지층은 필연적으로 층에서 층으로 나아간다. (66 104)
이 매개물들과 중첩들, 이 돌출들, 이 층위들을 겉지층들(épistrates)이라 부르자. (66 105) [곁지층 (parastrates)]
유기체 지층은 이른바 내부 환경과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다.
사실상 내부 환경은 외부 재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내부 요소들이자 동시에 내부 실체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외부요소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잘 알고 있듯이 유기체의 내부환경이 한 유기체의 부분들의 복잡성과 분화의 정도들을 조절한다. ... 중심고리는
주변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주변은 새로운 중심을 형성하고, 원래 중심 위에서 반응하다가는 불연속적 겉지층으로 옮겨간다. (67 105)
67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내부와 외부 사이에 이렇듯 새로운 상대성 또는 이차적인 상대성이 있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막이나 경계의 층위에도 새로운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67 105)
여기서 환경은 셋째 모습을 갖추게 된다. .. 이것은 상대적이라 할지라도 내부환경 또는 외부환경도 더 이상 아니고 매개적 환경도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연합된 환경 즉 합병된 환경(un milieu associé ou annexé)이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연합된 환경은 우선 영양 재료 자체 말고 다른 에너지원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에너지원을 획득하지 못했다면, 유기체는 영양을 취하기는 하지만 숨을 쉬지는 못한다고 할 수 있다. (67 105-106).
[미토콘드리아와 공생하지 않았다면, .. 호흡은 무엇인가? ]
진드기(Tique)의 저 잊을 수 없는 연합된 세계, 그것은 낙하 중력의 에너지, 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지각 능력, 작은 구멍을 팔 수 있는 행동력에 의해 정의된다. .. 지각과 행동의 특성들 그 자체는 이중-집게, 이중분절과 같다. (67-68, 106)
68 그런데, 연합된 환경은 유기체의 형태(형식)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유기체의 형태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연합된 환경이 구조화 구성된 것이다.
예를 들어 거미줄 같은 동물 환경은 유기체의 형태 못지 않게 “형태 발생적”이다. (68 107)
이 또 다른 방식, 즉 중심 띠가 파편화되는 방식, 이쪽저쪽 지엽말단까지 환원 불가능한 형식들 및 그 형식들에 연합된 환경으로 부서져나가는 이 방식을 “곁지층”(parastrates)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68, 107)
겉지층들과 곁지층들은 각각 지표들(indices)이 달린 구체적인 기계들을 갖고 있고, 상이한 분자들, 특수한 실체들, 환원
불가능한 형식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69, 108)
69 우리는 {다윈주의의} 근본적 두 획득물에 되돌아 갈 수 있었다. 겉지층들 안에서 형식들과 형식들의 유형들은 왜 개체군(populations)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가? (69, 108)
70 형식이 코드와 결부되어 있고 곁지층들 안의 코드화 과정 및 탈코드화 과정과 결부되어 있다면,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인 실체는 영토성과 결부되어 있고 겉지층들 위에서의 탈영토화 운동 및 재영토화 운동과 결부되어 있다.
옛 중심으로 다시 떨어졌다가 새로운 중심으로 뛰어오르는 유목민적 파동들 또는 탈영토화의 흐름들이 중심 층에서 주변으로, 그 다음엔 새로운 중심에서 새로운 주변으로 이동한다. (70, 110)
물리적 입자들은 탈영토화 속도들에 의해 특성을 부여 받는다. ... 타키온, 입자-구멍, 쿼크 .. 황이나 탄소 ..(70, 110)
[탈영토화는 안정된 상태가 아닌 상태로, 즉 변화가능한 상태로 또는 결합가능한 상태로 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인간의 열망하는 영혼은 그런 상태가 아닌가? (50MKC)]
외부와의 관계에 의해 탈영토화된 하나의 유기체는 자신의 내부 환경 위에서 반드시 재영토화 된다. (71, 111)
[자아는 항상 이중 열망에서 자기 확장을 하면서 또는 수렴하여 자기 정체성을 형성한다. (50MKC)]
71 미리 설정된 형식 미리 결정된 정도들을 비교하는 한, 우리는 그것들의 환원 불가능성을 단순히 확인하는데 머물 수
밖에 없으며 그 두 요소들 사이에 어떤 소통이 가능한지 판단할 그 어떤 수단도 갖지 못한다. (71, 112)
71-2 한편으로 코드는 외부 환경 속에 있는 우연한 원인 때문에 변경되는데, 코드 변경이 내부환경에 어떤 결과를 미치는지, 변경된 코드와 내부 환경이 양립가능한 지를 보면 코드변경이 널리 받아들여지는지를 알 수 있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는 코드 변경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코드변경들이 살아남을지를 엄밀하게 결정한다.
다른 한편 모든 코드 변경은 자신의 연합된 환경을 갖는데, 이 연합된 환경은 외부 환경과 관련해서는 특정한 탈영토화를
낳고 내부 환경이나 매개적 환경 위에서는 특정한 재영토화를 낳는다. (71-72 112)
그러니 위험이 나타날 때 동물이 자신의 연합된 환경을 다시 얻을 수 있도록 하나의[첫째] 도주선(ligne de fuite, 탈주선)을 남겨두어야만 한다. (72 113)
기존의 연합된 환경을 포기해야만 할 때, 둘째 도주선이 나타난다. (72 113)
이런저런 측면에서 볼 때 동물은 공격하는 자라기보다는 달아나는 자이다.
하지만 그 도주는 또한 정복이고 창조이다.
따라서 도주선들은 영토성 안에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운동들이 현존함을 증언해주면서 영토성을 완전히 가로질러간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영토성은 이차적이다. (72 113)
73 이 상대적 운동들과 절대적 탈영토화의 가능성, 절대적 도주선의 가능성, 절대적 표류(dérive)의 가능성을 결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73, 114)
입자들을 방출하고 조합하는 추상적인 기계는 통합태와 평면태(le oecumène et le planomène)라는 두 가지 아주 상이한
존재 양태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 추상적인 기계는 성층 작용에 갇혀 있고 또 특정하게 결정된 지층 속에 감싸여 있으면서, 이 지층을 프로그램이나 조성의 통일성을 정의하고(<추상적인 동물>, <추상적인 화학체>, 에너지 그 자체) 이 지층 위에서 일어나는 상대적 탈영토화의 운동들을 조절한다.
다른 한편으로, 추상적인 기계는 모든 성층 작용들을 가로지르며(traverser), 혼자서 그리고 체험으로 고른판 위에서 전개되면서 고른판의 도표를 작성한다.
하나의 동일한 기계가 천체 물리학과 미시 물리학,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양쪽 모두를 작동시키며 절대적 탈영토화의 흐름들을 안내한다.(물론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질료란 카오스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 설명은 아직 너무 단순하다. (MP 73, 114-115)
73 한편 우리는 단순히 가속만 가지고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이행할 수 없다.
설사 속도를 증가시키고 그 전과 비교해 보면 전체적으로 그런 결과가 나온다 해도 말이다. (73 115)
언제나 지층들의 내재성과 고른판의 내재성이 있다.
또는 강렬함의 서로 다른 두 상태가 공존하듯이 추상적인 기계의 두 상태가 공존한다. (74, 116)
§03.6. 내용과 표현 116 Le contenu et l'expression. 74
§03.7. [지층의 여러 측면들] La diversité des strates.
§03.8. 그램분자와 분자 Molaire et moléculaire.
[§03:7.6.8. 지층들의 다른 측면: 내용과 표현, 분자(덩어리, 단위)와 그램분자(요소들의 배열, 계열) - 이렇게 바꾸어야
할 듯하다. 들뢰즈 글이 불편할 때가 이런 때이다.]
