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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성호 교수, 이 책부터 읽고 인혁당을 말하시라
- 시간의 상처 -
* 이 글은 지난 2005년 4월에 제가 쓴 글을 최근의 상황에 맞게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분명 단단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민주화투쟁’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빨갱이’의 상징으로 둔갑되어 왔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줄기의 뿌리는 ‘민족’이라는 일종의 공동체 개념과 맞닿아 있다. 일제시기 좌우익을 막론하고 치열하게 진행되었던 민족해방투쟁이 그러하고, 해방 후의 남북합작 운동과 통일정부 수립 운동이 그러하며, 4·19 이후 한꺼번에 분출되었던 남북학생회담 투쟁 등이 그러하다. 물론 그러한 일련의 운동의 순기능적 유산은 지난 1980년대의 민주화 투쟁과 1990년대의 통일투쟁을 거쳐 오늘날의 남북교류 운동의 그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그 투쟁의 양상과 방법론이 시기 혹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발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반역의 어둠 뒤집어 새날을 여는 사람들 4·19를 일컬어 흔히들 ‘미완의 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한 편으로는 타당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4·19는 ‘시민혁명’의 색깔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전 계층 전 계급이 참여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4·19의 주역은 학생과 도시 인텔리겐차였으며, 바로 거기에 4·19의 시작점과 변곡점이 있다. 3·15 부정선거와 그에 따른 민중의 저항, 그리고 다시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독재정권의 피의 진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젊은 학생층을 제외한 지식인 계층은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으로 소일했다. 4·19 기간 동안 흘린 피의 대부분은 어린 학생들의 몫이었다. 중견소설가 김원일의 중편소설 <마음의 감옥>에는 이 당시의 부채의식을 원죄처럼 품고 사는 한 형제의 이야기가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흐르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혁명이나 변혁을 이루고 난 후, 그 주역세대의 변화를 예의주시한다. 4·19 세대와 6·3세대, 긴급조치 세대와 민청학련 세대, 그리고 광주항쟁 세대와 6월항쟁 세대 등으로 대표되는 우리 현대사의 각 세대들 중에 부침(浮沈)이 가장 극명한 이들이 바로 4·19 세대와 6·3 세대이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구호를 1980년대 학생운동 진영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한국현대사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해야 한다. 이 구호는 바로 4·19 직후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하던 이수병 등이 선도적으로 외친 구호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책, <이수병 평전(민족문제연구소 펴냄)>은 1992년 4월 <암장>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이수병 선생의 일대기를 보강된 내용과 자료를 통해 새로이 펴낸 책이다. 무엇보다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관련한 충실한 증언을 담아냄으로써, ‘단절된 시간의 나이테’와 오래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대학 다닐 때 내 곁에는 한 명의 특별한 벗이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수병 선생은 나에게 있어 ‘한 명의 민주열사’ 이상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선생의 첫째 아들(동우)이 같은 과 동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 참 ‘평범’했다. ‘데모질’을 권유하는 선배들을 피해 다녔고, 조금이라도 ‘의식화된’ 말은 꺼려했다. 그때 나와 다른 ‘운동권(참 오래된 말이다)’들은 그것을 의아해했다. “아버지가 그런 분이면, 아들은 당연히 ‘데모꾼’이 되어야 하는 거 아냐?” 철없는 우리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쩌면, 그때 우리가 살던 시간대가 ‘동지가 아니면 모두 적’인 ‘이분법의 시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벗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리 나지 않게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1990년 4월 9일 ‘이수병 선생 추모제’가 돌아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랄탄’에 눈물도 흘려보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익혀가고 있던 새내기에게 그러한 행사는 참으로 경이로웠다. 문익환 목사, 백기완 선생, 이부영 의원(당시에는 ‘꼬마 민주당’), 민가협 어머님들, 민자통 어르신들, 경희 민주동문회, 그리고 장기수 어르신들. 당시 행사에 오신 분들의 면면이었다. 티브이에서나 만나던, 더구나 ‘남한 빨갱이들 중에 가장 지독한 놈들’이라고 일컬어지던 분들을 직접 뵐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전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암흑의 날 우리에게는 이런 과거가 있었다. “유신헌법을 개정하자고 하거나 그런 말을 들었다고 전하는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해서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해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정권의 뜻에 따르지 않고 간첩이라고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온갖 고문으로 만신창이를 만들어 자백을 받아
