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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6:11-18
말씀: 갈6:11-18
제목: 부활 후의 삶 그리스도 흔적
이솝우화 중에 부활 주일에 많이 동원되는 예화인데요,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여름에 함께 놀다가 헤어지게 되어서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내일보자’그랬더니 내일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내일이란, 캄캄한 밤이 지나면 다시 오늘처럼 날이 밝아 오는데 그게 바로 내일이야." 그런데 그 내일을 하루살이는 못 믿는 것입니다. 서산에 넘어가고 있는 저해가 어떻게 다시 떠올라 밝아지느냐는 것이지요. 이번에는 메뚜기가 개구리와 함께 놀게 되었습니다. 가을이 지나자 개구리는 메뚜기에게, " 얘, 메뚜기가 이젠 그만 놀아야 할까 보다. 날씨가 추워 오니까 우리 내년에나 다시 만나서 놀자." 라고 말했습니다. 내년이란 꽁꽁 얼었던 시냇물이 다시 졸졸 소리 내어 흐르고, 새들은 노래 하구, 온 산과 들에 다시 꽃은 피구...." 개구리는 열심히 내년에 대해 설명했지만 메뚜기는 "거짓말. 그래 시들은 꽃이 어떻게 다시 피어나니?"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만 살다가는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란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고, 겨우 한 해를 살다가는 '메뚜기'에게는 '내년'이란 이해할 수 없는, 넘을 수 없는 어떤 세계였을 것입니다.
부활도, 내세를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부활을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부활에 함께한다는 사실도 압니다. 이런 부활을 믿고, 부활을 알고, 부활을 준비하는 사람들 대상으로 설교를 하게 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자면, 설득을 해야 되고 이해를 시켜야 될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이해가 될 수도 없지만, 일종의 전도의 역할을 하는 설교가 되겠지만, 오늘은 믿는 사람들 대상으로 하는 예배이기에 이제 부활을 믿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부활하셔서 그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오늘을 살아갑니다. 교회 머리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부활의 삶의 기초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임으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즉, 부활의 삶은 십자가를 기초로 하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통과해서, 즉, 부활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부활의 길은 십자가의 능력을 붙들고 가는 삶이며, 우리의 몸에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가는 삶입니다. 부활의 삶의 과정 속에서, 천국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삶의 여정 속에서 우리에게 남아야하고, 싸여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에서 도대체 예수의 흔적이 무엇이기에 갈라디아서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인지를 알고 부활 후의 오늘날 삶이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흔적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원어는 ‘스티그마타’입니다. 영어의 스티그마 (stigma ) 오점, 오염이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여기서 나온 것인데, 일반세속 헬라어에서는 사람의 몸에 세긴 문신이나 동물의 몸에 찍은 낙인을 가리키지만, 일반적으로는 어떤 표지나 아니면 찢어진 상처 흉터를 가리킵니다.
