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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그 시절 그 유물 '다황'과 '성냥'
우리나라에 성냥이 들어온 것은 1880년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이 일본(日本)에서 가져온 것이 처음이었으나, 일반인에게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한일합방(韓日合邦) 직후 일제가 인천에 '조선인촌(朝鮮燐寸)'이라는 성냥공장을 세우고 대량 생산을 하면서부터였다. "인천에 성냥공장"이란 말은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일제(日帝)는 이후 수원, 군산, 부산 등 전국 각지에 성냥공장을 잇달아 설립했는데, 우리에게는 제조기술을 숨기고 일본인(日本人)들끼리만 시장을 독점, 성냥 한 통에 쌀 한 되라는 비싼 값을 받아 착취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인천(仁川)의 성냥공장 내력을 알아본다.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란 보고서에는 “1886년 인천 제물포에 외국인(外國人)들의 지휘 아래 성냥공장이 세워졌다. 그러나 얼마 안가 생산이 중단됐는데, 그 원인은 일본제(日本製) 성냥이 범람했기 때문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 기록만으로는 성냥공장의 정확한 위치, 상호 등을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이 인천(仁川)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성냥공장은 1917년 10월 인천(仁川) 동구 금곡동(당시 금곡리)에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다. 이 공장이 인천에 들어선 것은 성냥 재료로 압록강(鴨綠江) 오지에서 생산되는 목재를 배편으로 쉽게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 한 세기’라는 책자에서는 “당시 서울에는 성냥공장을 세울 만한 마땅한 부지(敷地)가 없었고, 전력(電力)도 인천보다 부족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당시의 금곡리에는 대형 변전소(變電所)가 자리 잡는 등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사정이 서울보다 나았고, 항구도시(港口都市)라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이나 대구(大邱) 등지에 세워진 성냥공장들이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문을 닫은 것도 이 같은 여건들이 뒷받침되지 않은 탓이다.
조선인촌주식회사는 신의주(新義州)에 부속 제재소(製材所)까지 두었고, 직원도 남자 200여명, 여자 300여명 등 모두 500여명에 달했다. 성냥제조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어서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을 많이 고용했는데, 이것이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야릇한 노래가 탄생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 무렵엔 기계화(機械化)가 이뤄지지 않아 성냥개비에 인(燐)을 붙이고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넣는 작업 등을 전부 수작업(手作業)으로 했는데, 이 일을 주로 당시 가난했던 어린 소녀들이 맡았다.
이 회사는 ‘패동(佩童)’, ‘우록표(羽鹿票)’, ‘쌍원표(雙猿票)’ 등의 성냥을 연간 7만상자(하루 2만 7,000갑) 정도를 생산했다. 국내 소비량의 20%에 달했다. 특히 성냥갑 제조를 위해 하청(下請)을 준 곳이 500여 가구에 달할 정도로 규모나 생산량이 대단했다. 당시 하청을 받은 가정에서는 온 식구가 성냥갑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성냥공장 여공(女工)들이 낮은 임금에 항의해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성냥개비 1만개를 붙여야 60전을 받고 하루 13시간 꼬박 서서 일해야 하는 등 노동환경이 지나치게 열악(劣惡)했기 때문이다.
1950∼60년대 당시 인천(仁川)의 성냥공장 아가씨들을 읊은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노래는 나이 50을 넘긴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봤을 그 시절의 국민가요(國民歌謠)와 같은 것이었다. 체면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술자리 등에서는 단골로 등장해 수준을 ‘끌어내리는 데’ 일조(一助)했고, 군대에서는 군가(軍歌)처럼 불리기도 한 노래였다.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한 달에 한 갑 두 갑 일 년에 열두 갑, 치마 밑에 감추고서" 라는 그야말로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가사(歌詞)의 노래를 부른 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낄낄대기도 했었다.
지난날 군대(軍隊)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불리어져 제대 후 “정식 군가인 줄 알았다.”고 회고하는 싱거운 사람까지 있는가 하면, 모 전방부대(前方部隊)에서는 사단장(師團長)이 사병들과 함께 손을 흔들며 문제의 ‘끝부분’과 후렴까지 힘차게 불렀다는 믿기지 않는 얘기도 있었다. 개사된 ‘성냥공장 아가씨’의 가사를 소개한다.