소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이란 지난 1974년 4월 3일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에 맞서 전국 대학생들이 총궐기했던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23명을 지목, 국가 변란과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던 사건을 말한다. 이들 중 서도원, 하재완, 김용원, 송상진, 도예종, 이수병, 우홍선, 여정남 씨 등 8명에 사형, 15명에게 무기에서 징역 15년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특히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다음해인 75년 4월 9일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고서 하루도 채 되기 전 20여 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소위 ‘사법살인’ 사건의 피해자들이다. 이를 두고 스위스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들이 독재정권에 의해 ‘살인’을 당했을 때, 내 벗은 겨우 여섯 살이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자신이 여섯 살 때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벗은 그때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야만의 역사’를 품고 사는 사람들 우리는 저마다의 가슴에 굵은 상처 하나씩을 품고 살아간다. 아무리 밝아 보이는 사람도 미소 뒷켠에 숨겨진 눈물빛 기억이 있다. 하물며 지아비와 아버지를 영문도 모른 채 잃은 사람들은 어떠할까. 사형이 집행되던 날, 사형장이 있는 서대문형무소로 향하는 호송버스 앞에 드러누워 울부짖던 함세웅 신부는 호송버스에 치여 평생 다리를 저는 불구자가 되었다. 형 집행에 항의하던 가족들은 ‘검은 가죽 잠바’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고 협박을 당했다. 그리고는 다시는 망자(亡子)들과 만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누런 사각봉투에 담긴 죽은 이의 뼛가루와 조작된 유서뿐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조국 근대화’와 ‘한국적 민주주의’와 ‘7·4공동성명’을 치적으로 내세우는 박정희 정권의 본질이다. ‘농촌을 죽여서 도시를 개발하는’ 박정희 식 경제개발은 수많은 ‘공돌이, 공순이’와 ‘쪽방촌’과 ‘도시빈민’과 ‘농촌 공동화’를 야기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언젠가 그 벗에게서 “고등학교 때까지 형사들이 늘 따라다녔다”는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국가보안법과 ‘연좌제’의 짙은 그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벗이 왜 그리 소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먼 곳의 벗에게 보내는 편지 앵무새를 기르는 가장 큰 매력은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생물’이라는 점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 묻지마 빨갱이’, ‘사립학교법 재개정 반대 = 묻지마 빨갱이’, ‘언론관계법 개정 = 묻지마 빨갱이’, ‘과거사 진상규명 = 묻지마 빨갱이’라는 아주 속편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정녕 세뇌된 사람들은 그들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전철에서 늘상 마주치는 “불신 지옥, 믿음 천국” 류나 “도(道)나 기(氣)에 관심있으세요?” 류처럼 무지는 광신을 낳고, 광신은 다시 무지를 생산하는 ‘세뇌의 순환고리’ 속에서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가 대학교수이건 뭐건, 또는 지난 2004년 탄핵 당시 탄핵을 찬성하는 법학교수 모임을 이끌었건 말건,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분노하는 것은 그의 말이다. 그토록 ‘교양’ 있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제 교수처럼 시건방지고 천박한 역사 인식을 자랑하는 것을 나는 솔직히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는 작년 8월에 이렇게 말했다. “(제주도) 4·3 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막으려는 대표적 사건이므로 국경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을 저지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제주 4.3사건은 남로당의 지령 하에 1948년 5.10 제헌의원 선거를 파탄내기 위한 공산폭동 혁명이며 이를 제주 4.3 ‘민중항쟁’이라고 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결국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反)대한민국적’인 것이다”라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꼭 어울리는 우리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육갑 떤다’는 말이 되겠다. 4·3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제 교수는 어쩌면 우리 같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교한 법적 논리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논리도 ‘사람’보다 우위에 설 수는 없다. 제 교수와 같은 정신세계를 가진 자들의 무지와 광신을 넘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가는 길은 어찌 보면 쉽다. 그것은 우리 안의 냉소와 불신을 걷어치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제일 쉬운 방법론은 바로 ‘가끔씩 멈춰 서서 되돌아보기’이다. 지나간 과거의 일 중에서 어두운 부분이 있다면, 마땅히 그 잔재를 처리하고 가야 한다. 수구들이 말끝마다 내뱉는 “경제도 어려운데” 따위의 말들은 그들의 인분을 먹고 사는 짐승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진도 나가자’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진도를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이 갇혀 있는 감옥부터 탈출해야 한다. 4·19는 ‘미완의 혁명’이 아니라, ‘5·18’과 ‘12 ·19’를 지나 여전히 ‘현재진행 중’인 ‘시민혁명’이다. 해방을 원하는 자, 스스로를 해방하라. 거기에 우리의 길이 놓여 있다. * 故 이수병 선생과, 함께 가신 모든 이들께 ‘살아남은 자’ 모두를 대신한 슬픔과 사죄를 드립니다. |
첫댓글 64년도 1차 인혁당 사건까지 들추어내 법을 잘 못 적용햇다면서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얘기하던데 마음 같아서는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박근혜의 억울함도 풀어주고, 재성호 아자씨에게도 박정희의 과거에 대한 진상을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뉴라이트인지 꼴통라이트인지 그 사이트에서 제성호의 글을 내렸다는군요.그런데 조갑제 사이트에서는 자랑스럽게 태극기처럼 걸어놓고 있다는군요. 'ㅈ'자로 시작되는 조선일보,전두환,조갑제,제성호 요것들 제삿날이 언제일꼬~~~
요것들에게 딱어울리는 'ㅈ'자로 시작되는 멋진표현이 있는디유..
우리에게 있는 그런 비열하고 치졸한 야만성이 있었기에 더 야만스런 넘들한테 당하게된것은 아니었는지...
대학 다닐 때 특별한 이동우님의 고단한 가족사에 경의를 표합니다. 또 저 또한 故 이수병 선생과, 함께 가신 모든 이들께 진심으로 슬픔과 사죄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