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로트니코프 반란>
- "이제 내가 차르다!" -
가짜 드미트리가 살해된 후 며칠만에 바실리 슈이스키가 차르로 추대되었다. 그는 신속하게 가짜 드미트리의 추종자들을 좌천시키고, 드미트리가 가짜라는 걸 생모 마르파(1)를 통해 확인시키고, 드미트리를 성인으로 시성함으로써, 가짜 드미트리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일단 바실리 슈이스키가 너무 급하게 차르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이 약했던 게 문제였다. 굳이 따진다면 부계로 류리크 가문의 방계였다는 것이 내세울만한 장점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하면 다른 보야르 가문 상당수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바실리 자체가 민중들에게 그렇게 인기 있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거기에 가짜 드미트리가 살해될 때 겨우 탈출한 그의 추종자 미하일 몰차노프나, 푸티블로 좌천된 가짜 드미트리의 추종자 그리고리 샤홉스코이가 드미트리가 실제로는 살아있고, 그 때 죽은 건 시종이란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면서 러시아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당장 체르니코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페름에서는 소집되어있던 러시아군인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더니 흩어져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농민들과 홀로프(2)들이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니즈니 노브고로드는 모르도바인들과 농민들에 의해 포위되었고, 아스트라한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카잔의 타타르족들도 독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라쟌에서는 귀족인 랴푸노프 형제가 군주처럼 행세하고 다녔고, 도적과 코사크족이 사방에서 날뛰었다. 이 와중에 샤홉스코이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이반 볼로트니코프, 꽤나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로, 어느 귀족의 홀로프였다가 타타르족에게 잡혀 오스만투르크로 팔려갔고, 거기서 갤리선 노예로 몇 년간 살았던 인물이었다. 어떻게 겨우 탈출하여 베네치아를 거쳐 폴란드로 갔다가 러시아로 돌아왔는데, 그는 뜬금없이 가짜 드미트리가 살아있으며, 자신이 그를 만났고, 가짜 드미트리가 자신을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샤홉스코이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를 초빙한 후 본격적으로 바실리에게 반기를 들었다.
- 모스크바 근교에서 정부군과 싸우는 볼로트니코프 반군 -
반란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라푸노프 형제들 같은 귀족들과 농민들, 코사크족이 앞다두어 그 반란군에 가담했고, 반란군은 모스크바에서 보낸 진압군을 격파하고, 모스크바를 포위했다. 곧 모스크바는 식량난에 시달렸고, 반란군의 승리는 눈앞에 다가온 듯 했다.
하지만 여기서 일이 꼬였다. 이반 볼로트니코프는 모스크바 성 내의 시민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보야르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각지의 농민들과 홀로프들에게 보야르들을 죽이고,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는 등 계급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약탈 등을 통해 이를 어느정도 실천했다. 문제는 반란군 내에는 보야르 같은 고위 귀족까지는 아니더라도 드보랴닌(3) 같은 중,하위 귀족들은 많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런 구호를 스스럼없이 내뱉는 볼로트니코프를 불안하게 여기고, 바실리 슈이스키에게 투항했다.
