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에서 나타난 백제를 세운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었다.
주몽은 졸본에 와서 결혼을 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였고 작은아들은 온조였다. 그런데 주몽에게는 부여에 두고 온 부인과 아들 유리가 있었다.
유리도 아버지를 닮아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
하루는 유리가 물동이를 이고 가는 어떤 아주머니를 보고 활로 물동이를 쏘아서 구멍을 뚫었다.
그 여자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애비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버릇없이 남의 물동이를 깨다니." 유리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면서 화살에 진흙덩이를 꽂아 다시 물동이를 쏘아 구멍을 메웠다.
그러자 물이 더이상 흐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유리는 조용히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네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이 되는 분으로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셨단다. 네 아버지가 떠날때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네가 자라서 아버지를 찾아오려거든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의 소나무에 감추어둔 물건이 있으니 그것을 찾아 가지고 오라고. 그러면 내 자식인 줄 알겠노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일러준 말을 듣고 유리는 그 날부터 산골짜기마다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며칠이 가도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위의 소나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만 지쳐버린 유리가 집에서 쉬고 있는데 기둥에서 이상한 슬픈 소리가 났다.
그래서 그 기둥을 가만히 보니 소나무였고 일곱 모서리로 되어 있었다.
또 일곱 모가 난 주춧돌이 기둥을 받치고 있었다.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란 일곱 모가난 기둥과 주춧돌이고 돌 위 소나무란 기둥이 아닐 까?' 정신이 번쩍든 유리가 기둥을 살펴보니 과연 기둥에 구멍이 있었다.
조심조심 손을 넣어 보니 무언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부러진 칼 한 조각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유리는 크게 기뻐하며 곧 행장을 차려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드디어 고구려에 도착한 유리는 왕에게 나아가 가지고 온것을 공손히 받들어 올렸다.
주몽왕이 가지고 있던 칼 한 조각을 꺼내 유리가 바친 것과 맞추어 보니, 칼에서 피가 나면서 하나로 이어져 온전한 칼이 되었다.
주몽은 유리가 자신의 자식임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태자로 삼았다.
남으로 내려간 비류와 온조 형제는 부여에서 나타난 유리가 태자가 되자 자신들이 유리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고구려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자 신하들 가운데서도 오간, 마려 등 열명이 이들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이들이 함께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나자 많은 백성들도 뒤를 따랐다.
마침내 한산 땅에 이른 이들 일행은 부아악(지금 서울의 북한산)에 올라가 자리잡고 살만한곳을 두루 살펴보았다.
비류는 서쪽으로 보이는 바닷가에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그를 말리며 간하였다.
"여기서 살펴보니 이 한수(한강) 남쪽 땅은 북쪽에 강이 있고 동쪽에는 높은 산이 감싸고 있습니다. 또 남으로 기름진 들이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처럼 살기 좋은 곳은 얻기 어려울 것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만류를 듣지 않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서쪽 미추홀(인천)로 갔다. 온조는 그 땅에 도읍을 정하여 하남 위례성이라 하고 열 명의 신하들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워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그런데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사람이 살기에 그리 좋지 못한 곳이었다.
결국 다시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벌써 도읍이 자리가 잡혔고 백성들도 별어려움 없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비류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다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비류를 따랐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백성들이 많아지고 나라의 세력도 커지자 이름을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그리고 그 조상이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다.
( 설화이기 때문에 약간씩 이야기가 달리 기술이 되기도 하는데, 비류가 순순히 온조에게 와서 받아줄 것을 요청해서 함께 살았다는 식으로 기술된 것도 있다. 어찌되었든 이 설화에서 알수 있는 사실은 온조가 비류세력보다 강했다는 것과 이 백제국을 세운 중심이 바로 북으로부터 내려온 북방 민족이라는 것이다. 고구려와는 한가족이랄수도 있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비류와 온조가 피해서 남하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2. 고구려의 건국설화
금와왕 설화
고구려건국설화를 이야기하자면 부여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부여의 임금 해부루라는 태평시대를 누렸으나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 되면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한해는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임금이 탄 말이 돌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임금이 돌을 치우라하여 신하중 한사람이 돌을 치웠더니 금빛피부의 개구리모양을 한 아기가 누워있다가 해부루임금 일행을 보고서는 울음을 터뜨렸다. 임금은 그 아기를 데리고와 이름을 금와라 짓고 자식으로 삼고 태자로 삼았다. 해부루는 그리고 송화강유역의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명을 동부여라 했다. 해부루가 동부여로 떠난후 부여의 옛땅에 어떤사람이 나타나 자기를 해모수라 밝히고 나라를 세우니 북부여라 했다. 그리하여 부여는 둘로 갈라졌다 시간이 흘러 해부루임금이 죽고 금와가 왕을 이었다.
금와왕은 매우 사냥을 즐겼다 틈만나면 사냥을 하러 떠나곤 했다. 금와왕이 사냥을 갔다가
우발수라는 강가를 지나게 되었다. 금와왕이 경치에 반해 감탄하고 있을 때 한여인이 혼자서 있었다. 금와왕이 의심이 가서 조용히 다가가 까닭을 묻자 여자는 웅심산골짜기에 살고 있는 하백의 딸 버들꽃이라고 입을열었다. 여기서 웅심산은 백두산의 한봉우리며 하백은 송화강을 지키는 신이다. 금와왕은 버들꽃 유화를 데리고 왕궁으로 데려왔는데 유화는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꺼림칙하여 그 알을 여러모로 깨뜨리거나 짐승의 밥이 되게 했는데 깨지기는커녕 금하나도 안갔고 짐승들은 오히려 알을 품으려고 하였다. 금와왕은 하는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시간이 흘러 유화가 품은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어린나이에도 활을 매우 잘쏘며 무럭무럭 자랐다.
바로 그사람이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다. 금와왕에게는 일곱왕자가 있었는데 누구하나 주몽의 활쏘기, 칼싸움, 말달리기등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몽을 시샘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맏아들 대소는 주몽에게 마구간을 돌보도록했다. 주몽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머니인 유화부인의 부탁 때문에 꾹 참고 지냈다.