그동안에는 예수의 흔적을 두 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는데요, 몸에 나타난 종교적인 어떤 흔적은 이런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11장에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에게서 40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은 돌로 맞았고 어떤 때는 죽은 것처럼 얻어맞아서 시체를 버리는 도란에다가 버려진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본다면 바울이 말하는 몸에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하다가 고통을 당하며 생긴 몸의 상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을 자기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까? 바울의 적대자들이 할레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면서 몸에 있는 할레의 흔적을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행15:1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유대에 살던 어떤 몇몇 사람들이 갈라디아에 있는 인근지역에 와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란 남성의 생식기에 표피를 제거함으로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계약, 언약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이 언약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 된 징표요, 증거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할례는 하나의 자부심이요, 자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몸에 남아 있는 하나님과의 계약의 흔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몸 안에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흔적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당연하게 유대주의 자였든 바울의 적대자들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도 할례를 받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할례 받은 것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건강에도 좋고 또 구약에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할례도 받았는데 못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으면 되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적대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권했던 이유는 십자가와 그로 인한 박해를 피하려는데 가장 중요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12절에 보면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을 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할 뿐이라’ 그러면 왜 할례를 받으면 박해를 피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로마시대에 유대인들이 워낙 종교심이 강하고 유대종교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유대종교를 건드리면 반란을 꽤하고 목숨 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당국으로서는 골치가 아픈 자들입니다. 그래서 로마가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히 자기 종교를 믿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분명한 표식 되었던 것입니다. 이 할례 받은 것을 보여주면 유대종교를 믿는 자들이라는 것이 ‘증표’가 되어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유대주의 자들이 할례를 가르치도록, 그리고 할례를 받도록 요구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유대주의자들이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으려면, 또한 유대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했습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으면 박해를 피할 수도 있고 게다가 구원도 받을 수 있으니까 이게 일거양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바울은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에게 거짓선지자, 거짓교사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핵심적인 중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그 명분 뒷면에 십자가를 피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기초가 되어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그 구원 후의 삶을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신앙의 기초인데, 즉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기초인데,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헛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할례는 인간적인 비위를 맞추는 것이기 때문에 귀에 거슬리지 않습니다. 할례만 받으면, 즉 인간 스스로 이 의식만 행하면 구원이 있다고 하니까 할례를 전하는 것은 걸림돌이 되지 않지만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걸림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뿐만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듣기 싫고 거북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가 십자가도 믿고 할례도 받고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지 않습니까? 그리고 할례를 받아서 건강에도 좋고 또 핍박도 피할 수 있고 이런 방법이 없어서 그렇지 있으면 이 방법을 택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할례와 십자가를 동등하게 두게 됩니다. 동등하게 두게 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로만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은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구원 이 모든 것을 사실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능력과 구원을 부인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갈라디아서 5: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그러기에 거짓교사들을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할례를 전한 것이지요. ‘예수’에다가 할례를 전하면 양쪽 좋은 것들을 다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사야시대 때,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성전에서는 예배를 드리고 집에 와서는 바알 신을 섬기고,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왜요? 이들이 성전에서 하나님께만 제사 드리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서 전통신앙도 지키고 집에서는 우상도 섬기도 그래야 완벽하게 복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교회 와서는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거룩하게 드리고,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방법을 따르고 살아갑니다. 예배로는 예수님만으로는 십자가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가지고 세상을 살면 바보되기 딱 알맞고 조롱거리만 된다는 것아닙니까? 그래서 예배는 천국티켓으로 삼고, 세상에 나가서는 악과 함께 도모하며, 세상 질서와 방법과 세상의 원리를 지키며 세상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한 분으로, 예수그리스도 한 분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능력과 은혜로는 세상 살아가는데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그 과정은 따질 것 없이 내가 출세하고 내가 돈 잘 벌고 세상에서 지위를 확보하고 세상이 나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하면 이것이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나도 좋고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면 전도할 내용이 많고 또 사람들이 내가 예수를 믿어서 이렇게 출세했다, 부자가 되었다, 이렇게 기적이 일어났다, 이런 말을 하면 교회 좋고, 전도해서 좋고, 십일조 많이 해서 좋고 다 좋은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십자가복음으로는 사람들을 이끌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전도에 십자가의 미련한 방법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세상을 정복한 이 모든 것을 제시해야 전도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희석시키는 것이고 결국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행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런데요, 내가 양심에 가책이 되고 지은 죄가 커서 그것을 어떻게든 회복해 보고자 선행을 한다면, 이것 또한 십자가와 선행을 해야 구원이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심하셔야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복음으로 전도해야지 선행으로 전도하는 것 또한 우리가 십자가의 완전함을 부인하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들린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우리는 ‘목자 없는 양’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신학교교수가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요즘은 목사님들이 잘 때 핸드폰 꺼놓고 잔다는 것이지요. 옛날 목사님들은 전화통 붙들고 주무셨습니다. 혹시 임종하는 성도들이 없나, 혹시 어려움을 당해 목사님은 찾지는 않나 해서 말입니다. 퇴근 후면 개인시간이라고 해서 핸드폰은 받지 않고 문자만 받는다고 그래요. 어쩌다가 통화가 되면 아이 픽업하려간다 아내와 밖에 나와 있다 그러면서 필요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목자 없는 양이다’는 말을 하는 것이지요. 십자가만 붙들고 사는 것이 걸림돌이 되고 누리고 편안함과 휴식과 즐기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교회 사역이 직업화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휴식도 중요하고 쉼도 중요합니다. 그것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사역과 사명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들만 그렇습니까? 성도들은 요? 목사님이 심방 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간섭하는 것 같고 참견하는 것 같아서 싫고, 내 신앙 내가 알아서 할 것인데 목사님의 지도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내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도 귀찮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간섭하지 않아도 축복하지 않아도 내 힘으로 잘 살 수 있고 여러모로 편한데 십자가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지요. 십자가와 복음이 우리의 생애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 가정을 덮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 방법으로 살아가는데 십자가가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지요.
