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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성경:고린도전서16:15-18(신285P)
$$제목:시원하게 하는 성도
15.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서론
목욕탕 이야기 아시지요?
할아버지하고 손자가 목욕탕에 갔답니다.
할아버지가 뜨거운 탕에 들어가셔서 아 시원하다,시원하다(우리나라는 말이 참 이상하지요? 뜨거운 국물을 먹으면서도 시원하다고하지요)
할아버지가 시원하다고 하면서 손자에게 들어오라고 합니다. 손자는 진짜로 시원한줄로 알고 열탕에 들어갔는데 얼마나 뜨거운지, 앗 "뜨거워라 원 세상에 믿을놈 아무도 없네"
제2탄이 나왔답니다.
마찬가지로 할아버지가 손자하고 목욕을 가서 아 시원하다 시원하다 하며 손자더러 들어오라고 하니까 지난번에 속은 손자가 이번에는 안속는다고 하면서 안들어갑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시원하다고 하며 들어오라고 합니다. 손자가 진자인줄 알고 들어갔다가 았 뜨거라,
이번에는 무슨말을 했겠어요?
"그 버릇 아직도 못고쳤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과 사도 바울과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한 가정이 나옵니다.
바로 본문 15절에 나오는 ‘스데바나의 집’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스데바나의 집은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가정이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30도가 넘는 더위에 시원한 냉수나 음료수를 마시면 얼마나 시원합니까?
그런데 마음이 답답하고 근심 걱정으로 힘들어 할 때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논지: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성도는 인정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전에 스데바나와 그 식구들에 대한 배려의 권면이 아주 각별합니다.
사도 바울은 스데바나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그를 방문한 것에 대해서 무척 기뻐했습니다.그들을 보니 고린도 교회 성도들 전부를 본 것 같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바울의 허전함을 그들의 방문이 메워 주어 깊은 만족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그러니까 이들에게 순종하고 알아주라고 권합니다.
오늘 우리도 스데바나의 집 식구처럼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대지: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15)
본문 15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아가야"는 고린도라는 항구 도시가 속해 있는 지역입니다(지도참고)
.
고린도는 헬라 지역에서 아테네 다음으로 번성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아테네가 서울이라면 고린도는 부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야는 부산이 속한 경상남도와 같은 도 개념의 지역입니다.
그런데 스데바나의 집은 고린도뿐만 아니라 아가야 지방 전체에서 처음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유럽 최초의 신자였던 루디아처럼 아가야 지역의 최초의 신자였던 스데바나가 사도 바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쟁이 심한 교회로서 여러 가지의 문제 즉 교리문제, 윤리문제, 은사(恩賜)문제, 성도간 인격문제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현대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다 가지고 있었던 교회가 고린도교회가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드는데 바울은 이렇게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의 일부분이 자기를 놓고 뒤에서 수군수군하는 것에 대해 무척 속상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에 달려가거나 모든 문제를 어떻게 단번에 해결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마침 고린도교회로부터 세 사람이 바울에게 찾아 왔습니다.
17절"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 중에 스데바나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그의 집은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아가야의 첫 열매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아가야란 그리스의 남부 지역을 말하는데 그 수도가 고린도로서 그러니까 바울이 북부 마게도냐 지역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전도하다 모진 핍박을 피하여 아덴으로 옮겨와 다시 전도를 하였는데 크게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철학의 도시였기에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저들에게 접근을 하였으나 전도의 결과는 실패였고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으나 아덴에서는 세우지 못했습니다.
다만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약간의 신자가 생겨났었음을 알 수는 있습니다.
행 17: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이후 바울은 아덴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반응이 별로 없음으로 인해 좀 실망한 상태에서 고린도에 왔는데 마침 스데바나도 아덴에서 바울의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후 자신의 집 고린도에 돌아왔습니다.
이때 스데바나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특별한 지도아래 그의 가족들을 모두 회심시켰고 또한 가족들로 더불어 고린도교회를 열심히 잘 섬기면서 교회에서는 아주 꼭 필요한 일꾼으로 성장하여 갔던 것입니다.
이후 스데바나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열매를 맺으면서 기도와 예배와 봉사 그리고 교제와 화평의 열매 속에 신앙이 계속 성장해 감으로서 바울은 스데바나(Stefana. 면류관)와 그의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고전1:16).
물론 스데바나의 가족들은 고린도교회에서 믿음의 일꾼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이런 첫 열매를 만납니다. 그들이 목회에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첫 열매가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피로와 시름이 다 가십니다.