그의 나이 20세 예씨라는 아가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래도 대소는 주몽을 해칠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주몽의 오이, 마리, 협부라는 세 심복부하가 있어서 철저히 보호하는 까닭에 마땅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날 유화부인이 주몽에게 가장 빠르고 힘이 센말의 혓바닥에 가시를 꽃아두라고 했다. 그 말이 먹이를 못먹어 야위어 가고 있을 때 금와왕이 일곱아들에게 말 한 마리씩을 주었는데 주몽은 금와왕이 아무생각없이 준 야윈말을 가지게 되었다 . 하지만 그 야윈말은 본디 종자가 좋은 말이었기 때문에 혓바닥에 꽂은 가시를 빼자마자 엄청나게 먹어대고 몸에 기름기가 흐르고 털에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마가 천하의 주인을 만난 것이다. 추수가 끝난뒤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했는데 그 사냥대회에서 주몽은 역시 1등을 차지했다. 더욱 비위가 상한 대소는 무슨수를 써서라도 빨리 주몽을 해치우려고 하자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요청으로 동부여를 떠나라고 하자 주몽은 마음을 굳히고 예씨부인과 유화부인을 두고 남쪽으로 떠나게 되는데 예씨부인은 마침 임신을 한 상태였다 후에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려고 소나무 아래 일곱모난 돌에 부자의 증표를 넣어두었다. 끝까지 쫓는 대소를 따돌리면서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제사,무골,묵거라는 사람을 만나 기름진곳으로 안내를 받으며 동가강유역의 졸본땅에 도읍을 정하니 여러부족이 모여들어 고구려백성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여러 훌륭한 신하의 도움으로 고구려는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며 나라를 잘다스려 나갔다.
(즉, 부여, 고구려,백제의 족보는 처음엔 부여라는 나라가 있었고, 신의 손자인 주몽이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고구려를 세웠으며 주몽의 자식인 온조가 백제를 세운 것이다. )
3. 그 밖의 관련된 전설들..
▣ 백마의 전설 조룡대(釣龍臺)
나당(羅唐)연합군의 물밀듯이 침공에 7백년 백제사직이 무너지고, 망국의 치욕에 떨던 의자왕도 포로의 몸이 되어 멀리 불귀의 땅 당경에 끌려가자 백마강은 그 쓰라린 기억을 어서 잊으려는듯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사 영고성쇠(榮故盛衰)의 무심함이여! 바로 어제만 하여도 의자왕이 용선(龍船)에 아름다운 궁녀를 싣고, 태평세월을 구가하던 그 강상에는 위풍 당당한 소정방(蘇定方)의 깃발이 나부끼는 군선들이 오락가락 하였다.
더욱 야속하기로는 그 많은 배들이 한 때는 15만호에 사탑심다(寺塔甚多)하던 사비성을 외면하고 이제는 당의 도독부(都督府)가 설치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소부리(所夫里)는 7주야 밤낮 없는 약탈 방화로 완전 초토화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백마강의 주인인 용신은 이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백제의 유민들이 광복운동을 위해 일제히 궐기함을 안 용신은 때를 같이 하여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나리 군선들이 부소산 근처에 접근하기만 하면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시키며 돌풍을 몰아오고 호수와 같던 강물은 마치 바다의 노도와 같이 거세게 소용돌이 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당의 군선과 군병들은 물속에 삼켜졌다. 이런 당병들의 아비규환의 참변이 계속되기를 거의 한달에 이르렀다.
사비성을 초토화 시켜버렸으니 공주의 웅진성에 머물고 있던 소정방은 이 계속되는 참변의 소식을 듣자,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일관을 불러 그 원인을 알아보게 하였다.
일관은 소정방에게 [아무래도 백마강의 용신이 된 무왕의 혼이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하고 알리었다. [뭣이 무왕의 혼이라니?]
[네, 의자왕의 부왕인 무왕은 원래 소부리의 궁남지에 살던 용이 그 곳 궁녀와 상통하여 낳은 자임으로 죽어서 용으로 다시 환생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음, 그 말이 틀림이 없으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괴변이 강에서 일어날리 만무하옵니다.]
[그렇다면 무슨 묘책이 없겠는가?]
[그 용을 낚아채는 방법이 있사옵니다만]
[아니 용을 어떻게 낚는단 말인가?]
소정방의 귀가 번쩍 들리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용은 백마의 고기를 가장 즐긴다 하오니, 그를 미끼로 하면 틀림없이 용이 걸릴 것입니다.]
소정방은 곧바로 소부리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일관이 일러준대로 부소산 북쪽 강물속에 솟아난 바위에 올라 타고 부하를 시켜서 만들게 한 철사 낚시줄에다 백마의 고기를 끼워 강물속에 던졌다.
한편 용은 백제 사적의 원수 당에 대한 앙갚음으로 매일 백마강 위의 하늘에 구름과 비바람을 몰고오랴, 소용돌이를 발생시키느라 몸이 닳도록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보니 피곤도 하고 몹시 시장기고 돌았다.
이 때 마침 눈앞에 그렇게도 좋아하는 백마의 날고기가 물 속에 떠내려 왔으니 [이게 웬 떡이냐]하고 용은 얼른 그 백마고기를 꿀꺽 삼켰다.
바위 위에서 낚시줄을 잡고 있던 소정방은 [옳지 걸렸구나!]하고 낚시줄을 당겼다. 놀란 것은 용이었다. 용은 아픔과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이통에 소정방은 하마트면 물속에 이끌려 빠질 뻔 했으나, 발에 있는 힘을 다 주고 버티었다.
이렇게 기를 쓰며 당기는 소정방과 이끌리지 않으려는 용 사이에 옥신 각신 필사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소정방이 올라 타고 있던 수중 바위에는 발자국과 낚시줄이 마찰되어 흠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낚시에 걸린 용의 기력은 시간이 갈수록 떨어져 가기만 하는데 소정방에게는 힘이 센 부하 장병 수명이 달려들어 가세하는지라 대세는 일변했다.
용은 물 아래 위로 출몰하며 발버둥을 쳤다. 마지막 기력을 다해 저항하는 소리를 높이며 낚시줄을 낚아 채었다.
그러나 끝내, 황금 비늘을 공중에 번쩍 빛내며 백마강 동쪽 마을 지금의 용전(龍田)의 논두렁에 뚝 떨어져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도망가고 용의 시체는 때마침 여름의 폭양에 썩기 시작하더니 그 지독한 썩은 내는 멀리 80리 떨어진 공주의 한 마을까지 진동하였으니 이 때부터 그 마을 이름이 [구린내]가 되었고, 소정방이 올라 탔던 수중 바위도 조룡대(釣龍臺)라 이름 지어졌으며, 또한 용이 낚인 부근의 강 이름도 이때부터 백마강이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설도 바르게 전하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무책임한 태도로 너무나 황당무계하고 즉흥적으로 꾸며져 전하는 전설은 때로 우리 조상의 일에 침뱉는 격이 되고 향토를 욕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옳은 전설속에는 반드시 옛 조상의 뭔가 의도적인 뜻이, 아니면 암시나 비유가 상징적으로 내포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가 오늘날 듣고 알고 있는 조룡대 전설의 근원은 백제시대도 아닌 고려시대 삼국유사와 그리고 그로부터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동국여지승람등에 의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윤색되어버린 것이다.
여하간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한번 우리 고장의 조룡대 전설을 분석하고 재고해 보자.
