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며 사는 삶이 곧 수행”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장 도법 스님
▲ 도법 스님은 “삶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이 수행,
붓다로 가는 길”이라며 “깨달으면, 그리고
붓다가 되면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일 년 단위로, 한 달 단위로, 하루 단위로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만들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삶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매 순간이 처음이고 마지막입니다.
어느 순간이고 처음이 아닐 때가 없고 마지막이 아닐 때가 없습니다.
만약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확실해집니다.
매순간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면 지루하고 따분할 일이 없습니다.
“또 이 사람이야” “또 이 일이야” 하면서 불평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끊임없이 변하고 달라집니다.
우리 몸에서는 끝없이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납니다.
생각도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같은 사람을 100년 만나도 볼 때마다 항상 처음입니다.
순간순간 매일매일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지식 쌓는 것이 공부 아니라, 불교적으로 사는 것이 공부
어리석어 모르면 업보 중생, 진리를 알고나면 모두 붓다
붓다로 사는 것이 불자의 삶, 그 서원을 결코 잊지 말아야
그런데 우리는 실제를 보고도 실제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현재를 보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으로 상대편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이 어제 그 사람이 아님을 모릅니다.
우리가 80세를 산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80세가 돼야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죽었습니다.
매 순간 변하고 있기 때문에 매 순간이 처음이고 끝입니다.
비유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냇가에 가면 어떻습니까. 물이 흘러갑니다.
물이 흘러가는 한복판에 서서 내가 한 지점을 보고 있으면 어떻습니까.
물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지점을 통과하는 물은 매순간 새로운 물입니다.
냇가의 물이 항상 그 물 같은데 실제로는 항상 새로운 물입니다.
흐르는 물은 시작이면서도 동시에 마지막입니다.
우리 또한 항상 새롭게 사람을 만납니다.
어제의 사람을 오늘 만났더라도 그 사람은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나고 있는 나도 변했습니다.
10년 전부터 본 사람이라도 오늘 그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그 사람이 10년 전에 봤던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일 뿐입니다.
실상을 알게 되면 과거의 일로 사람을 대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 본 사람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내일 보게 되더라도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미운 마음, 성 내는 마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항상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인데
어떻게 미운 마음, 성 내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오히려 반가움과 살가움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불교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식을 쌓는 것을 불교공부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것도 공부는 공부입니다. 그러나 공부는 실질적으로 해야 합니다.
관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실천이 없으면 10년이고 20년이고 공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실천이 없으면 지식만이 쌓일 뿐입니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 중에 무아(無我)가 있습니다.
불교계에는 무아가 넘쳐납니다. 그런데 무아의 삶에 대한 고민은 없습니다.
무아적 삶은 무엇일까요.
무아라고 하는 것은 자기중심성, 또는 자기중심의 이익이 없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됐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무아의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배웠으니까 무아를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실천은 없습니다. 행동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걸 보통 유명무실(有名無實)이라고 합니다.
불교를 아무리 많이 알고 지식을 산처럼 쌓아도 대부분 유명무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 불교는 유명유실(有名有實)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알면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 교리적인 지식이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연기(緣起)도 무아(無我)도 공(空)도 몰라도 관계없습니다.
실제 살아가는 삶이 불교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붓다로 살자 모임을 갖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실천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붓다로 사는 것일까요.
붓다로 살자 발원문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보니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붓다라네.”
우리 모두 ‘붓다로 살자’를 결사 하려면 이 부분이 명확해져야 합니다.
이 부분이 확연하게 와 닿지 않으면 올바른 불자의 삶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첫 머리의 “신기하고 신기하다”는 것은 감탄사입니다.
“어리석음으로 실상을 모르고 있을 때는
중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그대로 부처로구나”하는 탄복입니다.
그런데 감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실천입니다.
내가 그대로 부처로구나 하는 의미가 알음알이가 아니라 실제 삶에 적용돼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진리가 아닌 거짓말이 될 뿐입니다.
말만 있고 실제가 없는 것을 불교에서는 망상(妄想)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전도몽상(轉倒夢想)입니다.
불자들은 부처님 말씀이라도 실제와 직결시켜봐야 합니다.
불교는 생각하지 말고 글로 하지 말고 실제로 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그렇다면 ‘붓다’의 뜻은 무엇일까요.
붓다는 깨달은 사람, 깨달을 수 있는 분, 완성된 사람,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중생이라고 알고 믿고 그렇게 사는 것하고,
부처라고 알고 믿고 사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불자는 붓다가 되는 것이 목적인 사람입니다. 붓다가 되면 행복해집니다.
깨달으면 행복해집니다. 결국은 삶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붓다로 가는 길입니다.
불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참선이나 절입니다.
무엇 때문에 참선을 하고 절을 합니까.
붓다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행위가 삶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향이라면 그것이 곧 수행입니다.
참선이나 염불이나 절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삶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실천과 활동이 바로 수행입니다.
신부님이나 목사님을 만나면 물어봅니다.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까.”
그러면 모두들 당황해 합니다. 한 번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왜’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인데 무슨 이유가 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원수를 왜 사랑해야 하는 건지 의심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내 삶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나에게 욕했지만 나는 상냥하게 대하겠다.
저 사람이 거짓말했지만 나는 진실 되게 대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상대를 미워하는 한 내 삶의 완성도는 높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연기(緣起)법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가 인연 맺고 있으며 이어져 있습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상대편이 욕을 했다고 해서 주먹을 휘두르면
더욱 큰 폭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연기법이 진리임을 안다면
우리는 상대편에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관계없이 선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삶의 완성도가 높아집니다. 붓다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명상이든 수행이든 삶과 분리돼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수행은 삶 속에서 녹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어디 가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수행이기 때문에 수행은 우리의 삶 속에 생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수행을 삶 속에서 완성하기란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죽기 살기로 해야 합니다.
하고 또 하고 그렇게 열심히 하면 반드시 이뤄집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반드시 이뤄지기에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는 만큼 이뤄집니다. 우리가 붓다라는데 과연 그럴까. 또는 붓다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의심에 찬 마음으로는 절대 되지 않습니다.
앞서 밝혔듯이 불교라고 하면 교리공부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붓다로 살자’는 이론이나 실제적 삶을 붓다로 살자는 의미입니다.
중생이 곧 붓다입니다. 그래서 신기하고 신기한 것입니다.
잘 몰랐을 때는 업보중생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신기하게도 내가 붓다였구나,
이런 감탄이 절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불자의 삶은 붓다로 살자가 답입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붓다로 살자’라는 결사의 첫 관문입니다.
우리 모두 붓다라는 것을 확신하고 함께 붓다로 살기를 서원해야 합니다.
정리=신용훈 전북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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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문은 붓다로 살자 전북모임이 2015년 1월11일
전북생명평화법당에서 개최한 포살법회에서
자성과 쇄신결사추진본부장 도법 스님의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도법 스님은 1966년 금산사에서 월주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69년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봉암사와 송광사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 수행했다. 1990년 승가개혁 결사모임인
선우도량을 통해 종단개혁을 견인했다.
실상사 주지를 맡으며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를 창립,
귀농운동과 생협활동, 환경운동을 전개했다.
2004년 실상사 주지를 그만두고 5년 동안 생명평화 탁발순례의 길을 떠났다.
현재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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