어느 공동체에 있든지 축복의 길을 앞서 열어가는 첫 열매가 되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첫 열매의 길은 힘든 길이고 고난이 있고 십자가가 있습니다.그렇지만 가장 복된 길이고, 그 길은 보통 길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서 항상 소중한 첫 열매가 되기를 힘쓰십시오.
얼마나 자랑스러운 위치입니까? 스스로를 너무 부족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 부족합니다. 그러나 장점도 많습니다. 부족함이 공동체에 큰 해가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조금 부족한 것이 낫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오히려 성공합니다.
이 세상에 완벽해서 성공했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단점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부족한 것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래야 서로가 필요한 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것이 보이거든 그것으로 마음이 무너지지 말고 그 부족한 것을 서로 보충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도 마음이 시원하고 보는 사람도 마음이 시원하게 될 것입니다.
첫 열매는 뒤따라오는 열매의 본이 됩니다. 그래서 첫 열매가 정말 중요합니다.
첫 열매가 화평을 추구하면 뒤따라오는 열매도 화평을 배우고 추구하게 됩니다.
첫 열매가 열심히 전도하면 뒤따라오는 열매도 전도를 배우고 전도하게 됩니다.
첫 열매가 사랑이 넘치면 뒤따라오는 열매도 사랑을 배우고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항상 소중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첫 열매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니다.
2대지:스데바나의 집은 첫 열매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성도 섬기기로 작정되었습니다(15).
본문 15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스데바나 가족 식구들은 “나는 꼭 성공해야지!”라고 작정한 것이 아니고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성도들을 무조건 섬겨야지!”라고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섬기기로 작정했다.”는 말이 원 뜻은 “섬기는데 중독되었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중독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약중독,알코올 중독,쇼핑에 중독,연속극에 중독,인터넷 중독 등 잘못된 중독으로 인생을 망하게 하고 실패와 죽음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데바나의 집은 잘못된 중독이 아닌 성도를 섬기는 일에 중독되었습니다.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의 첫 열매일 뿐만 아니라 성도를 얼마나 잘 섬겼는지 중독될 정도로 섬겼습니다.
사람이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은 쉽지만 모든 사람을 섬겨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사람들보다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보게됩니다.
세상에서는 직책이 있고 많은 직원들의 지도자 되는 분이 교회에서 모든 성도들을 섬기고 헌신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분이 그렇게 하려면 “나는 섬기면서 살겠다!”고 단단히 작정해야 합니다.
작정이란 스스로 삶의 시스템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게 생각되는 일도 작정해서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려운 일이 별로 어렵지 않게 느껴집니다.
예화)
어느 날, 한 캠프장으로 물건을 가득 실은 한 미니밴이 들어왔습니다. 그 밴이 캠프를 할 장소에 멈추자마자 곧 네 명의 남자 아이들이 급히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모든 캠핑 장비들을 내려놓았고 급히 텐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텐트를 다 설치하자 아이들이 급히 불을 피울 목재를 찾으려고 뛰어나갔습니다.
그 동안에 두 여자 아이들과 어머니는 급히 음식과 주방기구를 풀고 버너를 켰습니다.
근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사람이 걸어와서 그 가장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가족 팀워크가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아이들을 훈련시켰습니까?”
그때 그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그거 아주 쉽습니다. 시스템을 만들면 됩니다. 저희들은 캠프의 세팅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아무도 화장실에 가지 못한다고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시스템을 잘 만들면 따라다니면서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경영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시스템을 잘 만드는 지혜입니다. 자녀교육의 성패도 결국 시스템을 잘 만드는 것에 관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스스로 어떤 삶을 살겠다고 작정하는 ‘자기 시스템’을 잘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도 섬기기로 작정하고 그대로 실천하면 얼마나 그 삶이 멋있고, 힘 있고, 안정성 있게 되겠습니까?
살면서 사람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변덕입니다. 오늘 좋다고 했다가 내일 싫다고 하면 그 삶은 복된 삶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변화의 주인공은 되되 변덕의 주인공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번 섬기기로 작정했으면 꾸준하게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틀림없는 분이야.”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처럼 꾸준히 인내하고 기다리고 섬겨주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시원해집니까?
이 시간에도 다시 한 번 작정하십시오. “나는 주일성수 하리라! 나는 꾸준히 기도하리라! 나는 책임적인 교인이 되리라! 나는 겸손히 교회와 성도를 섬기리라!” 그처럼 낮아지기로 작정하고 겸손히 섬기면 진짜 종처럼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높여주시고 다른 성도들도 높여줍니다.
