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밤을 주으며 / 임영인
어릴 적 고향집 뒷밭에는 20년 된 밤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알밤이 영글어 떨어질 때면 밤새 떨어진 알밤을 다른 사람들이 주워 갈까 봐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알밤을 줍고 밤송이는 집게로 집어 가마니에 담아오는 게 하루의 첫 일과였다. 삶은 알밤은 가을 소풍을 갈 때나, 먼 곳으로 나들이할 때면 지참하는 필수품이었다.
밤꽃은 밤꿀의 밀원이다. 밤꿀의 맛은 약간 씁쓸하지만, 다양한 효소와 비타민 등이 풍부하게 함유되어있어 건강에 좋다. 한편 밤꽃은 특유한 냄새로 사대부 집안에서는 과부 며느리가 밤꽃 냄새를 맡으면 바람난다며 밤꽃이 필 때쯤이면 바깥출입을 막았다고 한다.
밤나무는 정원수로는 적당하지 않다. 옛날에는 뒷밭에 있었으나, 수익성이 높은 녹차나 매실나무의 재배면적이 늘어나자 밭에서 산기슭으로 밀려났다. 녹차나 매실 등은 원재료로 하여 수많은 식료품이 생산되지만, 알밤은 겨우 떡이나 빵에 약간 넣어 먹는다.
지난해 5월부터 지리산 둘레길을 매월 1박2일 일정으로 지인 2명과 함께 걷고 있었다. 전라북도 남원시, 경상남도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전라남도 구례군 등 3개도 5개 시·군에 걸쳐있고 21개 구간에 길이가 295㎞다. 한 구간은 대부분 15㎞, 짧은 곳은 10㎞, 긴 곳은 20㎞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매화, 코스모스와 귀한 야생화를 볼 수 있고, 오디와 보리수 열매, 다디단 홍시 맛도 즐기며 지방의 다양한 음식과 문화를 만끽할 수도 있다. 이번 구간은 하동 가탄에서 구례 송정까지 10.4㎞다. 짧지만 난이도가 높은 구간이다. 10시쯤 가탄마을의 지리산 둘레길 안내표지판 앞에서 출발하였다. 50m를 지났을까, 밤송이가 길가에 떨어져 있다. 모처럼 참여한 아내가 어린아이처럼 밤송이를 까고 알밤을 줍는다고 난리다. 나도 가까이 가서 가장 크게 생긴 밤송이를 골라 스틱으로 열어보니 알밤이 다섯 알이나 들어있다. 시골에서 자란 나도 60여 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개 밤송이에는 알밤 한 알이나 세 알이 있다. 너무나 신기해서 사진을 한 컷 찍어 시골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다섯 알은 친구들도 본 적이 없단다. 오늘 좋은 행운이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쌍계사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을 건너자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녹차밭과 매실나무밭을 지나니 산 중턱 길가에 알밤이 수두룩하게 떨어져 있었다. 튼실한 것만 골라 줍다 보니 시간이 30분이 지체되었다. 높은 고개 두 개를 넘어야 하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등산할 때는 등산길을 잘 파악하고 시간 안배를 적정하게 하여 낙오자가 없도록 해야 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험한 고개를 넘어 마을 쪽으로 내려가니 지천으로 밤송이가 떨어져 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밤을 줍는다. 배낭이 점점 무거워진다. 아내는 배낭이 가득 차 더 이상 담을 수 없다며 해맑게 웃는다. 등산용품은 아내의 배낭에 넣고 내 배낭에는 알밤만 넣었다.
두 번째 산을 넘기 위해 재촉했다. 피아골 개울가에 앉아 가져온 음식으로 간단히 식사하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1㎞쯤 지나자 알밤이 또 널려있다. 경사가 급하고 돌산인 고개를 넘어야 하기에 재촉하였으나 “잠시만, 잠시만.” 하며 알밤을 또 줍는다. 배낭이 터져나갈 듯 알밤이 가득 찼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르니 땀이 범벅이다. 중간에서 부실하고 작은 알밤은 다람쥐 먹이로 남겨놓고 나니, 조금은 배낭이 가벼워졌다.
알밤 줍는 재미를 배낭 한가득 담으니 마음은 즐거웠으나,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 목적지에 도착하니 예정했던 시간보다 2시간이나 더 걸려 해거름이 되었다. 무릎도 아프고 파김치가 되었다. 등산할 때는 산을 두려워하고 꼭 필요한 장비만 챙기며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하는 기본을 어긴 하루였다. 집에 도착하여 알밤에 흠이 있는 것은 가려내고, 물로 씻고 말려 조금씩 비닐 팩에 담아 이웃에게 선물했다. 멀리서 힘들게 주워 온 알밤이라서 선물을 하였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치 않다. 사과나 감 등은 그대로 편안하게 먹을 수 있지만 알밤은 삶거나 구워야 하고, 껍질을 벗기기도 불편하여 오히려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사 때 조상에게 부귀와 자손의 번창을 비는 마음으로 알밤을 올린다. 제사상 맨 앞줄에 가을의 대표 과일인 대추, 알밤, 배, 감 순으로 올린다. 다른 과일은 껍질을 벗기지 않고 올리나, 알밤은 껍질을 벗기고 칼로 모양을 예쁘게 다듬어 수북이 쌓아 올린다. 전통 혼례에서도 알밤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폐백상에 대추와 함께 올린다.
알밤은 껍질이 두껍지만 다른 과일과 달리 가시가 있는 밤송이로 이중 치장한다. 마치 갑옷을 입은 장수의 복장이다. 과일나무가 과일을 맺는 이유는 씨앗을 통해 자신들의 종족을 많이 퍼트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알밤 역시 씨앗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중 껍질과 가시로 보호한다.
그렇게 가시로 자신을 잘 보호하던 알밤도 때가 되면 스스로 가시 보호막을 갈라지게 하여 몸을 내어놓는다. 밤송이가 툭 터지면 알밤들이 예쁘게 가지런히 앉아 있다. 과거에 귀한 대접을 받던 알밤이 세월과 함께 다른 먹거리에 밀리고 비싼 인건비에 밀려 나뒹구는 모습이 안쓰럽다.
한겨울이면 골목골목에 진을 치던 군밤 장수가 보이지 않은 지 오래다. ‘개밥에 도토리’라는 말이 왜 생각날까? 군밤을 먹는 것보다 알밤 줍는 재미가 더 좋으니 많이 변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