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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레위기 제2강
모든 예물에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드리라
말씀 / 레위기 2:1-16
요절 /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우리는 주일에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헌금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듣습니다. 때로는 예배 시간이 아니더라도 시간과 재능을 드려 교회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섬김과 봉사를 감당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꼭 교회에서만 이루어지는 일들에 한정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일하는 직장, 가정을 돌보는 일, 공부하는 일, 이웃을 섬기는 삶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소제’는 바로 이런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소제는 짐승이 아니라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아드리기도 하고 곡식으로 만든 빵이나 볶은 이삭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짐승뿐만 아니라 곡식도 제물로 받으셨을까요? 소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일상적인 삶의 양식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곡식은 농부가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수고해 거둔 열매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수고만으로 곡식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비와 햇빛을 주시고 땅에서 열매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따라서 소제에는 하나님이 주신 양식에 대한 감사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소제는 구약의 제사 제도 안에서 주어진 구체적인 제사 규례이기에 오늘날의 헌금이나 교회 봉사로 바로 일대일로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소제’라는 제사 제도에 담긴 감사와 봉사, 헌신 또 언약에 대한 신실함은 오늘날 우리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 시간 소제에 담긴 신앙적 의미를 깊이 발견하고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소제’는 히브리어로 ‘민하(מִנְחָה)’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예물이나 봉헌물을 의미합니다. 소제는 번제나 속죄제처럼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와 구별됩니다.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는 하나님이 주신 일상적인 양식과 농사의 열매를 봉헌하는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소제는 단순히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린다는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곡식을 수확하기까지 많은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곡식이 익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수고에도 비가 내리지 않거나 가뭄이 들면 수확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자신의 수고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수고가 열매를 맺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소제는 사람의 일상의 수고와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기억하게 하는 제사였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소제를 ‘삶의 예배’라고도 부릅니다. 특히 소제는 다른 제사와 함께 드려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민수기 15장에 보면 번제와 화목제에 소제가 함께 드려지는 규례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소제를 단순히 번제와 별개인 감사 제사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곡식의 봉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소제도 번제와 마찬가지로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원하여 드릴 수 있는 제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소제에 담긴 신앙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 소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곡식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열매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곡식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식이었습니다. 곡식을 얻기 위해서는 땀 흘려 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수고만으로 풍성한 수확을 보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비와 햇빛, 토지의 생산력 등 생명의 성장 과정에는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많은 여건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확한 곡식을 하나님께 소제로 드리면서 양식을 공급해 주시고 자신들의 삶과 생명을 지탱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소제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인정하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감사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노력해 얻은 결과를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수고를 인정하면서도 그 수고의 열매를 누릴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누리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주시고 건강과 물질도 주시고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 먹을 양식과 소소하게 누리는 행복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은사와 재능도 하나님 앞에 감사 제목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드리는 것들은 하나님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소제는 우리의 수고와 일상을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입니다. 또 소제 속에서 우리의 수고를 다 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제의 기본 재료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일상적인 삶의 양식을 제물로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과 분리되어 계신 분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 살아가는 일상의 삶과 그 일상에서 얻은 열매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사실 고운 가루는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곡식을 심고 가꾸고 수확해야 합니다. 