그러나 이 노래는 본래의 가사(歌詞)를 터무니없이 왜곡한 음담패설(淫談悖說)에 불과하다. 이 노래의 본래 노랫말은 가난하고 핍박받던 일제시대(日帝時代) 때 '성냥'에 얽힌 역사와 우리네의 애환(哀歡)이 고스란히 서려 있다. 이처럼 숭고한 노랫말에 음담패설을 섞은 장본인이 살아 있다면, 지금이라도 참회(慙悔)의 변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가수 민승아가 부른 '인천의 성냥공장' 본래의 가사를 소개한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는 전국에 성냥공장이 300여개에 이르렀고, 도매상(都賣商)은 서로 물건을 많이 받기 위해 성냥공장에 로비까지 하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에는 무려 2백만 달러 이상을 수출하기도 했으나, 1회용 라이터의 등장과 가스레인지의 보급 확대로 수요(需要)가 갈수록 줄어 최근에는 차별화된 고급제품(高級製品)으로 해외 수출에 주력하고 있는 상태이다. 해외시장에서는 현재 스웨덴, 일본에 이어 3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성냥은 한때 우리나라 공업(工業)의 대명사로 통할만큼 수요가 높은 인기 상품이었다. 집집마다 필수품(必需品)에 물이나 습기에 젖지 않게 중요한 위치에 고이 모셔두기까지도 했다. 아이들 손에 넘어가 멀쩡한 집을 홀라당 태워먹는 그런 사태를 예방하는 의미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 집들이 선물로 성냥과 양초를 사 들고 가던 기억이 생생한 것을 보면 그렇게 오래된 얘기도 아니다.
1960~70년대 성냥은 한 가정을 어둠과 헐벗음에서 구해 주던 구세주(救世主)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부뚜막 위에는 얌전한 고양이 대신 팔각 성냥 한통이 항상 올려져 있었고, 장작불을 피울 때나 남폿불, 석유곤로, 번개탄에 불을 붙일 때도 성냥은 요긴하게 쓰여졌다. 성냥이 존재하지 않을 당시 시집 온 며느리가 불씨를 꺼뜨려 시댁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는데, 그런걸 보면 성냥의 출현(出現)은 여성의 해방(解放)과 무관하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때문에 당시에는 성냥 한 개비라도 아끼려고 제 주머니에 성냥을 놔두고도 "담뱃불 좀 빌립시다" 하기가 일쑤였고, 비에 젖은 성냥도 볕에 말려 다시 쓰곤 했었다.
허름한 막걸리 집에 가면 애장품(愛贓品)인양 검정 고무줄에 성냥통이 매달려 있었고, 재물이 불처럼 활활 일어나라고 집들이 땐 빠뜨리지 않고 성냥을 선물로 들고 갔다. 불장난을 하다 옆집 초가집을 홀랑 태워 먹어 집에서 쫓겨난 친구도 있었고, 성냥따먹기를 잘해 살림에 보탬이 되는 친구도 있었다. 식당으로 다방(茶房)으로 성냥을 팔러 다니는 성냥팔이 친구도 있었고, 성냥을 입에 물고 질근질근 씹어 조폭(組暴) 두묵 폼을 잡는 친구도 있었다. 다방이나 휴게소(休憩所)에서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성냥쌓기 삼매경(三昧境)에 빠져든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성냥으로 귀를 파다 꼭지가 톡 부러져 귓구멍으로 들어가 난리가 났던 일도 있었다.
성냥은 버드나무를 잘게 쪼개서 거기에 '황'을 발라 말린 후, 그것을 성냥곽에 붙은 '황'에 그어서 마찰열(摩擦熱)로 불을 일으킨다. 어린 시절의 불이란 마법적(魔法的)인 즐거움을 주는 도구이기도 했다. 어른들 몰래 성냥알 몇 개와 성냥곽에서 뜯어낸 '황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개구리 뒷다리도 구워 먹고, 방아깨비도 구워 먹고, 썰매를 타다가 옷이 젖으면 논두렁에 불을 놓아 옷을 말리거나 시린 손을 덥히기도 했다.