이런 통계가 있답니다.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거의가 봉사를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 말입니다.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저 흘러만 넘길 말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스데바나의 집은 달랐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믿은 그 때부터 성도를 섬기기로 하였는데 아예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작정을 하였다고 했으며 그러한 모습은 모든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알려졌습니다.
"작정한 줄을" 은" 스스로를 준비시켰다" 라는 의미로서 스데바나의 가정이 자발적이고도 헌신적으로 섬김의 봉사를 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누구나 신앙의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한 두 번 정도의 섬기는 일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변치 않는 믿음으로 시종일관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일은 그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스데바나가 가족으로 더불어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작정을 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이며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신앙생활을 해도 이렇게 심지가 곧아야지 이 말을 듣고 휘청, 저 말을 듣고 휘청거리는 사람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봉사의 일을 효과적으로 하지를 못합니다.
조변석개(朝變夕改)가 반복되는 성도가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인간관계에서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 아닙니까?
교회에 소속한 일꾼들은 모두가 섬기는 마음으로 살고 모든 성도들을 대할 때마다 다 내가 섬겨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남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은 없고 다만 몸소 봉사하며 섬기는 의무만 있다는 자세만 가진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를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실 우리가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 심령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고 대신 교만함이 싹트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은 늘 원망과 불평이 쉬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피차 복종하고 섬기는 사람들이며 이러한 사람을 교회는 꼭 필요로 합니다.
막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이러한 신실한 일꾼이 귀하게 느껴지는 시대이며 오늘의 교회가 이러한 일꾼을 찾기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자란 본래 식탁에서 시중드는 웨이터를 의미하였는데 섬기는 자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요 13:01~15) 것처럼 입이 아니라 손과 발로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섬김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며 나는 왜 교회가 찾는 일꾼의 자리에 나오지 못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직분(목사 장로 집사 권사 권찰 교사 찬양대원 등)을 받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섬기는 일이며 봉사하는 일입니다.
엡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교회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방법은 "섬김"에 있습니다.
스데바나는 성도 섬기는 일에 헌신적이었습니다.자신을 섬기는 일, 즉 노예의 직분에 임명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헌신적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과 영락교회가 가장 힘써 한 일은 봉사라고 합니다. 영락교회의 권사님들이 가장 힘써 한 일은 봉사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슬픔을 당한 자들을 발로 찾아가서 손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건네 주며 가슴으로 위로하는 일을 신의주 제2교회와 영락교회가 가장 힘써 했다고 합니다.
물론 성도 섬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교회 성도들이(직분자들) 우선적으로 교회의 성도들을 돌보며 섬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웃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섬겨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장애인도 섬기고 노숙자도 섬기고 외국인 노동자도 섬기고 조선족도 섬기고 고려인도 섬기고 북한 사람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예화)
지난 주간에 중국의 심양에서 압록강이 있고 바로 신의주가 보이는 단동에 다녀왔습니다.구체적인 말씀은 못드립니다만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단동과 신의주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단동을 거쳐서 모든 물류들이 북한으로 거의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어렵지만 북한에 식령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지만 다 안다고 합니다.교회가 아니고서는 아무 조건 없이 무조건 식량을 보내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봉사를 하되 한경직 목사님과 영락교회처럼 자기는 숨고 교회 중심적으로 예수님만을 나타내며 봉사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를 나타내며 봉사하다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바나는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바나는 일하며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바나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것을 바라볼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은 한 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3대지:아가야의 첫 열매가 되고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스데바나의 집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고 인정을 받았습니다(18)
본문 1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스데바나의 식구들 및 그처럼 겸손히 섬기는 사람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본문 18절 말씀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권면합니다.
결국 잘 섬기는 자가 오히려 섬김을 받고 높임을 받습니다. 성도는 다른 분야에서도 성공해야 하지만 섬기는 면에서는 최고로 성공해야 합니다. 그처럼 변함없이 섬겨줄 때 보는 사람의 마음도 시원하게 될 것입니다.
아가야의 첫 열매인 스데바나가 에베소에 머물고 있던 사도 바울을 찾아 왔습니다. 스데바나는 믿음의 형제들인 브두나도와 아가이고를 데리고 사도 바울에게로 갔습니다.
사도 바울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인색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하지 못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사랑도 부족했고 교제도 부족했고 구제도 부족했고 봉사도 부족했고 헌신도 부족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세 사람이 사도 바울을 찾아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필요했던 옷을 가지고 왔는지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왔는지 책을 가지고 왔는지 무슨 선물을 가지고 왔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사도 바울이 궁금해 할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식도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저들을 만난 사도 바울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내가 저희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의 온 것 자체가 사도 바울에게 기쁨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성도들이 찾아오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편지하기도 했습니다.