74 청중들 대부분이 떠났다(우선 이중 분절의 마르티네[Martiner]주의자들이, 그 다음엔 내용과 표현의 옐름슬레우주의자들이, 그리고 단백질과 핵산의 생물학자들이 떠났다). 다른 광기에 익숙해 있는 수학자들, 몇몇 점성가들과 고고학자들 그리고 몇몇 사람들만이 어수선하게 남아 있었다. 더구나 강의를 시작한 이래로 첼린저는 변해버렸다. (74, 116)
이중 분절을 구성하는 실재적 구분이 항상 있다는 것과, 내용과 표현간의 상호전제가 언제나 있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어떤 지층에서 다른 지층으로 갈 때 변하는 것은 이 실재적 구분의 본성이요.. (75, 116)
첫째 거대 지층군을 살펴보자.
우리는 그 특징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내용(형식과 실체)은 분자적(moléculaire)이고 표현(형식과 실체)은 그램분자적(molaire)이다. 내용과 표현 사이의 차이는 특히 크기나 등급의 질서의 차이이다.(75, 116-117)
75 우리는 지질학적 지층, 결정체 지층, 물리 화학적 지층들 등 그램분자적인 것이 미시적이고 분자적인 상호 작용을 표현
하는 모든 곳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75, 117) [이 지층들이 첫째 지층군들이다. 물리화학적 작용 법위에 있다.] ;
예컨대 그램분자적 표현의 형식은 “거푸집”(moule) 유형으로서 외부의 힘들의 최대치를 동원할 수도 있고, 반대로 “변조”
(modulation)유형으로서 외부적 힘들의 최소치만을 개입시킬 수도 있다. (75 117)
76 지층들은 신의 심판이니 중세스콜라 학파와 신학의 모든 정교함을 이용하는ㄷ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내용과 표현 사이에 있는 것은 실재적 구분이다. (76, 118)
76-2 형식적 구분들은 아주 다양하고 실재적이다. 그렇다면 [둘째 지층군 유기체] 유기체 지층이 될 때 바뀌는 것은 바로
그 구분의 본성이며, 이 본성이 바뀌면 이 지층 위에서 내용과 표현의 모든 배분도 바뀌게 된다. (76 118-119)
유기체 지층에는 독창적(original) 특성이 있는 데, 그것을 통해 이 증폭 자체를 고려할 수 있다. (76, 119)
[둘째 거대 지층군: 물리화학적 층군과 달리, 생명체의 유기적 배분이기 때문이다 (50MKC)]
중요한 것은 핵산 시퀀스의 선형성(linéarité de la séquence nucléique)이다. (77 119)
분자적인 것의 두 부류인, 표현인 핵산과 내용인 단백질을 구분하고, 핵산 요소 즉 뉴클레오티드와 단백질 요소 즉 아미노산을 구분한다.
크기의 질서와 독립해서 말이다. 이제 표현과 내용은 각각 분자적인 것과 그램분자적인 것을 동시에 갖게 된다. (77 119-120)
유기체 지층을 특징짓는 것은 표현의 정렬, 표현의 선의 배출 또는 격리이며 이렇게 일차원적인 선 위로 표현의 형식들과
표현의 실체를 접어 넣는 일이다. (77 120)
78 이로부터 많은 귀결들이 도출된다.
표현과 내용의 이런 새로운 상황은 유기체 재생산 역량은 물론이고 유기체의 탈영토와 역량이나 가속도까지도 좌우한다.
사실 코드의 정렬이나 핵산 시퀀스의 선형성은 “기호”의 탈영토화의 문턱을 표시해준다.
이 문턱은 어떤 새로운 소질(aptitude)이 다시 복사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며 또한 유기체를 결정체보다 더 탈영토화된 것
으로 정의한다.
탈영토화 된 것만이 재생산 될 수 있다. (78 120-121)
유도(induction) [전자기기 장에서] .. 변환(transduction) [생물계의 형질 변환에서] (78, 121-122) ...
79 셋째 거대 지층군을 보자. 인간의 본질을 끌어들여 그것을 정의할 필요까지는 없다. ... 여기서도 우리는 내용과 표현을
새롭게 분배(distribution)함으로써 이 지층군을 정의할 것이다.
내용의 형식은 “동종 형성적(homoplastique)”이기를 그치고 “이종 형성적(alloplastique)”인 것이 된다. (79, 122)
[셋째: 생명체의 진화를 거쳐서 그리고 나중에 인간에 관하여 전개할 것이다.]
몸짓과 말, .. 도구와 손, 언어와 안면 언어와 얼굴(visage-language)
손은 탈영토화된 과거의 앞발이다.
나아가 자유로운 손은 뭔가를 쥐고 장소를 이동하는데 쓰이는 원숭이의 손과 비교할 때 탈영토화되어 있다.
... 또 환경과 관련된 탈영토화들도 고려해보자.
스텝은 숲보다 더 탈영토화된 연합된 환경이며 몸체와 기술에 탈영토화라는 선별 압력을 행사한다. (79, 123)
[인간은 원숭이의 계열과 달리 침팬지 계열이다.
침팬지와 공동 조상(공동지층)이지 원숭이는 다른 지층 즉 곁지층에 속한다. (50MKC)]
80 다른 측면에서 보면 언어는 새로운 표현의 형식, 아니 차라리 모든 지층 위에서 새로운 표현을 정의하는 형식적
특질들의 집합이다. (80, 123-124)
입은 아가리의 탈영토화이고(뻬리에가 말했듯이 “입과 뇌 사이의 투쟁” 전체), 입술은 입의 탈영토화이다.
(인간만이 입술을 갖고 있다. 입술이란 내부의 점막이 바깥으로 밀려 올라간 것이다. 인간의 암컷만이 젖가슴을 갖는다.
젖가슴이란 탈영토화된 유선(乳腺)이다.
언어 습득에 의해 유리한 오랜 젖먹이 기간 중에 젖가슴 위로 입술의 보충적 재영토화와 입술 위로 젖가슴의 보충적 재영토화가 일어난다)
인간의 입을 음식물과 소음이 아닌 말로 채우다니, 이 얼마나 기묘한 탈영토화인가! (80, 124)
81 음성기호들은 시간적 선형성을 갖는다. 그리고 초-선형성이 음성 기호들을 특수한 방식으로 탈영토화하고 음성 기호
들과 유전학적 선형성의 차이를 낳는다. (81 125)
사실상 유전 코드 안에는 발신자도 수신자도 이해도 번역도 없으며 단지 잉여와 잉여-가치만이 있을 뿐이다. (81, 125)
번역이 가능하려면 하나의 동일한 형식이 한 실체에서 다른 실체로 이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유전 코드 안에서 예컨대
DNA와 RNA 사슬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81 126)
“비언어학적인 체계를 가진 모든 기호론은 언어라는 중개를 이용해야만 한다. (…)
언어는 다른 모든 언어학적, 비언어학적 체계의 해석자이다.” 이렇게 되면 언어의 성격은 추상적으로 규정된 것이고,
다른 지층들은 언어로 표현될 때에만 이 성격을 공유할 수 있다고 얘기하게 된다.
누구나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81-82, 126)
§03.9. 추상적 기계와 배치물: 그것들의 비교(상관적) 상태 126 Machine abstraite et agencement: leurs états comparés. 82
82 서둘러야 합니다. 이제 시간의 선이 셋째 유형의 지층으로 우리를 몰아대고 있습니다. ... 그것은 바로 기술이라는 내용과 기호 또는 상징이라는 표현이다. (82 126)
이 셋째 지층과 함께, 이 지층에 완전히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몸을 세워 올려 자신의 집게발을 다른 모든 지층들을 향해 모든 방향으로 뻗는 ‘기계들(Machines)’의 출현(l’émergence)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은 ‘추상적인 기계’의 두 상태 사이에 있는 매개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닐까?
추상적인 기계가 해당 지층 안에 감싸진 채로 있는 상태(통합태)와 추상적인 기계가 탈지층화된 고른판 위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상태(평면태) 사이에 있는 매개 상태.(82 127)
[생명체의 지층의 셋째는 인간(포유류)인 셈이다.
이들은 둘째와 달리 도구와 말씀(langue)을 구상(composition)하는 점에서 추상기계라 부를 수 있다. (50MLB)]
명백히 그것은 인간의 구성적 착각(l'illusion constitutive)이다(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누구라고 간주하는가?).