오래 전에는 '딱성냥'이라는 것도 팔았는데, '딱성냥'이란 '황종이'가 없이도 성냥을 아무 곳이나 그어대면 '딱' 소리를 내며 불이 붙는 성냥을 말한다. 심지어는 사람의 이마에 그어도 불이 붙는 걸 마술(魔術)처럼 구경하며 마냥 입을 벌리던 기억이 난다. '딱성냥'을 직접 만들기도 했는데, 아마 지금도 가능하리라 본다. 성냥알에 침을 묻혀서 '황종이'에 살살 문질러 '황'의 유약이 녹아 성냥알에 붙게 한 뒤, 말리면 '딱성냥'이 된다. 옛적에는 성냥알을 모두 벗겨내서 수북이 종이에 모았다가 화약(火藥) 대신에 쓰기도 했는데, 주로 '딱총'이나 폭죽(爆竹) 대용으로 쓰다가 어른들에게 들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성냥은 아궁이에 불을 때는 시골에서는 필수품(必需品)이어서, 장에 나가면 으레 됫병들이 호롱불 기름과 더불어 누구나 사 들고 오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마실꾼들이 모여 노는 화투판에서 돈 대신 성냥알 따먹기 내기를 벌이기도 했다. 성냥알은 귀를 후비는 데에도 자주 쓰였고, 칼에 베이는 경우 성냥곽에 붙은 '황종이'를 떼어 상처에 붙여 지혈제(止血劑)로 쓰기도 했다. 1970년대, 머리 부스스한 청춘남녀(靑春男女)들이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하루를 보내던 다방(茶房)에서는 심심풀이로 손장난을 할 때도 성냥개비가 많이 쓰였다. 성냥개비로 일정한 도형(圖形)을 만들어가는 것부터, 하릴없이 성냥개피 목을 똑똑 부러뜨리는 일로 다방 마담을 속상하게 하여 눈총을 받기도 했었다.
그동안 국내에는 성냥의 제조시설(製造施設)이나 규모에 있어서 제법 유명 브랜드를 가진 비사표, 아리랑, UN 등 기업(企業)의 규모를 갖춘 큰 성냥공장들도 있었지만, 성냥공장이라고 굳이 말할 것도 없는 최소의 자본으로 변두리 빈 창고나 몇 평 안 되는 판잣집에서 가내수공업(家內手工業) 형태를 제조하는 업체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서 숙련(熟練)되지 않은 직공의 손으로 원시적(原始的)인 작업에 의해 만들어진 성냥개비들은 갑이 없이 시장에서 됫박으로 담아 팔기도 했다.
그리고 한때는 우표수집(郵票蒐集)과 같이 모던한 디자인과 특이한 지기구조와 형태로 인하여 다양하게 개발된 광고 판촉용(販促用) 성냥갑을 모으는 애호가(愛好家)들도 많았다. 판촉용 성냥갑은 개업을 알리는 다방이나 카페, 여관, 식당이 주류를 이루었고, 신제품(新製品)을 알리는 다양한 업체들도 가세하여 그 수요도 만만치 않았다. 일부 애연가(愛煙家)들은 '지퍼' 라이터나 특이한 형태의 라이터를 가지고 다녔으나, 일부 감각 있는 애연가들은 독특한 디자인으로 개발(開發)된 판촉용 성냥갑을 멋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성냥갑들은 광고(廣告) 판촉용으로 제작된 세련된 표면 디자인과 형태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판용(市販用)으로 판매되는 가정용 덕용포장으로 직사각형 서랍식이나 뚜껑식 사각형과 팔각통 형태였고, 포켓용 납작성냥 등이 주류(主流)를 이루었다. 통성냥의 경우 750개에서 800개비가 들어 있었고, 서랍식의 경우 500개비가 갑 속에 들어있었다. 이러한 성냥갑의 표면 디자인은 한결 같이 황색바탕에 적색과 흑색으로 그려진 획일적(劃一的)인 것들이었다.
또한 재질(材質)은 덕용 포장의 경우 두꺼운 판지에 80g 모조지로 오프셋인쇄(印刷)를 하여 싸 바르는 식으로 덧발랐으며 포켓용의 경우 약 70개들이 갑으로 얇게 켠 나무재질로 만들었다. 성냥의 인기가 높아지자 유사품(類似品)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기도 했었다. 당시에는 유사품에 대한 관리 감독(監督)이나 인식이 엄격하지 못한 때라 상호(商號)나 디자인 등 진품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였다.
