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6일 서울상대 17포럼의 강의 요약은 연사 정해은 박사의 같은 제목의 글이 있어 이 글로
요약을 대신합니다.
『징비록』, 전란 극복에서 교훈을 얻다
정해은(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Ⅰ. 임진왜란 직전 어느 대화
당시 나라는 평화로웠다.
조정과 백성 모두가 편안한 까닭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와 동년배인 이로도 내게 글을 보내왔다.
“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
그러곤 조정 일에 불만을 늘어놓았다.
“지방만 보더라도 앞에 정진 나루터가 가로 막고 있소.
어떻게 왜적이 그곳을 뛰어넘는단 말이오.”
아니 넓디넓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막지 못한 왜적을
이까짓 한 줄기 냇물로 막을 수 있다니 내가 더 답답했다.
-『징비록』중에서-
위의 상황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의 일이다. 김성일과 황윤길이 일본에 다녀온 후 조선 조정은 명에 사신을 보내 일본이 명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알렸다. 그리고 일본을 경계해 경상도에 집중적으로 성곽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불만들이 쏟아졌다.
류성룡은 답답했다. “당시 사람들의 의견이 한결같이 이러했고 홍문관 또한 그런 의견을 내놓곤”하면서 반대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류성룡은 “이는 당시 전쟁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나라가 품고 있던 모든 힘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없었기”에 전쟁이 발발하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징비록(懲毖錄)은 류성룡이 영의정에서 물러나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면서 저술한 임진왜란 회고록이다. ‘징비’란 “내 지난날을 징계해[懲] 뒷날에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毖]”라는 의미로 시경(詩經)의 문구에서 따온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로 있으면서 군사업무와 정사를 담당한 류성룡은 『징비록』의 서문에서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발생한 이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아! 임진란의 전화는 참혹했다. 수십 일 동안 삼도(三都)를 지키지 못하고 팔도가 산산이 깨졌으며 임금께서 피난하셨으니, 그리하고도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천운이다.”고 썼다.
류성룡은 전쟁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해 후세에 남겨 왜 전쟁을 막아야 하는지를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글이 진솔하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자의적인 기억의 선택과 거리가 멀다. 류성룡의 기억과 회고를 따라 가다보면 주변 정세에 대한 무지와 오만이 어떤 결과를 빚었는지, 그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Ⅱ. 임진왜란은 어떤 전쟁이었나?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오후 5시 무렵, 조선 침략 선봉군 1만 7천여 명을 태운 일본의 군선 700여 척이 부산 앞 바다에 나타났다. 그리고 다음날 14일 아침 일본군이 해안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개전 초기에 조선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없었으므로 일본군은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3년 1월 8일에 조․명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하면서 전세는 뒤집혔다. 서울까지 후퇴한 일본군은 2월 행주싸움에서도 패하자 강화 회담을 제의하면서 남쪽 지방까지 후퇴했다.
그 후 일본은 1596년 9월 평화회담이 결렬되자 1597년 정월에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침을 기도하였다. 정유재란이었다. 일본군은 이번에도 직산에서 북진이 좌절되어 남쪽 해안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1598년 11월에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군이 조선에서 총퇴각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의 무모한 침략야욕으로 시작된 7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막을 내렸다.
조선은 7년간 전쟁으로 인해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두 차례의 전란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는 공식적으로 보고된 기록이 없다. 다만, 1593년 5월, 서울이 수복된 후의 한 기록은 서울로 돌아온 인구를 남자 14,062명, 여자 24,869명 합계 42,106명으로 집계하였다. 전란 전의 서울 인구는 10여만 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절반도 돌아오지 못한 상태인 셈이다. 1593년(선조26) 4월에 서울 수복 직후 서울의 모습을 류성룡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나도 명나라 군사를 따라 도성에 들어왔다. 성안에 남아있던 백성들을 보니 백 사람 중에 한 사람 생존해 있을까말까 하고 생존해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굶주리고 피폐하여 얼굴빛이 귀신이나 다름없었다.