먼저 용이란, 우리가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顔), 그리고 임금이 앉으시는 옥좌를 용상(龍床)이라 하듯 임금을 말함 이다. 또 백마(白馬)란 임금이 즐겨 타시던 애마를 상징함이라 왕과 백마의 상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전에 무엇보다도 알고 넘어가야 할 일은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고 고찰하건데 -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된 후 백제의 유민들은 광복을 위하여 얼마나 격렬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봉기하였음인지 당에서는 이를 수습 하는데 수년간 무척 골치를 앓았다. 그래서 당은 궁리 끝에 당경에 포로로 끌려 갔었던 왕자융(隆)을 불러들여 웅진 도독으로 삼은 뒤 강변에 제단을 쌓고 백마를 희생시켜 그 피를 마시면서 사태를 수습할 것을 왕자에게 맹세 시켰다 하는 기록이 보인다.
말하자면 이 때 당은 왕을 유인, 낚으기 위하여 백마를 이용 희생시켰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역사 기록을 비유하며 전설화 시킨 것이 오늘의 조룡대 전설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런 치욕적인 기록이나 전설로 인해서 우리 고장의 핏줄이라 할 수 있는 강의 이름마저 백마강이 되었다 함은 이것이 사고의 비약이요, 경박한 사대주의자가 아니고서야 발설 못할 일이라 하겠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런 주장은 비학문적인 인류의 날조로써 납득이 안갈 뿐만 아니라 자가 모독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강의 이름도 이보다 앞서 160여년 전 웅진의 무령왕 시대의 기록에 이미 보이고 있었으니,
[(前略) 백加出降 王 백가가 나와 항복하므로 왕(武寧王)은 이를 참형하여 백강(白馬江)에 던져 버렸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四) 혹자는 이 백강(白江)과 백마강(白馬江)이 다르다고 할지 모르나, 백마강이란 뜻은 결코 [흰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증언은 우리 고장의 청마산성(靑馬山城)이 상징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다고 본다.
청마선성의 청마(靑馬)는 푸른말으리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청(靑)은 청룡(靑龍) 즉 동쪽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고, 마(馬)는 크다는 뜻이다.
즉 마치(馬峙=큰고개), 마총(馬塚=큰무덤), 마한(馬韓=삼한중 제일 큰나라), 마천지(馬川地=냇가에 있는 큰못), 마산(馬山=큰산) 등등을 보더라도 크다(동물 가운데 말은 크므로)라는 의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청마산성이란 동쪽에 있는 가장 큰 산성이란 뜻이 되는데, 기실 청마산성은 서울의 동쪽에 위치한 가장 큰 산성이 아니겠는가.
이런 사실로 미루어봐서 백강(白江) 또는 백마강(白馬江)의 이름은 흰색이강이란 색깔에서 나오거나 흰말이란 동물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의 흰백은 나라 이름의 글자 즉 백제의 백(百) 아니면 백(伯濟라고도 기록됨)으로 보는 것이요, 따라서 백강은 [백제의 강]이고 백마강은 백(佰=나라이름)과 말(馬=크다)에서 [백제나라의 제일 큰강]으로 인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釣 龍 臺
[조룡대는 호암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부소산 아래에 이르러 한 괴석(怪石)이 강가에 걸터앉은 것이 있고, 돌 위에는 용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밀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 마리를 나꾸어 얻으니 잠깐 사이에 날은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일렀다 한다(신중동국여지승람 권18 부여현 고적조)]
계백장군
나당(羅唐)연합군 18만이 백제의 도성을 향하여 진격의 박차를 가해오자 의자왕은 전세가 급박함을 직감하고 달솔(達率)이던 계백(階伯)을 장군으로 삼아 황산벌 전장에 출정토록 하였다. 계백 장군은 5천 결사대를 인솔하여 전장에 나가며 말하기를, [한 나라의 사람으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상대 하게 되니 국가의 존망을 가늠할 수가 없다.
내 처자가 적들에게 붙잡히어 노비가 되어 욕된 삶을 이어 나가는 것은 차라리 쾌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 드디어는 손수 처와 자식을 벤 후에 황산(黃山) 벌판에 이르러 삼영(三營)을 설치하고 신라의 5만 병사를 만나 싸웠는데 여러 장병들 앞에 맹세하기를 [엣날 월(越)나라의 구천(句踐)은 5천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을 당하여 모든 장병들은 각각 분발하여 승리를 결단함으로써 국은을 갚도록 하라]하고, 드디어는 물밀듯이 쳐들어 가서 한 사람이 천명을 당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신라군은 드디어 격퇴되었다. 이와 같이 서로 진퇴하며 네 번이나 싸워 이겼다.
신라측에서는 군사의 기력이 다하고 백제군을 향하여 더 이상 진격할 용기를 잃게 되자 장군 흠순(欽純)이 아들 반굴(盤屈)을 불러 말하기를 [신하의 도리는 충성을 다 함과 같은 것이 없고, 자식의 도리는 효성된 일을 함과 같은 것이 없는데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내던지면 충과 효를 둘 다 이루는 것이라]하니, 반굴(盤屈)은 대답하기를 [삼가 아버님의 명령을 따르겠나이다]하고 곧 적진(백제 진영)으로 뛰어들어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 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아들 관창(官창-官昌)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모든 장병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의 아들은 나이가 겨우 16세이나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다. 너는 오늘의 급박한 전역에 삼군의 표적이 되겠는가] 하니, [예]하고 대답한 다음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말을 달려 백제 진영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관창은 곧 잡히어 포로가 되었고 계백 장군의 앞에 불려가게 된 것이다. 계백 장군은 관창의 투구와 갑옷을 벗겨 보고 그가 어린 소년으로 용감한 것을 사랑하여 차마 죽이지 아니하고 감탄하기를 [신라와는 능히 대적할 수 없겠구나. 어린 소년도 이와 같이 용맹스러운데 항차 장사들이야 어떠할까] 하고, 관창의 용맹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관창은 돌아와서 마버지 품일(品日)에게 말하기를 [소자가 적진으로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능히 적장을 베고 깃발을 빼앗아 오지 못함은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하는 말을 마치고 급히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 다시 백제 진영으로 달려 들어가서 용감히 싸우다가 계백 장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계백 장군은 [너는 너의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니 어리고 불쌍하나 할 수 없겠다] 하고는 머리를 단칼에 잘라서 말 안장에 매달아 돌려 보내니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안고 흐르는 피를 옷깃에 적시며 말하기를 [내 아들의 면목 (面目)은 산 것 같구나. 능히 국사를 위하여 죽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자 신라의 모든 병사는 이 모습을 목격 하고 감개 분발하여 결사의 뜻을 굳히고 진격하자 백제군은 도저히 그 사기를 꺾지 못하였고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전하게 되었으며 계백 장군도 전사하게 되었다.