- 미하일 스코핀 슈이스키를 그린 17세기 그림 -
이렇게 되자 반란군은 당연히 열세로 몰렸다. 볼로트니코프는 12월에 바실리의 조카인 미하일 스코핀 슈이스키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했고 결국 모스크바 포위를 풀고 칼루가를 거쳐 툴라로 도주했다. 그는 툴라에서 코사크족 사이에 나타나 자신을 표드르 1세의 아들로 1592년에 태어난 표트르 황자라고 주장하는 인물과 합세했다. 뭐 문제가 있다면 애시당초 표드르 1세는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즉 아예 존재하지 않은 인물을 사칭한 놈이었다는 것이었다. 그와 샤홉스코이는 표트르를 차르로 추대하며, 전열을 가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바실리 슈이스키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1607년 봄, 신속하게 툴라를 포위했고, 10월에 툴라를 점령했다. 가짜 표트르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볼로트니코프는 유배됬다가 눈이 뽑힌 후 호수에 던져져 익사되었고, 샤홉스코이는 유배되었다. 바실리는 위풍당당하게 모스크바로 개선했지만, 문제는 아직 이게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가짜>
툴라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1607년 8월, 또 다시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본래 그는 리투아니아 국경지대에 수감되었던 죄수였는데 탈옥을 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나가야 가문의 친척으로 행세해 풀려났다는 소문도 있는 인물로, 정확한 신원은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그는 감옥을 벗어난 후 자신이 드미트리 황자인 동시에, 모스크바에서 잠깐 차르로 지냈던 그 인물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 "내가 바로 차르 드미트리다. 겨우 모스크바에서 벗어났는데 이제 다시 나의 자리를 찾으러 가겠다" -
물론 이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일단 이 인물은 얼굴 생김새며, 목소리 등 너무나도 많은 것이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와 달랐다. 당연하겠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두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자기가 가짜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했다는 것이었다. 코사크족(4)들과 민중들이 그를 지지했고 드미트리의 생모 마르파가 또 말을 바꿔서 이 인물이 진짜 드미트리라고 인증하고, 마리아 므네지치까지 자기 남편이 맞다고 하는 바람에 두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급격하게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유배됬던 샤홉스코이 등 다수의 보야르들도 그에게 합세하며 힘을 보탰다.
- 집결하는 가짜 드미트리 2세의 군대 -
거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역시 내부 반란 때문에 국가적으로 지원은 해주지 못했지만, 몇몇 귀족들과 왕실이 개별적으로 가짜 드미트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귀족들 중 일부는 직접 모병한 병사들을 데리고 가짜 드미트리에게 합류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알렉산데르 요제프 리소브스키와 그가 이끄는 경기병대 리소브치치도 있었다. 이런 폴란드 병력이 대략 7500명 정도였고, 거기에 만 명의 코사크, 그리고 여기저기서 모여든 다른 만명까지 합쳐져 대략 27,500명 정도의 병력이 집결했다.
가짜 드미트리의 대규모 병력은 드미트리 슈이스키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며 모스크바 인근까지 진격했다. 이들은 점점 세력을 불려, 나중에는 거의 10만명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가짜 드미트리의 모스크바 공격 시도는 미하일 스코핀 슈이스키의 강력한 저항으로 좌절됬지만, 그는 모스크바 근처 투시노에 눌러앉아 아예 각료들을 임명하고, 표트르 니키티치 로마노프를 로스토프 대주교로 임명하는 한편, 세금을 거두는 등 정식 정부를 구성했다. 덕분에 그는 나중에 투시노의 도적이라고 불렸다.
- 리소브치치는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 및 이 그림과 연관된 '폴란드 기병'이란 소설로도 어느정도 알려져있다. 참고로 리소브치치는 30년 전쟁에도 참여해 백산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무지막지한 약탈로 악명이 높았다. -
가짜 드미트리는 투시노에 눌러앉은 후 가뭄과 전쟁에서 피해를 덜 본 북부 러시아를 장악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트로이츠키 수도원을 공격해야 했는데, 1608년 9월부터 가짜 드미트리의 군대가 맹렬하게 그 곳을 공격했음에도, 트로이츠키 수도원은 끝끝내 버텨냈다. 하지만 트로이츠키 수도원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정부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북부 러시아는 리소브치치들에게 약탈당하고 있었고, 정부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모스크바에는 투시노와 모스크바를 오가며, 양쪽 모두에서 하사품을 받아내는 기회주의자들이 넘쳐났고, 군대는 제대로 구성되지 못했으며, 가짜 드미트리에 대한 지지도는 높아졌다. 가짜 드미트리 격퇴는 둘째치고 트로이츠키 수도원을 구원하는 것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강도들의 등장.>
결국 바실리 슈이스키는 1608년 말~1609년 초엽, 스웨덴에 지원을 요청했다. 스웨덴의 칼 9세 역시 친폴란드 정권이 들어서는 걸 원치 않았기에 그 요청을 승낙하지만, 대신 핀란드 동쪽에 있던 켁스홀름 백작령을 할양할 것을 요구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모스크바는 어쩔 수 없이 이 요구를 승낙했고, 스웨덴은 젊은 프랑스인 장군 야콥 가르디에게 잘 훈련된 서유럽식 용병 만명을 러시아로 보내주었다.
