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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암행어사들의 타락ㆍ부패 극심
조선시대에도 공무원들은 개혁, 사정의 칼바람에 덜덜 떨어야 했다. 탐관오리를 박살내고 사회정의를 실현해 온 것으로 알려진 암행어사. 산천초목도 겁을 먹었다는 조선시대의 암행어사도 사실은 별다른 활약이 없었음을 실록은 전해주고 있다
암형어사 명함 가진 도둑까지 설쳐
관리들의 수난시대
가깝고도 먼 역사였던 조선시대에 공무원들은 어떤 모습으로 근무했으며, 그 시절의 개혁 사정은 어떤 모습을 전개됐을까.
조선시대 공직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 공포의 대상을 꼽으라면 단연 암행어사일 것이다. 임금의 특명을 받아 변장과 변복(變服)을 하고 마패를 가슴에 숨긴 채 방방곡곡을 잠행하면서 개혁 사정의 칼날을 번득이며 탐관오리를 잡아 가두고 산천초목을 떨게 한 존재가 바로 암행어사였기 때문이다. 세종 1년 11월 8일 임금은 팔도에 어사를 파견하면서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는데 이 담화문에 어사의 의미와 제도, 역사적 내력이 잘 설명되어 있다.
<“당나라 제도에 어사는 주(州)와 현(縣)의 감옥 송사와 관리의 선악, 탐오한 아전, 세력이 강한 호족들의 횡포, 그리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 원통하고 괴로운 사정을 스스로 펴지 못하는 일을 돕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우리도 어사를 팔도에 보낼 것이다. 그 고찰하는 조목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관리가 이익을 탐하거나 백성을 침해하는 것 두 가지는 내가 몹시 싫어하는 것이어서 이를 집중 구명할 것이다, 또 백성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해결하여 탐오의 행위가 그쳐 우리 백성들이 편히 생업에 종사토록 할 것이다….”>
그런데 기대했던 역할과 사명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어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모습들이 실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음은 성종 2년 11월21일 기록.
<대사간 김영견이 아뢰기를 “비록 어사를 보내더라도 관리와 더불어 거처하며 지나치게 친하여 거리낌이 없으므로 어사가 그 간악함을 적발할 수 없으니 어사 행차를 정지하소서.“>
이 사건 이후 조정에서는 파견지와 일정을 비밀에 붙인 채 불시에 어사를 파견하는 ‘암행어사‘ 제도를 연구하게 된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암행어사는 중종 시절에 처음 파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선왕조실록 CD-ROM으로 검색한 결과 성종 시절에 처음 암행어사를 파견한 기록이 발견됐다. 다음은 성종 16년 7월 6일 실록.
<임금:“윤해가 전에 청송부사가 되었을 때 암행어사를 보내 부정이 있는지 캐어 살폈지만 한 가지도 과실이 없었다.“>
암행어사 명함 가진 도둑도 등장
현종개수실록(조선시대에는 정권이 바뀌어 실록이 어느 특정 정파에 유리하게 기록되었다고 판단될 경우 새로운 실록을 편찬하여 원본과 함께 보관해 두었다) 즉위년 6월 8일 기록에도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활약이 미미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앞서 선왕(효종)이 송시열 등을 등용해 장차 국정을 개혁하고자 했다. 이에 어사를 팔도에 파견하여 나라 곡식을 도둑질하는 것, 군민을 침해하는 것, 상인과 결탁하는 것, 서울로 뇌물을 실어 보내는 것, 토호(지방 세력가)에게 아첨하는 것, 형장을 남용하는 것, 주연에 빠지는 것, 하급 관리에게 행정을 맡기는 것, 진휼(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돌보는 일)의 부지런함과 태만함, 농사의 상황 등 17조로 여러 읍을 순방하여 탐문하게 했다. 그런데 어사가 그 결과를 보고하기 전에 국상(國喪)을 만나 각 도의 어사가 모두 돌아오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어 여론이 유감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오늘과 마찬가지로 암행어사들이 타락하거나, 파견기관의 도덕성 추락의 모습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조선시대에는 암행어사의 수가 많지 않아 전국 각지에 모두 파견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암행어사 파견이 결정되면 대쪽이나 종이에 파견 대상이 될 만한 고을 이름을 적어 놓고 그 중에서 몇 개를 추첨하여 파견 지역을 정하는 절차를 추생(抽牲)이라 했다. 그런데 비밀리에 추첨된 어사 파견 지역이 새 나가는 바람에 곤혹스러워 하는 모습이 발견됐다. 다음은 중종 18년 5월 27일 실록.