오히려 세상에서 사는데 십자가가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마음대로 화도 낼 수 없고 즐길 수도 없고 십자가가 내가 생활하는데 얼마나 불편하게 느낍니까?
예나 지금이나 십자가는 걸림돌이지요. 아니 십자가는 요즘이 더 걸림돌인지도 모릅니다. 풍요를 모르는 시대보다 풍요가 넘치는 지금이 십자가가 더 큰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요. 어쨌든 예나 지금이나 상황은 변화지 않았습니다. 예수에다가 할례만 더 하면 되는데 무엇이 문제냐 그러면서 십자가보다는 할례를 더 좋아합니다. 이런 거짓설교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할례를 받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늘어나는 것이 바울의 적대자들에게 자랑이었습니다. 13절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함이라’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하던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율법을 다 지키더라도 하나만 지키지 못하면 결국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할례를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음에도 왜 다른 사람에게 할례를 강요했는가? 그 이유는 자신들처럼 할례를 받은 제자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대명사를 정확히 보셔야합니다. 거짓교사들은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왜 다른 사람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하느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숫자만 많으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까? 모이는 숫자로 따지면 이단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용문동 신천지교회는 예배시간이 되면 차량이 막힐 정도랍니다. 숫자가 자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 더 중요하지요,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숫자와 크기와 제정이 자랑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할례를 받으면 핍박을 피할 수 있고 또 제자들도 늘어난다면 일석이조 아닌가요. 그래서 갈라디아에 바울의 적대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예수’에다가 ‘할례’를 더 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할례중 하나를 택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박해와 고난을 교묘하게 피하면서도 제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자랑하는 거짓교사들과는 달리 자기의 자랑은 십자가 하나뿐이라고 바울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이 할례가 아니라 십자가를 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신 또한 세상에 대해 십자기에 못 박힘으로서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15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이 중요하니라’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을 받아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가 아니고는 새로 지으심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바울은 할례 당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새로 지으심을 받은 증거를 내 봐라’그러고 나서 바울이 세상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증거를 자신의 몸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아까 살펴본 대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40대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면 39x5 그러면 195대의 매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지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말만으로는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증거인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십자가의 흔적이 우리 몸에 남아 있습니까? 부활 후의 삶이 어떤 삶이냐를 물어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이렇게 결과가 나왔다는 그 자랑이 과연 십자가를 따르는 삶의 흔적이냐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를 잘 아시죠. 많은 사람들이 슈바이처를 존경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위대한 예술가입니까? 그가 독창적인 신학자이기 때문입니까? 그는 위대한 음악과 바하의 논문을 쓸 만큼 음악에 재능이 있었고 탁월한 오르간연주자였기 때문에 시간이 나면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를 했고 오르간을 개선하는데도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칸트의 종교철학으로 박사를 받아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요 루터파목사였을 뿐만 아니라 종말론에서는 독창적인 신학자였습니다. 이처럼 슈바이처가 위대한 예술가고 독창적인 신학자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일반사람들에게는 이런 음악가나 예술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슈바이처가 유럽에서 그 아름다운 삶과 출세를 포기하고 아프리카 정글 속에 들어가 병든 원주민들을 위해 희생적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서 사람들이 굉장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한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느냐 그가 얼마나 성공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슈바이처가 목사든 박사든 예술가든 신학자든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믿는 바를 위해 실질적으로 희생할 수 있느냐 목숨을 바쳐 믿고 있는 것이 있고 그리고 믿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바를 위해 희생을 하며 실천하느냐를 사람들은 보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희생적인 삶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는 구원받는데 슈바이처는 구원 못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자유 신학자라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요즘 신학은 ‘하나님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 세상의 소망이고 우리의 구세주라고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내여 