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사공(太師公) 장길(張吉)-장정필(張貞弼)-은 인동장씨 시조가 아니다.
문강공(文康公) 여헌선생(旅軒先生) 장현광(張顯光 :20세 ,남산파)께서 임진란(壬辰亂)(1592) 후 여헌수록(旅軒手錄)에 우리 족보(族譜)를 닦은 약(約) 170여년 뒤
문강공(文康公) 여헌선생(旅軒先生)의 오세손(五世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만인당(晩忍堂) 장지학(張趾學)은 영조(英祖) 45년(1769)에 펴낸 우리 옥산장씨(玉山張氏) 족보(族譜) 서문(序文)에서
「근래(近來) 또 국가사기(國家史記)를 얻어 보니 포음공(圃蔭公) 장길(張吉)이 중국(中國)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인동부원군(仁同府院君)에 봉(封)해지고, 또 노전(蘆田)에 사우(祠宇)를 세웠다고 하니 노전(盧田)은 곧 인동부(仁同府)의 남쪽 십여리의 곳이다.
이미 인동(仁同)에 봉(封)해지고, 또 인동(仁同)서 향사(享祀)를 하였으니 포음공(圃蔭公) 장길(張吉)이 인동(仁同)사람임은 분명(分明)하다.
우리 장씨(張氏)가 옥산(玉山)으로 관향(貫鄕)을 쓰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 같기도 하나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진중(愼重)한 도리(道理)에 있어 감히 반드시 꼭 그렇다고는 단정(斷定)을 못하니 마땅히 뒷날에 고증(考證)이 있기를 바란다.」고 한 것을 가지고
근세(近世) 일부 사람들이 태사공(太師公) 장길(張吉)을 우리 인동장씨(仁同張氏)의 시조라고 한 것 같이 서문내용(序文內容)을 잘못 해독(解讀)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왕건태조(王建太祖) 13년(930)후에 「안동(安東)에서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이 왕건태조(王建太祖)를 도와 장길(張吉)이 대상(大相)에 배(拝)하였다」는 기록(記錄)만 있을 뿐이고
우리나라 역사(歷史) 기록(記錄)과 지리지(地理誌), 인동읍지(仁同邑誌)에도 태사공(太師公) 장길(張吉)이 중국(中國)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나와 인동부원군(仁同府院君)에 봉(封)해 졌다거나 인동(仁同)고을에 노전(盧田)이 있었다든지 또 인동(仁同)에 장태사(張太師)를 향사(享祀)한 사우(祠宇)가 있었다는 기록(記錄)은 없다.
또 1967년에 펴낸 인동장씨대동보(仁同張氏大同譜)에 「시조 장정필(始祖 張貞弼)」이라 하고 그 밑에 주(註)를 「문강공 여헌선생 장현광(文康公 旅軒先生 張顯光)의 여헌수록(旅軒手錄)에 포음공 장길(圃蔭公 張吉)은 우리나라 장씨(張氏)의 득성(得姓)한 조상이다. 그러나 감히 정확(正確)한 계대(系大)를 밝힐 수가 없으므로 상장군공 장금용(上將軍公 張金用)을 일세조(一世祖)로 삼았다.
〔문강공 수록왈 (文康公 手錄曰), 포음공 휘길 위오장득성지조(圃蔭公 諱吉 爲吾張得姓之祖), 연불감진적저대고(然不敢眞的著代故), 이상장군공휘금용 위일세조(以上將軍公 諱金用 爲 一世祖)〕라고 한 것을 대동보(大同譜)를 할 때 태사공 장길(太師公 張吉)을 시조라고 주장(主張)한 몇몇 사람들이 문강공 여헌선생 장현광(文康公 旅軒先生 張顯光)의 말씀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다 믿는 심리(心理)를 악용(惡用)하여 여헌수록(旅軒手錄)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장태사(張太師)를 시조로 조작(造作)하는 잘못을 범(犯)하여
이후 1977년에 장우상(張羽相)이 펴낸 인동장씨(仁同張氏) 대동속보(大同續報)와 경파(京派)에서 펴낸 태상경공파보(太常卿公派譜), 1982년 금구파(金溝派)의 진안공파보(鎭安公派譜), 1990년 함평파(咸平派)에서 펴낸 참찬공파보(參贊公派譜)에 대동보(大同譜)에 잘못되어 있는「시조 장정필(始祖 張貞弼)」을 그대로 이기(移記)하였다.
1981년 인동본향(仁同本鄕)에서 종파(宗派)와 남산파(南山派), 황상파(凰顙派), 진평파(眞平派)에서 각기 파보(派譜)를 펴낼 때 1967년의 대동보(大同譜)에 장태사(張太師)를 시조로 한 것은 잘못된 것으로 결정하고 옛 족보(族譜)대로 삼중대광공 장금용(三重大匡公 張金用)을 시조로 하고 장태사(張太師)는 거명(擧名)조차 하지 않았다.