- 징비록 중에서-
전쟁이 끝난 후인 1601년(선조 34)에 한 대신은 전쟁 후에 인구가 10분의 1로 줄었다고 보고했다. 인구수가 10분의 1로 줄었다는 표현은 과장한 측면도 없지 않으나 그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왜란 중에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어림잡아 1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되고 있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포로로 끌려갔다가 천행으로 고향 함평으로 생환한 정희득(鄭希得)은 “우리나라 남자로서 전후에 일본으로 잡혀온 자들을…이제 모조리 찾아 모으면 무려 3〜4만 명은 되며 늙은이나 여자는 그 숫자가 곱절이나 될 것이다”라고 증언하였다.
한편 서울이 수복된 이후인 1593년 6월 당시, 조선은 전국토의 절반 이상이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었다. 328개의 행정구역 가운데 무려 181개(55.2%)가 피해 지역으로 나타났다. 특히 경기는 37개 읍 가운데 35개 읍(94.6%), 경상도는 67개 읍 가운데 48개 읍(71.6%)이 피해를 보게 되어 이 지역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극심하였다.
농토의 피해는 더욱 심각하였다. 왜란 직전에 150여 만 결(結)이던 전국의 농지면적이 전란 후에는 30여 만 결로 급격히 감소되었다. 1594년(선조 27) 5월의 한 기록에는 성중에 들어갔을 때 마침 명나라 군인이 술을 잔뜩 먹고 가다가 길 가운데 구토하는 것을 보았다. 천백의 기민이 한꺼번에 달려와서 머리를 땅에 박고 핥아먹었는데 힘이 약해서 미치지 못한 사람은 밀려나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조경남, 난중잡록(亂中雜錄) )고 적고 있다.
또 “근래 굶주린 백성이 사망하는 일이 더욱 많아졌는데 그 살점을 베어 먹고 단지 백골만이 성 밖에 쌓여있다.”(선조실록)고 한 지적은 당시 식량 사정이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내용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어 과장된 기록으로만 간주할 수 없다.
중국 명 장수 고양겸(顧養謙)은 “지금 너희 나라는 양식이 다 떨어져 인민이 서로 잡아먹고 있으니 또 무엇을 믿고 군사를 청하는가?”(『징비록』)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다음의 기록도 당시 정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기근이 극심하여 사람고기를 먹기에 이르렀지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괴이함을 알지 못한다.…비단 길바닥에 굶어죽은 사람을 시신을 베어 먹어 완전히 살이 붙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혹은 산사람을 도살하여 씹어 먹는다.
-선조실록 1594년 1월 17일-
이와 같이 7년간의 전쟁은 조선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백성들이 살기 위해 사람고기까지 먹을 정도였다 하니 과장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처절함이 극도로 달해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구가 10분의 1로 감소하고 토지가 5분의 1로 줄었으니 그 피해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에다가 포로 송환 문제와 명나라 군대의 횡포까지 겹쳐 조선 사회는 그야말로 재건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했다.
Ⅲ. 류성룡은 어떤 리더였나?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명신이자 퇴계의 학통을 이은 학자이다. 류성룡은 자가 이현(而見), 호가 서애(西厓)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유중영(柳仲郢)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여러 가지 일화를 많이 남겼으며 주변으로부터 큰 학자가 될 재목이라는 평가를 듣곤 했다.
1562년(명종 17) 21세 되던 해에 도산서당을 찾아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퇴계는 그에게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 장차 반드시 나라에 크게 쓰일 것이다.”고 크게 칭찬했다 한다. 1564년에 23세의 나이로 생원시와 진사시 두 시험에 모두 합격했고 25세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1570년(선조 3)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곧 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왕을 모셨다. 1590년에는 우의정에 올랐고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훈(光國勳) 3등에 녹훈되어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직전 좌의정으로 홍문관 대제학을 겸임하다가 전란이 발발하자 당시 51세의 나이로 병조판서를 겸임하고 군무를 총괄하는 도체찰사에 제수되었다.
