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비행기를 타는 것 같다는 老夫婦의 당차고도 야멸차게 던지는 한마디는
아마도 성공한(?) 딸의 후한 입김 때문이리라. 우리는 갈치 한마리가 더 그리운 이른바 5일장 世代인데,
이들은 우리와는 너무 다른 혼밥이 그립고, 혼술에 녹아나다 일자리를 잃어가는
배달에 더욱 익수해져가는 홍익인간이 아닌 배달민족의 후예들이 아니던가?
그렇게 슬퍼하거나 노여워 할 필요가 있을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제발 상관을 말아야지 하면서도 눈길이 자주 가는 것은 인간이기에 그런 것일까?
정안의 밤 밭이 연두 빛으로 점점 바뀌어가는 시절, 이른바 신록의 계절이라는 5월로 들어섰으니
당연한 흐름인데도,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빠름에 익숙하지 못함 때문이리라.
아니며, 초미세먼지에 시달릴 손주들의 아픔을 미리 걱정하는 부질없는 참견이 앞서서거나~~~
이리 남성고(?)쯤 되는 머슴애들이 입점리 고분군을 지나치며 힐끔거리다 자기들끼리 숙덕인다.
하긴, 너희들이 이 땅을 떠나는 날쯤에는 누가 남아 있어 떠난 자의 몫으로 수목장이라도 해줄까마는~
언젠가는 그들도 이 딱한 현상을 알아차리게 되지만, 그때는 아마 늦은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첫차로 길을 떠나서 막차로 돌아온다는 이 얄궂은 운명은 스스로가 택한 것이 아니던가?
영화에나 나옴직한 현실을 실감하면서 이곳이 바로 서울이었구나 하고 피식 웃고 만다.
억지로나마 받아들여야 살아질 수 있는 지금이 아닌가? 바로 그 서울이란 동네가~
언제부턴가 서울은 금요일이 지폐 만원이 아니라 滿員謝禮로 난리가 난지도 벌써,
그래서 당일치기로 하루를 살아가는 이에게는 금요일이 더욱 싫어지는 요일이 된지도 오래부터다.
금강 하구의 진포(곰개나루)에서 만나는 최무선의 일화가 너무 쓸쓸하여 기분마저 상하고 만다.
다이나마이트(dynamite)를 만들어 돈을 왕창 번 노벨(Nobel)은 그 이름을 지금까지 휘날리고,
기껏 챙긴 노벨 평화상에 우리는 ‘그나마 다행이다’라고 한숨을 몰아쉬면서,
바로 옆 동네를 힐끔거리며 비난(?)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형국이다.
하긴, 최무선이 있었기에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尙有十二)’라고 외친,
거북선의 이순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데,
인간 최무선에 대한 얘기가 자세하게 전해져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시나 반듯하게 전해져오던‘고려실록’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조선에서 인정하지 않은 신돈의 아들로만 치부해버린 고려 우왕시대의 일이니 더욱 고개가 갸웃해진다.
원나라 출신의 상원수 나세 얘기는 고려사의 열전에 상세하게 전하면서,
부원수로 출전한 최무선의 얘기는 변죽만 올리고 있으니 열을 받지 않을 수가 있는가 말이다.
500척의 왜선이건 300척의 왜선이건 문제될 것은 없는데 단지 100척의 수군으로 그들을 섬멸한 공이
결국엔 최무선의 화약무기 때문이라며, 아무리 정사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 했다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곰개나루 금강정에서 바라본 금강-웅포대교 방면>
<입점리 고분군>
<앞트기식 돌덧널무덤 모형>
<입점리 고분군 산책로>
<86-1호분 : 굴식 돌방무덤 - 금동관모 & 금동신발 출토>
<입점리 고분 전시관>
꽤나 먼 길을 툴툴거리며 녹차밭 북쪽 끝을 지나 입점리 고분전시관을 들어선다.
누가 오라지도 않았는데 5월이라 재잘거리는 어린이 무리(?)가 그늘막에서 귀엽게 웅성거린다.
1986년 칡을 캐던 학생덕분에 세상에 처음 알려진 우연치고는 도굴꾼이 다녀간 흔적이 너무도 뚜렷해,
뒤늦게 점찍은 쪽에선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허탈감이 어떠했을까?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인사동 패거리(?)의 찍기와 전문가라는 이들의 찍기 중에서
아마도 전문가가 당한 꼴이 아닌가? 이렇게도 건진 게 하나 없는 빈 털털이라니~~~
누구나 알 수 있는 당연한 사실 앞에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너무 멀어서 남겨진 큼직한 1호분에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이라도 건져냈으니~~~
익산과 군산의 경계선에 자리 잡은 어래산성이 정확히 어디쯤인지는 숫제 모르고,
임도로 방향을 틀어 익산 쪽으로 잡고서는 시간이 넉넉하다는 핑계로 무작정 걸어가고 본다.
어디선가 길은 뚫리게 마련이라는 속편한 희망 하나로~~~
목적지는 오직 하나 미륵사지를 찾아서 간다는 허울 좋은 배짱으로 그저 길을 헤매고 있을 뿐이다.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사방이 떠들썩하다.
20년! 물론 적은 세월은 분명 아니다. 그래도 아쉬움이 맴도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올리다가 만 듯 한 민망한 모습 때문에~~~ 아니며 또 다른 이유가? 글쎄다.
신라 24대 진흥왕의 손자인 26대 진평왕은 아들이 없자
보기 드물게 성골인 딸에게 왕위를 넘겨 일찍암치 여왕시대를 연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그의 딸인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에 얽힌 서동요를 익히 아는 길손으로서는
시멘트로 떡칠을 한 일제강점기의 복원작업이 새삼 원망스럽기도 하고,
새삼 발견된 서탑의 사리 봉영기에서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밝혀졌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 난감해진다.
<미륵사지 동탑 & 서탑 원경>
<복원된 서탑 & 동탑 근경>
<미륵산 아래 자리잡은 미륵사지>
<미륵산 아래 동원 승방지에 자리잡은 9층석탑 과 당간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