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의 개인적 책무, 사회적 책무
30여 년 간 재직하던 대학에서 어느덧 정년을 맞이해 지난 달부터 공식 활동을 종료했다. 여전히 명예교수라는 형태로 대학에 적은 둔 형태지만 의무는 전혀 없다. 고령화 사회로부터 조만간 초고령화 사회가 되는 국내 상황에 기여한다는 부담감 외에는 매우 기분좋은 상황인데, 지켜보는 주변 분들은 정년을 맞이한 소감과 함께 앞으로 남은 삶을 무엇으로 채워 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자상히 마음을 써 준다.
자연스러운 그런 질문 속에는 의외로 정년과 은퇴를 같게 생각하는 의식이 있다. 과거에는 정년과 은퇴가 낙향과 같은 의미였을지 모르나 이제 구분이 필요하다. 직장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정년은 글자 그대로 사회에서 합의된 일정 연령에 도달하여 그동안 주어졌던 사회적 역할을 완료했다는 것이기에 일종의 ‘만렙’을 찍은 셈이다.
정년은 사람 중심, 은퇴는 역할 중심의 개념
정년이란 표현이 역할을 충실히 달성한 사람 중심으로 언급되는 것과 다르게 은퇴는 사람이 수행하던 역할의 관점에서 등장하는 표현이다. 사회적이건 사적이건 주어진 역할에서 물러나는 것이니 정해진 연령도 반드시 있을 필요가 없다. 정년이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공적 책무를 면해 주고, 앞으로는 보다 개인의 사적 추구에 충실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의례다. 일정 연령이 되었을 때 우리 사회에서 부과하는 사회적 책무로서 병역이 있고, 이를 충실히 복무해 마치면 군대 제대를 맞이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사회적 책무에서 벗어나는 상황이 정년이라면, 은퇴는 하던 역할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 자연스레 정년이 곧 은퇴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모든 일에서 물러나는 은퇴와는 다를 수 있음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 보다 넓은 개념인 은퇴의 한 유형이 정년이다. 군대를 포함해 다른 공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만기를 경험한 이라면 제대를 맞이하면서 가졌던 여러 개인적 기대를 기억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년을 맞이한 소감을 묻는다면, 평소 개인적으로 하고 싶었던 것에 전념할 수 있으니 얼마나 홀가분하며, 개인적으로 하고픈 것만 해도 좋으니 제대와 다를 바 없다.
현역으로서 공적 담론과 정치, 정책 등에 참여해 힘 기울여 온 이들이 정년을 맞이했다면, 이들은 그동안 해 왔던 것을 생생한 현장에서 활약 중인 현역들에게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회 공공성을 위해 거리에서 목소리 높이는 것 역시 현역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론 본인 성향이 개인의 사적 생활보다 공적 활동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그런 일에 지속적으로 관여해도 무방하지만, 그것은 현역의 젊은이들이 해야 할 몫을 빼앗는 형태도 될 수 있기에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그처럼 공적 활동으로 존재 의미를 찾는 이들이라면 차라리 사회적으로 별로 주목받지 못해 군데군데 비어 있는 지점을 찾아 관여하고 기여하는 모습도 가능하다.
정년 후에도 욕심 버리지 못하는 ‘노추’의 모습들
지금도 주로 정부 기관이나 정치권에서 정년 내지 수명을 다한 이들이 자리 보장 내지 보은 형태로 여러 공공기관의 단체장으로 자리잡은 경우를 본다. 공공기관이 퇴직 후 자리 보장해주는 양로원이 되었고, 현장의 회원들이나 구성원들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는 재직하던 정부나 정치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사회는 지금 현역들과 미래세대가 살아갈 사회이니 그들이 만들어 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간혹 농담식으로 말해지는 65세 투표권 제한 이야기를 웃음과 함께 듣지만, 선거권 정년도 나쁘지 않다. 선거로 사회가 만들어지고 진행됨을 생각할 때 사회에서 살 날이 얼마 없는 이들보다는 앞으로 사회 주역이 될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특히 사회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요즘, 연령별로 보면 각종 사회 변화를 겪은 60대 이상이 여전히 이념 갈등의 모습으로 수구 보수층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사람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공익보다는 개인 아집과 함께 '살아보니 별 것 없다. 나 하나 편하면 된다'는 식의 노추 비율이 훨씬 높아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선거권 허용 연령을 고려한 선거권 정년을 도입하고, 피선거권 역시 평균 수명 고려해서 70세 정도로 해도 사회 발전에 큰 문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과 사회는 특정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특정인이 부각되는 사회일수록 사회의 건강함이 사라지는 것은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
한편, 공적 역할을 다 하고 정년을 맞이한 후 이렇게 변화된 모습으로 사는 것에는 전제가 있다. 홀가분한 소욕지족의 삶이 즐겁기 위해서 필요한 개인의 기본적 생활보장이다. 이는 은퇴로서의 정년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건강한 정년 후의 삶이 건강한 사회를 위해 필요하다면, 연금에 의한 기본생활 보장 여부가 관건이다. 정년 내지 은퇴 후 사회 안전망이 중요하다. 이는 공식 무대에서 내려가는 정년 이후 여생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는 문제에 있어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 몫도 있음을 의미한다.
욕심버린 노후 삶에도 최소의 사회안전망 필요
보건복지부가 작년 7월에 발표한 'OECD 보건통계 2022' 주요 지표별 우리나라 및 각 국가의 수준·현황을 보면, 우리나라의 기대수명은 83.5년으로 일본 84.7년에 이어 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았다. OECD 평균 80.5년과 비교해도 3.0년 더 길어, 평균으로만 보아도 정년 후 20년을 더 산다. 그런데 작년 9월에 있었던 OECD의 한국경제 보고서 발표를 보면 국내 노인 빈곤 상황은 이례적으로 심각하다. OECD 국가 노인 빈곤 평균에 비해 3-5배 가량 높다. 연금 문제임이 지적되었고, 저소득층의 의료보건 지출 비중도 너무 높음이 지적되었고, 장기요양 분야를 보아도 65세 이상 노인 중 장기요양 수급자는 OECD 평균보다 낮았다. 장기요양 돌봄 종사자 수도 평균 이하임은 다르지 않다. 노인 빈곤에 있어서 한국은 OECD 최하위국이다.
무엇보다 젊은 세대에 있어서도 우리 사회는 최악이다. 비정규직의 만연과 함께, 수직적 하도급 산업구조가 있다. 국가 지원은 대기업에 집중되어 이윤은 대기업에 가고, 중소기업은 이윤 창출이 어렵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대기업을 원하는 청년세대는 이류, 삼류 시민이 되지 않기 위해 더욱 무한 경쟁 속에서 시달려야 한다. 사회구성원으로서 기본 여건인 주택 마련은 서울에서 자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최근 부동산 상황에서 ‘영끌’로 주택을 구입한 젊은 세대와 심지어 ‘영끌’조차 할 수 없었던 이들의 고통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 제국주의 폭압으로부터의 해방 후,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었으면서도 반세기 만에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으로 인정받을 만큼 발전했다는 것은 분명 이를 이뤄낸 국민에게 자긍심을 준다. 선진국 국민으로서 더 이상 방치되거나 헐벗고 사는 모습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일정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나름 행복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아쉽게도 국가는 OECD 선진국이라지만 노인 계층과 젊은 세대는 이런 흐름에서 철저히 소외됐다.
정년을 맞이한 이들은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대신 젊은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노인들에게 기본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이 곧 젊은이를 위한 국가를 만드는 선순환의 시작이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나날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반드시 노인이 되어, 정년을 맞이하고 은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