류성룡은 유학자이면서 전쟁 전략가였다. 전쟁이라는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전략가로서 고군분투했다. 이순신․권율 등 유능한 명장을 발탁해 등용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진관체제의 복구를 주장했고 조선후기 오군영의 중추 군문인 훈련도감(訓鍊都監) 창설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산성을 비롯한 관방론, 궁시․조총․화포․화약 등 각종 무기와 방어시설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했다.
또 전쟁 앞에서 류성룡이 내세운 대원칙은 무엇보다도 임금을 비롯한 관리, 백성들의 총화단결이었다. 선조는 도성의 함락이 목전에 이르자 한양을 뒤로 한 채 북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1592년 5월 1일, 개성에 머물러있던 선조는 신하들에게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아라.”고 하였다. 선조는 괴로운 마음으로 난국타개의 방안을 신하들에게 허심탄회하게 듣고 싶었다.
이항복이 대답했다. “의주로 피난했다가 사태가 위급할 경우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서 명나라에 내부(內附)해야 합니다.” 윤두수는 “함경도는 군사가 강하고 함흥․경성과 같은 험준한 땅이 있으니 이를 믿고서 북방으로 피난가야 할 것입니다.”고 주장했다. 류성룡은 선조가 명으로 망명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했다.
“명나라에 내부(內附=중국에 붙는 것)하는 일은 안 될 말입니다. 임금께서 우리 땅을 단 한 걸음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합니다.…지금 동북의 여러 도가 건재하고 호남의 충성스런 의사들이 며칠 안에 벌떼처럼 많이 일어날 텐데 어찌 경솔히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는 일을 의논하겠습니까?”(『선조수정실록』1592년 5월 1일)
국가의 위기상황일수록 “군(君)-신(臣)-민(民)”이 하나로 뭉쳐야지, 국가의 리더가 신하와 백성을 버리고 일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피란 중에 영의정 이산해가 국사를 그르친 일로 탄핵되자 그 후임으로 류성룡은 영의정에 올랐다. 그 역시 반대당의 배척을 받아 그날 저녁에 해임되었다. 하지만 선조의 신임을 받아 아무런 직책 없이 임금의 피란 행차에 계속 동행하며 명나라 원군을 맞이해 반격 작전을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
한양이 수복되어 환도한 후 1593년 11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르고 경기․평안․황해․함경도의 4도 도체찰사를 겸임했다. 이때부터 서애는 전쟁이 끝나기까지 군무의 중책을 한 몸에 지고 외교․군문․민정 등에 전력했다. 그의 졸기(卒記)에서 당시 활약상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계사년에 수상으로서 홀로 서울과 지방의 중요 업무를 담당했다. 명나라 장수들의 문서가 주야로 폭주하고 여러 도의 공문이 이곳저곳에서 모여드는데도 류성룡은 흐르는 물처럼 민첩하고 빠르게 대처했다.
-선조수정실록 1607년 5월 1일-
전쟁이 끝나기 한 달 전에 류성룡은 다른 당[北人]의 공격을 받아 정계에서 물러나 1599년 57세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604년 다시 복직되어 부원군에 서용되었으나 사양했으며 그해 7월에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3년 뒤인 1607년(선조40) 5월 6일에 향년 66세로 풍산현 서미동 초당에서 졸했다. 조정에서는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고 영남 선비들은 병산서원에 향사해 그를 기렸다.
끼니를 잇기 어려울 만큼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한 류성룡은 많은 저서를 남겼다. 오늘날에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운암잡록(雲巖雜錄), 종천영모록(終天永慕錄), 신종록(愼終錄), 침자요결(鍼灸要訣), 관화록(觀化錄) 등이 전한다.
Ⅳ. 『징비록』의 구성
징비록은 류성룡이 영의정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저술한 임진왜란 회고록이다. 그렇다고 하여 단순히 지난 일을 기억하고자 저술한 회고록이 아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초기의 패인에 대해 “군정의 근본이라든가 장수를 뽑아 쓰는 요령, 또는 군사 조련 방법 등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겪은 환난을 교훈 삼아 앞으로 닥칠 지도 모르는 우환에 대비하고자 했다. 이런 측면에서 『징비록』은 참회록이자 교훈서인 것이다.
