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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양의 중심부 지도: 가운데 오른쪽으로 심양고궁이 보인다. |
ⓒ 이상기 |
심양의 구도심에 해당하는 심하구(沈河區)에 들어서자 바로 심양 고궁이 나온다. 심양 고궁은 1625년 태조 누르하치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인 태종 홍타시(皇太極, 1626∼1643)에 의해 완성되었다. 홍타시는 1636년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연호도 천총(天聰)에서 숭덕(崇德)으로 바꿨다. 청조(淸朝)의 발상지인 이곳 심양 고궁은 3대 순치황제 복림(福臨)이 1644년 베이징의 자금성에 입성할 때까지 청나라의 왕도 역할을 했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조부로부터 손자까지의 가계도>
1대: 기오창까(覺昌安) 2대: 리둔(禮敦) 어르연(額爾允) 계감(界堪) 탁시(塔克世) 탑찰편고(塔察篇古) 3대: 누르하치(努爾哈赤: 태조), 무르하치(穆爾哈赤), 쑤르하치(舒爾哈赤), 야르하치(雅爾哈赤), 빠야라(巴雅喇) 4대: 주잉(猪英, 1), 다이산(代善, 2), 탕구다이(4), 몽골대(5), 홍타시(皇太極: 태종, 8), 아지거(阿濟格, 12), 다르곤(多爾袞, 14), 둬이(多錫, 15) 5대: 하오거(豪格, 1), 복림(福臨: 세조, 9) |
6만㎡에 이르는 심양 고궁에는 114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태조인 누르하치 시기에 대정전(大政殿)과 좌우 왕정(王亭), 8기군의 군영인 8개의 기정(旗亭)이 세워졌다. 태종인 홍타시 시기에 대청문(大淸門), 숭정전(崇政殿), 봉황루(鳳凰樓), 청령궁(淸寧宮) 등 궁전의 중심 건물이 지어지면서 황궁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 심양고궁 평면도 |
ⓒ 이상기 |
고궁 관람은 대개 대청문에서 시작된다. 대청문은 고궁의 정문이다. 위에서 아래로 쓰인 한자와 만주 글자가 청(淸)이라는 큰 나라로 들어가는 문임을 알린다. 파란 바탕에 금빛의 글씨가 선명하다. 그런데 글씨체가 단정한 편이지 웅혼하고 호쾌하지는 않다. 문을 들어가면 앞으로 고궁의 정전인 숭정전이 보인다.
우리는 대청문 오른쪽에 있는 태묘(太廟)에 먼저 들른다. 남향하고 있는 태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동배전과 서배전이 자리하고 있다. 태묘에는 누르하치 초상이 있고, 동서 양배전에는 신위가 모셔져 있으며, 그 앞 제기에 음식들이 진설되어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우리 조상들이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이곳 태묘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갔다고 전해진다.
▲ 8기정 한가운데서 바라 본 대정전의 모습. |
ⓒ 이상기 |
다시 숭정전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고궁의 동쪽 지역 대정전과 시왕정(十王亭)이 나온다. 이곳은 정(政)과 군(軍)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지역으로 누르하치 시절의 정치유산이자 건축이다. 북쪽 한가운데 대정전이 위치하고 그 앞으로 좌우에 좌익왕정과 우익왕정이 위치한다. 그리고 그 앞으로 동서 양쪽에 각각 4개씩 기정(旗亭)이 있어 8기군을 형성한다.
누르하치는 1601년 황(黃), 홍(紅), 백(白), 남(藍)의 네 가지 깃발로 이루어진 기병군을 편성하고 자신의 친족을 이들 기병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1616년에는 이들 네 개의 기병 군을 각각 정(正)과 양(鑲)으로 나눠 8기군으로 확대 개편한다. 정군은 기존의 황기, 홍기, 백기, 남기를 그대로 사용해 정황기, 정홍기, 정백기, 정남기가 되고, 양군은 황기, 백기, 남기에 홍색으로 가장자리를 둘러 양황기, 양백기, 양남기를 만들고, 홍기에 흰색 선을 둘러 양홍기를 만들었다.
이들 8개의 기정 중 우리는 정백기정과 양황기정을 자세히 살펴본다. 기정 안에는 화살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15개의 화살이 화살표 방향에 꽂혀 있는데 그 모양이 다 다르다.
우리나라 중요 무형문화재 47호인 궁시장 보유자 중 시장(矢匠 : 화살의 장인)인 유영기(1936년생)씨에 의하면 화살 하나 만드는데 130번의 손이 가야고 한다. 화살촉, 화살대, 손잡이 부분이 각각 다른 것을 보니 그 정도의 정성은 들여야 할 것 같다. 특히 화살촉과 손잡이 부분의 다양한 모습에서 화살의 예술성을 발견할 수 있다.
▲ 백기정 안에 전시된 15종의 화살. |
ⓒ 이상기 |
사실 만주의 여진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청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활솜씨였다. 특히 누르하치 전기를 보면 그는 활의 명수 즉 명궁(名弓)으로 알려졌다. 전시된 화살 중 위에서 다섯 번째 '오치어차전(五齒魚叉箭)과 여덟 번째' 황제수시토차전(皇帝隨侍兎叉箭)이 특히 예리하고 멋있어 보인다.