주실 만큼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난 못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 자국이 아니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너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낙담한 제자들이 문을 닫고 함께 모여 있었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닫힌 문 사이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 앞에 서있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전에 하시던 대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인사를 건넸지만 그 때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자 그때야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기뻐했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가 돌아오자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에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의 손가락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내가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너무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라고 몰아붙여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상처가 있으니까 ‘그 상처를 만져보기 전까지는 예수를 믿을 수 없어’이렇게 이야기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일주일 후에 다시 제자들 앞에 나타나 도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마를 혹독하게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다른 제자들도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기 전까지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 아닙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 상처가 남아 있을까? 상처가 다 사라졌겠지 라고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는 못자국과 창 자국이 남아 있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직 그 상처로 그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예수의 몸에 난 상처를 통해야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학생이 작은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해 주었습니다. 작은 아버지의 아들은 이식의 조건이 맞지 않았는데 자기가 맞아서 이식을 전신마취를 하고 20시간동안 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요양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작은 아버지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수술 후에 양복 한 벌 선물 받은 것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이식을 한 것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 문제는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비 5000만원이 없어서 수술이 연기되어있는 찰나에 어느 복지제단에서 수술비 반을 줄 수 있어서 수술 했는데 수술이 끝난 후 퇴원해야할 무렵에 병원 이사장이 감동을 받아 나머지 수술비를 부담했습니다. 그 병원장이 그런 특혜를 준 이유는 지금까지 조카가 작은 아버지께 간을 이식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지금도 수술자국이 큰 십자형으로 나 있는데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신학생이야 말로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몸에 어떤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단순히 침례 받은 흔적이 전부입니까? 우리가 부활 후의 삶은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기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침례를 받았으니까 천국 가는 것은 문제가 없고 이제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에 집중하십니까? 바울처럼 부활 후의 삶이 세상이 나에게 못을 박고 내가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새로 지음을 받은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말씀을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 후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십자가는 강제로 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를 져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이란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지요. 주님을 따라오려면 누구든지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단을 하고 십자가를 질 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 때야 비로소 예수의 흔적 십자가의 흔적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어디서 많이 듣는 말이지요. 2019년 저희 교회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으로서 참 열매를 맺는 삶, 그리스도 안에서 풍족한 삶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이 있는 사귐을 통해 그분의 손자국과 못 자국을 옆구리에 창 자국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전하는 제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못 박은 세상을 향해 영광의 면류관을 쓸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도 여전히 세상에 의해 영광의 면류관을 쓸 것을 기대하고 십자가를 멀리하고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를 향한 십자가의 사랑을 짊어지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가는 삶 가운데 부딪히는 모든 것이 흔적이 되어 주의 귀한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만이 완벽합니다. 십자가에 주님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 완벽하게 사하셨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만족이며 그 분만이 우리의 권위자이십니다. 십자가만 붙들고 부활 후의 삶을 살아감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마음에 또한 영혼에 또한 육체에 예수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