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철학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니니, 왜냐하면 그만큼 철학은 오늘날 그 본래의 사명― 사람에게 인생의 의의와 인생의 지식을 교시(敎示)(가르쳐서 보임)하려 하는 의도를 거의 방기(放棄)(내어 버림)하여 버렸고, 철학자는 속세와 절연(絶緣)하고 관외(關外)에 은둔하여 고일(高逸)(남보다 높이 뛰어남)한 고독경(孤獨境)(외롭고 쓸쓸한 경지)에서 오로지 자기의 담론(談論)에만 경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학과 철학자가 생활의 지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부단히 인생의 예지(禮智)(밝고 깊은 슬기)를 추구하는 현대 중국의 '양식의 철학자' 임어당(林語堂)이 일찍이 "내가 임마누엘 칸트를 잃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는데, 이 말은 논리적사고가 과도(정도에 지나침)의 발달을 성수(成遂)(이루어 냄)하고 전문적 어법이 극도로 분화한 필연의 결과로서, 철학의 정치, 경제보다도 훨씬 후면에 퇴거(물러감)되어, 평상인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철학의 측면을 통과하고 있는 현대 문명의 기묘한 현상을 지적한 것으로서, 사실상 오늘에 있어서는 교육이 있는 사람들도 대개는 철학이 있으나 없으나 별로 상관이 없는 대표적 과제가 되어 있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물론 여기서 소위 사변적(思辨的), 논리적, 학문적 철학자의 철학을 비난, 공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나는 오직 이러한 체계적인 철학에 대하여 인생의 지식이 되는 철학을 유지하여 주는 현철(賢哲)(지혜가 깊고 사리에 밝음, 또는 그러한 사람)한 일군의 철학자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으며, 어느 정도로 인간적 통찰력과 사물에 대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이상, 모든 생활인은 그 특유의 인생관, 세계관, 즉 통속적 의미에서의 철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다음에 말하고자 함에 불과하다.
철학자에게 철학이 필요한 것과 같이 속인(俗人)에게도 철학은 필요하다. 왜 그러냐하면 한 가지 물건을 사는 데에 그 사람의 취미가 나타나는 것같이, 친구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그 사람의 세계관, 즉 철학은 개재(介在)되어야 할 것이요, 자기의 직업을 결정하는 경우에도 그 근본적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인생관이 아니어서는 아니되겠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들이 결혼 이라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볼 때, 한 남자로서 혹은 한 여자로서 상대자를 물색함에 있어서 실로 철학은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지배적이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우리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활을 설계하느냐 하는 것도, 결국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들이 부지중에 채택한 철학에 의거하여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생활권 내에서 취하게 되는 모든 행동의 근저에는 일반적으로 미학적 내지 윤리적 가치 의식이 횡재(橫在)(가로 놓여 있음)하여 있는 것이니, 생활인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어느 종류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소위 이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이상이 각인의 행동과 운명의 척도가 되고 목표가 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이상이란 요컨대 그 사람의 철학적 관점을 말하는 것이며, 그 사람의 일반적 세계관과 인생관에서 온 규범(規範)의 한 파생체(派生體)(주체에서 갈려나와 생긴 것)를 말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선택의 주인공이 된 이래, 그것이 그대를 천 사람 속에서 추려 내었다.'고 햄릿은 그의 우인(友人) 호레이쇼에게 말하였다. 확실히 우인의 선택은 임의로운 의지적 행동이라고는 하나, 그러나 그것은 인생 철학에 기초를 두는 한 이상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햄릿은 그에 대하여 가치가 있는 인격체이며, '천지지간만물(天地之間萬物)'에 대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 인생 생활을 저 천재적이나 극히 불우한 정말(丁抹)의 공자(公子)보다도 그 근본에 있어서 잘 통어(統御)할 줄 아는 까닭으로 호레이쇼를 우인으로서 택한 것이다. 비단 이뿐이 아니요, 모든 종류의 심의 활동(心意活動)은 가치관의 지도를 받아 가며 부단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운명을 형성하여 가는 것이니, 적어도 동물적 생활의 우매서을 초극(超克)한 모든 사람은 좋든 궂든 하나의 철학을 가지는 것이다. 사람은 대개 이 인생에 대하여 무엇을 요구해야 할까를 알며, 그의 염원이 어느 정도로 당위와 일치하며, 혹은 배치될지를 아는 것이니, 이것은 실로 사람이 인간 생활의 의의에 대하여 사유(思惟)하는 능력을 가지기 때문에 오직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두말 할 것 없이 생활 철학은 우주 철학의 일부분으로서 통상적인 생활인과 전문적인 철학자와의 세계관 사이에는,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와 트라지엔의 목양자(牧羊者)의 사이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현저한 구별과 거리가 있을 것은 물론이나, 많은 문제에 대하여 그 특유의 견해을 가지는 점에서는 동일한 철학자인 것이다.
