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 7.7) 말씀/ 고린도 후서 6:9-10 존재가 부요한 사람이 되라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는 요즘 소유냐 존재냐 에이프롬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좀 어렵기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가, 어떻게하면 풍족하고 질적인 삶을 살 수 있는가 방향을 제시하는 아주 좋은 책입니다. 소유냐 존재냐 이는 선택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존재하면서 많은 것을 소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유 존재, 어떤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소유지향적이냐 존재지향적이냐가 삶의 태도와 방향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할 것은 소유지향적일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가 하는 며, 성경과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존재 지향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천국도 소유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런데 그 천국을 누가 들어갑니까? 예수의 피로 씻음고 믿는 존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살고있는 이 땅은 소유를 바탕으로하고 있기에 소유에 민감합니다. 소유를 떠나서 우리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존재마저도 소유없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과거로 돌아가보면 인간이 삶은 단순하고 그렇게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머물 집이 있고 따스한 밥을 먹고 살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기본 소유가 없는 사람들은 불행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소원은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배고프지 않게 살아가기를 바랬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모든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꿈고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제로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자동차도 한 집에 식구대로 소유하고, 마트에 가서 카트에 물건들을 한가득 실고 나올 수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세게 여행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행복해졌는가? 에리히프롬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인간의 소유욕이 점점 늘어날수록 탐욕으로 치닿고, 그것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이기적인 되고, 배타적이 되고, 권력을 휘두르며 남의 것을 빼앗기까지 하며 불행도 가증되었다고 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가 제시하는 것이 존재 문제입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소유욕만이 아니라 존재를 키우고 확장시키며 성장시킨다면 얼마든지 소유문제를 띄어넘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신약성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소유욕을 다루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는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 광야의 만나 훈련, 안식일의 이미 등등... 이미 소유에서 오는 탐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존재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소유냐 존재냐 문제는 사실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시고 에덴 동산을 창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서 각종 과실과 강과 보석과 생명나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소유로 주시고 자유로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소유와 행복은 이렇게 처음부터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많은 행복의 조건들인 소유를 누리지 못하고 쫒겨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축복을 누릴만한 성숙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의 유일한 계명도 지키지 못하고, 죄인이 되었고, 죽을 운명의 존재가 되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소유란 행복의 조건이지만 잘못 다루게 되면 탐욕에 빠져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것을 방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온 한 율법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계명을 지키라.” “어릴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조 나를 따르라.“ 그는 부자인고로 고민하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부자로서 소유욕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또 한 부자의 예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쌓아둘 곳 없을정도로 많은 곡식을 거두었습니다. 흡족해 하며 스스로 이렇게 자족하였습니다. “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 때 하나님이 말슴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18-21) 그러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소유만 힘을 썼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천하를 얻고 자기 영혼을 잃는다면 어리석은 자라고 하십니다. 존재가 되지 못한다면 소유를 많이 한들 무슨 이미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소유와 존재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가 추구하고 따라야 할지 모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먹고, 자고, 입고 누려야할 소유가 필요하셨습니다. 이것을 안 사단으로부터 천국 복음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소유와 존재의 문제에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단은 40일 굶주린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단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떡 문제로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영적 존재임을 말씀하심으로 사단의 첫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시험 역시도 예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말씀하심으로 다 물리치셨습니다. 사단은 소유가 인간의 필요를 채워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말하지만 예수님은 성경을 근거로 먼저 존재가 바로 서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 중세의 수도자 토마스 아켐피스는 수도사들을 위해 생활의 지침서로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썼습니다. 나중에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신구교를 막론하고 경건생활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예수님처럼 말씀 순종하고,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 그분의 존재를 배우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책을 쓴 것은 그렇게 주님을 닮을 때 아름답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한 그 행복을 나누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후에 언제나 친히 삶의 본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상의 모든 삶에서 우리와 유리되신 적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삶으로 사시며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 예수님의 존재를 배우고 예수님의 삶의 본을 따르며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소유라는 것이 없습니다. 외적인 환경개선이나 경제적인 넉넉함, 명예 권력 세상적 높은 지위 그런 것과는 무관합니다. 그런것을 기대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주님 존재 자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주님 존재가 어떤 분이신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사 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신약성경 마태 8:19-20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누가 9:58) 요한은 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 1:14). 이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은 마른 땅에 나온 줄기 같고 풍채도 흠모할만한 것이 없으셨습니다. 