계백 장군의 결사대가 출전한 시일이 하루라도 빨랐더라면 성충이나 흥수가 말한대로 탄현을 넘지 못한 신라의 5만 군사는 전멸하였을 것이며, 다음은 소정방과 일전의 기회가 있었을 것이지만 10배나 많은 적을 평원에서 맞아 싸워야 되었던 불리함 때문에 백제의 원대한 꿈은 더욱 시기를 앞당겨 깨진 결과가 되었다.
장군의 기록은 출생으로부터 달솔에 이르는 동안을 찾아 볼 길이 없으나 우리 한국의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모두 펼쳐 봐도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훌륭한 군인의 정신과 인격을 겸비한 분이다.
이미 나라가 망할 것은 예견하였기에 사랑하는 처자의 목을 자기의 손으로 직접 쳐서 깨끗한 죽음을 택하게 한 연후에 황산(黃山)벌 전장에 도착하였으나, 어리고 용맹스런 적군의 소년을 베지 않고 일단 돌려 보내는 관용과 사랑은 장군의 고고한 인품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정확한 사실이라 하겠다.
외세를 끌어들여 인국을 정벌한 김유신 장군과 끝까지 주체성을 고수하며 대 백제국의 장군으로 죽어간 계백 장군을 우리 후인들이 비교한다면 백제의 정신을 모독하는 결과라고 생각된다. 우리 국민은 현재와 같은 국제적으로 심각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력의 신장과 국가의 안정 및 남북 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는 계백(階伯) 장군의 정신, 곧 삼충신의 정신인 백제의 정신을 길이 발굴 선양해 나가야 될 것으로 믿는다.
충절의 백제좌평 성충(成忠)과 흥수(興首)
백제 말기의 대표적인 삼충신은 성충(成忠)과 흥수(興首), 계백 (階伯) 세 분을 이른다.
성충과 흥수 두 분은 모두 의자왕 시대의 좌평(佐平)벼슬에 있던 분으로 현대의 각부 장관 직위에 해당되는 높은 벼슬 자리에 있던 분이다.
백제 말기의 국제 정세는 복잡 다난하였으니 한반도 내의 서남부 전역을 영토로 확보하고 국력을 사해에 떨치던 백제국의 꿈은 삼국 통일과 대륙을 향한 전출의 기백으로 약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의 고충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으며 신흥 대국으로 일어선 당나라에서도 백제를 방관하고 좌시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였다.
신라의 진평왕(眞平王-26대)으로부터 선덕(善德), 진덕(眞德), 무열(武烈)왕대에 이르도록 4대 왕의 역점 시책은 백제의 침공을 방어하는데 있었고 부족한 국력을 보충하는 자구책으로 숭당(崇唐). 모당(慕唐)의 사대외교(事大外交)에 진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백제의 멸망사를 자세하게 기록한 서적은 없으며 겨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존하는 정도이니 당시의 사필 (史筆)은 신라 일변도로 수록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망국의 왕은 지나치게도 국망의 요인을 감당해야 되는 모순된 기록으로 승자의 입장을 정당화 하였다. 이러한 점을 반드시 감안하여 백제 삼충신과 의자왕의 기록을 검토해야 될 것으로 믿는다. 삼국사기를 토대로 하여 성충과 흥수의 충성스러운 모습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응용 담대하며 효심과 우애가 돈독하던 백제의 31대 의자왕은 재위 15년에 이르도록 내외 정치에 뉘우침이 없는 성군으로서의 역할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국운이 다하였던지 도성 내에 해괴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났으며, 재위 16년(656)에 이르러서는 강대한 국력을 믿고 방심하여 의자왕은 주색을 가까이 하고 즐겁게 놀며 국사를 돌보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때에 좌평(佐平) 성충과 흥수는 국가의 운명을 심히 근심하여 왕께 자주 극간하기를
[대왕이시여! 국사를 돌보시오. 대왕께서 탐락하시면 대 백제국의 운명이 위태로웁니다.] 하고 권고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왕은 노하여 성충은 옥에 가두고 흥수는 귀양을 보냈다.
성충은 옥중에서도 단식하며 나라와 임금을 걱정하여 몸이 점점 쇠약해져서 임종에 이르게 되었는데, 마지막 유언으로 상소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오므로 원하건데 한 말씀 더 올리고 죽겠나이다. 신이 항상 시세의 변화를 관찰하옵는데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그 지리를 살펴 상류에 처하여 적세를 늦춰 놓은 연후에야 가히 국운을 보전할 수 있으리이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쳐들어 오면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고 그 험난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한 연후에 치는 것이 옳겠나이다.]
하였으나 왕은 이말을 알아 살피지 못하였다. 성충의 옥사는 충성의 마지막 표현이었으나 거룩한 죽음의 소망은 이루지 못하고 결국 백제의 멸망은 앞당겨지고 있었다.
성충이 죽고 흥수가 귀양살이를 떠난 후로는 감히 나서서 임금님께 간하는 자가 없었고 간신의 무리는 성하였으며, 신라의 첩자(간첩)들은 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백제의 도성내가 어지러운 틈을 이용하여 당나라 고종의 야망은 실천 단계로 옮겨졌다. 당나라군과 신라군으로 연합세력을 구축한 18만 대병은 수륙 두 길로 백제의 도성을 향하여 진격하게 되었으니 의자왕 20년, 서기 660년이다.
나당 연합군의 진격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군신들을 급히모아 놓고 전술의 적당한 방법을 논의하였으나, 모든 신하들의 의견이 백출하여 왕도 어찌할 줄 모르게 되었다.
이 때에야 정신이 든 의자왕은 이미 억울한 죄목으로 귀양보내어 고마미지현 (古馬彌知縣)에 유배중인 좌평 흥수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어 방어의 계책을 물었다.
