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김해는 경상도 6개 진관 중 하나로 속군, 속현의 병력을 합하여 약 5,6백명에서 최고 1,000 명 정도의 병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해 부사에는 서예원이 있었으며 전쟁 개시 이후 초계군수 이유겸이 성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초계군수 이유겸의 직책이 중위장(中衛將)이라고 나오는데 그럼 초계군수도 동래성 전투 당시 울산과 양산군처럼 사전에 정해진 어떤 계획에 따라 김해성을 지원하러 왔다는 걸로도 해석할 수 있을 듯 한데....
초계군이면 현재 합천군 초계면 인근 지역인데 김해와 초계는 너무 멀지 않나?(...라는 생각에 지도에서 대략적인 위치만 잡고 거리를 재어 보니 직선 거리 약 62km, 그에 반해 밀양-동래간 직선 거리는 약 44km.... 뭐... 그닥 멀다고 볼 수 없을려나...ㅡㅡ;;;;)
한편, 4월 18일 아침 부산 앞 바다에 도착한 일본군 제3번대 주력은 구로다 나가마사의 지휘 하에 다음 날인 19일에 낙동강 하구에 있는 죽도(竹島)로 상륙을 하여 원래 계획한 진격로를 따라 김해성을 향해서 북상을 시작하였다.
김해 부사 서예원은 배를 띄워 적정을 탐색하던 중 일본군의 선발대와 조우하였는데, 일본군은 먼저 이 배를 빼앗고, 조총을 쏘면서 육상으로 추격하였고, 조선군측 경계병들은 활로 응사하면서 김해성 안으로 철수했다. 곧 일본군 제3번대 주력이 도착하여 김해성을 포위한 채 공격을 시작하였다.
서예원이 전체 수비군을 독려하는 한편 초계군사 이유겸은 서문을 담당하여 군사를 지휘하여 일본군과 접전을 계속하여 주간에는 일본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못하였고, 포위된 상태였지만 조선군의 저항은 성공적이었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밤이 되자 일본군은 민가에서 볏짚을 날라 성 밖에 쌓기 시작하여, 성과 같은 높이까지 볏짚을 쌓아 그곳에 올라와 성 안으로 조총 공격을 시작하자 성 안의 사상자가 늘어나게 되어 군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었다.
전세가 악화되자 새벽에 초계 군수 이유겸이 순찰을 핑계 대고 달아나 버렸다. 이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가 더욱 떨어졌고 조선군의 동요를 눈치 챈 일본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여 일부가 성 안으로 난입해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부사 서예원은 패전이 확실해지자 이유겸을 잡으로 간다는 핑계로 역시 도주하였다. 병력과 화력이 열세인데다 지휘관마저 없는 상태에서 조선군은 저항할 힘을 잃자, 일본군은 못을 메운 동쪽으로부터 방어선을 무너뜨리며 성 안으로 난입하였다.
당시 수비군에는 일본군을 피해 성 안으로 피난을 온 다수의 일반 주민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지휘관이 도주한 상태에서 저항을 계속하였는데 이 중 순국한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은 이후 사충신(四忠臣)이라 하여 사충단이 세워졌다.
후에 김해성에서 도주한 죄로 이유겸은 참수당했고, 서예원은 삭탈관직 당했으나 이후 의병장 김면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김시민을 이어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김해읍성은 고종 때까지 존재하다가 서서히 헐리어 현재는 북문 일대만 성곽 흔적이 남아 있다. 최근 김해시는 대규모 복원 사업을 계획하여 북문을 복원하였고 차례로 동,서,남문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김해읍성 위치는 현재 김해시 동상동, 서상동 일대로 복원된 북문 외에 동문은 동광초등학교 후문 인근, 서문은 수로왕릉 진입로 인근, 남문은 김해농협지부 동편 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에서 성곽은 임의로 그은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