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복군 독립영웅 박영준朴英俊·신순호申順浩 부부
박영준 선생은 1915년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등으로 활동하던 박찬익 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8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 항일 선정 활동을 펼쳤고, 1945년에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으로 활동했다. 광복 이후에는 주화대표단에서 활동하며 중국에 있는 한인들을 보호하면서 중국과 외교활동을 펼쳤다.
1915년 11월 1일 만주 롱징(龍井) 난다라즈(南大辣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박찬익(朴贊翊)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문을 배웠으며, 독립운동가인 부친을 따라서 만주와 중국 본토를 전전하였다. 1935년 중국 저장성(浙江省) 자싱현(嘉興縣) 슈저우중학교(秀州中學校)를 졸업하였다.
1938년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참여하여 항일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가담하여 항일연극과 강연, 합창 그리고 전단을 배포하는 등, 항일사상 고취와 함께 초모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9년 11월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재 양성계획에 따라 중국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 교통과에 입교하여, 1941년 12월 제17기로 졸업하였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광복군 제3지대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2년 4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 배속되어 근무하였으며, 1943년 6월 임시정부 재무부 이재과장, 8월 총사령부 서무과장으로 근무하였다. 그 해 12월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의 주례로 충칭 우스예샹(吳師爺巷) 임시정부 청사에서 신건식(申健植)의 딸 신순호(申順浩)와 결혼하였으며,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3월부터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해 8월 카이펑지구(開封地區)로 파견되어 광복을 맞았다. 그 후 만주로 가서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동북총판사처(東北總辦事處) 외무주임으로 근무하며 자위대를 조직해 만주 교포들의 귀국과 치안을 담당하였다.
1949년 4월 주화대표단장인 부친과 귀국한 뒤, 육군사관학교 8기(특별 2기)를 마치고 육군 소령으로 임관하였다. 6·25 전쟁 발발 후 육군 정훈감으로 임관하였다. 1953년 준장으로 진급한 이후 조달감·사단장·부군단장 등을 거쳐 1961년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 한국전력공사 초대 사장에 임명되어, 1968년 퇴임 시까지 전력 확충에 힘썼다. 1964년 1월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이후,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한국광복군동지회장·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독립유공자협회장 등 독립유공자 단체들을 대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신순호 선생은 1922년 독립운동가 신건식·오건해 지사의 딸로 태어났다. 17세였던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했다. 한국광복군의 총사령부에서 근무했고, 임시정부에서는 회계를 담당하기도 했다.
보훈부는 “항일정신으로 맺어진 두 한국광복군 부부는 대를 잇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대 무장항일운동의 주역이었던 독립군은 1930년대 중반까지 고난을 겪으면서도 항일전을 지속해오고 있었고, 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근거지를 옮긴 끝에 중경(重慶)에 정착하여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광복군은 중국 화북 지역에서 병력 모집과 훈련, 선전과 정보 수집, 적정정찰, 유격전 수행 등을 통해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한인 여성들도 입대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광복군의 여성 군인들은 주로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 혹은 독립운동가와 결혼하거나 국내에서 민족운동에 투신하다 일제 경찰을 피해 망명을 하는 등 다양하였고, 남성들과 똑같이 초모활동, 교육과 훈련, 선전활동, 한미군사 합작과 전략첩보활동, 국내진입작전과 정진대 활동 등에 참가하면서 세탁, 재봉, 구호대 등의 일도 수행하였다.
1938년 8월 대장 고운기(高雲起)와 대원 연미당(延美堂), 오광심(吳光心) 등과 함께 중국 유주(柳州)에서 중일전쟁 시작 이후 대 일본 전쟁을 위한 위로금 모금 공연과 한중합작공연 등을 펼치며 항일공연 예술 방면에서 활약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한중 합동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경에는 중국 기강현(綦江縣) 성진(城鎭)에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소속으로 근무하였고, 다음 해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설립되자 김정숙(金貞淑), 조순옥(趙順玉)과 함께 여성 군인으로서 입대하여 활발히 활동하였다.
1942년 9월에는 임시정부 생계위원회 회계부 파견되어 근무하였고, 1944년 3월경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월경에는 임시정부 외무부(外務部) 정보과(情報科)에 파견되어 과원(科員)으로 근무하던 중 같은 해 8월 15일 중국에서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