낟알을 거두고 빻아야 합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고운 가루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같이 소제에는 사람의 일상의 수고와 노동의 열매가 담겨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여러모로 섬기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일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일상의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고 말씀합니다(골3:23). 우리 신자들은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중에는 직장에 다니며 일하는 분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을 돌보는 분도 있습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느라 수고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는 시간, 가족을 돌보는 시간, 공부하는 시간, 주어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시간도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하고 성실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이 일상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의 예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수고를 아시고 기뻐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감사는 예배당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는 사람은 반드시 고운 가루로 예물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고운 가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있어야 할까요? 수확한 곡식을 오랜 시간 햇볕에 말려야 합니다. 시골에서 부모님의 농촌 일손을 도울 때 보면 벼나 밀, 수수 이삭을 대개 일주일 정도 말렸습니다. 바싹 마른 후에는 찧어 껍질을 벗긴 후 갈아야 합니다. 밀알이 자신의 형체를 잃고 고운 가루가 되기 위해서는 말리고 찧어져 벗겨지고 깨지고 반복해서 갈아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요즘은 정미소나 방앗간에서 다 해주지만 옛날에는 절구나 맷돌을 사용해 여러 차례 찧고 반복해 갈아야 했습니다. 체로 거친 알갱이를 모아서 다시 갈고 또 갈아야 고운 가루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고운 가루는 거친 입자가 조금도 남지 않도록 부수어진 가루입니다. 소제에는 이와 같은 고운 가루가 사용됩니다. 거친 알곡이 그대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잘 찧고 빻고 다듬어 고운 가루로 드려집니다. 이는 우리의 거친 인간성과 자아, 고집과 교만, 자기 자랑이 완전히 깨어지고 부수어져 부드럽고 순결한 가루와 같이 되어 하나님께 헌신하는 모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자존심이 깨지고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철저히 낮아지고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서뜨려서 버리고 없애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고 드려질 만한 고운 가루로 만드시는 과정입니다. 사실 내가 강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고집과 자존심이 강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저절로 고운 가루와 같은 성숙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각기 삶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살고자 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면서도 철저히 찧어지고 빻아지고 갈아지고 또 갈아져 ‘고운 가루’처럼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찌하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는 순종으로 고운 가루같이 부드럽고 순결한 모습으로 헌신하시므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헌신하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대가가 아닙니다. 먼저 주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의 헌신과 섬김이 예배 시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직장이나 학교, 가정,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또 우리의 말과 행동, 물질의 사용, 사람을 대하는 태도, 맡은 책임을 감당하는 방식에서까지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중요한 헌신과 섬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대로 내 삶을 드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살고자 할 때 우리의 거칠고 모난 성품은 점차 예수님을 닮은 고운 가루와 같이 빚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놓는다고 했습니다. 기름은 구별하여 드리는 것을 의미하고 유향은 성도들의 기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기름과 유향은 향기로움과 기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죄악 된 육신의 본성은 거칠고 모난 투성이입니다. 우리가 이를 깊이 인정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고운 가루와 같이 하나님께 드려지신 예수님의 삶을 배우며 구별된 삶, 기도하는 삶을 통해 주님의 기쁨의 향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소제의 예물을 받아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소제는 번제와 달리 모두 불태우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고운 가루 전부가 아니라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만 따로 떼어 놓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있는 유향은 모두 취합니다. 향기를 내는 유향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 그리고 유향 모두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시는 소제입니다. 이것을 ‘기념물’이라고 말씀하는데 제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려 제사 전체를 대표하게 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비록 한 움큼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 올라갈 때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모든 헌신과 수고, 섬김과 봉사, 순종과 눈물을 기억하시고 향기로운 냄새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소제물은 하나님의 전을 섬기며 헌신하는 제사장들의 양식과 소득으로 주십니다(3).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나의 수고와 헌신이 한 움큼밖에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동안 수고를 많이 했는데 열매가 없어 보이고 그동안의 수고가 한 움큼밖에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지난 5월에 세계 선교대회와 선교사 목자 수양회를 위해 1년여 간 스트레스성 탈모까지 생기면서 수고하며 섬겼는데 정작 일주일간의 대회와 수양회였습니다. 물론 많은 은혜도 있었고 선교사님들도 수고했다며 많은 격려도 받았지만 한 주밖에 안 되는 것을 위해 그렇게 수고했던 시간이 비합리적인 것처럼 생각되고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섬기는 사역들로 드러난 헌신은 한 움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뒤에 보이지 않는 모든 수고와 헌신, 섬김과 봉사, 믿음을 아시고 기억하십니다. 매주 양들과 일대일하고 교회에서 여러모로 섬기고 봉사하는 목자님들의 수고를 하나님은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시고 기억해 주십니다. 또 교회에서 수고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성실하게 정직하게 신실하게 일하며 수고하는 여러분의 삶의 예배를 주님이 기뻐 받아주실 줄 믿습니다.