예를 들어 ‘기린성냥’은 상호는 그대로인 채 기린의 모양만 바꾸거나 ‘아리랑 성냥’은 ‘쓰리랑 성냥’이라는 유사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한 ‘BM성냥’은 팔각 모양과 탑(塔) 디자인을 당시 최고 인기 성냥이었던 `UN성냥‘을 그대로 흉내 내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UN성냥은 다른 제품(製品)이 따라올 수 없었던 독특(獨特)한 아이디어로 재미를 본 제품이기도 하다. 바로 성냥곽 안쪽에 고야의 명화(名畵)인 ‘나체의 마야’를 넣었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 25원하던 UN성냥은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명화에 편승한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대법원(大法院)은 ‘세계적인 명화라 하더라도 상용(商用)으로 복사해 팔면 음화’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결국 UN성냥은 음화제조판매(淫畵製造販賣)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문제는 이 사건으로 UN성냥이 오히려 더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 재판은 국내 최초의 음란물(淫亂物) 소송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온갖 유사품(類似品)이 판치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들 성냥은 라이터의 등장과 함께 사양산업(斜陽産業)으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제 전국에는 단 하나의 성냥공장인 ‘성광산업’만이 남아 ‘성냥의 추억’을 전해줄 뿐이다. 하준철이 쓴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를 음미하고 넘어간다.
(작자는 부산에서 만든 UN성냥을 인천에서 만든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성냥은 '다황'시대를 거쳐 곽으로 만들어진 발화도구(發火道具)다. 최초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곽성냥'은 ‘조양성냥공업주식회사’에서 조양성냥이다. 대량생산(大量生産)된 여러 개의 성냥개비들을 담아서 판매하던 성냥으로 성냥갑은 두꺼운 종이로 만든 직육면체(直六面體)의 곽으로, 종이갑의 위쪽 면을 뚜껑으로 만들어 덮었다. 성냥통의 측면에는 까끌까끌한 종이포를 붙였는데, 거기에 성냥개비를 대고 그리면 불이 일어난다. 뚜껑에는 사진에서와 같이 태양(太陽)과 태양광선을 그린 바탕에 하늘을 나는 흰머리 독수리의 그림을 그려 놓았고, 독수리 그림 좌우로 ‘조양’이라는 제품명을 적었다. 뚜껑 위쪽에는 영문(英文)으로 ‘SAFETY MATCHES’라고 적어 놓았었고, 아래에는 ‘조양성냥공업주식회사’라는 글귀를 적어 제조사(製造社)를 밝혔다. 조양 곽성냥은 가로 4.5 cm / 세로 3.5 cm / 두께 1.5 cm였다.
이제 고야의 명화인 ‘나체의 마야’를 넣어 불티나게 팔렸던 우리나라 성냥의 대명사였던 UN성냥도 찾기가 쉽지 않다. 성냥 소비가 급격히 줄어든 데다 값싼 중국산(中國産) 성냥과 라이터가 마구 수입돼 사양화(斜陽化)의 길을 걷고 있다. 유엔성냥은 생산시설(生産施設)을 파키스탄에 판 후 수입포장업체로 업종을 전환했다. 이제 유엔성냥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하에서는 그동안 줄을 이어 사라져버린 우리나라 성냥들을 생산연대(生産年代)별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지난 1940-50년대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서민가정의 경우 버드나무를 얇게 깎아내어 한쪽 끝에 화롯불에 녹인 유황(硫黃)을 찍어 성냥개비 머리 비슷하게 만든 '다황'을 사용했다. '다황'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사용했던 "석류황(石硫黃)"과 같이 지금처럼 인화성(燐火性) 물질과의 마찰에 의해 불이 붙는 것이 아니라, 화로(火爐) 속이나 아궁이 속 불씨에 갖다 대야 불이 붙는 것이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지금은 만드는 방법을 거의 잊어버렸지만, 재미있게 만들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많은 이들이 '다황'이 '성냥'의 경상도(慶尙道) 사투리라고 정의하기도 하나, 엄격히 말해 서로 다른 것이다. 물론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도 모두들 '성냥'을 '다황'이라고 했었다.