<임금:“어사를 파견하는 고을이 부당하게 전파되는 일은 내가 일찍이 들었다. 홍문관에서 올린 보고서를 보니 모두 어사가 누설한 일이다. 이런 사건이 허다한 모양인데 비밀을 누설한 어사를 조사하게 했으니 진상을 알게 될 것이다.“>
시대가 후대로 갈수록 암행어사 제도는 초기의 엄정했던 규율과는 달리 어사들의 타락과 기강 해이로 제 역할을 못하게 된다. 선조 시대에 들어서는 암행어사의 자질이 형편없는 데다가 제도마저 타락해 지방에서 횡행하는 도적들마저 어사 명함까지 소지하고 다닌 사실도 있었다. 선조 18년 4월7일 실록은 전라 우도(右道)에 파견된 암행어사 황혁에 대해 실록은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겨 놓았다.
<황혁은 젊어서는 술에 취해 기방에만 드나들었고, 벼슬길에 들어선 뒤에는 권세 있는 집안에만 들락거려 몸가짐에 볼 만한 점이 없었다. 낭관(각 관아에 소속돼 있던 6품 관리의 총칭)이 되어서는 속포(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거나 죄를 짓고 풀려날 때 그 대가로 바치는 무명)을 모두 창기(娼妓)에게 탕진했다. 고을 수령으로 나가서는 주지육림(酒池肉林)에 젖어 고을 백성들의 소송에 판결을 완전히 폐해 버렸다.>
문제의 인물 황혁이 전라 우도에 파견돼 올린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신(臣)이 나주 담양에 이르러 큰 도적 김국보 등을 잡아 가두었는데 이 무리들이 관청을 협박하고 농간하여 동료를 탈출시키려는 계책을 세울 듯합니다. 나라에 기율이 없어 도적이 횡행하는 데 심지어 도적이 어사의 명함까지 가지고 있으니….“>
광해군 4년 2월 18일 실록에 의하면 호남과 영남 지방에서 암행어사를 자칭하는 자가 여러 고을에서 횡행하다 영암군에서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어사 제도의 기강이 이쯤 되면 추상같은 법 질서를 바탕으로 탐관오리를 징벌하는 개혁 사정의 칼날은 점점 무디어지게 마련이다.
조선시대에도 인사고과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인사고과를 도목정(都目政)이라 했다. 도목정은 지방직의 경우 지방 감사가 각 고을 수령의 치적을 심사하여 중앙에 보고할 때 그 우열을 나누어 성적이 가장 우수한 상등을 최(最)라 하고, 하등을 전(殿)이라 했다. 이를 합쳐 전최(殿最)라 했는데 다섯 번의 도목정에서 세 번 최(最)를 받으면 승진되었다.
임금이라도 인사의 룰 어기면 가차없이 비판
조선시대는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였기 때문에 공정한 인사가 국가 흥망의 지름길이었다. 조정은 인사의 엄정성을 기하기 위해 관리들을 대상으로 인사고과를 실시했으니, 이것을 도목정(都目政)이라 했다.
도목정은 지방직의 경우 지방 감사가 각 고을 수령의 치적을 심사하여 중앙에 보고할 때 그 우열을 나누어 성적이 가장 우수한 상등을 최(最)라 하고, 하등을 전(殿)이라 했다. 이를 합쳐 전최(殿最)라 했는데 다섯 번의 도목정에서 세 번 최(最)를 받으면 승진되었다. 정종 1년 12월1일 실록에서 도목정의 기준이 발견됐다.
<“도력장(都歷狀:관리들의 근무 성적표)을 가지고 관리들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조사하여 부지런한 자는 승진시키고 게으른 자는 파면하며, 새로 관직에 제수된 자는 이듬해에 녹을 받고, 그 해의 일에 이바지하게 하는 것을 도목정이라 합니다.“>
도목정이 얼마나 중요한 정치적 행사였는지는 세종 즉위년(1418) 12월5일 임금의 발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이 도목정의 일로 편전에 나가 친히 전주(銓注:인물을 살펴 적당한 벼슬자리에 배정하는 일)를 점검하고 도목정 담당 관리에게 “이것은 내가 왕위에 오른 후의 가장 중요한 정사이니 사람들로 하여금 논박함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시대에는 이처럼 도목정이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임금의 건강이 좋지 않아도 관리들의 근무 성적표를 친히 열람하고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관료제도의 틀을 잡아 나갔다.