그것은 언어(le langage) 그 자체에 내재하는 덧코드화로부터 비롯되는 착각이다. (82 126)
83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이제 내용과 표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세워지며, 어떤 유형의 구분(quel type de distinction)이
존재하는가? 그 모든 것은 머리(tête) 속에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실재적인 구분을 없을 것이다. (83, 127)
르루와-구르앙(André Leroi-Gourhan, 1911-1986)은 첫째 경우 손이 어떻게 상징들의 세계 전체를 창조하는지, 그리고 단선적인 구어와 혼동되지 않으며 내용 고유의 방사적 표현을 구성하는 다차원적 언어 전체를 창조하는 지를 보여준다(이것이
글l’ecriture[글쓰기]의 기원일 것이다).
둘째의 경우 언어 그 자체에 고유한 이중 분절 안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음소는 기표작용적인 선형적 절편들인 기호소를 갖고서 표현 고유의 방사적 내용을 형성하기 때문이다(바로
이런 조건 속에서만 지층의 일반적 특성으로서 이중분절은 마르티네가 자신을 위해 마련해둔 언어학적 의미를 갖게 된다). (83, 128–129) .
84 첼린저는 점점 더 빨리 가고자 했다.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계속했다.
인간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부터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변했고, 그의 외모도 변했는데, 그것은 그의 안에 있는 동물적인
어떤 것이었다. (84 129)
그는 아직 세 가지 문제를 더 검토하고자 했다.
[1]첫째 문제는 아무래도 용어법에 관련된 문제처럼 보였다. 우리는 언제 기호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84, 129)
요약해 보면 우리는 세 종류의 기호, 즉 지표(영토적 기호), 상징(탈영토화된 기호), 도상(재영토화의 기호)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84, 129)
[퍼스의 기호학에서 도상, 지표, 상징과 같은 용어인데 배열을 달리하는 것인가? (44RKG)]
85 기표-기의라는 언어학적 관계는 물론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파악되었다. 그것은 자의적인 것으로 파악되기도 했으며
동일한 나뭇잎의 앞면과 뒷면처럼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되기도 했고 일대 일로 대응하는 것으로 파악되기도 했으며 총괄적인 것으로 파악되기도 했고 더 이상 구별될 수 없을 정도로 양가적인 것으로 파악되기도 했다.
어떤 경우 건 기의는 기표와의 관계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궁극적 기의란 기호를 넘어 확대 적용되는 기표의 존재 그 자체이다.
우리가 기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즉 기표는 <잉여>이고 <잉여를 만드는 것le Redondant>이라는 점 (85 131)
표현의 형식이 기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내용의 형식은 기의가 아니다.
이 점은 언어가 개입하는 지층들을 포함한 모든 지층들에서 진실이다. (85-86 131-132)
86 기표의 애호가들은 ‘말과 사물’이라는 아주 단순한 상황을 암묵적 모델로 삼는다.
그들은 말로부터 기표를 추출해내고, 사물로부터는 말에 순응하여 기표에 예속되는 기의를 추출해 낸다. (86 132)
푸꼬(Foucault)의 모범적인 분석을 빌려와 보자. ... “범죄”는 “감옥”이라는 내용의 형식을 상호 전제하는 표현의 형식이다. 범죄는 결코 감옥을 기의로 같는 기표가 아니며, 하물며 사법적 기표도 아니다. .. 거기에는 끊임없이 교차하는 두가지 다양체가 있는데, 하나는 표현이라는 “담론적 다양체”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이라는 “비담론적 다양체”이다. (132-133)
거기에는 끊임없이 교차하는 두 가지 다양체가 있는데, 하나는 표현이라는 “담론적 다양체”(multiplicités discursives)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이라는 “비담론적 다양체”이다. (86 132-133)
요컨대 말에 어떤 사물이 대응한다고 상정하여 그들을 대조하거나 기표가 어떤 기의에 순응한다고 상정하여 그들을 대조해서는 안 된다. .. “우리가 본 것을 말해봐야 소용없다. 우리가 본 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 안에 있지 않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87 133-134)
즉 읽기[입]와 쓰기[손](그리고 읽기와 쓰기에 고유한 상관적 내용들)를 가르칠 때는 표현의 형식화가, 사물들(그리고 사물들의 고유한 상관적인 표현들)을 가르칠 때는 내용의 형식화가 있다.
우리는 의미화하지(singnifiant, 기표)도 의미화되지(signifié, 기의)도 않는다. 우리는 지층화된다(stratifié). (87, 134)
[지층화된다는 기억화된다. 기억은 덩어리로서 층위가 없다. 추억들은 층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0MKC)]
87 그러니 모든 지층에 기호들을 위치시키거나 아니면 모든 기호들에 기표를 위치시키는 확장적인 방법보다는 엄격히
제한적인 방법을 택해야 한다. (87, 134)
87-2 그 다음 이런 제한적인 의미로 기호체제(les régimes de signes)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기호제제가 기표도 아니고 반드시 기표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87, 135)
88 그 어떤 경우에도 내용과 표현은 결코 기의-기표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2](여기에 둘째 문제가 있는데) 내용과 표현은 하부구조-상부구조로 환원될 수도 없다. (88 135)
우리는 언어의 본성을 오해한다.
언어는 정보를 순환시키기보다는 모순된 질서들을 분배하는 다질적 기호체계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기호체제의 본성을 오해한다. 기호체제는 정확히 말해 권력조직들 또는 배치물들을 표현하는 것이지, 내용의
표현이라고 가정되는 이데올로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모든 사회적 기계들을 감추는 가장 고약한 개념이다).
또한 우리는 권력 조직들의 본성을 오해한다. 권력 조직들은 국가 기구 안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곳에서 내용과 표현의 절편들을 교차시키고 내용과 표현을 형식화한다.
또 우리는 내용의 본성을 오해한다. 내용은 “마지막 심급에서”결코 경제적인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경제적이지 않은 내용이 있듯이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기호나 표현도 있기 때문이다. (88, 136)
사회 구성체들의 지위를 정교하게 분석한다는 것은 기표를 하부구조에 집어넣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약간의 남근이나 거세
를 정치 경제학에 집어넣던가 약간의 경제학이나 정치학을 정신분석에 집어넣는 것도 아니다. (88 136)
89 [3]마지막으로 셋째 문제가 있다. 지층들이 마치 단계적으로 정돈되어 완성의 정도들을 지나가기라도 하는 양 치층들
사이에 일종의 우주적 진화나 정신적 진화를 도입하는 척들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지층들의 체계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89 136)
[생명체들이 지층을 쌓듯이 기억의 축적으로 굉장한 몸체를 만들었다. 막시류는 사회를 만들고 말이다. (50MKC)]
내용과 표현이 서로 다른 모습들을 갖는다고 해서 이것들이 서로 다른 단계들인 것은 아니다.
생명권(biosphère)이나 정신권(noosphère)은 없다. 오히려 무엇보다도 하나의 동일한 “기계권”(Mécanosphère)만이 있을
따름이다. (89 136-137)
고른판은 모든 은유를 폐기한다.
고르게 함께 있는 모든 것은 “실재적”이다(tout ce qui consiste est Réel). (89 137)
[생명체의 기계는 그 몸체는 고른판이다, 즉 내재성은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이다.
내재적으로 무엇(어떤)으로 변환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이 변환을 변용태(affect)라 부를 수도 있다. (50MKC)]
말없는 춤. 고른판은 층위의 차이, 크기의 차원, 거리를 모른다. 고른판은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모든 차이를
모른다.
고른판은 형식과 형식을 부여받은 실체의 구분도 모르고 내용과 표현의 구분도 모른다.
이것들은 지층을 통해서만, 지층들과 관련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89, 138)
90 하지만 만약 사물들이 자신들을 규정하는 지층들을 잃어버렸다면, 만약 사물들이 절대적 탈영토화를 통과했다면 어떻게 여전히 사물들을 식별하고 명명할 수 있겠는가? (90 138)
또한 고른판은 “추상적 기계”에 의해 점령되고 그려진다.