멸시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머리 둘 곳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차도, 집도 옷도 여분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가난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따르면 우리도 멸시를 받을 수 있고, 월급도 제대로 못 받을 수 있습니다. 평생 일용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래도 따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 보장도 없이 모든 것, 즉 소유를 다 버리고 이 예수님의 존재를 따랐습니다. 2000년이 넘도록 온 인류는 이 예수님을 게속 흠모하며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도 예수님은 따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처럼 그 존재가 부요하고 멋진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면 흠모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충만하시며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겉모양은 보잘 것 없는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모든 지혜가 그 안에 있습니다. 사실은 부귀도 그 존재 속에 있습니다. 온 세상이 다 주의 것입니다. 필요할 때는 우리들에게 우주의 창고를 열어 다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께 가난이란 운명이 없습니다. 소유에 대한 욕심이 필요 없고, 비교의식이라던가 열등감이란 것도 필요없습니다. 권세자들 앞에 비굴함이나 미약함을 느끼시는 것도 없습니다. 존재가 부요하고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있고(골로새서 2:9), 생명이 있고, 온 우주가 그 분 존재 안에서 존재하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생사 화복 이십니다(요한 14:6). 우리가 이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면 무엇이 부족할 것이 있겠습니까? 왜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고 탐욕에 빠지고, 투기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렇게 살아갑니까? 존재가 아주 가난하고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텅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애쓰는 것은 스펙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입니다. 밍크털 옷이나 루비똥이나, 메이커, 학력 오붜하면 위조까지 합니다. 그리고 좋은 차. 큰 집, 많은 땅. 돈. 이런 것들을 많이 소유하였다고 사람이 달라집니까? 조폭이 벤츠 탄다고 성자가 되나요? 철학자 니체는 껍데기가 아닌 맴 몸으로 승부하라” “향상심을 가지고 너 자신의 존재를 성숙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라”고 합니다. 껍데기의 치장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이루는 업적 사역도 어떤 일도 내가 아닙니다. 계급장 떼고 벌거벗은 내가 나입니다. 내 존재가 부요해야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유에서 자유하고, 아무것 없어도 우주 속에 홀로라도 당당히 살아갈 수 있고, 그리고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소유도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소유가 없어도 잘 살 수 있고, 또 소유가 주어져도 소유에 묶이지 않고 잘 누릴 수 있습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일천번제를 드리고 나서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무엇이든지 소원을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족한가운데 왕이 되었으니 백성을 다스릴 지혜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크게 감동을 받으시고 지헤를 주실뿐 아니라 구하지 않은 황금도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은 보화를 가지고그의 지혜를 들으려고 몰려왔습니다. 역사 속에 가장 황금을 많이 소유한 왕이 되었습니다. 욥의 경우 사단의 고소를 받고 자녀들 소유한 재산 심지어 자신의 육체마져 하루 아침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정금처럼 연단받고 난 후에는 하나님은 모년에 더 많은 소유로 그를 축복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42장) 존재가 준비되면 이렇게 하나님도 소유로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삭도 백배나 축복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알렉산더 대왕과 그가 존경했던 철학자 디오기네스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이 왜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부러워하였을까요? 한번은 알렉산더가 인도 정벌을 하러 가는 길에 디오게네스를 찾았습니다. “어디로 가냐”고 디오게네스가 물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인도 정벌을하러 간다고 하자 그 후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고 또 물었습니다. 편히 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디오게네스는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편히 쉬고 있네” 하고대답하였습니다. 그가 통 속에서도 그렇게 편히 쉴 수 있었던 것은 온 마음과 생각, 온 존재가 지적 지혜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는 세계를 제패했고 많은 것을 소유하였다고 하지만 껍데기 뿐이었으니 디오게네스라는 존재를 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디오게네스는 그는 통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소유하고 지적 충만 속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렉산더는 내가 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교훈이 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은 소유를 띄어넘어 존재가 부요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소유는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나중에는 옷을 벗으면 빈껍데기만 남습니다. 그러나 존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벗을수록 빛납니다. 사람을 감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스펙이나 소유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벌거벗은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수의 한 벌을 남기셨는데 오히려 수위를 벗어버리고 더 빛나는 부활의 존재로 일어나서 온 일류의 주가 되셨습니다. 아멘! 이 세상에 예수님처럼 아름답고 예수님처럼 세상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존재를 본 받는 삶을 산다면 저와 여러분들도 아름답고 멋진 인생을 살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점점 소유를 놓게되고 존재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제가 젊은 날 가장 은혜를 받고 붙든 말씀이 고린도 후서 6:9-10절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 스스로가 예수님을 본받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어떻게 무명한데 유명하고, 징계를 받아도 죽지 않고, 근신하는 것 같은데 항상 기뻐하고,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디고, 가난한데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저는 본래 원론적인 사람, 정치로는 부수적인 사람, 멋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고 따르는 우리 주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분 이신지 생각하며 그 분 존재를 다시 바라보면서 삶이 달라졌습니다. 겉으로 보면 보기에 흠모할만한 것이 없지만 자기 생명까지 다 내어주시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시고 가장 사랑받으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도 예수님 존재의 아름다우심과 부요함을 닮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과 자주 멋지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엘리 후배 간호사 서달님 자매는 오래전 유방암 수술df 받으면서 기도와 말씀으로 도왔던 자매입니다. 큐티와 카스를 계속 받고 있는데 카스를 받으면 머저 엘리에게 이야기해주며 아빠처럼 멋잇게 사는 사람을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존재가 부요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소유도 할 수 있다면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소유나 스펙에 머물지 않고 존재가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존재가 넉넉한 사람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모르고, 온 세상에 자유한 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부요케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무것 없어도 모든 것을 가진 자, 가난해도 많은 사람을 부요케하는 자 그런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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