국왕의 보전과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여 충성스런 간언을 되풀이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살이를 하던 흥수는 유배지의 고달픈 생활 중에도 항상 변함없이 나라의 장래에 대한 근심과 임금님을 사모하는 충성심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염려하던 대로 국운이 위태로운 지경이라는 소식을 접한 흥수공은 사자(使者)에게 이르기를 [당병은 무리가 많고 군사들의 기강이 엄명한데다가 신라와 공모하여 쳐들어 오므로 만약 평원이나 광야에서 대진하고 싸우면 그 승패를 알지 못하겠으나 백강과 탄현(현재의 전북 완주군 일대 )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길목이므로 여기서 한 장부가 창을 휘두르면 만사람도 당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용사를 뽑아 여기서 지켜 당병들로 하여금 백강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 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엄중히 지키다가 그들의 군량이 다하고 군사들이 피로해진 연후에 분격하면 반드시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흥수의 의견은 곧 조정에 전달되었으나 일부 신하들은 말하기를 [흥수는 오랫도록 귀양살이를 하는 중이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말은 가히 쓰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당병들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 오게하면 거스리는 물에 배를 부리지 못할 것이요,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게 하면 길이 좁아서 군마를 벌려 세울 수 없겠으니 이 때를 기하여 군사를 내어 몰아치면 비유컨데 울안에 들어 있는 닭을 잡는 것과 같고 그물에서 고기를 주워내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자 왕은 이 말을 수긍하였다. 궁성 내에서 벌어진 전술책의 논의는 여러 날 동안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계속되는 중에 당병은 이미 백강으로 들어 오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서 진격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백제국이나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는 다음의 과정은 계백 장군 편에서 계속하여 기록하였다. 성충(成忠)과 흥수(興首) 두 좌평은 위의 기록에서 본 것처럼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분으로 평소부터 유비 무환(有備貿患)을 강조하며 국가와 임금을 위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바친 분이다. 충성이 목숨을 다 바치는데까지 이르는 백제의 정신사를 마지막으로 빛낸 두 분은 계백장군과 함께 백제의 삼충신으로 부소산 남쪽 삼충사에 모셔 매년 후예들이 정성스런 제향을 올린다.
낙화암(落花岩)-----백마강
백제의 사직이 무너지던날 백제의 여인들이 적군에게 잡혀 치욕스런 삶을 이어가기 보다는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백마강에 몸을 던졌 던 곳으로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날리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마강에서 바라보면 아직도 절벽 색깔이 붉은데, 당시 백제 여인들이 흘린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부여의 부소산 서북편에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의 이름이 곧 낙화암이다. 암벽의 사이사이에 노송이 붙어 자라며 철따라 전달래 철쭉꽃이 붉게 피어나 일편단심으로 목숨을 던진 그 옛날 백제 여인의 고귀한 충절심을 되새기는 듯하며 절벽의 정상에는 육각정자 백화정이 날아갈 듯이 서 있다.
낙화암의 백화정은 옛부터 시인 묵객의 발걸음이 끊일 사이 없었으며 현존한 백화정 건물은 1929년에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시인묵객의 친목 단체에서 건립한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남자가 없이 이룰 수도 없으며 여자가 없이 이룰 수도 없기에 남녀는 평등하며 부모 자녀가 모두 똑같이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소임과 소행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수많은 전쟁사가 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전쟁의 주역이 남자였다면 전쟁의 제물이 여자가 된 사례를 무수히 볼 수 있다. 우리 한반도에 삼국이 정립한 시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래로 우리 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일컬어 오게 된 연유는 충효정신에 있었으며, 더욱이 한국의 여성은 정절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고 한걸음 나아가서 효행과 충절에 자신을 희생한 예를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는 무왕(武王) 32년으로 국력이 강성하여 신라의 변경에서 자주 전쟁을 일으켜 많은 땅을 취했으며, 고구려도 신라와 국경에서 전쟁이 계속되던 때라서 진평왕은 신라의 보전을 위하여 제 3의 힘이 절실히 요망되던 때이므로 당나라에 지나친 사대주의적인 외교와 조공으로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의 여인을 당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신라는 진평왕으로부터 선덕, 진덕, 무열, 문무왕까지 5대에 이르는 일백여년간의 시기에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 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국력을 모두 당 나라의 도움으로 지탱하다보니 굴욕적인 숭당(崇唐) 외교를 불사했으며, 한편으로 장기간의 세월을 두고 간청해 온 신라의 청원으로 삼국 통일의 주역을 맡게 된 당 나라는 나름대로 한반도를 모조리 당의 통일천하에 예속시키려는 음모를 깊이 간직한 채 신라와 연합 세력을 구축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 하였으니 신라와 당 나라는 동상이몽으로 뭉쳐졌기 때문에 복잡하고 미묘한 승전의 후유증이 꼭 따라 붙었던 것이다.
결국 신라의 삼국 통일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광활한 만주 벌판을 영원히 우리 한민족의 수중에서 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백제의 기록에는 인접국이나 중국과의 외교에서 여자를 주고 받은 사실을 찾아 낼 수 없다. 도미(都彌)라는 평민의 부인이 일부종사하는 정절의 미담이 전해 올 뿐이다.
서기 660년 백제가 신라와 당 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망하게 될 때 백제인의 훌륭한 정신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삼충신의 충성심이며, 낙화암의 전설이요, 3년간 계속되는 치열한 광복 운동이라 하겠다.
백제의 26대 성왕이 재위 16 년에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며 나라 이름까지 남부여라 바꾸며 이루어 보려던 꿈은 삼국을 통일하여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려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성왕도 불행히 신라의 병사들에게 잡혀죽었다. 백제의 국력은 마지막 법왕과 무왕, 의자왕대에 최강을 자랑하게 되었다. 의자왕의 치적은 더욱 혁혁하여 신라나 고구려는 견뎌내기 어렵게 했고 신라로서는 김유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 화랑도 출신의 수많은 병사를 양성하였지만 단독으로 백제와 대결하기에는 무력한 처지에 놓이게 되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당 나라와 연합군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며 백제는 국운이 다했던지 의자왕도 재위 16년부터는 튼튼한 국력을 믿고 정사를 소홀히 다루며 조정의 신하들을 채용함에 있어 현명한 판단을 잃어가고 당 나라에서 보내오는 조서의 내용을 모두 무시해 버렸다. 당 나라의 입장에서도 한반도에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 백제국을 앉아서 바라볼 수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의자왕 20년(660년)7월 사비도성은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어 왕은 공주로 피신하게 되었고, 성내에 살던 왕족을 중심으로 한 고위층의 남자들은 모두 전몰하거나 포로가 되자, 비빈과 궁녀 등 도성내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침략군이 산성내에까지 몰려들자 이들 백제의 여인들은 적군에 잡혀가서 치욕스런 삶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유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는 바 [백제 고기에 이르기를 부여성(사비성~부소산성)의 북각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는 강에 임하였다........... 차라리 자결할 지언정 적의 손에서 죽지 않겠다 하고 이곳에 달려와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러한 연유로 타사암(墮死岩~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전해 온다.
위에 적은 바와 같이 백제의 여인들이 몸을 던져 죽어간 절벽은 타사암이라고 부르던 것을 후세에 여인을 꽃(花) 으로 비유하여 아름답게 불러 꽃이 진 바위 즉 낙화암(落花岩)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일부 속된 전설에 의하여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궁녀의 수가 삼천이라고 하는 얘기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는 해괴한 이야기이며, 곧 많은 궁녀와 여인들이 이곳 낙화암에서 우국충절을 지켜 죽어간 것을 뜻하는 것이다.