그 옆의 기정에서는 황제의 문장인 5개 발가락을 가진 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파란 바탕에 은빛으로 수를 놓았는데 용의 모습이 정말 품위 있고 살아있는 듯하다. 하늘색 눈꺼풀과 이빨, 빨간색으로 표현된 입안과 배가 정말 잘 어울린다. 당시 바느질이나 뜨개 또는 매듭 장인들의 수준을 가늠케 해준다.
그 옆에는 황기군의 제복이 마네킹에 입혀져 있고, 그 옆으로 황기군과 홍기군의 깃발이 세워져 있다. 과거 청나라 시대처럼 기정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이 두 군데 기정에서 8기군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기정을 보고 나서 우리는 동편의 중심 건물인 대정전으로 간다. 6각형의 건물로 건물 안에는 누르하치가 통치했던 용상(龍床)이 있다. 용상의 뒤 병풍 모양의 벽에는 역시 용들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 황제와 황후 복장으로 고궁을 거니는 젊은이 한쌍. |
ⓒ 이상기 |
이곳을 보고 나서 중심부 지역에 있는 황제의 침소인 청령궁으로 가려다 청나라 때 복장을 한 젊은이 한 쌍을 만날 수 있었다. 노란색의 곤룡포에 깃털 달린 모자를 쓴 청년은 황제이고, 붉은색의 호복(胡服)에 꽃장식이 들어있는 화관을 쓴 처녀는 황후이다. 이들이 자연스럽게 꽃을 만지기도 하고 거닐기도 하면서 옛날의 모습을 정말 잘 연출한다. 어디를 가나 이런 가외의 소득이 있어 여행은 더욱 즐겁다.
▲ 순치제 복림이 어릴 때 타던 그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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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보고 나서 나는 후원을 돌아 과거 황제와 황후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청령궁과 봉황루로 간다. 청령궁이 황후의 거처라면 좌우에 있는 네 개의 작은 궁은 후궁들의 거처이다. 이들 작은 궁 중 영복궁(永福宮)과 관저궁(關雎宮)이 유명하다.
영복궁은 나중에 순치제가 된 복림이 태어난 곳으로 효장문황후의 거처였다. 이곳에는 지금도 순치제가 타던 그네가 걸려 있고, 황후가 잠을 자던 침소도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 3층 누각인 봉황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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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궁 앞에 있는 봉황루는 일종의 연회 장소로 3층으로 된 누각 형태의 건물이다. 1층의 남쪽으로 '자기동래(紫氣東來)'라는 현판이 있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북쪽에 있다. 자기동래는 보랏빛의 상서로운 기운이 동쪽으로부터 온다는 뜻으로 여기서 동쪽은 만주족의 원초적 고향인 영릉진을 의미한다.
▲ 숭정전 안의 화려한 용상(龍床)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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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봉황루에서 계단을 내려가 남쪽으로 가면 고궁의 정전인 숭정전이 나온다. 이곳의 용상은 대정전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다. 용상을 덮는 지붕이 2층으로 되어 있고 그 앞으로 양쪽에 두 마리의 용이 기둥을 감싸고 황제를 지키고 있다. 용상 위 지붕에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네 글자가 있어 황제에게 정치의 큰 틀을 일러주고 있다. 숭정전 앞에는 일종의 저울인 가량(嘉量)과 해시계인 일귀(日晷)가 놓여 있다.
숭정전을 보고 나서 후대 황제들에 의해 지어진 서편 건물로 간다. 이중 대표적인 건물이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보관하던 문소각(文溯閣)이다. 지금 이곳에는 책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삼사백년의 역사 속에서 훼손되기도 하고 옮겨지기도 하면서 박물관이나 도서관 어딘가에 보관되고 있을 테니까. 문소각에서는 '사해연회(四海沿迴)’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온 세상은 순리대로 흘러간다'는 의미로 보면 될까?
▲ 콩깍지 비슷한 열매를 달고 있는 키가 5~6m쯤 되는 나무. |
ⓒ 이상기 |
문소각을 보고 나서는 조금은 자유롭게 이 건물 저 건물, 이 나무 저 나무, 이 꽃 저 꽃을 보면서 왔다 갔다 한다. 심양 고궁에는 전체적으로 식물이나 정원이 부족하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면에서는 바람직하지만 지나치게 건물이 많아 상당히 답답하다. 조경이라는 측면에서는 별로 볼품이 없다.
인상적인 식물로는 복사꽃 모양의 꽃을 피운 키 작은 나무와 콩깍지 비슷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키가 5∼6m쯤 되어 보이는 나무이다.
▲ 곽말약이 쓴 심양고궁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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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西所) 쯤을 나오다 보니 건물의 한쪽에서는 러닝셔츠 바람의 군인들이 약간은 편한 자세로 지휘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고궁과 군인 별로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다. 하긴 우리도 과거 경복궁 안에 군인이 주둔하고 있었으니까 할 말이 없다.
고궁을 어느 정도 다 보고 나오다 보니 곽말약(郭沫若)이 쓴 심양 고궁이라는 현판이 눈에 띈다. 전통적인 서체는 아니지만 개성이 뚜렷한 아주 잘 쓴 글씨다. 곽말약, 그는 중국과 일본,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서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처신하면서 현대사를 살아간 정치가이자 시인이다.
심양 고궁이 여름 오후의 따가운 햇볕을 받아 더욱 빛난다. 고구려의 옛 땅에 세워진 심양 고궁에서 고구려의 전통을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물건과 기운 어딘가에서 우리 민족과의 연결 고리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