추상적 기계는 자신이 그리는 탈지층화된 판위에 펼쳐져 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조성의 통일성(l’unité de composition)을
정의하면서 각 지층 안에 감싸인 채로도 있고 심지어는 포착의 형식을 정의하면서 어떤 지층들 안에 반쯤 선채로존재하기도 한다.
따라서 고른판 위에서 풀려나가거나 춤추는 것은 제 지층의 분위기, 파동(une ondulation), 회상(un souvenir), 또는 긴장
(un tension)을 담고 있다. (90, 138)
[추억(un souvenir)보다 기억(une mémoire)이라는 표현이 더 좋은데...]
고른판, 또는 평면태(le planomène)는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질료들의 무차별적 집합이 아니며 이런저런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의 카오스도 아니다. (90 138)
[논리상 평면태는 필연성이고 아낭케이다. 지층은 과정의 종합으로서 카오스가 아니라 카오스모스인 셈이다 (50MKC) ]
하지만 지층들의 형식과 실체 아래에서 고른판(또는 추상적인 기계)은 강렬함의 연속체들(continuums d'intensité)을 구성
한다. (90 139)
고른판(또는 추상적인 기계)은 상대적 운동들 아래에서 각각의 지표들을 절대적 가치로 변형시키는 탈영토화의 흐름들을
접합 접속시킨다. ... 반면 강렬함의 연속체, 미립자들 또는 기호-입자들로 조합된 방출,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접합접속
같은 것들을 고른판에 고유한 세 요소이며,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 작동되고 탈지층화를 구성한다. (90 139)
91 드디어 마지막 구분(distinction)을 할 때가 왔다. 추상적 기계는 동시적이며 상이한 상태를 갖고서 고른판 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의 복잡성를 설명해 준다. (91 139-140)
추상적 기계(la machine abstraite)는 때로는 고른판 위에서 펼쳐지면서 고른판의 연속체들, 방출들, 접합접속들을 구성하고 때로는 하나의 지층 위에 감싸여 있으면서 그 지층의 조성의 통일성과 그 지층의 인력 또는 포착력을 정의한다.
기계적 배치물(l’agencement machinique)은 추상적 기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르다.
우선 기계적 배치물은 하나의 지층위에서 내용과 표현을 상호 조율시키고, 내용의 절편들과 표현의 절편들이 일대일 대응 관계를 맺게 하며, 지층이 겉지층과 곁지층들로 나누어지도록 이끌어 준다.
그 다음 기계적 배치물은 한 지층에서 다른 지층으로 옮겨다니며 밑지층이 되는 지층과 자신의 관계를 확고히 하고 이에
대응하는 조직변화를 확보한다.
끝으로 기계적 배치물은 고른판 쪽으로 나아가는데, 왜냐하면 특정한 지층위에서, 그리고 지층들 사이에서 그리고 지층들과
고른판의 관계 속에서 기계적인 배치물은 반드시 추상적인 기계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91, 140)
92 따라서 지층들의 체계는 기표-기의, 하부구조-상부구조, 물질-정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모든 것들은 모든 지층들을 하나의 지층으로 깎아내리거나 체계를 탈지층화로서 고른판을 잘라내어 체계 그 자체 안에 가두는 방식이다. (92 141)
[고른판, 플라노메네 이지만 플라톤과 다르다. 고른판 생명의 역사가 들어있고 움직이고 유동하는 흐름의 강도로되어 있다. 그래서 무시되어야 할 플라노메네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물자체(Dign an sich)도 아니다.
그 자체 기관없은 신체 즉 순수 질료이다. (44RKG)]
[요약 정리]
우선 첫째 개념군이 있었다.
첫째, <기관 없는 몸체> 또는 지층에서 벗어난 <고른판>.
둘째, 그 <고른판>의 <질료>. 이것은 기관 없는 몸체 안에서 또는 고른판 위에서 지나가는 것이다(절편화되지 않은 다양체들, 강렬한 연속체들, 입자-기호들의 방출들, 흐름들의 접합접속들 등으로 만들어진 독자적인 다양체들).
셋째, 하나 또는 여러 <추상적인 기계>. 추상적인 기계는 기관 없는 몸체들을 구성하며 고른판을 그리거나 지나가는 것
(도주선들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들)을 “도표”로 만든다(diagramatiser). ( 141-142)
92-2 다음, 지층들의 체계가 있었다. 강렬한 연속체 안에서 지층들은 형식을 재단하고 질료를 실체로 형성한다.
조합된 방출 작용 안에서 지층들은 표현과 내용을, 표현의 통일성과 내용의 통일성을, 예컨대 기호들과 입자들을 구분한다. 접합접속 안에서 지층들은 흐름들을 분리해내고 그 흐름들에 상대적 운동과 다양한 영토성, 상대적 탈영토화와 보충적
재영토화를 할당한다. (92 142)
절편적 다양체를 구성한다.
이것들은 지층들이다. (92 142)
[절편적 다양체란 서술은 멋있다. 왜냐하면 종들 중에서 사라진 종도 있고 같은 층위에서 다른 종들이 나온다.
원숭이와 유인의 공통조상 시절은 4,500만년전이고, 고릴라와는 700만년전에, 침팬지와 보노보와 공통조상이 같았던 것은
600만년 전이다.
챌린저 교수가 층위로서 말하는 인간(호모니드)은 600만년전의 층위에서 쌓인 기계권이다. (50MKC)]
우리는 실재적 구분의 세 가지 커다란 유형을 요약하여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 형식적-실재적 구분. 이것은 표현의 공명이 설립되는 크기의 질서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유도 induction).
둘째, 실제적-실재적 구분. 이것은 표현의 선형성이 설립되는 상이한 주체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변환 transduction).
셋째, 본질적-실재적 구분. 이것은 표현의 초선형성이 설립되는 상이한 속성들 또는 범주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번역 traduction). (92-93 142)
§03.10. 웃지층들 142 Métastrates. 93
93 하나의 지층은 다른 지층의 밑지층(substrate) 노릇을 했다.
하나의 지층은 자신의 환경, 자신의 실재적 요소들, 자신의 형식적 특질들에 따라 조성의 통일성을 갖고 있었다. (통합태)
(93 142-143).
[통합태를 사고하는 쪽은 이데아의 사고와 닮았다면, 평면태에서 기관없는 신체를 통해 운동하며 사유하는 것이 질료
측면이다.]
곁지층 .. 겉지층, .. 사이층, ... 끝으로 기계적 배치물은 하나의 웃지층(métastrate)이기도 했다.
고른판을 향해 나아가며 반드시 추상적인 기계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93 143)
한편 추상적인 기계는 고른판 위에 펼쳐져 있으면서 고른판의 탈지층화를 주도한다(평면태). (93 143)
93-2 끝났다.
훨씬 나중에 가서야 이 모든 것이 구체적 의미를 얻게 되리라. 이중 분절된 탈도 장갑도 외투도 벗겨졌고 거기서 액체가
빠져나왔는데, 이 액체[수프, 조이스]는 도망가는 와중에 “유향연기로 가득차 있고 이상한 그림 벽지로 덮인” 강의실 지층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93, 143)
[이 문장을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서 베이컨의 그림에 비추어보면 좋을 것이다.]
불가사의한 세계(le monde mystérieux)로, 유독한 내 정원으로 떠난다. 패주(敗走)를 통해 사물들이 진보하고 기호들이
증식하는 것이다.
공황(la panique)은 창조이다. (93 143)
[아페이론 세계는 불가사의하고 공황이며, 괴물이며, 열망의 고원들이다. 안 그런가? (50MKC)]
“그 [첼린저 교수의 비형체화된] 그림자는 거의 인간이 아닌 자태로 기묘하게 쓰러졌으며... 그리고 그 그림자는 관 모양의 상자로 들어가서, 자기 뒤의 문을 닫아버렸다. 비정상적인 뚝딱거림이 계속되면서, 어둡고 우주적 리듬을 두드린다.