궁성 내에 의자왕이 거느린 궁녀가 모두 삼천 명이라는 이야기는 백제의 만년에 음주와 가무 등 유흥을 즐긴 사실을 대변하는 가상적인 숫자로 보아야 되며, 낙화암을 의자왕이 데리고 놀던 많은 궁녀들이 떨어져 죽은 곳이라고 간단히 보아 넘겨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백제는 건국 설화에서부터 사대를 배격하고 자주 자립하는 주체성을 고수하는데 역점을 두었으며, 일찌기 해양기술을 발전시켜 국제적인 다변 외교를 통한 문물의 교역 및 해외 활동이 왕성하였고, 멸망의 고정에서도 백제의 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초토작전에 의하여 불타면서 백제의 정신, 백제의 혼을 남긴 것이다.
낙화암! 우리 나라의 모든 여성이 정조를 생명보다 더욱 소중하게 지키며 국난의 시점에 서면 가장 용맹스런 병사보다도 더욱 용감하고 지혜롭고 끈기있게 항거해 나온 역사적인 전통을 심어놓은 낙화암은 하나의 전설이 어린 바위가 아니라 백제의 정신과 우리 한민족의 혼이 담긴 암반이다.
무덤이야기
인간의 통과의례 가운데 마지막 과정인 죽음에 대해 일정한 형식과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들의 최초 의식이 장례식이다.
한 집단의 생활방식 중 가장 변하지 않는 보수성을 띤 것이 바로 장례방식이다. 그래서 새로운 장례문화를 갖고 있는 집단이 이주해 오거나 획기적인 문화변동이 일어나지 않는한 바뀌지 않는 것이 무덤의 양식이라 한다. 그래서 무덤의 양식이 바뀌면 그 문화가 완전히 바뀌었다고까지 말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선 신석기 시대부터 무덤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청동기 시대 이후 그 형식이 다양해진다.
무덤중 가장 간단한 것은 시신을 땅 위에 놓고 돌로 덮어버리는 돌무지무덤(적석총)과 구덩이를 파고 흙으로 덮는 구덩무덤(토장묘)이다. 후대로 오면서 점차 위를 둥글게 흙을 쌓게 되는데 이를 봉토라한다.
이러한 무덤의 형태는 계급사회로 오면서 변화되는데, 권력자들은 생전의 권력을 과시하고, 영화를 내세에까지 연장시키기 위해 크고, 복잡한 무덤을 만들고 많은 부장품을 함께 매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분의 매장 방법 및 부장품등을 통해서 고대인의 사상 및 신앙, 기타 관계된 풍습과 제도등을 알수 있다.
무덤은 초기엔 평지에 만들어 졌지만 후대로 오면서 구릉으로 옮겨졌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1) 인구가 늘어나니까 농경지 확대의 필요성 때문에 무덤의 영역이 산으로 올라가게 됐다
2) 계급자들이 평야를 내려다보는 높은 능선위에 거대한 봉토로 만들어 평지의 무덤들보다 장대하고 위압적으로 만들기 위함과, 그것이야말로 자손과 신하를 감시하고 보호하는 조상의 유택이라는 인상을 준다
3) 단군이 후에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결국 산으로의 회귀성, 산악숭배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산으로 옮겨졌다.
※고분이란 말그대로 역사적으로 오래된 무덤을 말하는데 ' ∼총, ∼분 '으로 달리 불리우는 것은 - 개개의 무덤에 고유 이름이 붙지 않고 일괄적으로부를 때, 편의적으로부를 때 1호분, 2호분 등으로 불리운다. 천마총, 황남대총, 장군총등과 같이 그 무덤의 내.외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고유명사를 붙였을 때 ∼총이라한다.
삼국시대고분의 종류를 보면 크게 돌무덤과 흙무덤으로 나뉜다.
고구려와 신라의 형식은 백제에 비해 단순하다.
1)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돌무지무덤(적석총), 돌방흙무덤(석실봉토분) 으로 나뉘며
2) 신라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돌곽흙무덤(석곽봉토분) 돌방흙무덤 으로 나뉜다
3) 백제
한성시대 - 돌무지무덤, 돌방무덤(석실묘), 움무덤(토광묘)
웅진시대 - 돌방무덤에 흙무덤, 벽돌무덤(전축분)
사비시대 - 돌방흙무덤으로 정리되며
백제 후기까지 보여지는 영산강 유역에 산재한 옹관묘(독무덤)는 이주해온 지배집단과 토착민과의 차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이렇게 복잡한 무덤의 양태는 백제의 복잡한 국가형성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백제의 무덤은 기본적으로 고구려 계통의 묘제에서 출발하여 백제화되는 과정을 밟고 있는데,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네모꼴방에서 긴 네모꼴방무덤으로 어울무덤(합장묘)에서 흩무덤(단장묘)으로 변화하고, 널길(관)의 위치가 남벽의 동쪽에서 가운데 또는 서쪽으로 옮겨지며 점차 북침으로 통일되어 갔다.
■ 돌무지무덤 (북한용어로는 돌각담무덤)
냇돌이나 산돌을 쌓아 만든 피라밋모양의 네모무덤으로 한강유역에서만 보이는 형식인데 집안이나 독로강유역의 고구려 돌무지무덤과 통하면서 다져쌓기,돌무지, 구덩 등의 요소도 섞여 있다. 돌무지무덤은 백제초기의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이며 그 예로서 서울 석촌동 3.4호 무덤과 양평 문호리무덤이 대표적이다.
■ 널무덤
원삼국시대의 널무덤 전통을 이은 것으로 백제시대에는 전지역에서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땅밑에 긴 네모꼴의 구덩을 파고 주검을 직접 묻거나 널.덧널을 사용하였다. 서울 가락동, 석촌동일대와 천안 화성리및 청주 신봉동의 널무덤이 유명하다. 널무덤 가운데는 주검을 땅위에 올려 석회와 진흙다짐으로 덮은 뒤 네모난 봉토를 만들고 표토 가까이에 돌이나 기와를 깐 특수한 형식도 있다. 가락동 2호 무덤에는 3기의 널무덤과 독무덤이 함께 들어 있어 가족공동묘로 생각된다.
■ 돌덧널무덤
긴 네모꼴의 구덩이를 파서 돌덩이나 깬돌로 네 벽을 쌓고 그 위에 몇개의 뚜껑돌을 덮은 것인데 천정을 좁히기 위하여 벽위에 굄돌을 얹거나 벽을 오므린 것이 많다. 대개 하나의 주검을 묻고 있으며 공주, 금산, 임실, 남원 등에 분포하고 있다.