나는 흔히 철학자에게 생활에 대한 예지(叡智)의 부족을 인식하고 크게 놀라는 반면에는, 농산어촌(農山漁村)의 백성 또는 일개의 부녀자에게 철학자인 달관(達觀)을 발견하여 깊이 머리를 숙이는 일이 불소(不少)(적지 않다)함을 알고 있다. 생활인으로서의 나에게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생활 체험에서 우러난 소박, 진실한 안식(眼識)이 고명한 철학자의 난해한 칠봉인(七封印)의 서(書)(볼 수 없도록 일곱 번이나 봉인을 찍은 책. 곧 난해한 책)보다는 훨씬 맛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현실적 정세를 파악하고 투시하는 예민(銳敏)한 감각과 명확한 사고력은, 혹종의 여자에 있어서 보다 더 발견되고 있으므로, 나는 흔히 현실을 말하고 생활을 하소연하는 부녀자의 아름다운 음을 경청하여, 그 가운데서 또한 많은 가지가지의 생활 철학을 발견하는 열락(悅樂)(기쁨과 즐거움)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하나의 좋은 경구는 한 권의 담론서(談論書)보다 나은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인생의 지식인 철학의 진의를 전승(傳承)하는 현철(賢哲)이 존재한다는 거은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무명의 현철은 사실상 많은 생활인의 머릿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생활의 예지― 이것이 곳 생활인의 귀중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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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 : 중수필
▶제재 : 생활인의 예지
▶주제 : 생활인의 예지와 통찰력 속에 빛나는 철학
이 글은 흐름이 논리적이고 사색적이다. 생활 주변의 신변잡담으로 작가의 정신을 드러내는 여타의 수필보다는 읽기에 딱딱하다. 생활이야기를 경수필(輕隨筆)이라 한다면 이런 글은 중수필(重隨筆)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철학이 생활과는 동떨어져 학문탐구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고 실생활에 지혜를 주는 역할에는 소홀한 것을 지은이는 아쉬워한다. 철학 책은 어려워져, 석 장 이상 읽을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철학 책을 따로 읽지 않아도 생활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어졌다고 통탄한다. 이 글의 간행이 1948년이었으나 반세기가 지난 요즘에도 형편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몇 해 전부터 황필호 교수가 시작한 <어느 철학자의 편지>란 잡지가 김진섭의 이런 정신을 실천하고 있어 고무적이다.
농어촌의 일개촌부가 상아탑 안의 철학자보다 생활의 예지에서 훨씬 뛰어날 때가 있다는 지은이의 발견과 생활 속의 통찰이나 선택은 좋든 궂든 철학적인 판단에 기초한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1. 이 수필의 문체상의 특질을 밝혀보자.
▶ 수식이 없이 간명하고, 쉬운 문체를 선택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과정없이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털어놓기에 적합한 형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글의 내용과 상응하는 형식의 탐구로 가능해
진 것이다.
2. 작가가 강조하는 철학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