- "어중이떠중이들아. 서유럽식 군대 체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
1609년 3월 말, 가르디가 이끄는 이 다국적 용병대는 노브고로드에서 미하일 스코핀 슈이스키가 이끄는 러시아 군과 합류했다. 이들은 카멘카, 토르조크 등에서 숫자만 많지, 질적으로 떨어지는 가짜 드미트리의 군대를 격파했고, 나중에는 트로이츠키 수도원도 구원해냈다. 중간에 용병들 다수가 급료 미지급을 이유로 이탈해버리는 사단이 벌어졌지만 곧 추가병력이 도착했고, 가짜 드미트리의 군대는 패퇴하기 시작했다.
- "씁. 어쩔 수 없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해볼까?" -
이 꼴을 보고 지그문트 3세는 경악했다. 이렇게 되면 스웨덴과 러시아가 동맹을 맺고, 연방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되고, 이러면 스웨덴 왕위를 탈환하려는 그의 시도는 물거품이 될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그문트 3세는 세짐을 설득해, 전비를 마련한 후 대규모 병력을 일으킨 후 러시아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에 도착한 폴란드 군대는 곧 스몰렌스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투시노 정부 내의 폴란드인들과 친 폴란드 성향의 보야르들은 가짜 드미트리를 버리고 지그문트에게 합류하기 시작했다. 가짜 드미트리의 힘은 더더욱 약해졌고, 결국 가짜 드미트리는 투시노를 버리고 칼루가로 도주해야했다. 그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모스크바를 공격하려고 시도했지만, 가르디와 미하일 스코핀 슈이스키에게 패배했다. 두 사람은 화려하게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쿠쉰 전투>
-"이제 내가 진정한 러시아의 차르다!" -
한편 가짜 드미트리를 버리고 지그문트에게 도주한 친폴란드계 러시아 귀족들은 1610년 2월, 폴란드 정부와 스몰렌스크 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내용은 친 폴란드파 보야르들에게 통치권을 보장해주고 지그문트의 아들인 브와디수아프 왕자가 러시아 정교로 개종한다면, 브와디수아프 왕자를 러시아의 차르로 옹립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제 차르는 3명이었다.
- 스몰렌스크 공방전을 다룬 그림. 스몰렌스크는 1611년까지 폴란드 군을 상대로 격려하게 저항했다. -
이 와중에 가르디와 미하일 슈이스키가 화려하게 모스크바에 입성하면서, 각지의 보야르들이 바실리쪽 진영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바실리쪽 군대의 수는 질적으로는 좀 의문스럽기는 해도 5만명에 달할 정도로 그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마침 폴란드 군도 보리스 고두노프가 철저하게 강화한 스몰렌스크의 성벽을 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대세는 바실리 쪽에 기울어진 것처럼 보였다.
- 미하일 스코핀 슈이스키. 그의 죽음은 안정을 찾는 듯 했던 러시아에 다시 어두운 그림자를 들이밀게 하였다. -
그런데 이 와중에 문제가 생겼다. 민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미하일 스코핀 슈이스키가 갑작스럽게 죽은 것이었다. 현재까지 말이 좀 많지만 타살이 가장 유력하며, 유력한 용의자는 바실리의 동생이며 유력한 후계자였던 드미트리 슈이스키였다. 동기로는 미하일의 인기가 높아지며 후계자로 미하일을 추대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미하일을 독살했다는 추측이 우세하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군은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드미트리 슈이스키는 과거 가짜 드미트리에게 대패한 전적이 있었던 인물인데다가 능력도 미하일보다 확연히 딸렸다. 거기다 미하일이 슈이스키 가문 내에서 유일하게 인기 있던 인물이었던데다가 용병 급료가 체불되면서 분위기는 더 뒤숭숭해졌다. 태만이 러시아 군대를 지배했고, 가르디는 용병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래도 5만은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다. 이들은 자신만만하게 폴란드 군대를 격파하기 위해 스몰렌스크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 "젠장. 폐하는 말을 안 듣고... 그래도 윙드 후사르들이 많이 있으니 이걸로 판을 벌여봐야겠군." -
하필 폴란드 군은 상황도 좋지 않았다. 스몰렌스크는 함락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주키에브스키가 전 병력을 동원해 야전으로 싸우자고 간언했지만 지그문트는 이를 묵살하고, 고작 만여명의 병력만 주키에브스키에게 준 후, 러시아군을 요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리투아니아 원수인 주키에브스키 자신도 상당한 명장인데다가 이 병력들 중 절반 이상은 윙드 후사르라는 것이었다. 일단 주키에브스키는 러시아군 선발대를 고립시킨 후 5500의 윙드 후사르를 이끌고 7월 4일 쿠쉰에서 러시아군과 격돌하였다.