징비록은 7책 16권(卷)으로 이루어져있다. 징비록 본문 <상> <하> 2권, 근포집(芹曝集) 2권, 진사록(辰巳錄) 9권, 군문등록(軍門謄錄) 2권, 녹후잡기(錄後雜記)로 이루어져 있다.
간행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운양잡록(雲陽雜錄)에 따르면 1647년(인조25) 외손자 조수익(趙壽益)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할 당시에 간행했다고 한다. 징비록은 징비록 본문 <상> <하> 2권과 녹후잡기만으로 구성된 이본도 전하는데 이 또한 간행 연도가 불확실하다.
류성룡이 스스로 쓴 서문에 따르면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발생한 이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 중에 임진왜란 전의 일도 기록했는데 전란의 시초를 구명하기 위해서이다.…이에 한가로운 가운데 듣고 본 것을 대략 서술하니 임진년부터 무술년까지의 일이 얼마 가량 되고, 장계․소차(疏箚)․문이(文移)와 잡록을 그 뒤에 덧붙였다.”고 했다.
근포집은 1592년(선조 25)~1596년까지 선조에게 올린 軍國․政務에 관한 글[箚․啓辭]들을 모은 책이다. ‘근포’의 의미는 열자(列子) 「양주(楊朱)」편에 “옛날 송나라에 농부가 있어 늘 삼베옷을 입고서 겨울을 지내다가 봄철에 와서 따스한 햇볕을 등에 쬐니 마음이 무척 기뻐서 이 따스한 햇볕을 우리 임금에게 드리고 싶다고 하였다. 또 맛있는 미나리[芹]를 맛보고는 우리 임금에게 가져다 드리고 싶다”고 한 고사에서 나왔다
진사록은 1592년[임진]〜1593년[계사] 사이 류성룡이 종군하면서 선조에게 올린 장계(狀啓)를 모은 책이다. 군문등록은 1593〜1598년까지 영의정으로 4도 도체찰사로 재임할 당시 각도 관찰사․순찰사․병마절도사 등에게 내린 지시문을 정리한 책이다. 녹후잡기는 임진왜란 7년 동안 겪은 사실이나 전쟁에 관한 견해 및 논평 등을 에필로그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요컨대, 류성룡이 서문에서 밝힌 장계․소차는 근포집 진사록, 문이는 군문등록, 잡록은 녹후잡록을 말하며, 모두 징비록의 부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징비록은 엄밀한 의미에서 임진년(1592)〜무술년(1598)까지 유성론이 포화 한가운데서 몸소 겪은 일들을 가감 없이 기록한 본문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징비록이라 하면 7책 전부보다는 징비록 본문 <상> <하> 2권만 의미하기도 한다.
Ⅴ.『징비록』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나?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관한 종합보고서다. 제목이나 별다른 구분 없이 날자 순서대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직전의 일본 정세와 조선의 국방 태세를 시작으로 하여 임진왜란 발발과 이후의 전투 상황, 수군의 승전과 한산도 해전, 명나라 군의 참전, 전선(戰線)의 교착과 강화, 정유재란, 일본군의 철수와 수군의 최후 공격 등 핵심적인 내용을 담아냈다.