그 리듬은 그 아래에 모든 비의적인 문들(les portes occultes)을 열고 있는 듯이” - 그것은 <기계권(Mecanosphère)> 또는
리좀권(rhizosphère)이었다. (94, 144)
[마치 제우스 일당에 의해 땅 밑으로 갇힌 티탄족 크로노스 일당들은 새로운 비의적 문을 열고자 뚝딱거리고 있듯이...
플라톤의 동굴의 벽 그 속에서 온갖 새로운 지층들이 있었고 또한 새로운 창조가 있다.
플라톤의 곡해는 밖에서 그림자가 비친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아마도 그는 소크라테스 죽음이후 젊은 시절에 이집트여행에서 오랜 지층을 파보기보다 겉으로 보인 이집트 기하학를
보고 온 것인지 모른다.
/ 깊이 파노는 이런 전통은 신화 속에서도, 엠페도클레스에서도 있었고, 유목과 결합하는 대장장이들에게 있었다고 해야
할까? (44RKG)] /
[소크라테스가 질료(영혼)의 비의적 내용을 열려고 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에게 새로운 신을 도입했다고 고소당하여
독배를 마셨다.
혼란한 정치적 상황에서 판관(코드화)과 황제(영토화)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아테네가 내재성의 철학자를 첫 순교자로
만들었다.
둘째 순교자가 브루노일 것이다.
이사야 이래로 예수는 사제가 아니라 선지자이며 마호멧도 선지자에 속한다.
그리고 철학에서 스피노자도 벩송도 어떤 면에서 선지자이다. 성직자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50MKC)]
(40NKK 7:31) / 오후부터 하루에 다시 정리하기는 많은 양이다(44RKG 11:3) (17:10, 50MKC)
카프카(Kafka, 1883-1924): 시골 의사((Ein Landarzt, 1920)
들뢰즈와 가타리: 천개의 고원, 제5장 기원전 587년 -기원후 70년: 몇몇 기호체계에 관하여
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 제13장 기원전 7000년-포획장치
니스벳(Nisbett, 1941-), 생각의 지도 (The geography of thought, 2003)
이정은: 가라타니 고진: 맑스의 가능성, 세계 공화국으로? (2013)
러셀(Russell, 1872-1970): 플라톤 (Platon, Πλάτων, 427-347)
삐끄(Pascal Picq, 1954-): 말의 시대, 분절 언어의 출현
메르카데르(Patricia Mercader), 성전환증을 통한 젠더, 심리 분석, 천성의 고찰
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 제1장 리좀(Rhizome)
에리티에(Françoise Héritier, 1933-): 진화론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
9. 1933년 미시정치와 절편성
우리는 모든 곳에서, 모든 방향으로 절편화된다.
인간은 절편적 동물이다.
절편성은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지층들에 속해 있다.
거주하기, 왕래하기, 노동하기, 놀이하기 등 체험은 공간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절편화된다.
집은 방의 용도에 따라 절편화된다. 거리는 마을의 질서에 따라 절편화된다.
공장은 노동과 작업의 본성에 따라 절편화된다.
우리는 사회 계급,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등 거대한 이원적대립에 따라 이항적으로 절편화된다.
우리는 나의 일, 내 동네의 일, 도사의 일, 나라의 일, 세계의 일…… 등 조이스의 “글자”의 방식으로 점점 확대되는 원들
안에, 점점 확대대는 원들 안에, 점점 더 커지는 원반들 또는 환(環)들 안에 원형으로 절편화된다.
우리는 하나의 직선 위에서, 여러 직선 위에서 선형적으로 절편화되는데, 거기서 각각의 절편은 하나의 에피소드 또는
“소송”을 표상한다.
우리는 하나의 소송을 끝마치자마자 다른 소송을 시작한다.
우리는 항상 영원히 소송하고 소송 당하는 자로서, 가족, 학교, 군대, 직장으로 옮겨다닌다.
학교는 우리에게 “너는 더 이상 가족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며, 군대는 “너는 더 이상 학교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때로는 상이한 절편들이 상이한 개인들이나 집단들에 결부되며, 때로 한 절편에서 다른 절편으로 이행하는 것이 동일한
개인이나 동일한 집단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항적 절편, 원형적 절편, 선형적 절편 등 절편성의 모습들은 항상 함께 취해지며, 심지어는 서로 옮겨가기도
하고 관점에 따라 변형되기도 한다.
야만인들의 세계에서도 이미 그것이 나타난다.
리조는 <공동 저택>이 어떻게 내부에서 외부로, 장소를 지정할 수 있는 여러 유형의 활동(종교 의식과 제례, 그 다음
재화의 교환, 그 다음 가족생활, 그 다음 쓰레기장과 뒷간)이 수행되는 원형의 계열 안에서 조직화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이 환들 각각은 그 자체로 횡적으로 세분되며, 각 절편은 특수한 혈통에 할당되고 상이한 형제자매 집단
사이에 세분된다.”1)
보다 일반적인 맥락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원시 부족의 이원론적 조직화는 원형적 형태와 결부되며,
“ 몇 개의 집단이 됐건 해당 집단을”(적어도 셋) 포괄하는 선형적 형태만으로도 이행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2)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인데, 왜 원시 부족으로 돌아가는가?
사실 절편성이라는 개념은 고정된 중앙 국가 장치도 없고, 포괄적인 권력도 없고, 전문화된 장치 제도도 없는 이른바
원시 사회를 고려하기 위해 민속화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그래서 사회적 절편들은 융합과 분열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업무와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유연성을 갖고 있다.
이질적인 사회적 절편들 사이에는 커다란 소통 가능성이 있어서, 한 절편과 다른 절편의 이어짐이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다.
사회적 절편들은 국지적으로 구성될 수 있어서, 토대 영역(경제, 정치, 사법, 예술)이 미리 결정될 수 없게 된다.
사회적 절편들이 갖고 있는 상황 또는 관계의 외부적 속성들은 구조의 내부적 성질들로 환원될 수 없다.
사회적 절편될은 연속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절편성은 돌출, 격리, 재결합에 의해 작동하는 진행 중인 절편화 작용과
독립해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원시적 절편성은 가계들과 그것들의 다양한 상황에 관계에 기초한 다성적 코드의 절편성인 동시에 뒤얽힌 국지적 나눔
들에 기초한 순회하는 영토성의 절편성이다.
코드와 영토, 씨족의 가계와 부족의 영토성은 비교적 유연한 절편성의 직물을 조직한다.3)
그렇지만 우리가 보기에 국가 안의 사회들이, 더욱이 우리의 현대국가들이 덜 절편적이라고 말하기를 어려운 것 같다.
절편적인 것과 중앙 집중적인 것 간의 고전적 대립은 전혀 적합한 것 같지 않다.4)
국가는 자신이 부양하거나 지속시키는 절편들 위에서 작동할 뿐 아니라 제 안에 나름의 절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강요한다.
모르긴 해도 사회학자들이 절편성과 중앙 집중 사이에 설정하는 대립은 황형동물과 중추 신경계라는 생물학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중앙의 뇌 그 자체는 뇌의 모든 대체 기능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러한 대체 기능이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보다
더 절편화된 하나의 벌레이다.
중앙 집중적인 것과 절편적인 것 사이에는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의 정치 체계는 스스로 통합되고 다른 것을 통합하는 포괄적인 전체이다.
하지만 병치되고 겹쳐지고 정돈된 하위 체계들의 집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정 과정(décisions)을 분석해 보면 변경이나 자리바꿈 없이는 연장되지 않는 모든 종류의 구역 분할들과 부분적
과정들이 드러난다.
기술 관료주의는 절편적 노둥 분업(국제적 노둥 분업을 포함한다)을 통해 진행한다.
관료주의는 칸막이로 구획된 사무실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목적의 자리바꿈”과 여기에 대응하는 “기능 장애”를 통해서만 기능한다.
위계는 단지 피라미드 모양만은 아니다.
사장실은 건물의 높은 곳에 있는 만큼이나 복도의 끝에 있기도 한다.
