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장유張維가 살아있을 적에 아들 선징의 아내가 청나라에 잡혀간 것을 속환금을 내고 찾아왔잖습니까. 그런데 청에 잡혀가 오욕을 당한 며느리와 아들이 그대로 다시 부부가 되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는 없는 거지요. 2년 전 남편이 죽기 전에 이런 이유로 이혼시켜 주기를 간청했었습니다. 제가 지금 재차 단자單子를 올리는 까닭은 며느리가 타고난 성질이 못돼서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청나라에 끌려갔다온 뒤로는 더욱 편치 않게 행동해서입니다. 이는 칠거지악에 해당되니 이혼시켜 주기를 거듭 청합니다. 1640년 인조 18년. 장유의 아내 김씨가 2년 전 죽은 남편을 대신해 그의 아들과 며느리를 이혼시켜달라고 예조에 낸 소장이다. 예조에서는 아래와 같이 의논하며 거듭된 장유 처의 이혼 요구를 들어주었다.
죽은 남편이 진정했다가 조정의 윤허를 받지 못했으니, 칠거지악의 의의를 거듭 내세워 반드시 죽은 남편의 지극한 소원을 이룩하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사녀士女들의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었으니 지금 그 법을 다시 고치기는 어렵다. 특별히 이 경우만 소청을 윤허한다. 1640년, 병자호란 나고 4년 된 해. 청나라에 몸값을 치른 포로들이 속속 돌아올 때였고 몸값을 치를 경제력이 없던 상민들은 심양에서 수백 킬로미터를 도망쳐 오던 때였다. 주회인走回人들을 잡아 보내라는 청나라의 명령에 조선정부는 요구하는 도망포로 숫자를 맞추기 위해 부랑아들이나 상민들까지 잡아들여 의주로 압송시키기도 하던 때였다. 유례없이 계속 되는 기근이 무고한 양민을 붙잡아 도망포로로 만들어 청나라로 보내는 정부 탓이라며 민심이 흉흉해졌던 때이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속환贖還돼 돌아온 며느리와 아들의 이혼을 요구한 시어머니가 있었으니 위의 김씨이다. 시아버지 장유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으로 효종왕비의 아버지이고 김씨는 효종왕비의 어머니이다. 김씨는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과 원손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장유는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주화파였다. 주자학의 편협한 학문 풍토를 비판하고 비교적 유연한 사고를 했다는 이런 핵심관료층까지 정절에 관해서는 물러섬이 없었다. 속환녀인 며느리와 아들의 이혼을 앞장서서 요구한 것이다. 실록에는 이 이혼 요구와 승낙 이후로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라고 나온다.
사대부집안에서 너도나도 이혼을 시킬까봐 속환녀들이 돌아올 때 정부에서 낸 묘수가 '회절강'이었다. 마을 어귀의 개천에서 몸을 씻으면 정절이 회복되는 것으로 치자고 캠페인을 벌인 것이었는데 이게 통할 조선사대부들이 아니지. '천하 각국 어디에도 없고 중국도 이것만은 조선을 따르지 못 한다'고 자부한 '조선여인의 정절'은 조선사대부들만의 자부심! 이미 40년 전 전쟁, 임진왜란이 끝나자 부랴부랴 발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조선사대부들은 강력한 캠페인을 벌였다. 열녀 356명, 효자 67명, 충신 11명. 효자나 충신을 합한 숫자보다 네 배 이상 압도적으로 많은 열녀의 숫자가 뜻하는 바는 '정절은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이라는 '정언명령'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포로로 끌려갔다 속환돼 온 사람들은 위로는커녕 전쟁의 트라우마를 치료받을 길이 없었다. 남녀 모두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화냥(몸을 판)질'이 돼 버리는 상황이었다. 오랑캐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것은 유교 이념으로 보면 불충不忠이며 불사이군不事二君, 불사이부不事二夫의 원칙을 훼손한 '루저'들이 되는 것이다.
"며느리가 타고난 성질이 못돼서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청나라에 끌려갔다온 뒤로는 더욱 편치 않게 행동하니 이는 칠거지악에 해당된다." 라고 사대부집안 시어머니들이 말했더라도 '여자의 적은 여자'여서 시어머니들이 이혼에 앞장섰다고 말한다면 넌센스이고. '열녀 정신'으로 무장된 조선 사대부집안 시어머니들로서는 오랑캐의 땅에서 유교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포로 생활로 정신적 외상이 막대한 며느리들이 '오염된 피'일 뿐이었다. 시어머니들은 오랜 이념 교육으로부터 속환녀가 가문의 혈통을 잇기에는 합당치 않다고 배운 것이다.
이들 속환녀들은 오랑캐에게 끌려가며 빼앗긴 삶을 고향에 돌아와서도 찾지 못했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화냥년이라 손가락질 당한 것인데... 우린 여기서 누가 화냥질을 한 것인가? 진지하게 물을 수 있다. 공권력의 공백 속에서 끌려간 백성들인가? 끌려갔던 것이 화냥질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권력인가?
'화냥花娘'은 '유녀(몸 파는 여자)'라는 뜻의 중국어로 성종 때부터 쓰였다. 임진왜란 때 명군이 10만 명 넘게 참전해서 8년 3개월을 주둔했던 바, 그때부터 널리 쓰였을 것이다. 명군이 철군한 뒤 조정에서는 명군과 관계했던 여자들, '화냥년'들을 한성부 10리 바깥으로 쫓아낸다. 그 당시 '화냥년'이란 용어는 전쟁을 맞아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외국인과 접촉한 여자라는 뜻으로 널리 쓰였다고 본다. (환향녀還鄕女는 병자호란 때 돌아온 속환녀들을 일컫는 화냥년이라는 비칭을 순화시키려고 근대에 와서 새로 만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