그러나 이 시절에도 고위층에 연줄이 있는 관리들이 한가로운 자리에 근무하다 몇 단계씩 빠르게 승진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세종은 재임 12년 1월24일 승진에 엄정성을 기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발견됐다.
<“벼슬이란 공로에 보답하여 주는 것인데 전직에서 한가롭게 지내던 자가 계급이 뛰어올라 부지런히 근무하는 사람보다 높이 승진하는 것은 정말 옳지 못한 일이다. 앞으로는 전직의 자급을 그대로 제수하되 인품과 자격이 상당하여 꼭 뛰어 올려 승진시켜 주어야 할 자는 사유를 갖춰 아뢰도록 하라.“>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총애하는 대신을 임의로 승진시킬 경우 다른 관리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 시절에도 대신들은 당당히 임금의 인사조치에 맞서 법치국가의 기틀을 지키려는 모습들이 보인다. 다음은 연산군 1년 5월9일 기록.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유대승은 겨우 현령(종5품 지방 수령직)에 이르렀는데 이번에 당상관에 승진했습니다. 이지강은 남평 현감(종6품 지방 수령직)으로 있다가 파면되어 경력이 없는 데도 역시 당상관에 승진되었으니 인사에 외람됨이 너무 심합니다. 당상관은 지극히 중한 직위인 데 이런 무리에게 함부로 주는 것은 부당하오니 모두 취소하소서.“>
조선시대에도 공무원간에 승진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했던 모양이다. 너도나도 업무는 뒷전에 미룬 채 승진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발버둥치자 급기야 임금이 나서서 “조급히 승진하기를 바라는 기풍을 억제하라“는 명을 내리기에 이른다. 다음은 중종 10년(1515) 11월28일 기록.
<“근래 조급히 승진하려는 버릇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매우 옳은 말이다. 새로 등용된 사람은 지기는 있어도 숙달된 일이 적을 것이고, 조정의 법도를 모르는데 조정 돌아가는 모습을 어찌 알겠는가. 오래 벼슬한 사람은 뚜렷한 허물이 없어도 아랫줄에 침체되어 있고, 출신한 지 오래지 않은 자가 그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선조 38년(1605) 3월25일에도 승진욕에 눈이 먼 관리를 비판하는 임금의 발언이 발견됐다.
<임금:“조급히 승진하려는 자는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사람이다. 옛말에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사람은 못하는 짓이 없다‘고 했으니, 이는 극악한 사람이므로 결코 쓸 수 없다. 서로 공박하고 붕당을 만드는 자는 모두 승진하려는 습관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같은 사람은 반드시 제거하고 청렴한 선비를 등용해야 한다.“
심희수:“등창을 빨고 치질을 핥으며 아비와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모두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생긴다 했으니, 그 말이 지나치지 않습니다.“>
정조 13년(1789) 1월19일에는 임금이 :인재의 우열이 나이의 많고 적음과, 벼슬에 있은 지 오래이고 오래지 않은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며 늙은이를 발탁하여 쓰라는 지시가 발견됐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휩쓰는 명퇴니 조기퇴직 권유의 세태와는 크게 비교가 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관직 얻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관직 중에서 가장 위엄 있고 명망 높은 자리는 모든 관직의 감찰과 풍기 등을 바로잡는 일을 관장하던 사헌부와,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간원 등의 대간직, 그리고 문장 실력과 학식이 뛰어난 사람에게 제수되는 홍문관, 예문관(임금의 명령이나 국정에 관련된 문서를 작성하는 부서), 승정원 등의 문한직이었다.
신참 공무원 되면 고참들에게 고나한 잔치상 올려
조선시대에는 관직 이외에는 별다른 직장이나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관직에 등용되는 것이 개인의 영예일 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관리가 되는 길은 과거, 천거, 문음(門蔭) 등 세 가지 길이 있었다. 천거는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 중 학행과 도덕이 뛰어난 사람을 추천 받아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이며 문음은 공신이나 3품 이상의 실직(實職:실제 직함을 받고 관리로 일하는 직책)을 거친 사람의 자식이나 사위 등을 간단한 시험을 거쳐 하급 관리로 선발하는 제도다.
과거는 관리로 등용되는 가장 영예로운 길로서 오늘날의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외무고시에 합격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과거 급제자 전원을 관직에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나 급제자 수가 실제 관직 수보다 많았기 때문에 보직 얻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기‘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급제자들 중 최우등 성적을 기록한 3명에게만 실직을 주고 나머지 급제자는 문과의 경우 승문원(외교문서 작성 부서), 성균관(교육부서), 교서관(경서 간행 부서) 등에 임시 대기직 자리를 주었다.