요컨대 우리의 현대의 삶은 절편성을 몰아내기는커녕, 반대로 그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절편성과 중앙 집중을 대립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절편성의 두 유형을 구분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는 “원시적”이고 유연한 절편성이고 다른 하는 “현대적”이고 견고한 절편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앞서 살펴본 [절편성의] 모습들 각각을 검증하게 될 것이다.
1) 이항 대립(남자-여자, 상층민-하층민 등)은 원시 사회에서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이항 대립은 그 자체로는 이항적이지 않은 기계들과 배치물의 결과인 것 같다.
한 집단 안에서 남자-여자라는 사회적 이항성은 남녀가 배우자를 서로 다른 집단들 안에서 얻도록 규정하는 규칙을
동원한다(따라서 적어도 세 개의 집단이 있게 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원시 사회에서는 이원론적 조직화가 그 자체로는 유효하지 않은 이유를 보여줄
수 있었다.
반대로, 이원적 기계를 이원적기계로서 유효하게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현대 사회, 또는 차라리 국가 안에 있는
사회의 특성이다.
이 이원적 기계는 일대일 대응 관계들에 의해 동시적으로 진행하고 이항화된 선택들에 의해 순차적으로 진행한다.
계급이나 성은 둘씩 나아가며, 삼분(三分) 현상은 둘의 운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우리는 <얼굴 기계>에서 그 집을 분명히 확인했는데, <얼굴 기계>는 이런 점에서 원시적 머리 기계들과 구별된다.
현대 사회는 이원적 절편성을 충분한 조직화의 층위로 높여놓은 것 같다.
따라서 여성이나 하층민의 지위성의 우열을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조직화로부터 이러한 지위가
나오는지를 아는 것이 문제이다.
2)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원시 부족들에게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원형적 절편성은, 원들이 중앙 집중적이라거나 동일한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연한 체제에서 중심들은 이미 노드들, 눈들, 또는 검은 구멍들처럼 작용한다.
하지만 중심들이 모두 함께 공명하는 것은 아니며, 동일한 점 위에서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중앙에 있는 동일한 검은
구멍에 집중되지도 않는다.
애니미즘적인 눈들의 다양체가 있어서, 예컨대 눈들 각각은 특정한 동물 정신(뱀-정신, 딱따구리-정신, 악어-정신……)에
의해 변용된다.
각각의 검은 구멍은 상이한 동물눈에 의해 점유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견고화와 중앙 집중화의 조작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본다.
이제 모든 원들은 나름대로 하나의 중심만을 가진 유일한 원을 통과해야 한다.
샤먼은 모든 점들 또는 정신들 사이에서 특질들을 끌어내어 성좌를, 중심의 나무에 이어진 뿌리들을 방사하는 뿌리 집합을 그린다.
중앙 집중화된 권력이 탄생해서, 여기서 나무 모양의 체계가 원시적 리좀의 돌출을 다스리게 되는가?5)
그리고 여기서 나무는 이분법이나 이항 대립의 원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순환의 축 …… 역할을 한다.
하지만 샤먼의 권력은 여전히 완전히 국지화되어 있으며, 개별적인 절편에 밀접하게 의존해 있고, 약물들에 좌우되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점은 자신의 독립된 시퀀스들을 계속해서 방출하게 된다.
현대 사회나 국가에 대해서는 같은 애기를 할 수 없다.
분명 중앙 집중은 절편화와 대립되지 않으며, 원들을 구분된 채로 있다.
하지만 원들은 중앙 집중적이 되며, 결국 나무 구조를 갖게 된다.
모든 중심들이 공명하고 모든 검은 구멍들이 모든 눈들 뒤에 어떤 교차점과도 같은 축적점으로 모여드는 한에서 절편성은 견고하게 된다.
아버지의 얼굴, 교사의 얼굴, 연대장의 얼굴, 사장의 얼굴은 잉여를 만들어내며, 다양한 원들을 가로지르고 모든 절편들을 다시 지나가는 의미생성의 중심과 결부된다.
중심을 도처에 갖고 있고 원주를 아무 곳에도 갖고 있지 않은 거대-얼굴이 유연한 미세-머리들을, 동물적 얼굴화들을 대체한다.
더 이상 하늘 또는 동물이나 식물되기에 있는 n개의 눈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광선을 주사(走査)하는, 정돈하는 중앙 집중적 눈을 갖는다.
중앙 국가는 원형적인 절편성을 제거함으로써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원들을 중앙 집중화하거나 중심들을 공명하게 함으로써 구성된다.
원시 사회에도 이미 권력의 중심들이 있다. 아니면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표현을 쓴다면, 국가 안의 사회에도 여전히 권력의 중심들이 있다.
하지만 국가 안의 사회가 공명 장치로서 작동하며 공명을 조직화하는 반면 원시 사회는 공명을 금지한다.6)
3) 끝으로 선형적 절편성의 관점에서 보면, 각각의 절편은 그 자체로는 물론이고 다른 절편들과 관련해서도 강조되고
교정되고 등질화된다고 애기할 수 있다.
절편들 각각은 나름의 측정 단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편들 사이에는 단위들의 등가성과 번역 가능성이 있다.
중앙의 눈은 그것이 자리바꿈을 하는 공간을 상관물로 갖고 있으며, 이 자리바꿈과 관련해서는 그 자체로 불변항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의 도시와 클레이스테네스(Clisthéne)의 개혁 이래로 계통의 절편들을 덧코드화하게 될 등질적이고 동위체(同位體)
적인 정치 공간이 나타났으며, 그와 동시에 공통분모로서 작용하는 하나의 중심 안에 상이한 초점들이 공명하기 시작했다.7) 또한 폴 비릴리오는 그리스 도시에서 더 멀리 나아가 로마 제국이 어떻게 기하학적 또는 선형적인 국가 이성을 강요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이성은 진지와 요세애 대한 일반적인 그림, “도면에 의해 경계표를 세우는” 보편적 기예, 영토의 정비, 공간을
장소와 영토성을 대체하기, 세계를 도시로 변형시키기 등, 요컨대 점점 더 견고해지는 절편성을 포함하고 있다.8)
이처럼 강조되었거나 덧코드화된 절편들은 자신의 발아 능력 및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작동 중인 절편화 작용과의 역동적
관계를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만약 원시적인 “기하학”(원(原)-기하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조작적 기학학일 것이다.
이 기하학에서는 형상(形象)들은 형상들에 가해지는 변용과 분리될 수 없고, 선들은 선들의 생성과 분리될 수 없고,
절편들은 절편화 작용과 분리될 수 없다.
“둥근 것들”은 있지만 원(圓)은 없으며, “열(列)들”은 있지만 직선은 없다. 등.
반대로 국가의 기하학, 또는 차라리 국가와 기하학의 연계는 정리(定理)라는 요소의 우위 안에서 드러나는데, 정리라는
요소는 유연한 형태론적 형성체들을 관념적이거나 고정된 요소들과 대체하고, 변용태들을 성질들로 대체하고 진행
중인 절편화 작용들을 미리 결정된 절편들로 대체한다.
기하학과 산술은 해부용 메스라는 역량을 얻는다.
사유 재산은 토지 대장에 의해 덧코드화되고 격자화된 공간을 내포하고 있다.
각각의 선들은 자신의 절편들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선의 절편들은 다른 선의 절편들, 소비재의 절편들과 대응할
것이다.
우리는 견고한 절편성과 유연한 절편성 사이의 주된 차이들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견고한 양태 아래에서 이항적 절편성은 그 자체로 유효하며 직접적 이항화의 거대 기계들에 의존하는 반면, 유연한
양태아래에서 이항사들은 “n차원을 가진 다양체들”의 결과로부터 생긴다.
두 번째로 원형적 절편성은 동심원을 그리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원형적 절편성은 끊임없이 자리바꿈되면서도 그
속에서 불변하는 채로 남아 있는 단일한 중심 안에서, 공명 기계를 참조하면서 모든 초점들을 일치시킨다.
끝으로 선형적 절편성은 기하학적 방식으로 등질적 공간을 구성하는 덧코드화 기계를 통과하며, 절편들의 실체와 형식과
관계안에서 결정된 절편들을 끄집어 낸다.