뭐, 윙드 후사르 때문에 키르홀름에서 몰살당했던 스웨덴은 이들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덕에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은 엉성하게나마 목책을 치는 등 나름대로 윙드 후사르들을 대비하였다. 비록 윙드 후사르들이 카라콜을 해대는 진기명기를 벌이는 통에 병력이 꽤나 많이 소모되기는 했지만(5) 목책을 친 덕에 그나마 윙드 후사르들을 상대로도 전열이 붕괴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고 윙드 후사르들이 좀 지쳐가는 기색이 보이자, 드미트리 슈이스키가 일을 내고 말았다. 윙드 후사르들을 때려잡을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기병대들을 내보낸 것이었다. 문제는 윙드 후사르들은 완전히 지치지 않았으며, 이런 상황 자체가 주키에브스키가 바라던 상황이었다는 것이었다.
- "지금이 기회다! 전 군 돌격! 성모 마리아를 위하여!" -
러시아 기병대는 바로 윙드 후사르들에게 제대로 돌격을 얻어맞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 기병대는 연합군의 전열을 뭉개버리고, 목책을 부수면서 도주했고 윙드 후사르들이 바로 그 뒤를 따라 러시아군을 덮쳤다. 드미트리 슈이스키는 도주하고(6), 러시아군 상당수는 목숨을 잃었다. 스웨덴 용병들은 폴란드 군에 항복했고, 가르디도 겨우 도주했다. 러시아군이 이렇게 소멸되어버린 것이었다.
<폴란드 역사상 최고의 순간>
러시아 중앙군이 이렇게 소멸되자, 전세는 급격하게 바실리 쪽에 불리해졌다. 가짜 드미트리는 다시 모스크바 인근까지 진격했고, 주키에브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군 1만명은 모스크바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다. 보야르들은 얼른 지그문트 3세로 갈아탔고, 라푸노프 형제의 주도하에 7월 27일 바실리 슈이스키를 폐위한 후, 그를 강제로 수도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곧 주키에브스키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 폴란드 역사상 최고의 순간 jpg. -
주키에브스키는 일단 바실리와 그의 동생 드미트리를 지그문트 3세에게로 끌고 갔다. 바실리는 지그문트 3세에게 절해야 했고, 이후 폴란드에 감금되었다가 그 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한편 모스크바는 차르 선출을 두고 뒤숭숭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성직자들과 관리들은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기 차르로 밀었고, 보야르들은 스몰렌스크 조약대로 브와디수아프를 지지했다. 그리고 서민들은 가짜 드미트리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폴란드 군을 등에 업은 보야르들의 힘이 가장 강했고, 결국 8월 27일 브와디수아프가 차르로 선출되었다. 자기가 차르가 되고자 했던 가짜 드미트리는 다시 모스크바에서 후퇴해야 했다.