■ 돌방무덤
백제고분의 주류로서 백제 전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주로 구릉의 남쪽 비탈이나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땅위에 깬돌이나 판돌로 돌방을 만들고 흙으로 덮은 무덤이다. 돌방은 대체로 평면이 네모이면서 널길이 남벽의 동쪽에 붙은 모양과 긴 네모꼴의 남벽 중앙에 널길이 있는 모양의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 벽돌무덤
벽돌을 쌓아 만든 긴 네모꼴의 터널식 널방무덤으로 중국 남조로부터 받아들인 묘제로서 주로 공주지역에서 발견되어 왔으며, 특히 송산리 6호 무덤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진 유일한 왕릉이기도 하다.
최근 부여 저석리에서는 돌덧널무덤 모양의 벽돌무덤이 발견되었다.
■ 독무덤
재래식 묘제를 계승한 전통묘제의 하나로 서울, 공주, 부여, 영산강 유역 등 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영산강유역에서는 한 봉토안에 여러 개의 독널이 묻혀 있기도 하다.
■ 화장묘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무덤형식으로서 백제 후기의 부여지방에서 유행하였다. 풍화암반에 둥근 구덩을 파고 그 바닥에 다시 작은 구멍을 파서 화장한 뼈를 담은 단지를 넣고 납작한 돌이나 기와, 벽돌 등으로 덮은 것이 특징이다.
■ 백제의 벽화무덤
백제의 무덤중 벽화가 그려진 것은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부여 능산리 1호분(동하총이라고 부르기도 함)이다. 두 무덤 모두 사신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의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예로 보아 벽화무덤중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송산리 6호분은 벽돌무덤이며 무덤방 네벽에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그림이 그려져 있다. 주작그림이 그려진 무덤방 남쪽 벽에는 해와 달이 그려져 있고 구름무늬도 묘사되어져 있다. 벽화는 벽면에 진흙을 발라 벽면을 매끄럽게 한 뒤 물감을 사용하여 흙이 채 마르기 전에 그리는 '프레수코기법'으로 그렸다. 한편 송산리 6호분에는 무덤방의 각 부분에 채색이 이루어져 있다.
능산리 1호분은 화강암과 큰 판자돌을 이용하여 만든 굴식돌방무덤으로서 무덤방의 네 벽면에는 사신도를, 천장에는 연꽃과 구름이 그려져 있다. 벽화를 그리는 기법은 송산리의 예와는 달리 판자돌의 겉면을 곱게 간뒤 그 위에 직접 그림을 그렸다.
■ 뼈단지
불교식 장례법으로 주검을 화장한 뒤, 그 뼈를 추려 담아 땅속에 묻는 여러가지 모양의 용기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전래된4세기 후반부터 사용되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정성이 담긴 백제인의 기술-
백제의 금속공예품은 삼국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발견 예는 적은 편이나, 질적으로는 정교하고 세련된 멋을 보여준다.
한성백제기의 금속공예품은 몽촌토성.석촌동무덤.풍납동 등에서 발견된 금동제귀걸이와 철제초두가 대표적이며 고구려와 낙랑등 중국과 문화적교류를 가졌음이 드러나 있다. 또한 백제권역인 천안 화성리무덤발견의 당초무늬가 은상감된 고리자루칼도 백제인의 수준 높은 공예술을 보여준다. 웅진백제기의 금속공예품은 무령왕릉출토품이 대표적으로서 금제관식.귀걸이.팔찌.반지.은제잔 등 갖가지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조형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 유물들은 비록 한정된 시기와 왕의 부장품이라는 제약을 갖고 있으나 중국 남조와 신라지역과의 문화적 교류관계 및 불교문화의 영향 등을 보여주고 있다. 사비시대를 맞이하면서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은 정교함의 극치를 이루며 수준높은 공예품을 만들어 갔다.
이러한 백제의 금속공예품은 고구려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함과 아울러 신라 가야와도 활발한 문화교류를 가지면서 백제인 특유의 조형감각과 뛰어난 공예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왜에게 전해져 일본문화의 형성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일본 아스카문화의 주류를 이룸)
■ 백제의 관모와 관식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중국의 역사책인 수서.북사 등에는 '왕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에 금으로 만든 꽃으로 장식하였고, 6품인 나솔이상의 관리들은 은꽃으로 장식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은꽃관식을 꽂았던 사람들은 사비백제의 중앙에서 파견되었거나 그 지역에서 지역민을 통솔하였던 지방관리로 생각된다. 은꽃관식은 백제의 금속공예연구와 지방통치제도를 연구하는데 귀한 자료이다.
■ '전부'라고 새긴 표시돌 - 당시 사비가 도시구획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시사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표시돌이다.
약 9cm가량의 크기의 글자로 '전부'라고 새긴 것으로 부(部)란 도성 또는 나라전체를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눈행정구역의 이름이며, 전부는 일반적으로 상(上),중(中),하(下),전(前),후부(後部)로 구성되는 오부(五部)의 하나이다.
■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
부여 송국리유적은 금강지류인 석성천가에 펼쳐진 평야지대에 나지막하게 뻗어있는 구릉지대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대의 청동기시대의 마을유적으로 넓이는 수만평에 달한다.
둥근 집터는 바닥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양쪽 끝에 2개의 기둥을 세운 것이 특징으로 '송국리형집터'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서남부와 동남부 및 일본지역까지 영향을 주었다.
청동도끼거푸집과 다량의 불탄 쌀과 볍씨자국토기조각은 당시의 송국리사람들이 청동기를 만들고 벼농사를 지었음을 보여준다.
위에서 살핀 부여 송국리유적과 유물들은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 가운데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송국리형문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송국리형문화 내용을 가진 유적은 금강유역에서 발생하여 남부지역으로 점점 퍼졌고 일본큐슈지방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 백제 창왕 명석조 사리감
창왕명석조 사리감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윗면이 둥근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규모는 높이 74cm, 가로 세로 각각 50cm로 윗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여 마치 오늘날의 우체통처럼 생겼다.
사리감에는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감실(舍利孔)은 높이 45cm, 너비 25.3cm, 깊이 24.5cm로 만들어 졌는데, 감실의 문턱(4cm)을 제외하면 실제로 사리장엄구를 넣을 수 있는 깊이는 21.5cm가 된다.
감실이 있는 전면의 양쪽면에는 각각 10자씩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글의 시작은 오른쪽에서 왼쪽 으로 씌여졌다. 글씨는 공주 무녕왕릉 매지권에 사용된 글자체와 비슷하다.
글씨의 내용은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
로, 내용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으나, '백제 창왕[威德王] 13년(567년) 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 라는 내용으로서 성왕(聖王)의 위업(偉業)을 기려 만든 것이다.
사리감은 다음의 몇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즉 사리를 봉안한 시대와 공양자가 밝혀지고 백제시대 최초로 절의 조축연대(567년) 가 확실하게 밝혀진 점을 들 수 있으며, 사리감의 형태는 남북조 시대의 전돌무덤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 중 중하총(中下塚)의 현실과 같다. 이와 같이 이 사리감으로 인하여 절의 조성연대와 조성이유가 상세히 밝혀졌으며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도 입증되었다.