글쓰기는 수필 형식이나 내용은 체계적이고 종합적이어서 임진왜란 당시 전황은 물론 국정 및 민심의 동향까지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다 임진왜란 당시 관군의 붕괴와 조정의 분란, 민심 이반, 비참한 백성의 피난 생활 등 조선의 부끄러운 현실을 숨김없이 그대로 기록했다. 이 가운데에서 몇 가지 내용만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선조의 파천 장면
○ 마산역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밭 가운데 있다가 바라보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니 우린 누굴 믿고 살아야 합니까?”하였다.…초경에 동파역에 닿자 파주목사 허진과 장단부사 구효원이 임금께 드릴 음식을 간략하게 준비하였다. 그런데 호위군들이 하루 종일 굶주린 채로 온 탓에 부엌으로 마구 들어가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장차 임금께 드릴 음식마저 없어지자 허진과 구효연은 겁이 나 도망쳐 버렸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담력이 컸고 말 타기와 활쏘기에 유난히도 능했다. (중략) 이외에도 이순신이 세운 공은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추천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 만에 겨우 정읍 현감에 올랐을 뿐이었다. 당시 왜적의 태도가 날로 극성스러워지자 임금께서는 비변사에 명령을 내려 뛰어난 장수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나는 이순신을 천거해서 그는 수군절도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갑작스런 승진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 당시 이순신이 탄 배는 거북선이었다. 판자로 배위를 덮어 그 모습이 꼭 거북이 같았기 때문이다. 전투병과 노 젓는 인부들은 모두 안에서 활동했으며, 사방에는 화포를 싣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베를 짜는 북이 오락가락하듯 했다.
○ 견내량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갑옷을 입을 채 북을 베고 누어있던 이순신은 갑자기 일어나더니 장수들을 부르고 술을 내오게 하였다. “간교한 적들이라 꼭 달이 없는 날만 골라 공격해 왔는데, 달이 밝은 오늘도 기습해올 것 같으니 경계를 엄히 하라.”그런데 얼마 후 척후가 달려와 왜적의 기습을 알렸다. 우리 군사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 왜적은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이런 일을 겪고 난 장수들은 이순신을 귀신 장군이라 생각했다.
-일본군의 조총
○ 적군은 창고에서 곡식 섬을 꺼내 성처럼 나란히 늘어놓은 후 그 안에서 화살과 돌을 피하면서 조총을 수없이 쏘아댔다. 우리 군사는 즐비하게 늘어서서 겹겹이 있었으므로 맞으면 반드시 관통했고 간혹 총탄 한 발에 서너 명씩 쓰러지기도 하였다. 우리 군사는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
○ 신립은 탄금대 앞을 흐르는 두 강물 사이에 진을 쳤다. 이곳은 좌우에 논이 있고 풀도 우거져 말과 사람이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잠시 후 적군이 단월역으로부터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공격하는 모습이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과 같았다. 한 무리는 산을 따라 동쪽으로 들어오고 다른 한 패는 강을 따라 내려왔다. 총 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땅을 뒤흔들었다. 이 모습을 본 신립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말을 돌려 적진으로 돌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말머리를 강물 속으로 돌려 죽고 말았다.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대첩
○ 명나라 구원병이 서울을 향했다는 소식을 들은 권율은 한강을 건너와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이를 본 서울의 왜적들은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시작했다. 엄청난 왜적의 기에 눌린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려 했으나 성의 뒤는 강물이어서 달아날 곳도 없었다. 할 수 없게 된 병사들은 돌아와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되었다. 왜적들은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번갈아 공격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날이 저물자 왜적들은 결국 돌아가고 말았다. 권율은 길가에 흩어져 있는 왜적 시체를 가져다가 나뭇가지에 걸어놓아 그 동안 맺힌 분을 풀었다.
-1593년 4월 20일 서울 수복
○ 4월 20일이다. 서울이 수복되었다.…하루 전날 적병은 이미 성을 나갔다. 나도 명나라 군을 따라 입성했는데 성안의 백성을 보니 백에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조차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얼굴빛이 귀신같았다. 이때 날씨가 몹시 더워서 사람과 말의 시체가 여기저기 그대로 드러나 있어 썩은 냄새가 성안에 가득 찼고 길가는 사람들은 코를 막고 지나갔다.
이 밖에 징비록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국왕 선조를 비롯해 수많은 고위 관료와 하급 관리, 전쟁터에서 분전하는 장수와 장교․병사들, 그리고 민초 등 당대 인물의 됨됨이나 활약상을 실명(實名)으로 등장시켰다. 위에서 제시한 이순신도 한 사례에 속한다.