장태사공(張太師公)을 시조로 하는 일부 타관(他貫) 장씨족보(張氏族譜)에
삼중대광공 장금용(三重大匡公 張金用)을 태사 장길(太師 張吉)의 14세손으로 계대(系代)한
직제학(直提學) 장계(張桂)〔고려 충렬왕 (高麗 忠烈王) 31년(1305) 진사(進士)에 등제(登第)〕의 장자(長子)로 조작(造作)해 놓아
순조(純祖) 5년(1085) 경파(京派)와 금구파(金溝派)에서 그 잘못된 것을 지적, 의변록(疑弁錄)을 작성(作成)하여 설파(說破)한 일이 있은 후
타관장씨(他貫張氏)는 또 장태사(張太師)의 이후 장기(張紀)를 장금용(張金用)이라 하다가 근래에 와서는 「장금용(張錦用)의 이름이 또 장금용(張金用)이라고도 하니 인동파(仁同派)의 파조(派祖)이라」하면서 장금용(張錦用)을 우리 인동장씨(仁同張氏의) 시조 삼중대광공 장금용(三重大匡公 張金用)과 같은 동일인(同一人)으로 날조(捏造)하고 있고
근래 일부 출판사에서 펴내 시판(市販)하고 있는 씨족(氏族)에 관한 일부 서책(書冊)에 「장태사공(張太師公)이 처음 인동(仁同)에 살았다느니 우리 인동장씨(仁同張氏)의 시조가 되는 것같이 조작(造作)하고 있다.
문강공 여헌선생 장현광(文康公 旅軒先生 張顯光)은 임진란(壬辰亂)(1592) 때 39세로 이때 잃어버린 우리 옛 족보(族譜)를 임진란(壬辰亂)전부터 보아온 어른으로 여헌선생(旅軒手錄)과 여러 유문(遺文)에서 「오직 우리 시조는 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 장금용 부군(三重大匡 神虎衛 上將軍 張金用 府君)이라」하셨고
장태사(張太師)에 대해서는 일체 들먹인 사실조차 없었으며, 금반 다행히 청주파(淸州派) 중랑장공(中郞將公) 장득선(張得宣)의 종중(宗中)에서 보존되어온 임진란(壬辰亂)(1592)이 일어나기 24년전 선조(宣祖) 1년(1568)에 군수(郡守) 장범(張範)이 인동장씨(仁同張氏) 청주파보(淸州派譜)를 펴내고 지은 서문(序文)에
「우리 선대(先代)가 이어 나온 것은 인동(仁同)의 시조에서 비롯하였다. 내가 명종(明宗) 21년(1566) 경상도(慶尙道) 도사(都事)의 命(명)을 받고 부임(赴任)하는 길에 인동(仁同)에 이르러 관청(官廳)의 문적(文籍)을 열람하니 곧 장성(張姓)를 쓰는 자(者)는 모두 장금용(張金用)의 후손(後孫)이다. 상사공 학거 장순(上舍公 鶴渠 張峋)(17世)과 종중(宗中)어른 20여명이 찾아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장씨(張氏)가 이 인동(仁同)고을에 살아 온지가 오래되고 시조 삼중대광공 장금용(三重大匡公 張金用)께서 옥산(玉山)의 계상(溪上)에 터를 잡고 살으셨다」고하였다는 한 사료(史料)를 발견(發見)하였으니
오직 임진란(壬辰亂) 이전의 이 족보(族譜)에서도 우리 인동장씨(仁同張氏)의 시조는 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 장금용(三重大匡 神虎衛 上將軍 張金用)이라고 하였으니
문강공 여헌선생 장현광(文康公 旅軒先生 張顯光)께서 기록(記錄)해 놓은 여헌수록(餘軒手錄)과 여러 유문(遺文)이 정확(正確)함을 확인(確認)해 주었으며
장태사공(張太師公)을 우리 인동장씨(仁同張氏)의 시조라고 할 고증문헌(考証文獻)이 전혀 없으니
조작된 족보(族譜)와 문헌(文獻)에 현혹된 일부 종인(宗人)들이 장태사(張太師)의 묘소(墓所)에 가서 시조의 묘(墓)라고 참배하는 수치(羞恥)한 우(愚)를 범(犯)하는 자(者)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
범장씨 측에서 주장하는 "우리나라 장씨 득성시조는 안동장씨 시조인 태사공 장정필"이라고 하고, 또한 성씨관련 책자나 인터넷 자료 등에 광범위하게 잘못된 이 논리가 퍼져있어 우리 인동장문 상장군계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유린하는 실정입니다.
이 글은 우리 인동장문 시조이신 대광공 휘 금용 부군은 안동장씨 시조인 태사공과는 전혀 별개라는 명쾌한 논리를 담고있는 그야말로 우리 집안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글이라 생각되니, 카페회원님들은 이 글을 정확히 숙지하시어 주위 일가친척 및 친분이 있는 사람들께 널리 알려 나갑시다.
우리 인동장문의 정체성을 전 종문들의 힘으로 굳건히 세워, 우리 후대들께 자랑스런 인동장문의 빛나는 위상을 물려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 글은 대종회 공식홈페이지에 '장을식' 종문님이 올리신 것이며, 우리 문중의 역사나 기타 다른 사항을 알고 싶은 회원님들은 대종회 홈페이지에 접속하시어 보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고귀하고 소중한 자료를 게시하여 주셔서 감사 합니다... 翼昌운영자님께서 문중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 하시는 열의에 다시한번 머리를 숙입니다...
익창씨, 뭐,드릴 말이없습니다. 감사해요,많은 종문님들이 좋아하시겠습니다. 건강하십시요.
귀한 자료 잘 이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