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첫째주 메시지 예수님 안에서 누구나 존엄하다
요한복음 4장 강해 1부 예수님 안에서 누구나 존엄하다
말씀 요한복음 4장 1-8절
요절 요한복음 4장 7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하나님은 존중히 여김 받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닮아서 누구나 존중히 여김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은 존중히 여김 받기를 원하면서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를 받고 이 세상은 지옥처럼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우리를 존중히 여기셨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면 모든 사람이 존중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 받아 하나님과 사람들을 존중히 여기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을 만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갖습니다.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은 세례요한보다 더 많이 세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이 사실을 들은 것을 아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과거 세례요한에게 조사단을 파견하여 요한이 그리스도인가? 엘리야인가? 그 선지자인가 물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관심이 예수님에게 바뀌어서 그리스도인가? 엘리야인가? 그 선지자인가 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직 그리스도임을 밝힐 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피하여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들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혼혈족이 되고 혼합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였습니다.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면 귀신들렸다는 말과 함께 큰 욕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로 가면 3일 길인데 곧바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서 6일 간의 시간을 소비하며 돌아다녔습니다. 서울에서 대전을 가려면 천안을 거쳐가는 것이 가장 빠른 두 시간 길인데 당진으로 돌아 네 시간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사마리아로 통행하고자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는 강한 의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의 고독과 소외를 아시고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외로움을 해결해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며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버려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고독한 존재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은 강한 사람에게 무시 받고 왕따를 당할 수 있습니다. 강한 사람도 고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도 돌아가시면 우리를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고아가 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도 죽을 때 같이 갈 수는 없습니다. 자녀도 나이가 들면 결혼하여 떠납니다. 영원한 친구는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고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외로움 아시고 우리에게 함께 하고자 다가오시는 강한 의지를 갖습니다. 성령으로 오셔서 영원히 우리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전에 김양순 선교사는 중학교 1학년 때 소풍날 두 친구와 놀러가기로 약속하고 두 친구에게 그것이 알려져 두 친구에게 버림 받고 반 친구들에게 버림 받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어 그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소심하게 살았습니다. 혼자 살았습니다. 선교사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았습니다. 양순 선교사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고 예수님이 자신을 알고 함께 하겠다고 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하시려고 중학교 일학년 그 때로 친히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자기혐오, 수치, 불안, 염려, 자신은 누구인지 모를 방황을 아시고 찾아오셨습니다. 마음에 벽을 쌓고 문 닫고 들어앉아 있는 양순 선교사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문을 열지도 부수지도 않고 일시에 휘장이 걷힌 것처럼 그렇게 찾아오셨습니다. 모든 걸 다 아시는 주님이시라는 걸, 완전히 다 이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여자를 만나 주신 예수님 말씀이 양순 선교사에게는 “내가 너를 안다. 너를 만나러 내가 간다. 만나야겠다.” 하시는 말씀으로 목자님들 모습과 오버랲 됐습니다. 비록 낯선 이들 통해, 모르는 사람들 통해 오셨지만,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이 함께 오셨음을, 사람들을 보내셔서 오셨음을, 말씀으로 알게 해주셨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존귀히 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6시 우리 시간으로 낮 열두시였습니다. 예수님은 땡볕에 걸어오셔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피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배고픔도 목마름도 피곤함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육신을 가진 인간이 피곤하고 목마르고 배가 고픕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목마르고 배고프고 피곤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중에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목마르다고 갈증을 느끼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을까요?
첫째, 우리 인간들을 이해하시고 인간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친구는 같이 아파하고 같이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인간과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서 기뻐할 때 그들과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공감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고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친구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낮아져 우리를 존중히 여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목마른 자가 된 것은 목마르지 않은 자보다 낮아진 것입니다. 십지가에 죽으신 것은 가장 낮아진 위치에서 모든 사람들을 존중의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도 하나님으로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갖고 계시지만 자세를 낮추셨습니다. 겸손은 실력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세를 낮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할 뿐 아니라 겸손히 우리를 존중히 여기시는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존중히 여기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높은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우리는 누구나 존귀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무시 받는 자들을 존중히 여기십니다.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그때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당시 우물은 플렛폼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정보교환을 하였습니다. 지금의 단톡방이나 카페나 블로그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누가 시집가고 애기낳고 하는 정보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곳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소외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과거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으나 이혼하고 지금 한 여인과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도 이 정도의 여자라면 무시하는데 그 당시는 얼마나 무시하였겠습니까? 사람들은 그 여인을 불륜의 여인으로 보았습니다. 창녀와 같이 취급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비도덕적이었지만 여자는 그들보다 더 비도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인을 무시하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들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무시하였지만 예수님은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과거를 아셨습니다. 다섯 명의 남편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 다른 한 남편과 살고 있는 여인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방황한 이유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해석입니다. 여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어서 영혼이 목말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목이 말랐고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존중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하나님의 황공주로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예수님보다 휼륭한 점이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타레박이 없으나 여인은 타레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자로서 모성애가 없으나 여인은 모성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이 말랐으나 여인은 목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존중하며 낮은 위치에서 여인에게 겸손히 물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가진 타레박과 모성애를 통하여 겸손히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타레박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하였지만 여인에게 물을 마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의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생수를 주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목마름이 있었지만 여인은 영혼의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그 영혼의 목마름을 남자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섯 명의 남편과 결혼하고 지금도 한 여인과 살고 있었습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천하보다 큰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우리의 영혼에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돈이 만족을 주지 못하고 사람이 만족을 주지 못하고 쾌락이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의 만족을 주십니다. 오직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님만이 우리의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목이 마르지만 영혼이 목마른 여인의 갈증을 더 심각하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이 목마른 여인을 아시고 영혼의 생수인 성령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약자들이 무시 받았습니다. 복음이 들어와서야 존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특히 여성들은 복음이 들어온 후에 존중히 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조선 땅에서 와서 한 여인을 만났을 때 그분은 이름도 없었습니다. 당시에 조선 여성들은 이름 없는 사람이 대다수였습니다. 선교사님은 그녀의 이름을 헬렌켈러의 이름을 따라 활란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신식 교육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분이 이대 초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박사입니다.
우리나라의 천민들도 엄청 무시 받았습니다. 상민 밑에 천민이 있었습니다. 천민은 종이나 백정이나 기생이나 광대들이었습니다. 한 분이 백성의 아들로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은 그에게 서양이라는 이름을 주고 세브란스 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그가 한국 최초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박서양압니다.
복음이 오면 무시 받는 자들을 존중히 여깁니다. 왕족과 천민이 함께 교회에 다녔습니다. 숭동 교회에서는 왕족이 천민을 형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무시 받는 사람들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여자, 아이들, 장애인, 배우지 못한 사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 됩니다.
(결론) 예수님은 누구나 존중히 여기십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교만하여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람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를 아시고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피곤하고 배고프고 목마른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목마르다! 하시며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높은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성령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존중받는 천국 같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기며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7월 첫째주 메시지 예수님 안에서 누구나 존엄하다
요한복음 4장 강해 1부 예수님 안에서 누구나 존엄하다
말씀 요한복음 4장 1-8절
요절 요한복음 4장 7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한복음 4장 강해 일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