바울도 기다리고 하나님도 기다리고 담임 목사도 기다립니다.
목회자는 예배 때마다 성도들을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어느 때는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꼭 와야할 성도가 안보이면 내내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어디 아프신가? 아니면 급히 어디 출타하셨는가? 교회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나? 그런데 그 성도가 예배 중에 오시면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모릅니다.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가 사도 바울을 찾아왔을 때 바울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저희는 고린도 교회의 부족한 것을 보충했습니다.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아마 사도 바울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함께 기도도 하고 함께 전도도 하고 함께 봉사도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시중 들며 섬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시원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을 즐겁게 했고 힘이 솟아나게 했다는 말입니다.
베다니의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가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기쁘게 했듯이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가 바울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기쁘게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괴롭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는 사도 바울의 마음 뿐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도 시원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바울은 이기적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알아주라고 분부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까지 분부했습니다.
16,18절“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자들에게 복종하라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
교회에서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 같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성도와 이웃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 그리고 교역자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권면했고 이런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런데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섬기고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분들을 알아주고 복종하는 성도들보다 비난하고 깍아내리고 그래서 그런 분들이 상쳐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여러분은 결코 이런 대열에 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와 결론은 이기적이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를 본 받고 알아주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방관자와 비난자가 되지 말고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를 본 받고 저들처럼 되고 그리고 저들을 알아주라는 말씀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바울이 특별히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또 한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오네시보로"입니다.
딤후 1: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아마 오네시보로는 감옥에 갇힌 바울을 자주 찾아 위로하고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었던 것 같은데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 아니겠습니까?
성도들 간에도 이러한 교제의 장이 넓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교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물질이 많은 자가 아니고 많이 배운 지식인들도 아니고 특별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다려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거부감을 주는 사람입니까?
혹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입니까?
어떠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까? 특히 여러분 가까이 있는 사람들,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다려지는 사람, 내가 속한 공동체의 회원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화)
미국의 최대 부자였던 록펠러는 어렸을 때 돈을 많이 벌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독하게 살았습니다. 그에게 이웃이란 개념은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악덕업자라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이 산 결과, 그는 33세에는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43세에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53세에는 당시 지구상에 유일한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독하게 살다가 그는 53세에 머리에 독성이 퍼지는 독두증이란 병에 걸렸습니다. 그 병으로 인해서 머리칼은 빠졌고, 눈썹과 속눈썹도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몸은 미라처럼 오그라들었습니다. 그때 그의 매주 수입은 백만 달러였지만 먹을 수 있는 것은 소량의 우유와 과자뿐이었습니다.
돈을 벌려고 피도 눈물도 없이 살았기에 사방에 원수가 있어
서 그는 밤낮으로 경호원에 둘러싸여 사생활도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잠도 거의 자지 못했고, 즐거운 것이 하나도 없었고, 삶에서 웃음과 미소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가 1년 이상 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신문은 크게 기뻐하며 그가 죽으면 바로 기사를 쓰려고 미리 부고 문을 써놨습니다.
그렇게 투병하던 어느 날, 밤새 잠을 못 이루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동전 하나도 내 것이 아니구나!” 그때 그는 돈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 날,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물질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교회와 자선단체와 학술단체에 엄청난 기부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록펠러는 잠도 잘 자고, 잘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두증을 극복하고 98세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고 성도들이나 이웃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성도가 받는 축복인줄로 믿습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오늘 사도 바울을 기쁘게 하고 시원하게 한 세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 그들은 열매를 맺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봉사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 그들은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시원하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는 큰 별 바울을 보다 밝고 찬란하게 빛나게 만든 작은 별들이었습니다.
요즈음 처럼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불신자들로부터 비난받고 손가락질 받는 이때에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열매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의 첫 열매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자들이 필요합니다.섬김의 중독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는 물론이요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까지 봉사하는 봉사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교역자들과 농어촌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 프란시스코의 평화의 기도문을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내용이 좋아서 가끔씩 인용을 하는데 저와 우리 여러분들이 그러한 기도의 내용처럼 살면 이는 분명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케 하고 이웃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다시 인용하여 읽어 드리겠사오니 마음에 받으셔서 주님을 시원케 하는 한 과정으로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서 받고 용서함으로서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들마다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 같은 작은 별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대한 민국과 북한 그리고 세계 열방의 특히 이슬람권의 땅의 밤 하늘을 밝게 빛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때문에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시원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