<가짜 드미트리의 죽음>
- 지그문트 3세. 물론 그는 표드르 1세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유능한 군주는 절대 아니었다. 거기에 지나친 신실함과 욕심은 많은 문제를 나았고, 러시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희한한 건 연방의 최대 판도는 그가 즉위할 때 만들어졌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곧 문제가 생겼다. 주키에브스키는 스몰렌스크 조약을 이행할 생각이 있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 지그문트 3세는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브와디수아프가 차르로 선출된 이후 모스크바에서 사절단이 이 사실을 알리러 스몰렌스크로 갔는데,(7) 이들은 브와디수아프가 정교회로 개종할 것과, 스몰렌스크의 포위를 풀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독실한 카톨릭 교도인 지그문트는 자기 아들을 정교회로 개종시킬 수 없고, 스몰렌스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이며, 자기가 러시아의 군주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사절단은 반발했다. 그러나 사절단에게 소용 없던 것이 지그문트 3세와 세짐은 합심해서(8) 브와디수아프가 정교회로 개종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나마 지그문트 3세가 조금 양보한 게 있다면 자기 아들이 차르가 되는 대신 자기가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이 되겠다는 정도였다. 주키에브스키는 답답해하며, 지그문트를 설득했지만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소규모 병력만 모스크바에 남긴 채 폴란드로 돌아갔다.
- "다시 기회가 오는구나!" -
이렇게 되자 러시아 전체가 분노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반폴란드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여러 도시에 보냈고, 각 도시들은 이에 호응했다. 폴란드의 강압적인 요구를 들은 러시아 동부 지역들은 단체로 가짜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안 그래도 바실리 슈이스키가 폐위되자, 스웨덴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한 상황이었기에(9), 러시아는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이 상황에 상당한 지역이 가짜 드미트리에게 투항하자, 그는 다시 한 번 차르의 자리에 도전할만한 힘을 갖추게 되었다.
- "가짜 드미트리는 이제 없어. 하지만 이 가슴, 이 마음 속에 하나가 되어 살아가! 거기다 아들도 남겼고!" -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차르 자리에 도전할 수 없었다. 다시 세력을 갖추기 시작했을 무렵, 그는 술을 마시다가 타타르 출신의 부하 표트르 우소노프에 의해 살해되었다. 표트르 우소노프는 가짜 드미트리를 암살한 후 토막냈으며, 그의 세력은 공중분해 되었다. 다만 그의 추종자들이 가짜 드미트리의 아내 마리아 므네지치와 그의 유복자 이반을 데리고, 약간이나마 남은 세력을 가지고 볼가강 유역에서 세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1) 마리아라고도 알려져있음.
(2) 흔히 노예라는 의미로 번역되나 일반적 노예와는 약간 의미가 다름. 다만 큰 차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3) 보야르보다는 급이 낮은 중,하급 귀족. 군사 업무에 종사하는 대가로 토지를 받은 귀족들이었다. 라푸노프 형제도 드보랴닌이었다.
(4) 단 코사크족들은 그를 진지하게 드미트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이무렵 코사크족 내에서는 수많은 가짜 황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5) 윙드 후사르들의 무장 중에는 권총도 있었고, 카라콜도 당연히 훈련받아서 할 줄 알았다. 단지 랜스를 들고 돌격하는 것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어서 잘 안 했을 뿐.
(6) 그는 어찌저찌 모스크바로 도주했지만, 나중에 폴란드로 끌려가 그 곳에서 죽었다.
(7) 이 사절단에는 유력한 차르 후보였던 골라친공과 미하일 로마노프의 아버지 표트르 니키티치 로마노프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상 경쟁자 제거 조치였다.
(8) 사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그문트와 세짐은 항상 사사건건 대립했다. 키르홀름 전투로 스웨덴 군대가 몰살당한 후에도 세짐의 전비 지출 거부로 연방은 에스토니아를 점령할 수 없었고, 나중에 세짐과 지그문트의 대립은 주키에브스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9) 스웨덴은 아예 친 스웨덴파 귀족들을 압박하여 칼 9세의 아들이자 구스타브 아돌프의 동생인 칼 필립을 차르로 선출하게 만들었다. 기껏 한명으로 확정되는 듯 했던 차르가 다시 3명이 되었다.
첫댓글 모스크바에 외국군이 주둔한 마지막 사건...
(수정)하고 생각해보니 나폴레옹이 있긴 했군요;;
저 두국가는 저때 러시아를 차지 못한게 참...이자를 톡톡히 치루네요
마르파 저아줌마는 노망든걸까요?
왜 아들인증을 개속해서 러시아를 카오스로 밀어넣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