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반도체, 일본의 자존심 외교가 낳은 참극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3.03.29. 00:40업데이트 2023.03.29. 06:28
https://www.chosun.com/opinion/chosun_column/2023/03/29/WT2E775L25EUPPWVDNGY4NGA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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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반도체 호령하던 1980년대 일본의 패착
소니 창업주와 이시하라 신타로 “No라고 말할수 있는 일본”
이후 일 반도체는 역사 뒤안길로
반도체 지렛대론 주장하는 한국의 자칭 진보들은
20세기 日 극우 실패 반복하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5월 20일 경기도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과 생산 시설을 둘러본 후 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한국은 전 세계 제조업 5위, 반도체·배터리 생산 1~2위, 대규모 군대와 방위산업을 가진 국가다. 미국도, 일본도 중국을 견제하고 첨단 기술 공급망을 재편하는 등 전략 목표를 실현하려면 한국의 협력이 절실하다. 이런 한국의 역량을 최대한 지렛대로 삼아 동맹에 쓴소리도 하고 치열하게 협상하고 주고받아야만 한국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
소위 진보 성향 일간지 <한겨레>의 박민희 논설위원이 지난 17일 쓴 칼럼의 한 대목이다. 이 글을 읽고 필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2020년대 한국에서 스스로를 ‘진보’로 여기는 이들이, 수십 년 전 일본 극우 정치인을 연상케 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1980년대, 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쓰, 마쓰시타(현 파나소닉) 등 일본 5대 메이커가 세계 반도체 시장을 호령하고 있었다. D램 시장 일본 기업 총 점유율은 80%에 근접했다. 빛나는 성취에 스스로 눈이 멀었던지, 패전의 설움을 잊고 살던 일본인들의 국가적 자존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소니의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는 미국인들을 상대로 ‘올바른 경영 기법’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급기야 소설가이자 극우 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공저했다.
이시하라는 마치 OPEC 회원국들이 석유 수출 통제를 무기 삼듯, 일본은 반도체 수출을 무기 삼아 미국을 상대로 일본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다는 포부를 내비치고 있었다. “중거리 핵무기건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건, 그러한 무기의 정확성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아주 작고 고도로 정밀한 컴퓨터에 의해 판가름 난다. 만일 일본제 반도체가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 정확성을 보장할 수가 없다.” 일본 없이 첨단 무기를 만들 수 없으니 미국도 일본에 무릎을 꿇거나, 적어도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소리다. 이시하라는 당차게 선언했다. 첨단 반도체는 “군사력의 핵심이며 따라서 일본의 힘의 핵심이다. … 어떤 면에서 일본은 아주 중요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이시하라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면 미국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에는 모리타 아키오의 이름이 공저자로 박혀 있었다. 워싱턴 정가가 발칵 뒤집어진 것은 당연한 일. 정보기관의 내부 회람용으로 만들어진 축약본이 서점에서 알음알음 유통될 지경이었다. 그 후의 전개는 잘 알려진 바와 같다. 미·일 반도체 협정과 플라자 합의가 이어지면서 일본의 반도체 메이커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 기업들이 그 빈틈을 치고 들어간 결과 오늘날의 세계경제 지도가 완성됐다.
미 터프츠대 교수 크리스 밀러는 ‘칩 워(Chip War)’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에 대해 인상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미국이 ‘적의 적은 친구’라는 판단하에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적극 지원했다는 것이다. 인텔은 당시만 해도 기술력이 부족했던 삼성의 메모리칩에 인텔 브랜드를 붙여서 팔 수 있도록 했다. 부도 위기에 몰렸던 미국 기업 마이크론은 삼성에 64K D램의 설계를 제공하고 라이선스 생산을 허용했다.
이런 협력이 가능했던 것은 돈 때문만이 아니었다. 실리콘밸리가 축적한 메모리 반도체 기술이 한국으로 넘어올 때 워싱턴 정가는 제동을 걸지 않았다. 후방 지원에 머물렀던 일본과 달리, 한국은 때로 미국보다 많은 병력을 보내며 베트남에서 함께 피를 흘린 혈맹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슬슬 자존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일본보다 좀 더 충실한 동맹국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가져가는 편이 낫다는 인식을 품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은 반도체의 소재, 부품, 장비 분야에서 막강한 시장 지배력을 자랑한다. 미국이 제3국의 반도체 생산을 막으려면 일본의 협력을 얻어야 할 정도다. 그런 일본조차 미국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려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극우 정치 특유의 필부지용(匹夫之勇)이 낳은 쓰라린 결과다. 21세기 한국의 자칭 진보는 20세기 일본 극우와 같은 함정으로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일본을 이기려면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한다. 미국은 미래 지향적 한일 화해를 원한다. 일본에 ‘지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일본을 이기기 위한 첫 단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역사만이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