이들은 매월 실시하는 월례고사 성적과 근무 일수로 인사 고과를 하여 다른 관직으로 발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가문이나 문벌이 좋은 집안의 급제자들은 홍문관이나 선전관에 배치되어 관직 진출이 빠르고 요직에 등용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급제자들은 임시 대기직으로 평생을 보내다 은퇴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관직 중에서 가장 위엄 있고 명망 높은 자리는 모든 관직의 감찰과 풍기 등을 바로잡는 일을 관장하던 사헌부와,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간원 등의 대간직, 그리고 문장 실력과 학식이 뛰어난 사람에게 제수되는 홍문관, 예문관(임금의 명령이나 국정에 관련된 문서를 작성하는 부서), 승정원 등의 문한직이었다.
대간직과 문한직은 ‘청직‘이라 했고, 인사권을 담당한 이조와 병조, 재무를 담당하는 호조 관원은 ‘요직‘이라 했다. 이 둘을 합쳐 ‘청요직‘이라 했는데, 이 청요직이야말로 조선시대 관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관료가 되기가 이처럼 어려웠기 때문에 청운의 꿈을 품고 관리의 길에 등용된 사람들은 ‘신참례‘라는 신고식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현종 3년 2월19일 기록을 보면 조선 중기 과거 급제자들의 통과의례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선비가 새로 대과와 소과에 합격하면 사관(四館:성균관, 예문관, 승문원, 교서관의 총칭)에서 그들을 신래(新來)라고 지목합니다. 그리하여 방방(과거 급제자들에게 증서를 주는 일. 문무과는 붉은 종이에, 생원과 진사는 흰 종이에 이름을 싸서 주었다)하기 전에는 사관에 일정별로 신고하는 관례가 있습니다. 분관한 뒤에는 회자면신(귀신 옷을 입고 밤에 선배들을 찾아가는 것)을 하는데, 갓을 찌그러뜨리고 옷을 찢는 등 엄숙한 옷차람을 형편없게 만들면서 갖가지 골탕을 먹이고 곤욕을 줍니다. 이런 일이 어느 때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으나 관례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이 폐단을 통렬히 개혁하소서.“>
이런 신고식이 끝나면 신참자가 고참들에게 거나한 잔치상을 차려 대접했는데, 그 도가 지나쳐 당사자들에겐 큰 부담이었던 모양이다. 다음은 중종 24년(1529) 11월4일 기록.
<“신래자들을 괴롭히는 것이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병조에서는 소속 관원이 신래자를 괴롭히면 그 녹을 낮추기 때문에 심하지 않으나 예조 소속 관아에서 특히 심합니다. 사관(史官)을 뽑을 때 사람들이 모두 꺼리는데 이는 신참례 진치 비용을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참례를 거쳐 관직에 오른 관리들은 한평생 국가를 위해 봉사하다 나이가 들면 현직에서 물러나는데, 오늘날의 정년퇴직에 해당하는 것을 조선시대에는 치사(致仕)라 했다.
치사란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일‘을 일컫는 말로서 예기(禮記)에 ‘대부(大夫)의 나이 70이 되면 치사하는데, 사직시킬 형편이 못되면 반드시 안석(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를 하사한다‘는 대목이 있다. 그러니까 치사란 오늘날처럼 구조조정이니 명퇴니 하여 반강제적으로 도태시키는 제도가 아니라 신하를 예로써 존경하여 말년을 한가히 보내도록 배려한 제도였던 셈이다.
정종 2년(1400) 4월6일 실록을 보면 나라 살림을 넉넉하게 하기 위해 명예직 관리인 검교와 용관(冗官: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관원)을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상소가 발견됐다.
<“…당나라 태종은 367인의 관원을 정하고 ‘내가 이것으로 천하의 인재를 대접하면 족한다‘ 했습니다. 우리 조정은 동반(문관)이 520여 인, 서반(무관)이 4170여 인이니 관리의 수가 중국 조정 제도의 3배나 됩니다. 녹봉(관리들의 월급)이 부족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녹봉이 부족하고 국방비가 저축되지 못한 것은 용관을 태거시키지 못한 때문입니다. 특별히 명하여 없앨 것은 없애고 합병할 것은 합병하며, 늙은 대신으로서 직책을 수행할 수 없는 70세 이상은 고려의 제도에 의해 치사(명예퇴직)하게 해서 녹봉을 허비하지 않게 하고, 검교는 모두 혁파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