생울타리에 자생하는 버드나무를 잘라 '번철낫'으로 껍질을 벗겨 낸 후 새하얀 속살이 드러나면, 잘 드는 낫으로 종이쪽 같이 얇게 겹겹으로 벗겨 낸다. 얇게 벗겨내야 잘 마르고 불이 잘 붓기 때문이다. 껍질을 벗겨 낸 후에는 마당에 멍석을 펴고 괄괄하게 말린 다음, 유황(硫黃) 덩어리를 담은 허름한 '종지'나 깨진 '옹찰이'를 화로에 얹어 유황을 녹인다.
유황(硫黃)이 화롯불에 노랗게 용해(溶解)되면 말린 버드나무 껍질 끝에 녹인 유황을 찍으면 성냥대가리처럼 동그랗게 결정(結晶)이 된다. 이렇게 만든 '다황'은 할아버지 방과 안방에 보관(保管)해 두고 아침마다 화로 불씨에 갖다 대어 밥솥과 쇠죽솥 아궁이에 불을 붙였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담뱃불을 댕기는데 사용하셨다.
필자의 경우 1940년대 후반까지 할아버지 방에서 할아버지가 녹여주신 유황(硫黃)에 버드나무껍질을 찍어 동그란 대가리를 만드는 '다황'만들기를 했었다. '다황'을 만드는 것이 너무나 재미가 있어 할아버지께 보채기도 했던 것 같으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곧이어 6.25가 터지면서 시골에까지 성냥이 대량(大量)으로 보급되자 짧은 추억이 되고 말았다. '다황'의 그림이 없어 게재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다황'이라는 말 한 토막만 들어간 타령조의 시(詩) 한수를 소개한다.
성냥은 우리나라가 구한말(舊韓末)에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서구의 여러 신식 문물을 들여왔고, 특히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들어서서는 부싯돌을 대신하여 등잔불을 밝히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중요한 요소(要素)로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초로 만들어진 성냥공장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인천(仁川)의 조선성냥으로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국권이 피탈(被奪)되는 1910년경에 설립되었으며, 성냥이 신흥(新興) 부유층들 사이에서 인기를 크게 얻자 군산. 수원. 영등포. 대구. 마산. 부산 등지에 군소(群小) 성냥공장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인(朝鮮人)들에게는 공장 설치를 일체 허가(許可)하지 않았고, 설령 성냥공장에 취직을 시켜도 기술을 전수(專修)해 주지 않고, 잔심부름만 시켰다. 1945년 8·15 광복(光復)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자본(資本)을 투자하여 인천에 대한성냥공업사를 세운 것을 시발(始發)로 전국에 300여개의 성냥 공장이 설립되어 월간 400만포의 성냥을 생산 공급(供給)하게 되었으며, 6.25전쟁 후에는 1970년대까지의 산업화시기(産業化時期)를 거치면서 자동화시설에 의한 생산과 업체간 합병(合倂) 등으로 성냥제조업체 수가 20여개소로 감소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성냥산업이 전성기(全盛期)를 누렸던 것은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의 일이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성냥메이커로써 큰 족적(足跡)을 남겼던 업체로는 유엔화학공업사(UN표 성냥)-부산, 조양성냥(쓰리랑 성냥)-충남 천안, 조일성냥(아리랑성냥)-충남 천안, 남선성냥공업(비사표 성냥)-충남 논산, 영화인촌산업사(전화표 성냥)-경북 영주, 성광성냥공업사(향로표 성냥)-경북 의성, 경남산업공사(기린 성냥)-경남 김해 등이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2000년대 초에 모조리 자취를 감추고, 지금 남아 있는 성냥전문 제조업체는 성광성냥공업사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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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료 잘 보고 갑니다
수짱님 잘 계시죠 더위에 건강 하세요.
성냥 UN이 히트 상품이었는데요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그때 성냥 다화이라 했지요.건강 하시고 해피하세요.
칼빈님 안녕하세요
성냥의 대한 유용한 정보 감사 합니다
행복한 저녁 되세요 ^*^
성냥의 추억이 많지요.
종류별로 취미로 모아둔것이 어느날 보니 박스로 하나 있더라구요.
시골 갔다 주었더니 요사이 성냥 구하기가 힘드는데 이런 선물이 하면서
선반위에 고이 모셔 두더군요.건강 하시고 즐거운 한주 되세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무더위속 늘 건강하세요
더위에 건강 하시죠.관리 잘 하시고 즐거운 한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