이것은 기록이 빈곤하여 잘 알 수 없었던 백제의 문화사회를 연구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 고란약수-----고란초
▣ 희귀의 종 ----- 고란초(皐蘭草)
부여읍 구교리 부소산의 북쪽 기슭 고란사 뒤뜰에는 바위 절벽 밑에 약수가 솟아오르고,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암벽 사이에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다.
이 고란초는 고사리과에 속하는 다년생 은화식물로 머리카락같이 가느다란 잎자루에 잎사귀 하나씩이 고란초의 전부이며 잎사귀 후면에는 다갈색의 포자낭이 두줄로 나란히 붙어 있다.
이 포자가 바람에 날려 조건이 알맞는 곳에 뿌리를 내려 번식한다고 하지만 부소산의 바위 절벽 어디를 찾아봐도 고란초는 보이지 않고 오직 고란사 뒷벼랑에만 자생한다.
그 줄기와 잎이 연약한 것처럼 뿌리 또한 바위틈에 겨우 붙어 있는 정도며 옮겨 심을 수도 없다.
더욱이 고란초는 햇빛을 싫어한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다습한 바위 절벽 틈바구니가 고란초의 자생 적지다.
이조 세종 때 편찬된[향방약성대전]에 고승 "원효대사가 사비강 하류에서 강물을 마셨는데 이 강의 상류에 진난(眞蘭)과 고란(皐蘭)이 있는 것을 물맛을 보고 알아냈다"는 기록이 전하며, 한방에서는 고란초를 화류의 치료제로 달여 먹기도 하였다는 얘기다.
고란초는 우리 나라의 강원도 이남 산간지역 그늘진 바위 틈에 자생하는 희귀 식물로 되어 있으나 부여를 제외한 타 지역에서는 쉽사리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금강 중에도 백마강이라 불러오는 부분의 세 곳에서 발견되니 과연 백제의 역사와 같이 살아오는 역사와 전통의 식물이라 하겠다.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은 고란사의 약수를 애용하셨는데 이 약수를 떠갈 때마다 고란초 잎사귀 하나씩을 띄워서 올렸으니 고란사의 약수라는 증명이 되었고 그 향기가 물에 돌아 원기가 왕성해졌다는 내용이다.
▣ 백제의 박사제도
백제에서 학문과 기술을 진흥시키기 위해 실시하던 제도로 역박사(曆博士), 의박사(醫博士), 오경박사(五經博士)등의 분야가 있다.
백제는 논어와 천자문 등을 일본에 전해 줄 정도로 한학의 수준이 높았다.
▶ 오경박사(五經博士)
중국 한(漢)나라 태학(太學)의 교관. 한나라 무제(武帝) 때에 시작되었다. 오경박사는 오경(五經)만을, 그것도 각기 한 경서를 전문으로 교수하였다.
백제시대의 관직으로 오경, 즉 《역경(易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경서에 능통한 사람을 오경박사라 하여 귀히 여겼다.
오경박사는 일본에도 초빙되었는데, 무녕왕 때 단양이(段揚爾)·고안무(高安茂), 성왕 때 왕유귀 (王柳貴)등이 초빙되어 고대 일본의 유교교육을 담당한 사실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타나 있다.
▶ 역박사(曆博士)
백제 시대 역법(曆法) 전문학자.
일찍부터 백제는 중국의 유교 이념을 도입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전문 관부(官部)와 학자도 양성하여 박사 제도를 설치하였다.
▶ 의박사(醫博士)
백제 때 의학 업무를 담당하던 전문 관직.
■ 백제의 궁궐
1. 한성시대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이다.
현재까지 한성시대의 왕성 위치 및 유적에 대해서는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의하면 궁안에는 회나무를 심었고 우물과 연못을 두었으며 궁의 서쪽에는 활쏘는 대를 조성하는 등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2. 웅진시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부터 538년까지 60년 사이이다.
동성왕은 20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한성으로부터 내려온 귀족 세력과 웅진성 지역의 신흥 귀족세력을 조정하여 왕권의 신장을 꾀하였다.
곧 우두성을 비롯한 5개성을 쌓는가 하면 웅진서 안 궁궐 동쪽에 임류각이라는 고층 누각을 지어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 만큼 왕권을 안정시켜다 무녕왕 때에는 왕권이 재확립된 듯 중국의 양나라에로부터 영동대장군 곧 중국의 동쪽 을 평안하게 만들었다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이때의 궁궐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가 죽은 뒤 축조된 무녕왕릉의 건축술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왕궁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사비시대
사비시대에 문헌상 주목되는 것으로는 무왕 때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망해루와 의자왕이 왕궁 남쪽에 세웠다는 망해정 및 의자왕이 지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했다는 태장궁 등이 있다.
또 무왕 35년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못가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안에 방정선산을 모방하여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 궁원(宮苑)
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 조원(造苑)의 기술이 뛰어났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진사왕(辰斯王)때 궁실을 장엄하게 중수하고 궁내에 원지(苑池)를 파고 가산(假山)을 조성하여 기이한 새와 진귀한 꽃들을 길렀고, 개로왕(盖鹵王)때(475) 궁을 장려하게 짓고 누각사대 (樓閣사臺 : 정원 속에 세운 정자)등을 지었으며, 웅진(熊津)시대 동성왕은 궁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건립(500)하고 원지를 파고 기이한 새를 길렀다.
백제 무왕은 35년(634)에 泗비城 남쪽에 원지를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속에는 방장선산 (方丈仙山)을 조성하고 못가에는 버들숲을 만들었다.
무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왕흥사도 화려하게 조성하고 泗비城의 북쪽 북포(北浦)도 괴석을 치석 (置石)하고 꽃을 심어 그림같이 만들었다.
이를 보면 백제는 모든 도성에 큰 원림과 원지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서기 추고천황(推古天皇) 20년(612)의 기록에 백제인 노자공(路子工)이 황궁 남정에 정원을 만들고 다리를 놓고 수미산을 조성하였는데, 이는 일본 정원문화의 시조가 되었다.
부여 동남리 사지에서 보듯이 금당 앞에 수조(水槽)를 만들여 연화를 심기도 했으며, 대통사지(大通寺址) 석조나 부여 궁지에서 옮겨 온 부여 석조등은 정원의 뜰에 놓고 연꽃을 심었던 원기(苑器)들이다.
이것이 통일신라에 전하여져서 많은 석연지(石蓮池)가 만들어졌다.
이상과 같이 백제문화는 재주가 뛰어나고 명석하였으며 진취적으로 외래 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여 잘 소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직선보다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터득하여 자유로운 구상으로 낭만적이고 조화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리하여 넘치는 문화의 힘이 해외로 뻗쳐 일본 飛鳥文化의 선사국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