매번 이 견고한 절편성을 표현하는 것이 <나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나무>는 나무성의 노는 또는 이분법의 원리이다.
<나무>는 중앙 집중을 보증해주는 순환축이다. 그것은 가능성(le possible)을 격자화하는 구조 또는 그물망이다.
하지만 나무화된 절편성과 리좀적인 절편화 작용을 이렇게 대립시키는 것은, 단지 동일한 과정의 두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원시 사회들은 본질적으로 코드와 영토성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토성의 부족 체계와 가계의 씨족 체계라는 두 요소의 구별이 공명을 방해한다.9)
반면 현대 사회 또는 국가 사회는 일의적 덧코드화를 통해 쇠약한 코드들을 대체했으며, 특수한 재영토화(이것은 바로
덧코드화된 기하학적 공간 안에서 행해진다)를 통해 잃어버린 영토성들을 대체했다.
절편성은 언제나 추상적인 기계의 결과물로 나타난다.
하지만 견고한 절편성과 유연한 절편성 안에서 작동하는 것은 결코 동일한 추상적인 기계가 아니다.
11. 리토르넬로에 대해
I.
어둠 속에 한 아이가 있다. 무섭기는 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음을 달래보려 한다.
아이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걷다가 서기를 반복한다. 길을 잃고 거리를 헤매고는 있지만 어떻게든 몸을 숨길 곳을 찾거나
막연히 나지막한 노래를 의지 삼아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간다.
모름지기 이러한 노래는 안정되고 고요한 중심의 스케치로서 카오스의 한가운데서 안정과 고요함을 가져다준다.
아이는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어딘가로 도약하거나 걸음걸이를 잰걸음으로 했다가 느린 걸음으로 바꾸거나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름 아니라 이 노래 자체가 이미 하나의 도약이다.
노래는 카오스 속에서 날아올라 다시 카오스 한가운데서 질서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노래는 언제 흩어져버릴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기도 하다.
이처럼 아리아드네는 언제나 한 가지 음색을 울려 퍼뜨리고 있다. 오르페우스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II.
앞에서와는 반대로 우리는 이번엔 자기 집 앞에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안식처(chez-soi)는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얻으려면 먼저 부서지기 쉬운 불확실한 중심을 둘러싸고 원을 그린 다음 경계가 분명하게 한정된(limité) 공간을
만들어야만 한다.
따라서 온갖 종류의 지표(指標)와 부호 등 극히 다양한 성분들이 개입된다.
앞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의 공간을 정돈하기 위해 성분을 동원하는 것이 중요하지 일시적으로 하나의 중심을 한정하기 위해
성분을 동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리하여 카오스의 힘들은 가능한 한 외부에 붙잡혀 있고 내부의 공간은 완수해야만 할 임무 또는 이뤄내야 할 사업의 근
원이 되는 힘들을 보호하게 된다.
여기서는 선별, 제거, 추출 등 온갖 활동이 전개되며, 그에 따라 대지의 은밀한 힘들, 대지의 내부에 있는 모든 힘들이
침몰하는 일 없이 저항하고, 나아가 그려진 공간을 필터나 체를 통해 카오스와 선별해내어 카오스 상태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음성과 소리 성분이 중요하다.
그것은 일종의 소리 벽(un mur du son)이며, 적어도 벽의 일부는 소리적인 것이다.
한 아이가 학교 숙제를 하기 위해 힘을 집중시키려고 작은 목소리로 흥얼거린다.
한 주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라디오를 켜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하는 동안 카오스에 저항하는 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모든 가정에서 일종의 소리 벽으로서 영역을 표시한다(따라서 소리가 너무 크면 이웃의 불평을
듣게 된다).
도시 건설이나 골렘(Golem)의 제조 등 숭고한 사업을 일으킬 때도 역시 둘레에 원을 그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마치 원무(園務)를 추는 아이들처럼 이 둘레를 돌면서 자음과 모음을 합쳐 리듬을
만들어내어 이것을 안에 감추어둔 창조적 힘이나 유기체의 분화된 부분들에 대응시키는 것이다.
속도나 리듬, 화음과 관련된 과실은 결국 파국을 초래할 것이다. 카오스의 힘들을 회복시킴으로써 창조자와 피조물 모두를 파괴시켜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III.
그럼 마지막으로 이번엔 원을 반쯤 열었다가 활짝 열어 누군가를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또는 누군가를 부르거나 혹은 스스로 밖으로 나가거나 뛰어난가본다.
물론 이전의 카오스의 힘을 밀려들어올 수 있는 쪽에서는 원을 열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원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영역에서 열어야 한다.
마치 이 원 자체가 스스로의 내부로 수용한 활동중인 힘들의 운동 속에서 미래를 향해 본래의 자기를 열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 목적으로 하는 미래의 힘과 코스모스적인 힘에 합류하려 한다.
일단 달려들어 한번 시도해 보는 모험을 감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렇게 하려면 자신을 <세계>에 던져 이 세계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
속삭이는 노랫소리에 몸을 맡기고 자기 집밖으로 나서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범한 한 아이의 통상적인 여정을 나타내는 운동이나 동작, 음향의 선 위에서 “방황의 선”이 생겨나고 지금
까지와는 다른 고리, 매듭, 속도, 운동, 동작과 음향이 나타난다.10)
지금까지 서술한 것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진화의 세 계기가 아니라 동일한 사실, 즉<리토르넬로>의 세 가지
측면을 가리킨다.
이 세 측면은 공포담이나 동화에도 등장하며, 가곡에서도 나타난다.
리토르넬로는 이 세 가지 측면을 갖고 있는데, 이것들을 동시에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혼합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때로는 이렇고, 때로는 저렇고, 또 때로는 …… 때로 카오스는 거대한 검은 구멍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이때 사람들을 내부의 중심에 불안정한 하나의 점을 찍으려 한다.
다른 때는 하나의 점 주변에 (형태라기보다는) 고요하고 안정된 “외관”을 만들어낸다.
이에 따라 이 검은 구멍은 자기 집으로 변하게 된다.
또 다른 때는 이 외관으로부터 도망칠 길을 만들어 검은 구멍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파울 클레는 이러한 세 측면과 이들 측면들간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회화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는 검은 구멍이라고 말하지 않고 “회색의 점”이라고 말한다.
이 회색의 점은 무엇보다도 차원이 없는, 위치 결정이 불가능한 카오스, 카오스의 힘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방황하는 선들이 뒤엉킨 하나의 덩어리 외에 다름 아니다.
그런 다음 이 점은 “스스로를 뛰어넘어 도약하며”, 수평 방향의 성층, 수직 방향의 단면, 그려져야만 하는 일상의 선 등
대지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힘 전체를 통해 차원적인 공간을 빛나게 해준다
(이 힘은 이보다는 훨씬 더 풀어헤쳐진 형태로 대기나 수중에서도 나타난다).
이처럼 회색의 점(검은 구멍)은 평상의 상태로부터 도약하며, 따라서 카오스가 아니라 거주 혹은 자기 집을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회색의 점은 우주의 영역까지 확대되어 떠도는 원심적인 힘의 작용을 받아 기운을 얻어, 자기 외부로 나간다.
“사람들은 대지로부터 날아오르려는 충동적인 시도를 반복한다.
그러나 다음 단계에 이르면 중력을 이겨낸 원심적인 힘들의 영역에 속해 실제로 대지로부터 날아오른다.”11)
리토르넬로의 역할을 이제까지 여러 차례 강조되어왔다.
다시 말해 이것은 영토적인 것으로 영토적 배치물이다. 새의 노래가 좋은 예를 보여준다.
새는 노래를 지저귐으로써 자기영토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 음악의 선법(旋法)이나 인도 음악의 리듬도 자체가 이미 영토적이며, 지방과 지역을 나타낸다.
리토르넬로는 이 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할 수 있다.
연예의 기능, 작업적 기능 혹은 사회적 기능, 나아가 전례(典禮)나 코스모스적 기능 등. 어느 것을 취해도 리토르넬로는
반드시 대지의 일부분을 동반한다.