이 때문에 징비록은 후대에 임진왜란 때 활약하던 인물들의 공적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 자료로도 활용되었다. 예컨대, 1786년(정조10) 상주 선비 이국배(李國培) 등은 징비록에 근거해 사근 찰방 김종무(金宗武)가 이일(李鎰)의 군대에서 싸우다가 순절했으므로 증직(贈職)을 내려 달라고 요청해 뜻을 이루었다.
Ⅵ. 『징비록』이 던지는 질문
류성룡은 『징비록』의 첫머리를 국왕 성종과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대화로 시작한다. 성종은 임종을 앞둔 신숙주에게 물었다.“경은 나에게 남길 말이 있소?” 그러자 신숙주가 이렇게 대답했다. “앞으로도 일본과 친하게 지내도록 하십시오.”
신숙주는 오늘날 배신의 아이콘이지만 당대 최고의 핵심 브레인이었다. 1439년(세종 21)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첫발을 내딛은 신숙주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을 거쳐 성종까지 무려 여섯 임금을 모신 인물이다. 신숙주의 행보 중에서 여러 가지가 눈에 띄지만 본 주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사항이 1442년에 서장관이 되어 일본을 방문한 일이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신숙주는 그 때의 견문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지어 세종에게 올렸다. 해동제국이란 일본의 본토, 구주, 대마도, 이키도(壹岐島), 유구국(琉球國)를 총칭하는 말로 일본의 지형과 정세, 풍속을 비롯해 조선과 일본의 내왕 연혁 등을 기록해 일본과의 외교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 책은 신주숙가 살아 있을 때에 두 차례 추가로 내용이 덧붙여졌고, 1501년(연산 7)에도 내용이 추가되었다. 그 만큼 조선 정부에서 일본을 파악하는 교과서와도 같은 책이었다.
류성룡은 왜 신숙주를 언급하며 위의 대화를 첫 부분에 실었을까? 성종은 신숙주의 말을 가슴깊이 새겨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런데 사신이 대마도에 도착해서 풍토병에 걸리는 바람에 일본행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그 뒤로 조선 조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류성룡은 전쟁의 발단을 조선이 주변국 정세를 외면한 역사에서 찾은 것이다. 중국대륙에 대한 관심을 다른 주변국으로 조금만 확대했다면 달라질 상황이었다. 그래서 류성룡은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행여 현재에도 이 역사를 반복하고나 있지 않은지 말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정국의 최고책임자로서 전쟁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후세에 교훈이 되고자 하는 뜻에서 『징비록』을 남겼다. 그는 민족 수난기에 처한 백성의 고통과 항전 태세를 생생하게 기록했으며, 전쟁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던 애민의 마음을 담았다.
류성룡은 징비록 서문에서 “나 같은 불초한 사람이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중한 책임을 맡아 위태로운 시국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하건만 아직도 시골구석에서 생명을 연장하고 있으니 이 어찌 임금의 너그러우신 은전이 아니겠는가. 근심과 뛰는 가슴이 조금 진정된 후에 지난 일을 생각해보니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둘 곳을 알지 못하겠다.”고 술회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정국의 최고책임자로서 전쟁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후세에 교훈이 되고자 하는 뜻에서 징비록을 남겼다.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은 선조실록을 비롯해 각종 자료가 있으나 징비록 만큼 임진왜란의 실상을 종합적으로 전해주는 책이 드문 편이다. 징비록의 가치는 일본에도 알려져 1695년 일본 교토에서도 간행되었다. 이에 1712년(숙종 38) 조선에서는 징비록이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금하기도 하였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민족 수난기에 처한 민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던 저자의 애민 정신이 절절히 배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은이 자신이 당시 정국의 최고책임자로서 전쟁을 직접 경험하면서 백성의 고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현재 징비록은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2003). 징비록. 서울:서해문집.
유성룡 지음, 서애전서(西厓全書).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조정기(1990), 서애 류성룡의 국방정책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원승(1992), 류성룡의 군사분야 업적 재조명. 청문각.
임재해(1992), 안동하회마을. 서울:대원사.
한명기(1999),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서울: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