4~10절에 보면 하나님은 소제의 예물을 드릴 때 고운 가루로 예물을 드리되 그것을 드리는 방식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허용하셨습니다. 화덕에 구운 것으로 드릴 수도 있고 철판에 부친 것으로 드릴 수도 있고 냄비로도 소제의 예물을 드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받으실 때 우리가 드리는 다양한 방식의 헌신 또 직장, 학교, 가정, 교회 등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수고를 다 받아주십니다.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드려지는 수고와 헌신의 예배이지만 하나님은 똑같이 향기로운 냄새로 흠향하시며 받아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소제물을 만들어 드릴 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넣어야 할 것과 넣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먼저 넣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소제에 누룩과 꿀을 넣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누룩과 꿀을 넣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에서 누룩은 부패를 상징합니다. 삶의 영역에서 인본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의 누룩이 틈 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또 누룩은 실제보다 부풀게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부풀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과시와 자랑을 좋아합니다. 헌신이 자기 욕심과 자랑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실제로는 자기 명예나 인기를 얻기 위해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속에 ‘나’가 돋보이게 됩니다. 헌신이라는 포장 속에 자기 욕심과 자랑이 담겨 있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품을 빼고 진솔하고 순수한 삶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또 꿀은 세상 쾌락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는 삶에는 세상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 감동과 하늘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의 예배는 달콤한 예배가 아니고 거룩한 예배여야 합니다.
그런데 소제에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아야 했는데 거기에 뭐가 더 필요했을까요? 13절을 보십시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바로 소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소금을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소금과 같습니다. 소금은 변하지 않는 영원함을 의미합니다. 소제물에 소금을 침으로 하나님과 내가 맺은 언약이 영원불변한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기억하고 변함없는 언약 관계인 하나님께 변함없는 헌신과 충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소제를 드리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곡식만 바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며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을 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흘리신 피의 언약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습니다. 이 언약은 천년이 두 번 지나도 변하지 않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영원한 언약입니다. 우리는 이 변하지 않는 주님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고 주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주님 앞에서 또 주님의 말씀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상황이 좋을 때만 유지하는 거래 관계가 아닙니다. 기도한 대로 일이 잘 풀릴 때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대로 되지 않을 때도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형편이 넉넉할 때도 감사하고 어려울 때도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언제나 어느 때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삶, 이것이 언약을 기억하는 삶이고 내 삶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드리는 삶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첫 이삭으로 드리는 소제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첫 이삭을 볶아 찧고 기름과 유향을 더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첫 이삭’입니다. 첫 이삭은 수확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아직 모든 곡식을 거두지 않았을 때 얻은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왜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렸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농사를 잘 지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수확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삶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첫 소산을 드리는 정신은 우리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하나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가?”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무조건 많은 돈을 헌금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어떤 태도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시간 사용도 달라져야 합니다. 물질을 사용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남는 시간과 남는 물질과 남는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먼저 놓여 있어야 합니다.
첫 소산을 드리는 사람은 아직 거두지 못한 나머지 수확까지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첫 소산은 잘 거두었어도 나머지는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첫 소산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신뢰와 연결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먼저 드리면 반드시 물질적으로 더 많은 것을 받게 된다는 공식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은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앞으로의 삶도 하나님의 손에 내어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화려한지보다 우리 삶을 어떤 믿음으로, 어떤 감사로, 어떤 섬김의 자세로 살아가는지를 보십니다. 우리가 우리 일상을 소제로 하나님께 드려야겠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것, 가정을 돌보는 것, 공부하는 것,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것 등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고 신실하게 감당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주님의 변함없는 언약을 기억하고 주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삶의 소제를 드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예배가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