예를 들어 정신적인 의미의 대자라하더라도 통상 하나의 대지를 수반하며 본질적으로 <타고난 것(Natal)>이나 <선천적인
것(Natif)>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음악적 “가창곡(nome)"은 작은 선율이다.
이것은 끊임없이 확인하고, 다성음의 토대 또는 토양에서 계속되는 선율의 정해진 형태이다
(이것이 정선율[cantus firmus : 定旋律]이다).
성문화되지 않은 관습법으로서의 노모스는 공간의 분배, 이른바 공간에서의 분배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이 노모스는 하나의 에토스(ethos)인데 이 에토스는 <거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때로 카오스로부터 영토적 배치물의 문턱으로 나가기도 한다.12)
방향적 성분과 하위 배치물(infra-agencement)이 그러하다.
또 때로는 배치물을 조직하기도 한다. 방향적 성분과 내부 배치물(intra-agencement)이 그러하다.
더 나아가 때로는 영토적 배치물에서 벗어나 다른 배치물을 향해 나가기도 하며, 또는 전혀 다른 어떤 곳을 겨냥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상호 배치물(inter- agencement)이, 그리고 이행 또는 도주와 관련된 성분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운동이 한곳에 집중된다.
카오스의 힘들, 대지의 힘들, 그리고 코스모스적인 힘들.
이것들을 모두 리토르넬로 속에서 서로 부딪치고 다툰다.
서평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 책은 '안티-오이디푸스'와 함께 현대 서구 철학의 이정표를 세운 명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 국내에 널리 소개되고 있는 두 사람의 사상은 지난 90년대 한국 지성계를 풍미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인
모습과 함께 그것의 한계와 탈출구를 동시에 보여주는 점에서 철학사적으로 독창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안티-오이디푸스'가 아직도 ‘안티’, 즉 반(反)의 ‘부정적 비판’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면 생물학과 지질학, 분자생물학, 위상 기하학부터 시작해 인류학과 고고학의 최신 연구 성과까지 인간의 지성이 구축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새롭게 ‘긍정적으로 종합’하고 있는 이 '천 개의 고원'은 지난 20세기의 인문학의 온갖 모험이 서로 소통하고 접속하고 교통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철학이나 인문학 하면 언뜻 떠올리기 쉬운 방법론(methodology)이나 이데올로기(ideology) 비판 또는 어떤 이론을 구축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저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우리의 모든 사유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유하는 방법에 대한 사유(noology)를
겨냥하고 있다.
즉 방법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대신 그러한 방법론이 어떤 근거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며, 이념의 논리(즉 ideo-logy)를 찾거나 이를 비판하는 대신 그러한 이념이 어떤 근거에서 발생하는 지를 고고학적으로 탐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부 15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마다 음악, 미술, 국가론, 문학론, 정신분석비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일관되게 저자들은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여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의 서론으로 두 저자의 이론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1장의 '리좀'부터 읽기 시작하면 이들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전인미답의 사유의 길을 열어나가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제까지의 서양의 사유는 일종의 장기 게임과 비슷한 것이었다.
즉 각각의 개체는 특정한 이름이 부여되어 ‘주체’가 되지만 이 주체는 실제로는 가는 길과 역할이 고정되어 있는 노예와
비슷했으며, 게다가 장기의 모든 게임은 국가의 왕을 지키는 것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논리를 ‘나무형 사유’라고도 부르는데, 뿌리와 줄기가 가지와 잎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러한 국가형 사유 모델이 지난 2000년 동안 서구의 현실과 사유를 동시에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철학은 항상 감성-오성-이성으로 연결되어 일직선으로 상승되어야 하며, 이것은 정치에서도 그대로 복제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현인 왕(또는 철학자=왕이라는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사유 방식은 항상 기호학을 법칙으로 하는 위계적이고 중심적이며, 천상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이다.
이에 반해 궁정의 게임인 장기와 달리 동양의 재야 선비들의 게임인 바둑은 모든 돌=주체가 평등하며, 따라서 왕도 신하도, 주체도 객체도, 또 이미 정해져 있는 길도 없는 유목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준다.
즉 최근의 인터넷처럼 모든 돌이 동일한 주체로서 다양한 연결로와 교통망을 통해 평등하게, 또 계속 새로운 사유를 함께
만들 나가며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중심도, 주체도, 위계도 없는 사유의 전형인 셈이다.
그리고 장기가 기호학의 법칙을 추구한다면 바둑은 다양한 연결선들의 봉쇄와 차단과 연결과 접속(저자들은 조금 어렵지만 이것을 영토화, 탈용토화, 재영토화 등의 개념으로 부르고 있다)으로 짜여지는 거대한 네트(net)적 사유의 창조 행의 자체인
것이다.
최근 우리는 중심과 질서가 없어져 간다는 비탄조의 이야기를 자주 듣고있지만 두 사람은 이러한 상황을 새로운 창조와
변신의 기회로 멋지게 전환시켜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생각은 질서냐 아니면 무질서냐, 또는 국가냐 아니면 아나키냐 하는 대립축으로 문제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비질서들’의 접속들이 새로운 시대의 모럴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지를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은 1장의 리좀 대 나무부터 시작해 주체와 다양체,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국가의 포획 장치 대 유목민의 전쟁 기계 등의 새로운 대립쌍으로 변주되면서 기존의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 고고학, 생물학의 성과들을 재검토하는 멋진
시험지가 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인 푸코는 “언젠가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은 푸코의 그러한
평가가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반증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게다가 다양한 반체계적, 반-시대적 사유들의 접속을 추구하고 있는 이 책은 인터넷과 함께 네티즌의 시대가 열린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열어나가야 할 정신적 지도를 너무나 정확하게, 또 흥미진진하게 그려주는 점에서 바로 시대의 철학을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의 지적 모험을 이렇게 요약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자본주의라는 질서에 대해 저항이 또 다른 질서에 대한 꿈을 낳았으나 또 다른 질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절망이 무질서로의 급경사(예를 들어 68 운동과 모든 ‘질서’를 거부하는 ‘안티 오이디푸스’)로 이어졌으나 저자들의 말대로 자본주의의
성벽은 워낙 강고한 것이었다(70-90년대 서구의 저항 운동의 침체).
하지만 이제 이들은 네트워크의 시대를 맞이하며 질서도, 그렇다고 또 다른 질서도, 또 무질서도 아닌 무수한 비질서들의
공존과 접속이라는 새로운 사유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과학에서도 이들은 ‘비정확한 것’의 제거를 위한 기준과 공리론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자 과학, 또는 왕립 과학이 아니라 ‘비정확하지만 엄밀한 과학’을 추구하는 유목 과학, 또는 소수자 과학을 추구한다.
앞의 과학은 모든 것을 질서지우고, 서열화하지만 후자의 과학은 다양한 근접한 사유들의 공존과 접속을 겨냥한다.
아마 이만큼 우리 시대의 사유의 풍경과 나아갈 길을 흥미있게 제시하고 있는 철학책도 드물 것이다.
비정확하지만 엄밀한 것에 기반한 비질서의 유목적 사유들과 표준, 기준, 공리를 기반으로 한 왕립 과학의 대결이라는 틀.
‘인문학의 위기’ 운운하는 이 부박한 시대에 두 사람의 이 책은 인문학적 사유가 얼마나 아름답게,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에 까지 울려 퍼질 수 있는 멋진 방법들을 보여주는 점에서도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과 충격을 던져주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특징을 한가지 더 들자면 그 동안 각 번역본마다 다르게 번역되어온 두 사람의 주요한 개념어들을 완벽하게 한글화시켜 놓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역자는 plan de consistence라는 핵심적인 개념을 ‘고른판’이라는 말로 하부지층, 상부지충, 메타지층 등으로 추상적으로 번역되어온 개념들을 밑지층, 윗지층, 사이지층 등으로 완전히 한글화시켜 놓았다.
아마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지난 90년대 동안 꾸준히 소개되어 왔지만 막상 좋은 한국어 번역은 만들어내지 못한 우리의
번역 작업에 좋은 본보기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